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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73화


군림천하 (973)

제396장 노아삼수

서문연상의 짐작대로 유소응은 삼 층의 입구에서부터 제지를 당했다.

“꼬마야, 아직은 이르니, 십 년은 더 있다 오도록 해라.”

막 삼 층에 올라선 순간, 앞을 가로막은 두 명의 장한들은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유소응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거리며 웃어댔다. “아빠라도 찾으러 온 거냐? 아니면…………….”

둘 중 인상이 더 차가운 장한이 유소응의 뒤에서 따라 올라오고 있는 서문연상과 방화를 슬쩍 훑어보았다.

“형과 누나를 따라온 거냐? 어찌 되었건 너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아래의 주루에서 기다리던지 일 층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도록 해라.’

불문곡직하고 유소응을 계단 아래로 내쫓았을 것이다. 그는 한눈에 서문연상과 방화가 좋은 옷을 입고 두 눈에 정광이 번뜩이는 것을 알아보고 그나마 부드럽게 응대한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유소응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서문연상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곳의 책임자를 불러 줘요.”

장한의 눈꼬리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책임자는 왜 불러 달라는 거냐?”

서문연상의 두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신광이 번뜩거렸다.

“용건이 있으니까 불러 달라는 거지. 그리고 한 번만 더 본 낭자에게 반말을 지껄였다가는 두 번 다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눈빛과 음성이 어찌나 매서웠던지 장한은 절로 움찔하는 표정이었다.

‘이년이 대체 무얼 믿고 큰 소리지? 보아하니 명문가의 출신 같긴 한데…………….’

장한은 잠깐 머뭇거렸으나, 그렇다고 소녀의 말만 믿고 덜컥 책임자를 데려올 수는 없기에 조금은 신중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이유를 말해 주거나, 아니면 신분이라도 알려 주시오. 무작정 윗사람을 불러올 수는 없소.”

서문연상은 방화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종남에서 왔어요?”

두 명의 장한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종남? 종남파의 제자들이란 말이오?”

“그래요. 중요한 일이 있어 왔으니, 어서 책임자를 불러와요.”

장한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더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만복당의 풍경은 그야말로 거대한 열기의 용광로 같았다. 뻥 뚫린 중앙에 크고 작은 무리들이 잔뜩 모여 있고, 좌우측의 벽 쪽으로는 밀실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나눌 수도 없을 정도였다. 밀실이든 중앙이든 사람들로 북적거린 데다 대부분이 흥분에 찬 음성으로 떠들어 대고 있어서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장한이 들어가는 바람에 잠깐 열렸다 문이 닫히는 그 짧은 사이에 들려온 폭발적인 음향에 서문연상과 방화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곳에 무작정 쳐들어갔다가는 사람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아무 소득도 없이 소란만 일으킬 게 뻔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장한의 뒤에는 건장한 체구에 이목이 제법 수려한 중년인이 뒤따르고 있었다.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중년인은 서문연상과 방화, 그리고 유소응을 차례로 훑어보고는 이내 서문연상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가 이 일행에서 주도적인 인물임을

“만복당에서 주부(主簿)를 맡고 있는 구웅(具雄)이라 하오. 소저의 방명을 알 수 있겠소?”

“종남파의 이십이대 제자인 서문연상이에요.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내 사형들이에요.”

구웅은 아직 어린 나이의 유소응에게도 사형이라고 지칭하는 그녀의 말이 조금 의아했으나,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이제 보니 서문 소저이시구려. 뵙게 되어 반갑소.”

그녀는 구웅이 자신의 이름을 아는 듯하자 눈을 반짝였다.

“나를 알고 있어요?”

고제자(高弟子)라고 들었소.’ “물론이오. 서문 소저께서는 검보의 보주이신 서문 대협의 장중보옥(掌中寶玉)이며, 종남파의 유명한 여협이신 무영낭랑이 아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연상은 구웅이 자신을 알아보자, 한편으로는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종남산에만 처박혀 있는 자신을 어찌 알았는지 의아한

하나 이는 그녀가 현재 종남파의 위상을 잘 모르기에 벌어진 착각이었다.

