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8화
대부분의 광산은 경계가 엄중합니다. 얼간이가 들어가서 사고를 당하는 것을 막는다는 인도적인 이유도 있고 광산은 곧 보물 창고와 같다는 타산적 인 이유도 있지요. 아무 자격이 없는 왕지네 같은 이는 갱도에 들어와 있어선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왕지네는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사 람을 보고도 한참 동안 따라다니며 진짜 길을 잃은 것인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예언자에게 왕지네는 그렇게 변명하며 빨리 도 와주지 않은 것을 사과했습니다.
“그래, 알았어. 그런데 당신 바이서스로 돌아간 것 아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왕지네는 어깨를 움츠린 채 방어적인 미소를 지었어요.
“바이서스로 돌아가진 않았어. 시에프리너의 레어를 털 작정이라고 말하면 반대할까봐 그랬지.”
“뭐라고?”
그다지 참신한 반응이랄 수는 없지만 예언가는 너무도 기가 막힌 나머지 저 이상의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설적인 벽타기꾼은 자신 만만했습니다.
“값비싼 보물이 쌓여 있고, 주인은 자고 있어. 이건 훔치라는 강요에 가깝잖아.”
“하지만 어떻게?”
처음 만난 그 밤처럼 왕지네는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얼굴로 설명했습니다. 시에프리너는 수면기에 들기 전 레어로 통하는 길을 다 막 았을 겁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그녀의 레어로 통할 길을 찾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죠. 설령 찾아낸다 해도 그것은 드래곤만이 다시 뚫을 수 있을 정도 로 단단히 막혀 있을 테고요. 그런데 그들이 있는 광산은 코볼드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코볼드는 갱도를 파면서 자기들의 군주에게 통하는 길 하나 쯤 만들어두었을 수도 있죠. 만약 그런 통로가 있다면, 그것은 코볼드가 다시 열 수 있을 정도로만 막혀 있을 테죠. 그 정도라면 왕지네가 뚫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길은 코볼드와 시에프리너를 잇는 길이니 함정 같은 것도 없을 테고요. 따라서 그 길만 찾아낼 수 있다면 잠들어 있는 시 에프리너에게 안전하게 직행할 수 있는 겁니다.
예언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확실히 말이 되는 추론이었지요.
“당신하고 헤어진 이후로 계속 이 광산에서 살다시피 했어. 이젠 어지간한 광부보다 내가 더 이 광산에 훤할걸. 곧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이봐. 당신이 성공한다 치더라도 드래곤의 보물을 훔치고서 무사할 것 같아?”
“돌려주면 되지.”
“돌려주려고 훔친다? 당신 바보 아냐?”
“또 그런다. 바보는 당신이라니까. 생각해 봐. 추락하지 않는 시에프리너가 금방 깨어날 거라면 어떻게 이 땅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겠어? 공부 많이 한 사람들, 학자들이 시에프리너가 한참 동안 깨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솔베스가 생긴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시간은 많이 있다고.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시에프리너가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지. 하지만 그 전 에 깨어나면? 들어봐, 들어봐. 나는 시에프리너한테 뭐 쓸 만한 것을 훔친 다음 그걸 종자돈 삼아서 돈 잔뜩 벌 거야. 그러곤 솔베스에서 언제 사람들 이 떠나는지 살피다가, 똑똑한 학자들이 사람들한테 피하라고 알려주겠지? 응? 그런 낌새가 보이면 그 보물을 되사서 제자리에 샥 돌려놓는 거야. 여 유가 된다면 그 전에 되사도 될 테고. 기막히지? 바보가 어떻게 이런 생각 하냐고.”
“당신 때문에 시에프리너가 바로 지금 깨버릴 수도 있잖아.”
“이봐. 집주인이 절대 깨지 않을 거라고 믿는 바보 도둑이 어디 있어? 그런 위험은 감수해야지. 혹시 드래곤을 깨우게 되면 그건 내 기술이 부족한 탓이니까 당한다 해도 억울할 건 없지.”
“아니, 잠깐. 당신이 다치는 것도 싫지만, 그러면 솔베스 사람은? 그 사람들은 억울하잖아.”
“응? 무슨 소리야? 솔베스 사람들이 뭐?”
“아, 이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겠군. 시에프리너가 깨면 당신 혼내준 다음 다시 잠들 거라고 생각했군? 보통 집주인처럼? 아냐. 시에프리 너가 지금 깨어나면 그건 그대로 활동기로 접어든다는 뜻이야.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다시 수면기에 들어가지 않을걸. 그러면 솔베스 사람들은 다 죽 는 거지.”
왕지네가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이 퍽 우스웠기에 예언자는 실소하고 말았습니다. 왕지네는 당혹하여 말까지 더듬었죠.
“나, 나 한 사람 때문에 깨어날까? 응? 전쟁이 벌어져도 꿈쩍도 안 하고 쿨쿨 잠만 잤는데.”
“전쟁이야 저 위에서 우리끼리 치고 박은 것이지만 당신은 시에프리너 바로 옆에 가서 그녀의 보물을 훔치려는 거잖아. 당신 훌륭한 도둑이니까 실 패할 확률이 낮을지도 모르지만, 실패했을 경우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보면 확률이 만분의 일이라도 문제가 되는 것 같은데.”
예언자의 말대로였지요. 왕지네는 머리 아픈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일단 예언자를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잠깐. 광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난 들키면 안 되니까………… 좋아. 가자.”
광산 구조에 훤한 왕지네는 놀랄 만한 속도로 예언자를 지상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광산 입구에 도달한 왕지네가 말했습니다.
“난 밤에 나갈게 있다가 당신 집에 들러도 될까?”
“밤새도록 기다릴게. 아, 이번엔 문으로 들어와, 제발.”
왕지네는 싱긋 웃으며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미 예언자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 상태였기에 현장사무소에서는 예언자의 귀환에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습니다. 아무래도 광부들이 일부러 그를 낙 오시킨 것 같진 않았습니다. 예언자는 안도하며 집에 돌아가 쉬겠다고 했지요. 소장은 내일도 쉬어도 좋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언자는 약간 멋쩍었 지만 분위기를 보니 지하에서 귀환한 누군가는 모두 그 정도 환영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았습니다. 사실 그랬죠. 몸이 심하게 상하거나 그렇지 않 다 해도 정신이 나가버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 지하 실종이니까요.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까지 붙여주겠다는 제안을 사양하며 예언자는 집으로 돌아왔 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서는 방문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깜짝 놀랐죠. 집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는 것은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