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86화
군림천하 (986)
성락중은 노해광의 말을 알 듯 모를 듯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대접받아야 잘 대접받는 거요? 나도 잘 모르겠구려.”
노해광의 얼굴에 한 줄기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사제도 해남에만 주로 머물러 있느라 남에게 제대로 대접받아 본 적이 별로 없겠군. 그럼 사제도 오늘 한번 경험해 보도록 하게.”
성락중은 노해광이 자신까지 끌어들이려 하자 잠시 주춤거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오?”
노해광은 정색을 했다.
“물론이네. 어떤 때는 기껏 대접을 받아 놓고도 오히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대접해 준 자가 서운함을 표시하거나 화를 내기도 하네. 명문정파의 제자일수록 남에게 대접받는 일을 잘해야만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강호에서 활동하는 데 수월해지는 법일세.”
“대접받는 일에 그런 심오한 의미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
“그게 모두 본 파가 그동안 남에게 대접받을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세. 평소에 그런 일을 자주 겪게 된다면 나름의 처신이 생길 텐데, 본 파의 제자들은 아직 그런 적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배워 두어야만 앞으로 강호를 행도하는 데 불편함이 덜 할 걸세.”
성락중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려. 확실히 본 파는 그동안 제대로 지위를 누리거나 행세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소. 내가 본 파에 들어온 후 다른 누군가에게 대접다운 대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확실히 그랬던 모양이오.’
무당산에서 형산파를 꺾은 후로는 어디를 가든 극진한 환대를 받았으나, 그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특히 기산취악 전후의 종남파는 무림인들에게 제대로 된 문파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로 인한 차별을 많은 부분에서 느껴야만 했다.
과거를 생각하자 성락중은 공연히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종남파의 제자로 지내면서 물론 좋았던 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가슴 아프고 비통한 기억이 훨씬 많았다. 그만큼 그 당시 종남파의 상황은 위태로웠고, 주위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때가 있었다. 그런 종남파가 어느새 허물을 벗듯 새로운 모습으로 우뚝 서고 만인의 앙망을 받게 되었으니, 막상 그 현장에 있으면서도 가끔은 실감이 나지 않을
‘본 파가 언제 이렇게 성장을 했지?’
되짚어 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초가보와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종남혈사’라고까지 불렸던 그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했기에 비로소 종남파는 생존을 넘어 도약할 기틀을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성락중은 멸문 직전까지 가 있었던 종남파가 극적으로 회생했던 그 역사적인 싸움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쉽고 안타까웠다. 또한 그 아수라장을 헤쳐 와 끝내는 종남파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제자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험난한 과정의 생 증인이라 할 수 있는 노해광이 그의 의중을 안다는 듯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자네는 잘해 왔네. 본 파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이루어 낸 성과이니 쓸데없이 자책하거나 아쉬워하지 말게.”
성락중은 노해광을 돌아보다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그래도 한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오.”
“당연한 말을. 그런 장문인을 모시게 된 것도 넓게 보면 문파의 선조들이 쌓아 온 은덕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제 슬슬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군.”
성락중이 정면을 바라보니 한 사람이 좌중의 인사를 받으며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화려한 금포를 입은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유난히 각진 얼굴에 날카로운 신광이 이글거리는 인상적인 용모의 그 중년인이 바로 오늘 생일연의 주인이자 금륜장의 장주인 금륜군자 고소명이었다.
고소명의 나이는 오십 대 후반이었음에도 관리를 잘한 덕분인지 사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소명은 중앙에 우뚝 선 채 장내를 둘러보고는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오늘 미흡한 이 사람의 생일에 이토록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소. 우선 이 고 모의 인사를 받으시오.”
고소명이 사방으로 포권을 하자 앞을 다투어 마주 인사를 하느라 장내가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성락중도 무심결에 일어서려다 노해광이 여전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멈칫거렸다.
노해광은 턱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냥 앉아 있게. 통상적인 인사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네.”
성락중이 돌아보니 노해광 외에도 서안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은 상당수가 제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가벼운 목례만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는 자들도 있었다.
“중요한 인물들에게는 고 장주가 따로 인사를 할 걸세. 그때 답례를 하면 되네.”
노해광의 말에 성락중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소명은 중인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좀 더 앞으로 걸어 나와 한쪽을 향해 포권을 했다.
“철기보의 철기은창 하 보주께서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날렵한 체구에 얼굴이 길쭉한 중년인이 일어나 그의 인사에 답례했다.
“초대해 주어 고맙소. 오늘 고 장주의 모습을 보니 기개가 더욱 헌앙해지신 것 같아 기쁘오.”
그는 서안 최대의 마장을 운영하는 철기보의 보주인 철기은창 하대경이었다.
“하하, 하 보주의 신태도 한층 더 비범해지신 것 같소.”
이어 고소명은 하대경의 근처에 앉아 있는 흑의 무복의 장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장한은 이마에 흑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정광이 이글거리는 눈에 검은 수염을 가득 기르고 있어 거칠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백인장과의 결전을 승리로 이끈 후 서안 일대를 호령하고 있는 노호공장 관주께서 친히 와주시니 정말 고맙소.”
흑의 장한은 서안 최대의 무관인 관중일관의 관주 장력패였다. 그는 일전에 강력한 경쟁자였던 백인장과의 비무대결에서 승리한 후 최고의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장력패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하하! 내가 요즘 조금 이름을 날렸기로서니 어찌 고 장주에 비할 수 있겠소? 예전보다 한층 당당하신 고 장주의 모습을 보니 안계가 넓어지는구려.”
