군림천하 : 971화
군림천하 (971)
제395장 청홍옥완(靑紅玉玩)
유소응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종남파의 산문이 보였고, 그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종남산의 푸른 산자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늘 보았던 풍경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해지며 다소 무거웠던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옆에서 유소응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문연상이 예쁘게 웃었다.
“내일이면 다시 돌아올 텐데, 그새를 못 참겠어?”
“그게 아닙니다.”
“아니긴. 한동안 떠나 있다가 다시 본산을 내려가려니 왠지 마음에 걸리는 거지? 본 파는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유소응은 무어라고 대답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모습에 서문연상은 속으로 키득거렸다.
‘가뜩이나 어른스럽던 애가 강호물을 마시고 오더니 완전히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사형은 또 없을 거야.’
항렬은 엄연히 사형이지만, 늘 그를 자기 막냇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는 서문연상은 다시 만난 유소응의 모든 행동거지가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키도 조금 큰 거 같네.’
유난히 작고 왜소해서 더욱 측은해 보였던 유소응도 지금 다시 보니 왠지 듬직해지고 부쩍 성장한 것 같았다.
사부인 진산월이 선사한 견정검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진중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며 걷고 있는 유소응의 모습은 한 명의 검객과 다름이 없었다. 모르긴 해도 일전의 중원행이 앞으로 그가 무림인으로 성장해 가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서문연상은 즐거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아! 자유의 냄새, 아무리 본산이 좋아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야 살 것 같구나.” 서문연상은 모처럼 외출 금지령이 풀리자마자 유소응과 방화를 꼬드겨 서안으로 나들이를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종남파에 입문한 후 그녀가 산문을 벗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본 파에 크고 작은 일들이 겹쳤다고 해도 나같이 젊고 파릇파릇한 여자를 퀴퀴한 산속에서 몇 달씩이나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건 너무 심했어. 정말 유배당한 거나 똑같은 기분이었다니까’
마침 오늘은 날도 좋았고, 마음에 드는 사형과 사제도 함께하니 그녀는 그동안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날아갈 듯 상쾌한 기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방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방화는 예전의 나약하고 소심했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밝게 빛나는 눈과 틀이 잡혀 가는 이목구비가 더해지니 한층 기개가 헌앙해 보였다.
소지산을 사부로 맞이하여 매일 고련을 거듭하고 있는 방화는 실력 면에서도 일취월장하여 가끔 그녀와 대련을 할 때면 오히려 그녀가 조금씩 밀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검보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어려서부터 주위의 어른들에게 다양한 검법을 배워 온 그녀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자신을 이기고도 오히려 쩔쩔매는 방화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다지 싫지만은 않아서 지금도 가끔은 그와 비무를 하곤 했다.
방화는 서안으로 나들이를 가자는 서문연상의 제안에 의외로 선뜻 승낙을 했다.
오히려 유소응을 꼬시는 것이 어렵고 힘들었다. 유소응은 좀처럼 아무 대답도 없이 그녀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서안에 가는 김에 약재 몇 가지만 사 오라는 제갈외의 지시를 받고 나서야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 생각만 하면 살짝 얄밉기도 했으나, 지금처럼 의젓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걸 보노라면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서안에 도착한 것은 막 중천에 해가 떠오를 때였다.
마침 배가 출출하던 참이라 서문연상은 그들을 이끌고 남문대로를 따라갔다.
방화가 약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산해루는 저쪽인데?”
서문연상은 짐짓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산해루로 간다고 했어요?”
“그럼 대왕루로 가려고?”
“모처럼 나왔는데 사숙조네 가게에 가서 눈칫밥을 먹을 필요 있어요? 오늘은 나만 따라와요. 내가 기가 막힌 곳을 알려 줄 테니.”
그녀의 호언장담에 방화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께서 서안에 가면 꼭 노 사숙조를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사숙조야 오늘 저녁이나 내일 오전에 찾아뵈면 되는 거고, 오늘은 우리끼리 모처럼 나왔으니 신나게 즐겨 보자구요.”
“그래도…….”
체구는 건장해져도 소심한 성격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지 방화는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서문연상은 그의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태연히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모처럼 사매 노릇 좀 하려니까 영 안 도와주네. 잔말 말고 오늘은 나만 믿고 따라와요. 두 촌놈에게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눈이 번쩍 뜨이게 해줄 테니까.”
방화와 유소응은 반강제로 서문연상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서문연상이 두 사람을 양손에 잡아끈 채 빠르게 움직이자 정신없이 끌려가던 방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사매, 가더라도 어딘지나 미리 말해 줬으면 좋겠어. 설마 도박장이나 기루는 아니지?”
서문연상은 냉랭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흥, 도박장? 기루? 남자들 생각이란 다 뻔하지.”
“그게 아니라면 주루라도 가는 거야?”
“먹고 마시고 노는 거밖에 안 떠올라요?”
“그럼 서점이나 잡화점인가?”
방화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서문연상은 냉소를 날릴 뿐 좀처럼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잠시 후, 서문연상의 손에 이리저리 이끌려 가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문연상은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어때요? 서안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방화는 물론이고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유소응 마저 멍하니 앞을 주시한 채 넋이 나가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성채가 우뚝 서 있었다.
<취화성(華城).>
사람의 키만 한 높이에 길이는 무려 삼장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현판이 걸린 그 건물은 정말 한 채의 성이라 할 만했다.
오층으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누각은 한 층의 높이가 여타 건물의 이 층에 육박해서 주위의 다른 건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수없이 뚫려 있는 다양한 장식의 창문들과 길게 늘어진 처마 그리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기와지붕은 그야말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거대한 건물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수도 엄청나서 온 서안의 사람들이 모두 몰려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문연상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곳이 바로 세상의 모든 화려함이 다 모여 있다는 취화성이에요. 어때요?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한참이나 눈을 부릅뜨고 취화성을 보고 있던 방화가 불쑥 물었다.
