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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75화


군림천하 (975)

어느새 그토록 시끄럽던 만복당 안은 점차로 조용해지더니 이내 몇몇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의 시선이 유소응 일행과 고씨 형제에게 집중되었다.

처음 유소응과 서문연상 등이 만복당에 들어올 때만 해도 대부분은 신기해하거나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힐끔거리긴 했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거칠기로 유명한 고씨 형제에게 다가가자,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자들이 조금씩 생겨나더니, 돌아가는 사정이 점점 더 심상치 않아 보이자 그제야 관심이 쏠리면서 장내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저 꼬맹이들은 누구인데 저 성질 사나운 고씨 형제와 시비가 붙은 거야?”

“유품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 형제에게 변을 당한 자들의 후인인 거 같아.”

“안됐군. 아무리 그래도 제 발로 저 세 마리 짐승 앞에 나타나다니, 어려서 그런가? 너무 무모하군.”

고씨 형제는 비록 서안 출신은 아니지만,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이 서안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이곳에도 그들을 알아보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고씨 형제는 섬서성의 명문세가 중 하나인 고가(高家堡)의 방계 출신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성격이 잔인하고 난폭하여 성인이 되자마자 가문에서 산서성 북부에서는 그들의 이름만 들어도 모두 치를 떨 정도였다. 쫓겨나다시피 집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고가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서성 노아산(山)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어찌나 악명이 자자했던지

처음에 그들은 스스로 노아삼걸(蘆芽三傑)이라는 나름 운치 있는 별호를 자칭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그들을 노아삼수(蘆芽三獸)라고 불렀다. 고가보에서는 아예 그들을 가문의 호적에서 삭제하여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내외에 천명하기도 했다.

하나 그 뒤로도 그들의 악행은 더욱 심해져서 나중에는 산서성의 명문정파 몇 군데에서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고수들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토벌대를 피해 북쪽으로 도망쳤는데, 그 바람에 초원 일대에 때아닌 혈풍이 몰아치고 말았다. 그들은 두 달 가까이 돌아다니며 수십 명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는데, 그 행태가 어찌나 잔인했던지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토벌대가 헛걸음을 하고 물러간 후 그들은 남들의 눈을 피해 거처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지나친 악행으로 주위에 소문이 퍼지는 건 가급적 자제했다.

하나 겉으로는 조용히 지내는 것 같아도, 사실은 가끔씩 북쪽으로 가서 한바탕 분탕질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 초원으로 가서 일을 벌이는 게 위험하지도 않고 벌이도 훨씬 더 낫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그들이니만큼 언제든지 자신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자들이 덤벼올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서문연상이 물건 운운할 때부터 고취와 고표는 남들 모르게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다 유소응이 부모님의 유품이라며 다륜의 혈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들은 거의 동시에 각기 유소응과 서문연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 틈에 뽑아 들었는지 그들의 손에는 예리한 병장기가 쥐어져 있었다.

“앗?”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보기에도 그들이 휘두르는 병장기에 어린 소년과 소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것이 너무도 분명했던 것이다. 

유소응을 향해 덤벼든 자는 고표였다. 그는 한 자 반 남짓 되는 기형의 병기를 사용했는데, 병기의 한쪽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반면 다른 한쪽은 톱니 모양의 날이 달려 있어 보기만 해도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 기형의 칼로 인정사정없이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의 목덜미를 찔러 가고 있으니, 중인들이 놀란 외침을 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소응이 그 살인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때마침 수중에 옥 노리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표가 맹수처럼 무섭게 달려들며 무언가 시퍼런 것이 자신의 목으로 다가드는 것을 느낀 순간,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옥 노리개로 자신의 목 부위를 막았다.

쨍!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시라도 유소응의 목을 도륙할 듯하던 고표의 기형도가 옥 노리개에 가로막혀 허공에 멈춰졌다.

유소응은 비록 목이 꿰뚫리는 참변은 면했으나, 옥 노리개에 가해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때마침 그의 뒤에 서 있던 방화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나뒹굴다가 제대로 대항도 못 하고 참혹한 일을 당했을 지도 몰랐다.

서문연상 또한 고취의 공격에 위급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서문연상은 나름대로 고씨 형제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그들이 설마 이토록 갑작스럽게 공격해 올 줄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취가 내뻗은 강침 모양의 병기에 그대로 이마를 뚫릴 뻔했다.

그녀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고취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보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순간, 고취가 오른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 손가락 사이에는 시퍼런 빛을 발하는 한 자 길이의 강침이 쥐어져 있었다.

서문연상은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뉘며 바닥에 누워 버렸다.

팟!

그녀의 임기응변은 실로 시의적절하여 고취의 살인적인 암습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 버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고취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여자답지 않은 거친 욕설과 함께 그녀는 어느새 뽑아 든 검으로 고취의 머리를 두 조각낼 기세로 맹렬하게 내리쳤다.

고취는 자신의 공격이 벗어나는 순간에 이미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나직하게 혀를 차면서도 재빨리 옆으로 몸을 움직여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쯧. 쉽게 가려 했더니만.’

당초 계획대로 눈앞의 계집과 어린애만 죽여 버렸다면 쓸데없이 다륜의 혈겁 운운하며 자신들에게 대놓고 덤벼들 자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뒤에서야 온갖 욕설과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겠지만, 당사자들이 죽어 버린 다음에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계집이 보기보다 실력이 뛰어나 어지간한 고수라도 피하기 어려운 자신의 암습을 간단히 벗어나더니 오히려 날카로운 반격을 가해 오고 있는 것이다.

