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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97화


군림천하 (997)

“그 제안은 거절해야겠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백모란의 얼굴은 처음으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백모란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눈 속에 담긴 냉정함과 단호함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이미 마음을 정했구나.”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제 마음은 이미 하나였습니다.”

백모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 순간 장내의 공기는 숨을 제대로 내쉬기도 힘들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고,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괴한 분위기가 질식할 듯 주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심상치 않은 기류가 피어올랐으나, 진산월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러 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 둔 상태였으며, 그 마음은 추호도 변치 않았다.

그에게 그것은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었고, 손해와 이익을 염두에 둔 철저한 계산의 결과도 아니었다. 돌아가신 사부의 손을 잡고 ‘군림천하’의 꿈을 입에 올릴 때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누구도 그 꿈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 길을 막거나 훼손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옆에 서 있을 수 있는 동반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다른 누구도 그녀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백모란은 남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고매한 석동도 그녀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 적은 없었고, 심지어 필생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익현마저도 그녀의 말이라면 신중하게 들어 주었다.

존재에 의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수십 년간 공들여 온 싹이 피어나지도 못하고 무참하게 꺾여 버리게 되었다. 그것도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의 핏덩이 같은

막상 너무 화가 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백모란의 지금 심정이었다.

백모란은 가슴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으나 지금 당장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기에 막상 그 일을 눈앞에서 당하게 되니 일시지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것이다.

죽음처럼 무거운 침묵을 깬 사람은 뜻밖에도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그녀를 향해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사매를 돌보아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이제 본 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임영옥을 대동하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백모란조차도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백모란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태연히 돌아서려는 진산월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조여홍이 스스로를 단심자(丹心子)라 부른다고 하더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말에 진산월은 돌아서려던 몸을 멈춰 세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모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고, 눈빛 또한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너무 깊은 분노는 때로는 호수처럼 깊게 가라앉아 보이는 법이다.

백모란은 무심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한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이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들었다.”

단심자에 대한 것은 예전 손검당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철혈홍안 조여홍뿐 아니라 석동과 백모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석동은 천룡과도 같은 사람이라 천룡객이라 불렀고, 백모란은 봉황 같은 여인이라 봉황인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들 세 남녀의 별칭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어서 진산월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진산월은 그 별칭을 누가 붙였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조여홍이 직접 붙인 모양이었다.

자신을 단심자라 부른 것도 특이했지만, 자신을 배반한 남편과 필생의 연적을 천룡객과 봉황인이라고 지칭한 것도 무척이나 기이한 일이었다.

원래 ‘단심’이란 단어는 백모란이 먼저 자기 스스로에게 붙인 것이었다.

조익현이 자신의 가문인 백가장을 멸문시킨 원수임을 밝히던 날, 백모란은 조여홍을 향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조익현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내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단심인(丹心人)’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조여홍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붉은 마음은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다. 피를 토하는 심정을 갈고 닦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당신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나요?”

“너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너는 단지 그뿐이다.”

그때 백모란을 보는 조여홍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차갑고 냉정했다. 그 서늘한 눈빛에 백모란은 조여홍에게 더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백모란은 조여홍이 스스로를 단심자라 칭하며 자신을 봉황인으로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그녀는 별생각 없이 웃고 말았는데, 그 이름이 설마 백 년을 이어져 올 줄은 정녕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백모란은 굳이 왜 이 시점에서 단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백모란은 진산월에게 자신의 의중을 분명하게 밝혔다.

“조여홍이 자신의 결심을 보여 주기 위해 단심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조익현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나의 단심은 지금도 그대로이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수 있다.”

그녀의 말은 겉으로는 스스로의 결심과 각오를 표현한 것이었으나, 그 말속에는 자신의 말을 거절하는 상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서릿발 같은 위협이 담겨 있었다. 항상 의중을 알 수 없고 한 마리 봉황처럼 품위를 잃지 않던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격한 모습이었다.