종남파가 형산파를 꺾은 후 적어도 서안 일대의 크고 작은 세력들 사이에서는 종남파의 모든 인물들에 대한 세세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적어도 종남파의 제자들을 몰라보고 실수를 하거나 충돌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제자이기에 오히려 더욱 구분하기 쉬웠다. 더구나 종남파의 문인들은 아직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전부를 외우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서문연상은 종남파에서 몇 되지 않은

이를 미처 몰랐던 서문연상은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 되었다.

“구 주부께서는 말이 통하는 분 같으니 이야기하기가 쉽겠군요.”

“말씀하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리겠소.”

“우리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구웅은 종남파의 제자들이 몰려온 이유가 도박장에 있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종남파의 누군가가 도박에 빠져 있는 모양이군.’

구웅은 더욱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느 고인인지 알려주시면 바로 모셔 드리겠소.”

서문연상은 알 듯 모를 듯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고인까지는 아니고, 꼭 찾아야 할 사람이에요. 우리를 도와주겠지요?”

구웅은 그녀가 거듭 다짐을 받으려 하자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기에 듬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어느 분이시오?”

“어떤 물건의 주인이에요.”

구웅은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물건의 주인을 왜 본 당에 와서 찾는 거요?”

“우리는 이 취화당 일 층의 상점에서 예전에 잃어버렸던 물건을 찾았어요. 상점 주인에게 물으니, 만복당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제야 구웅은 대략적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누군가가 이들의 물건을 훔쳐 본 당에서 돈으로 교환한 모양이구나. 골치 아프게 되었는걸.’

구웅은 일이 자신의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본당에서 물건을 맡긴 사람의 신분이나 정체는 외부로 발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오. 아쉽게도 이번 일은…….”

서문연상은 구웅의 말을 끊고 다시 생글생글 웃었다.

“그건 당신들이 정한 규칙이지요. 그걸 우리에게 강요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본당 나름의..”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지 마세요.”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구웅은 적지 않은 중압감을 느꼈다. 분명히 도화꽃 같은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어려 있건만, 무언지 모를 섬뜩함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그치지 않은 채 말을 덧붙였다.

내가 왜 사문의 어른을 모시지 않고 우리끼리만 이곳에 왔는지를 알아야 해요. 우리는 이번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은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보죠?”

그 말에 구웅은 침착하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종남파는 그 성세에 비해 문하 제자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녀의 사문 어른이라면 강호제일고수인 신검무적의 사제들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위의

혈뿐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대고 오금이 저려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구웅은 이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쩔 수가 없구려. 이번만 특별히 예외로 하겠소. 소저가 찾는 사람이 본 당에 맡겼다는 물건이 무엇이오?”

“유 사형, 그것 좀 꺼내 줄 수 있어요?

서문연상이 유소응에게 눈짓을 하자 유소응이 알아차리고 품속에서 옥 노리개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서문연상은 그 옥 노리개를 구웅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우리는 이 노리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을 찾고 있어요.”

구웅은 어렵지 않게 그 노리개를 알아보았다.

“청홍옥완이군. 오 일 전에 본 당에 접수되어 이틀 전까지 찾아가지 않기에 일 층의 상점으로 넘긴 것이오.”

“잘 알고 있군요.”

“본 당의 물품들은 모두 내 손을 거치고 있소. 더구나 이 물건은 며칠 전에 본 것이라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거요.”

서문연상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참으로 이쁘고 화사한 웃음이었는데도 구웅은 왠지 전신에 빙굴에 떨어지는 듯한 냉기를 느껴야 했다.

“덕분에 일이 편하게 되었군요. 이제 말해 주세요. 이 물건을 만복당에 맡긴 사람이 누구인지.”

구웅은 잠시 멈칫했으나 자신에게 다른 선택이 없음을 알고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고표(高)라는 자요.”

“고표? 뭐 하는 사람이지요?”

“노아삼수(蘆芽三獸) 중의 둘째로, 산서성 노아산 일대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오.”

서문연상의 눈이 번쩍 빛났다.

“별호만 들어도 어떤 인물들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이제 한 가지만 말해 주면 당신의 도움을 잊지 않도록 하지요. 고표는 아직 이곳에 있나요?” 

구웅은 자신의 대답에 따라 왠지 한바탕 피비린내가 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형제는 아직 본 당에 머무르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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