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96화
군림천하 (996)
백모란은 한동안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손으로 조익현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나도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점점 몸을 회복해 가는데, 나는 그를 상대할 자신을 잃고 말았지.”
백모란은 자신만으로는 조익현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곧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조익현이 비망록을 이야기하면서 특이한 절진 하나를 언급한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펼치는 합격진으로, 제대로 펼칠 수만 있다면 천하의 어떤 고수라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최고의 절진이라고 했다. 다만 그 절진을 펼칠 만한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며 조익현은 웃었다.
백모란이 그 이유를 묻자 조익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빙긋 웃었다.
“굳이 찾자면 여자는 당신이 할 수도 있겠군. 월녀검법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구결을 구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남자는 불가능해. 남자가 익혀야 할 신공절학들이 모두 실전되었으니 말이야.”
그녀는 더 묻지 않았고, 조익현도 두 번 다시 그 진법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음양쌍반진을 떠올린 백모란은 그 절진을 익히는 길만이 자신이 조익현을 상대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석동이 조익현과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후 그녀의 생각은 확신이 되어 버렸다.
“음양쌍반진만이 조익현을 쓰러뜨릴 수 있다.”
음양쌍반진은 비선의 비망록에 적혀 있다.
그러니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비망록을 입수해야 했다.
그리고 비망록은 철혈홍안 조여홍의 수중에 있다.
때마침 조여홍이 신목령을 만들어 뛰어난 인재들을 모으고 있음을 알게 된 백모란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한 가지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사람은 몇 년의 노력 끝에 그녀의 지시대로 비망록에 적힌 음양쌍반진의 구결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음양쌍반진의 구결을 보고 난 후에야 그녀는 왜 그때 조익현이 음양쌍반진을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음양쌍반진을 익히기 위해서는 두 남녀가 필요했는데, 여자는 칠음진기와 월녀검법을 대성해야 했고 남자는 구양신공과 삼락검을 완성해야 했다. 칠음진기는 그녀가 익히고 있었고, 월녀검법은 종남파에서 익힌 여고수들이 제법 있어서 구결을 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나 구양신공은 이미 오래전에 절전되었고, 삼락검 또한 세 가지 검법 모두 유실되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구양신공을 변형시킨 천양신공이 있으니, 대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삼락검 또한 유사한 다른 검법을 구해 익힌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익히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닐 것이다. 음양쌍반진의 비결에 월녀검과 삼락검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두 남녀의 검법이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반드시 두 검법을
처음 그녀는 당연히 자신의 연인인 석동을 음양쌍반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석동은 천양신공을 익혔고, 뛰어난 검법을 다량으로 터득하여 조익현에 못지않은 절세의 고수였다. 그러니 충분히 대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하나 석동은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
천양신공으로 구양신공을 대체할 수 없고, 삼락검 또한 다른 검법과는 호환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합공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익현에게 당한 부상이 좀처럼 낫지 않는다는 것도 큰 이유였으나, 무엇보다 석동 자신이 고사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조익현을 이기고자 했지.
결국 그녀는 자신과 함께 음양쌍반진을 익힐 만한 인재를 찾기 위해 강호를 뒤져야 했다. 석동 또한 심각한 천양신공의 폐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양신공을 복원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고,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하나 인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용봉은 비록 천하의 기재였으나 천양신공을 익혔기에 처음부터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그 후로 적지 않은 고수들을 물색했으나 적합한 대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한 세월이 흐르던 와중에 마침내 한 사람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비록 당장의 무공은 보잘것없었지만, 두뇌가 비상하고 무공에 대한 재질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종남파의 장문인이라서 종남파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다는 장점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그 사람은 단순한 기대주가 아니라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선택자가 되었다. 백모란은 물론이고 그녀 주위의 누구도 그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 말을 하는 백모란의 얼굴에는 약간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마 그녀로서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내뱉기에 약간은 쑥스럽고 낯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은 문득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신목령에 잠입하여 비선의 비망록을 얻어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뜻밖의 말에 백모란의 봉목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너는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그녀로서는 나름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중요한 말을 했는데, 그가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하자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녀의 꾸지람 비슷한 말에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공주의 말씀을 들으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는지 궁금하더군요.”
“네가 생각한 사람이 누구냐?”
“신목령주의 십이사자 중 첫째인 백자목입니다.”
백모란은 잠시 기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맞다.”
놀랍게도 신목령주의 대제자이며 최고의 기재로 꼽히는 신목일호 백자목이 백모란의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진산월의 물음에 백모란은 약간은 냉기가 감도는 눈으로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내 조손 중 하나다.”
대한 그녀 나름의 추모였다. 그녀는 석동과의 사이에서 두 명의 자식을 보았으며,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백씨 성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멸문당해 사라진 자신의 가문 백가장에
백자목은 그녀에게는 증손이었고, 어려서부터 무공에 대한 뛰어난 재질을 보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기재 중의 기재였다.
백자목이 신목령에 들어왔을 때 신목령주는 물론이고 조여홍도 그를 마음에 들어 해서 가까이 두게 되었다. 결국 백자목은 조여홍의 거처에서 비망록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중 음양쌍반진의 내용을 사본으로 만들어 백모란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자신의 핏줄까지도 서슴없이 이용하는 백모란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요함과 끈기가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혀 늙지 않는 그녀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런 백모란이 자신의 상대자로 진산월을 지목한 이상 쉽게 자신의 마음을 바꾸거나 취소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백모란은 기대 어린 눈으로 진산월을 보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이제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내 물음에 답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눈이 활개 치듯 크게 뜨여지며 찬란한 별빛 같은 눈빛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너는 나와 함께 음양쌍반진을 익히겠느냐?”
음양쌍반진!
종남파 최고의 비전이며, 절전된 지 너무 오래되어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최고의 합격진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백모란은 진산월이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조익현이 취와미인상의 삼대절학을 모두 익힌 이상, 음양쌍반진이 아니고서는 그를 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조익현과의 악연을 생각해 본다면 그와의 격돌을 피하기 힘든 진산월로서는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될 것이다.
진산월은 허공을 응시한 채 한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백모란은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진산월의 대답이 어떠한 여파를 일으킬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그녀는 그가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합격진을 함께 익히는 것뿐이 아니라 서로의 모든 걸 함께 나눈다는 의미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완성할 수 없을 정도로 음양쌍반진은 두 남녀의 긴밀한 관계를 필요로 했다.
어디 그뿐이랴? 익히기 위한 조건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구양신공과 칠음진기라는 최고의 신공절학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어야 했고, 삼락검과 월녀검법을 완성할 정도로 최고의 검법을 지녀야 했다.
그런 면에서 진산월과 백모란은 이백 년 전의 매종도와 조심향 이후 음양쌍반진을 익히기 위한 최적의 한 쌍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조심향의 배신으로 음양쌍반진은 완성되지 못했었다.
이제 이백 년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그 전설적인 합격진이 완성될 것이다.
좀처럼 흔들림이 없던 백모란의 가슴이 조금씩 뜨거워질 때, 마침내 진산월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