천하의 누구라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면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몰랐겠지만, 백모란은 원래 누구보다 격정적이고 몸과 마음이 모두 불같이 뜨거운 여인이었다.

백가장 시절의 그녀는 항상 흰옷을 입고 다녔고, 백색은 그녀를 대변하는 색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백가장이 멸문하고 조익현에 대한 복수를 꿈꾸면서 그녀는 붉은색 옷을 입기 시작했고, 지금은 붉은색 봉황이 그녀를 상징하는 문양이 되어 버렸다.

그에 비해 철혈홍안 조여홍은 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여인이었다. 물과 불같은 두 사람의 이러한 성격은 추후의 일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조여홍은 석가장을 지키며 다소 수동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에 열정적이고 과격한 백모란은 석동을 움켜잡은 채 천봉궁을 세워 본격적으로 강호에 뛰어든 것이다.

그런 백모란이니만큼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진산월을 어떻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당장 손을 쓰지 않은 것은 그만큼 진산월이 그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산월은 오히려 그녀의 화가 자신이 아닌 임영옥에게 미칠 것을 우려했으나, 백모란은 한 차례 깊은 호흡을 내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단순한 말 한마디로 나의 이십 년 적공(積功)을 수포로 만들어 버렸구나. 너와 나의 인연은 이것으로 종결된 것이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진산월은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스스로 단심을 지녔다고 말하는 그녀의 의중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지금의 그가 그녀에게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와의 일이 매듭지어지게 된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스산한 빛이 어른거렸다.

“네가 그녀를 만나고도 그런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어디 네가 앞으로 어떤 결정을 할지 지켜보도록 하겠다.”

일 층으로 내려와 주루 밖을 벗어난 진산월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푸르기 그지없던 하늘은 서쪽 한편이 조금씩 붉어지며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떨구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정소소가 그림처럼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매에게 데려다주시오.”

정소소는 무언가 말을 내뱉을 듯하다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녀가 그를 데려간 곳은 주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객잔이었다.

<화평객잔(和平客棧)>.

한쪽에 작게 쓰인 간판만 아니었으면 이곳이 객잔인지 알지 못했을 정도로 작고 허름한 곳이었다. 정소소는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을 우려했는지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이 이 일대에서 가장 조용하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 골랐어요. 덕분에 임 소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몸을 쉴 수 있었어요.”

“고맙소.”

진산월이 짤막하게 대답하자 정소소는 그를 살짝 쳐다보다가 다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밖에서 볼 때보다는 한결 깨끗하고 정리된 모습이었다.

십여 개의 객실이 모두 비어 있는지 인기척이 전혀 없었음에도 청소가 잘되어 있었고, 아늑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이 들게 했다.

정소소는 가장 구석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저 방이 이 객잔에서 가장 크고 넓은 곳이에요. 임 소저는 지난 며칠 동안 저 방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방으로 성큼 다가섰다.

막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진산월은 정소소를 돌아보았다.

“내 사매가 단봉공주를 만난 적이 있소?”

정소소는 어깨를 움찔하다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얼마 전에 공주님을 뵈었어요.”

“그녀가 요청한 거요?”

“그래요.”

“그 이후에는?”

정소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이후로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어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정소소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오늘은 사매를 데리고 움직일 생각이오. 미안하지만 마차 한 대를 구할 수 있겠소?”

정소소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의 뒤뜰에 준비해 두었어요.”

진산월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내가 사매를 데리고 갈 거라고 미리 예상한 거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진산월은 단봉공주의 격렬했던 반응과는 다른 정소소의 차분한 대답이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정소소를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단단히 신세를 졌소. 이 은혜는 반드시 보은하겠소.”

진산월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정소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탁!

문이 닫힌 다음에도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누구도 알아차리기 힘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녀의 얼굴에는 한 줄기 씁쓸함과 어두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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