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9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왕지네가 올 때까지 자고 싶었지만, 예언자는 이루릴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었어요. 예언자는 기력을 끌어 모아 정중하게 이루 릴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이루릴은 그의 상태가 심상찮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챘죠. 몸을 대강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예언자는 이루릴에게 자신이 당했던 사고를 말해 주었습니다.
이루릴은 차분히 그의 말을 듣고 따스하게 위로의 말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왕지네와 조우했다는 말에는 예언자 이상으로 놀라워하며 깊은 관심 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루릴은 약간 난처한 기색이었죠.
“나는 어떤 이의 전언을 가져왔어요. 그 내용은 어쩌면 당신에게 꽤 불쾌한 것일 수도 있어요. 험한 일을 당한 차에 그런 말을 전하려니 면목이 없군 요.”
하지만 이루릴이 마침내 용건을 말하자 예언자는 불쾌감 대신 혼란을 느꼈습니다. 몸 상태가 저하되어 이해력이 나빠진 탓도 있지만, 이루릴의 용건 자체가 범상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루릴은 다시 자세히 말했습니다. 3년 동안 당신을 당신 이외의 모든 자로부터 격리하길 원하는 이가 있다. 격리 기간 동안 당신은 왕들도 부러워 할 만한 대우를 받을 테지만 당신 스스로 그 격리 상태를 중단할 수는 없다. 3년의 기한에는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한 연장 또한 절대 없다. 주의 깊게 판단하여 대답해 주세요.
예언자는 겨우 그녀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의 뜻 또한 깨달았지요.
“그러니까, 누군가 힘센 인물이 앞으로 3년 동안 제가 예언을 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군요. 잠깐만. 그러면 애초에 당신은 왕지네가 아니라 그 사람 부탁 때문에 저를 왕비에게서 구출해 주신 겁니까?”
“그랬다면 당신과 헤어졌다가 다시 찾아오는 귀찮은 일을 하진 않았겠지요.”
“그렇・・・ 군요. 예. 제가 멍청한 소리를 했군요. 당황했나 봅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누군가의 입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살해지요. 당신이 그 자와 타협해서 즉각적인 살해 대신에 그 호화로운 감옥이라는 돈 많이 들고 비효율적인 대안을 끌어내어주신 것이군요?”
“내가 직접 끌어낸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제안을 꺼낸 이는 입막음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내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이는 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겠죠.”
“정말, 정말 당신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군요. 감사를 해야 마땅하겠지만 염치없게도 우선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감스럽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 질문 잊어주십시오. 제가 판단해야 할 문제지요. 죄송합니다… 이거, 참.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예언자가 울컥하여 외쳤습니다.
“정말 바보 같은 자입니다! 그 자는 그런 제안을 내놓는 것이 저를 더 충동질하는 것임도 모른단 말입니까? 3년 안에 중대한 일이 벌어진다고 제 귀 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교활하다거나 영악하다는 표현은 듣기 어려울 거라는 점에 동의해요. 하지만 나는 이 제안에 담긴 진실성에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군요. 어떤 자들 은 목적의 본질보다 수단의 화려함을 높이 사기도 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런 태도에 편승할 생각이 없어요. 컵의 아랫부분을 뚫는다면 컵의 윗부분과 통일성, 대칭성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것이 더 조화롭고 아름다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걸 컵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거예요.”
이루릴의 말에 담긴 희미한 신랄함이 예언자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고민에서 빠져나와 엘프를 직시했지요. 하지만 이루릴은 그가 포착하고 규정할 만한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물끄러미 예언자를 바라볼 뿐이었지요.
문득 예언자는 그 엘프의 모습에서 낯익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낯이 익다는 것은 부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군요. 예언자가 계속 상상해 온 어떤 모습과 이루릴의 모습이 일치한다고 해야겠네요. 그 발견과 동시에 예언자는 말했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대답에 놀라며 동시에 만족했습니다.
“거절합니다. 제 말을 전해주십시오. 비록 충동질을 당했지만, 그래도 저는 예언을 하지 않을 겁니다. 미래를 보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 다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믿지 않는 자의 약속을 제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묻지 않나요?”
“더 쉬운 입막음을 선택하겠지요. 아닙니까? 제 입으로 거절했으니 그 자는 당신의 체면을 건드리는 일 없이 저를 죽이러 나설 수 있겠군요. 호락호 락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를 밀어붙이는 것이 과연 제가 예언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인지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거절하면 공격받는 건 당신이 아니에요.”
“예?”
“이런 말을 전하게 돼서 유감이군요. 당신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 이는 당신의 여자를 죽일 거예요.”
예언자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이겠지요. 후회할 말을 꺼내고 만 것은.
“어느 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