슬쩍 눈치를 보니 어린애를 공격한 고표도 성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어린놈들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구나. 뭐 하는 놈들이지?’

고취는 그들의 정체에 대해 무언지 모를 불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우선은 눈앞의 계집부터 쓰러뜨리자고 마음먹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을 스치자 어느새 그의 왼손에는 쇠장갑이 끼어져 있었다. 다양한 장치가 숨겨져 있는 그 장갑은 절혼투(切魂套)라는 기병으로, 오른손의 혈혼침(血魂針)과 함께 고취가 즐겨 쓰는 무기들이었다.

기형의 병기를 양손에 쥔 고취가 살기 어린 눈으로 서문연상을 바라보자, 서문연상은 수중의 검으로 그를 가리키며 성난 음성을 토해 냈다.

“초원 일대를 떠돌며 양민들을 학살해 온 악적들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오늘 본 아가씨가 네놈들의 목을 잘라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해 주겠다.” 

고취는 음산한 살소를 날렸다.

“흐흐.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내 이름은 고취 어르신이다. 누구 목이 달아날지 모르지만, 뭐 하는 년인지 이름이나 밝히도록 해라.”

고취는 은근슬쩍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으나, 서문연상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어차피 죽을 놈에게 알려줄 이름 따위는 없다.”

고취가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는 수정의 장검을 휘둘러 곧장 그의 입을 찔러 갔다.

“추잡한 말을 내뱉는 그 몹쓸 주둥이부터 도려내 주도록 하마!”

일단 손을 쓰자 그녀의 검은 무섭도록 빨라서 고취는 욕설이라도 내뱉으려다 포기하고 황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여 피하려 했다.

하나 막 옆을 지나칠 듯하던 그녀의 검이 돌연 한 차례 꿈틀거리며 고취의 입을 계속 찔러 오는 것이 아닌가?

“헛?”

그 신묘한 변화에 고취는 다급하게 왼손의 절혼투로 자신의 입 주위를 막았다.

땅!

절혼투에 막힌 그녀의 검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치는 듯하더니 재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고취는 간신히 입이 꿰뚫리는 참변은 막았으나, 그녀의 검이 부리는 다양한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쩔쩔매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명문가의 솜씨로구나. 대체 어느 문파의 계집이지?’

고취는 그녀의 검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으나, 좀처럼 그녀의 검세 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표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고표는 주춤거리던 유소응이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품에 안고 있던 검을 뽑으려 하자, 거친 흉소를 날리며 재차 달려들었다.

“흐흐! 네 부모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그 옆으로 보내 줄 테니 기뻐하도록 해라!”

그는 수중의 기형도로 키가 작은 유소응의 머리를 내리찍어 갔다.

한 점의 인정도 볼 수 없는 잔인한 솜씨에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흘러나왔으나, 고표에게는 그 소리 또한 자신에 대한 찬양처럼 들렸다.

‘이 어린놈의 머리를 도륙하고 그 뒤의 기생오라비 같은 놈을 베어 버리고 이곳을 뜨면 된다.’

고표에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주위의 평가 따위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와 당장의 손익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어린놈의 머리통을 잘라 버릴 줄 알았던 그의 공격은 이번에도 헛되이 빗나가고 말았다.

나오며 예리한 검광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놀랍게도 유소응이 너무도 유연한 동작으로 바닥을 굴러 그의 도를 피하며 옆으로 이동해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안고 있던 검이 뽑혀

고표는 무심결에 엉거주춤 옆으로 피하려다 안색이 대변했다.

그 검광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왔던 것이다.

팟!

“큭!”

짧은 신음과 함께 그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고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잘린 옷자락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오는 광경이 생생하게 드러나 보였다. 놀랍게도 유소응의 일검이 정확하게 그의 옆구리를 가르고 지나간 것이다.

고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지혈할 생각도 못 하고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고 있다가 이를 갈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 놈이………….”

유소응은 견정검을 잡은 채 중단세를 취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한 호흡, 한 호흡 내뱉을 때마다 그의 몸은 흔들림을 멈추고 완벽한 자세를 이루어 갔다.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고, 고표를 응시하는 두 눈 또한 물처럼 고요했다. 

그 모습은 실로 오랫동안 수련을 쌓아온 일류검객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고표의 눈빛이 스산한 빛으로 번뜩였다. 상대가 자신의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핏덩이 꼬마가 아니라 예리한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엄연한 한 사람의 무인임을 알아본 것이다.

고표는 수중의 기형도를 힘껏 움켜잡은 채 유소응을 노려보고 있다가 먼저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팔다리를 모두 자르고 살점을 한 점 한 점 여미어도 그런 낯짝을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수중의 도를 기이하게 흔들며 유소응의 좌측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약어보(躍魚步)와 파흔도(波痕刀)라는 자신의 최고 장기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유소응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수중의 견정검을 휘둘러 그에 맞서 갔다.

파파팍!

그들이 부딪히며 사방으로 날카로운 도기와 검광이 퍼져 나가자 놀란 중인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한쪽에서 말없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고경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양손을 맞잡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게 다 꼬이는군. 아무래도 여기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니 앞으로는 오지 않아야겠구나.”

그는 두 아우들의 싸움이 생각보다 수월치 않은 것을 알고 더 이상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을 결심을 했다.

하나 그가 막 앞으로 한 발 나서려 할 때,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경이 고개를 돌려보니 새하얀 얼굴에 준수한 소년이 그의 앞에 우뚝 선 채 담담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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