“이곳이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아까 사형이 말했던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건물이죠.”
방화가 무심결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모든 게 다 있다고?”
“그래요. 일층은 각종 서적과 장신구부터 문방사우와 병장기, 각종 약재 등 다양한 물품들을 파는 만화점(萬貨店)이 있고, 이 층은 천하의 산해진미를 모두 맛볼 수 있는 끝내주는 주루가 있죠. 그리고 삼 층은 세상에 산재한 모든 도박을 즐길 수 있는 도박장, 그리고 오 층은 최고의 안락함을 자랑하는 객잔이 있어요.”
“사 층은?”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방화를 쏘아보았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해요?”
방화는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왜 말을 못 하는데? 기루라도 있는 거야?”
서문연상은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방화를 노려보며 냉랭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사 층으로 달려가겠군요?”
“아니, 나는 그저 별 뜻 없이…………….”
“이제 보니 이곳을 모른다는 것도 거짓말이었겠네요. 사형의 꼴을 보니 오늘 밤은 사 층에 처박혀서 내려올 생각도 없을 게 뻔하군요.”
그녀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방화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맹세코 난 이곳이 처음이야.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까. 믿어 줘, 사매.”
“장 대가가 나한테만 살짝 말해 준 줄 알았더니 사형도 이미 알고 있었군요.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숭을 떨다니…….” 방화는 서문연상이 말한 장 대가가 장승표임을 알고, 자칫하면 엉뚱한 사람에게 불똥이 튈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몰랐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겠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내 말 좀 들어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냉기가 서려 있던 서문연상의 얼굴에 봄바람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사형이 몽땅 쓰는 거죠?”
방화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오늘은 내가 살 테니 사매는 걱정하지 마. 대신 내 말을 믿어 주는 거지?”
“물론이죠. 이곳이 문 연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장 대가도 간신히 소문으로만 듣고 와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나 보고 이곳에 꼭 들려서 갔다 온 이야기를 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던데, 소식에 둔한 사형 귀에 들어갈 리가 없죠.”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방화는 자신이 그녀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렸으나, 이미 말을 내뱉은 후였다.
방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태연자약한 표정이었으나, 속으로는 자신이 오늘 들고 온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전에 우문 숙부께서 비상금으로 쓰라고 남겨 두신 돈이 있기는 한데, 사매가 은근히 손이 커서 뭘 얼마나 사려는지가 관건이로구나.’ 그가 고민을 하건 말건 서문연상은 신이 난 표정으로 먼저 취화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늘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절강성 어딘가에도 비슷한 이름의 건물이 있다고 하는 것 같던데, 다음에 그곳도 가 봐야지.”
말릴 사이도 없이 서문연상이 사람들을 뚫고 먼저 취화성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방화가 황급히 유소응을 잡아끌었다.
“이러다 사매를 잃어버리겠다. 우리도 어서 가자.”
두 사형제는 서문연상의 뒤를 따라 취화성으로 들어섰다.
취화성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만큼이나 실내 또한 화려하고 웅장했다. 널따란 문을 지나자, 장정 서너 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넓은 복도가 나타났고, 그 복도를 따라 다양한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마치 시장을 통째로 건물 안에 만들어 놓은 모습인지라 정신없이 복잡하고 다양한 볼거리가 사방에 가득 널려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어찌나 몰려드는지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운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서 누구도 불평을 토해 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고 흥정을 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먼저 들어간 서문연상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방화는 인파를 헤치며 그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서너 가게 앞쪽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어느 장신구 가게 앞에서 넋을 잃고 상품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조금 안 되어 보이기도 해서 방화는 슬며시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검보의 금지옥엽 신분으로 몇 달 동안이나 산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사매도 많이 답답했을 거야. 오늘 기분이 풀리면 성격도 좀 온순해지려나?’ 방화는 한 손으로는 유소응의 작은 손을 단단히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열심히 사람들을 헤치며 그녀가 있는 상점으로 움직여 나아갔다. “마음에 드는 것이라도 있어?”
방화가 다가가셔 묻자 서문연상은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여전히 손에 들린 장신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있으면 사 주기라도 하려고요?”
방화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처럼 산문을 내려왔으니 사매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정도는 사 줄 수 있지.”
그제야 서문연상은 그를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구두쇠로 소문난 방 사형이 웬일이에요?”
방호는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구두쇠는, 그거 다 장 대가가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야. 나도 쓸 때는 쓸 줄 알아. 다만 본 산에만 있다 보니 좀처럼 쓸 일이 없었을 뿐이지.”
“어련하려고요.”
“지금 그게 마음에 들어?”
서문연상이 계속 손에 옥으로 된 장신구 하나를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방화가 묻자 서문연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옥(玉)인 줄 알았는데, 만지면 만질수록 따스한 온기 같은 게 느껴지는군요. 모양도 이쁘고, 재질도 특별한 거 같아서 관심이 가네요.”
방화가 자세히 보니 여타의 푸른색 옥보다는 훨씬 엷은 색의 옥을 정교하게 깎아서 푸르고 붉은 두 가닥 수실을 매달아 만든 노리개였다. 얼핏 보기에는 다소 투박하고 평범한 것 같았는데, 서문연상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지 지금도 계속 옥 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아까부터 서문연상의 손에 들린 옥 노리개를 바라보고 있던 유소응이 무언가에 이끌린 사람처럼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줄곧 그녀의 손에 들린 옥 노리개에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