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41화
조국의 참혹한 패전을 팔짱낀 채 묵인하고 왕비의 감금을 비웃으며 탈출했던 오만불손한 예언자가 꼬리를 만 채 돌아왔다는 소식은, 애초부터 뜬소 문에 머물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렇게 극적인 요소가 많잖아요. 그 결과, 궁내부원 한 명이 자기 약혼자(예의바르게도 늙은 이모님을 배석시키고 있던) 에게 미래에 대한 농담을 한 지 정확히 8시간 후엔 명사들의 저녁 모임에서 ‘그런데 예언자의 귀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같은 말이 나오게 되 었지요. 물론 소문을 퍼트린 건 왕비였지만 왕비 자신도 그 기세에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유가 뭘까요? 패전의 상처에 신음하던 바이서스 인들에게 왕자 탄생은 분명 새로운 희망의 증거로 보이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왕권 승계가 안정화되었다는 것 외엔 분명한 긍정적 효과는 없지요. 왕자가 어떤 인물이 될지 알 수 없으므로 그건 그냥 아이 한 명의 출생인 셈이지요. 그 런데 예언자는 왕자가 진짜 희망임을 보증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반길 수밖에 없지요. 이상이 사회 현상을 설명하길 좋아하는 이들이 찾아낸 설명입니다.
바이서스 임펠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주점 구석에 앉아 있던 여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지요.
‘뭔가 이상해.’ 여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을 술로 씻어 내릴까 하는 유혹을 참으며 계속 그 불쾌감을 관찰했습니다. 동시에 불쾌감을 관찰하는 자신도 관찰했죠. ‘내가 왜 이러지? 책 먼지 꽤 마셔본 사람처럼 생각하네. 이것 때문인가?’ 여자는 허리를 내려다보았어요.
거기엔 보통 사람의 허리엔 잘 매달려 있지 않은 물건이 있었죠. 안에 몽당초가 들어 있을 것 같은 조그만 원통형 각등이었어요. 금속 재질에 개폐 장치가 달려 있어 군용 같은 느낌도 주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지하실에 내려가는 주부의 손에 들려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물건이었습니 다. 단 그 주부는 수백 년 전의 주부여야 할 겁니다. 굉장히 구식이었으니까요.
허리에 단단히 매달아두었으니 잃어버리기 싫은 귀중품이겠지만 여자는 그것을 험악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노려보았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개폐 장치의 걸쇠가 잘 걸려 있는지 확인한 여자는 다시 갈망에 찬 표정으로 술잔을 쳐다보았지요.
‘마치………… 바이서스 전체가 갑자기 미래에 대한 갈증을 가지게 된 것 같아. 음. 그런 견지에서 보면, 으잉? 내가 뭐라고 했지? 어쨌든 그렇게 보면 왕 비가 왜 그리도 예언자에게 목을 맸는지도 설명할 수 있지. 바이서스의 뜻인 거야. 바이서스가 왕비를 움직여 예언자를 움켜쥔 거라고………… 헤, 내가 이런 말도 하나? 아, 미치겠어. 이 빌어먹을 물건.’
여자는 양쪽 볼을 부풀렸다가 천장을 향해 크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곤 탁자를 붙잡고 위아래로 세게 흔들었습니다. 술잔이 덜그럭거리자 주 점 주인이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보았죠.
“어이, 왕지네. 그건 뭐냐?”
왕지네는 샐쭉한 표정으로 주인을 쳐다보고는 술잔을 앞으로 끌어왔습니다. 그러곤 이로 술잔을 물어 들어올렸다 내려놓았다 하기 시작했어요. 주 인은 거의 슬픈 표정을 지었죠. 한참 동안 술잔으로 온갖 장난을 치던 왕지네는 주인이 행주를 던지기 좋게 뭉치기 시작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 다. 값을 치른 그녀가 나가려 할 때 주인이 의아하여 말했습니다.
“그냥 가?”
“응? 계산 했잖아.”
“술은 마시지도 않았잖아. 돌아오자마자 벽 타려고 뭐 물어보러 온 것 아냐? 술도 벽 타려고 안 마신 것이고.”
“안 봤어? 술 가지고 놀려고 온 거야. 물어볼 건 없어.”
“나 원 참. 별의별 손님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소린 또 처음이네. 술을 가지고 놀아? 헛.”
주인은 그 말이 재미있다는 듯이 몇 번이나 반복했죠. 왕지네는 크게 미소 지어주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거칠게 북북 찢어놓은 듯한 구름이 반쯤 덮여 있어 더욱 푸르게 보이는 하늘을 흘깃 바라보며 왕지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정말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