“감사하오. 그리고 대응표국의 단리 총국주께서 어려운 걸음을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고소명이 이런 식으로 서안의 유력한 인물들을 하나씩 호명하여 인사를 하자, 그제야 성락중은 노해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 노 사형이 조금 전에 굳이 일어날 필요 없다고 한 거로군.’
노해광은 성락중이 이런 식의 허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살짝 웃으며 그를 달랬다.
“너무 그를 비웃지 말게. 이런 방식이 얼핏 쓸모없고 불필요해 보여도 꼭 필요한 일일세.”
“비웃을 리 있소? 다만 이런 식으로 따로 소개를 받은 적이 없어서 어색했을 뿐이오.’
“앞으로는 자주 겪게 될 걸세. 이렇게 해야만 참석한 사람들의 체면도 세워 주고 자신의 위세도 알릴 수 있어서 대부분의 연회에서는 반드시 거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고소명은 질리지도 않은 지 오늘 자신의 생일연에 참석한 서안의 유력 인사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언급을 하며 인사를 했다.
노해광은 이 부분에서 고소명의 꼼꼼함을 칭찬했다.
“대충 하는 것 같아도 미리 참석한 사람의 명단을 확인해서 상대가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세. 생각해 보게. 여기서 깜박 잊고 고장주가 소개를 건너뛰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성락중은 그제야 수긍의 빛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아닌 척해도 당사자는 치욕을 느끼거나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겠구려.”
“그렇지, 자존심을 먹고 사는 무림인들에게는 그보다 더 모욕적인 일은 없을 걸세. 그래서 기껏 연회에 초대해 놓고 원수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네. 그런 경우 대부분은 연회의 주최자가 대접에 소홀했거나 손님을 대하는 것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세.”
노해광은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제대로 대접하거나 완벽하게 준비할 자신이 없으면 연회를 열어서는 안 되네. 연회뿐 아니라 어떤 행사라도 마찬가지일세. 잘 대접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잘 대접해 줄 만한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하네. 고 장주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치밀하고 믿을 만한 인물이지.”
성락중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대접받기 위해서는 사람부터 잘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로군. 사형은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신경을 쓰면서 살아온 거요? 정말 존경스럽소.”
“하하. 일단 습관이 되면 별로 힘들지 않네. 상대를 파악해서 자신이 참석해도 될 자리인지를 아는 것은 강호에서 행도할 때 가장 먼저 익혀야 할 처세술 중 하나일세.. “
“자신이 낄 만한 자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로군.”
“그게 강호에서 살아가는 첫걸음이지. 자네도 잘 생각해 보면 은연중에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경우가 적지 않을 걸세.”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성락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노 사형의 말대로 인 것 같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자리에는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내 자신이 까다로운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은근히 까다로운 성격이었던 모양이오.”
“하하. 그건 까다로운 것과는 다르네. 자네는 천부적으로 강호인으로 살기 적합한 성격이었던 걸세. 그걸 몰라서 엉뚱한 자리에 참석했다가 봉변을 당하거나 낭패를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일세.”
그들이 대화를 하는 동중 고소명이 점차로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와 함께 중인들의 반응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유력 인사가 소개될 때마다 형식적으로 박수를 치거나 가벼운 환성을 보냈던 사람들이 점차로 웅성거리며 기대에 찬 표정을 띠고 있는 것이다.
노해광은 성락중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접을 받을 시간이 왔군. 본 파가 지금 강호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한번 느껴 보도록 하게.”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고소명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크고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멀리 종남산에서 어려운 걸음을 해 준 귀한 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열정적이고 뜨거운 함성이었다.
“우와!”
“종남파다!”
“드디어 대종남파의 고수들을 보게 되는구나.”
주위가 떠나갈 듯한 환호성을 받으며 노해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소명이 그를 향해 어느 때보다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철면호 노해광 대협. 오늘 왕림해 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리오.”
노해광은 담담하면서도 매끄러운 태도로 답례를 했다.
“멋진 연회에 초대해 주어서 감사하오.”
고소명은 단순히 한두 마디의 인사만을 나누었던 것과는 달리 노해광에게는 환한 미소를 가득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나름 신경을 쓰긴 했지만, 노 대협 같은 분의 눈에 차지 않을까 우려했던 게 사실이오.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할 뿐이오.”
“눈에 차지 않다니 당치 않소. 최근에 참석한 연회들 중 오늘 금륜장의 연회가 단연 최고였소.”
고소명의 얼굴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활짝 펴졌다.
“그렇게 보아주니 이고 모로서는 감격할 따름이오. 모쪼록 연회의 마무리까지 잘 즐겨 주시기 바라오.”
성락중은 노해광을 대하는 고소명의 태도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고소명이라면 한때 서안의 최고 고수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이토록 스스로를 굽혀 노해광에게 극진한 모습을 보이니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나 의외로 주위의 반응은 고소명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고소명과 미리 인사를 나누었던 인물들 중에는 노해광과 인사를 주고받는 고소명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제야 성락중은 종남파가 강호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느껴보라는 노해광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무림인들에게 종남파는 단순히 재기에 성공한 명문정파가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며 추앙해 마지않는 존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