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73화
‘예언’은 반쯤 무너진 참호 속에서 신음하던 시에프리너 토벌군을 지진의 충격처럼 관통했습니다.
춤추는 성좌는 루트에리노의 후손에 의해 죽는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누가 세계를 지배하던 드래곤 로드를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지배자로 격하 시켰습니까? 루트에리노 대왕이지요. 그 루트에리노의 후손인 왕이 프로타이스의 부당하고 불쾌한 참견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전선으로 온 것입니 다.
사람들은 신문보다 왕이 나은 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이 있어야 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지요. 신문을 읽은 후에는 판단이라는 귀찮 은 짓을 해야 하지요. 하지만 왕 앞에서는 판단의 힘겨운 노역은 필요 없습니다. 판단은 왕이 하는 것이니까요. 왕은 모든 정당성의 원천이죠.
솔베스의 하늘은 포연과 불 붙은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 때문에 원래 파란 색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꼴을 하고 있습니다. 참호에는 똥오줌과 핏물, 시체 유출수 따위가 뒤섞인 얼음장 같은 물이 마를 날이 없지요. 물이 저지대에 모이는 건 자연법칙이니까요. 그 안에서 흠뻑 젖은 코 트로 몸을 감싸고 노루잠이라도 자려 해도 쉽지 않았어요. 시신을 계속 뜯어먹는 동안 조그만 늑대로 변한 것이 아닌가 싶은 쥐들이 잠든 이의 가슴 을 밟고 달리니까요. 그 괴물 같은 놈들이 잠든 병사의 눈알을 빼먹는다는 이야기는 전설인지 사실인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꼼짝 못하게 된 부상자 의 귀나 코를 물어뜯는 쥐들은 확실히 있었죠.
왕은 그 모든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다. 왕이니까요.
하지만 거대한 힘에는 거대한 대가가 따르지요. 왕은 그런 정당성 확립에 실패할 경우 다른 이들과 달리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끝낼 순 없습니 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죠. 저번 전쟁 때 왕은 그런 위험에 빠질 뻔했죠. 발탄과의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가 패전하는 바람에.
이제 왕은 그 힘을 다시 사용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열식장에서, 왕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병사들을 죽 둘러보고는 하늘을 향해 외쳤습니다.
“그림자 지우개를 가져왔다. 이제 왕은 네가 원하는 싸움을 할 준비가 되었다. 이 저주받을 짐승아!”
왕은 그림자 지우개를 뽑아들었습니다.
병사들은 괴성을 질렀습니다. 분명 총기류에 익숙한 현대적 군인인 그들이었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온 힘인 드래곤에게 처절하게 농락당한 지금 그들 의 사고 방식은 2큐빗짜리 쇠붙이를 흔드는 왕에게 열광을 보낼 정도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왕은 베레모에 권총까지 끼고 있었고 그 앞에 도열한 병사들 또한 트라이던트 레버액션 라이플을 들고 수류탄과 탄띠가 달린 서스펜더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갑옷이나 투구, 창 등은 보이지 않 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모든 이는 영광의 7주 전쟁 재현 행사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왕은 뭔가를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빳빳하게 다려놓은 군복 윗옷을 벗어던지고 내의까지 벗어 벌거벗은 상체를 드러내었습니다. 베레모도 내팽 개쳐 원시 전사 같은 모습이 된 왕은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왼손으로 칼날을 쥐고는 그림자 지우개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그러고는 바이서스 왕가의 수호신을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아샤스!”
완전히 흥분해 버린 병사들은 하늘을 향해 총질을 시작했습니다. 왕의 앞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지만 아무도 말릴 수 없었어요. 장교 들마저도 권총을 뽑아 하늘로 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거든요.
왕은 치켜들었던 고개를 떨구고는 그의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시선을 옮겼습니다. 사열식장 뒤편, 조금 떨어진 곳에는 왕비가 시녀들과 함께 서 있었 습니다. 왕비를 향한 왕의 시선엔 무한한 감사가 담겨 있었지요. 병사들을 돕기 위해 궁성을 샅샅이 뒤져 고대의 보물들을 찾아내었던 그 현명하고 자애로운 여인은 궁성 가장 깊은 곳에서 솔로처가 만든 위대한 마법의 검 그림자 지우개도 찾아내었지요. 왕비가 그것을 바친 후에야 왕은 어떤 참모 들도 이해하지 못한 프로타이스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타이스는 ‘그림자 지우개를 들고 와라. 한 판 붙어보자!’고 말한 것이었지요.
게다가 왕비는 그 승부의 결말까지 알려주었습니다. 괴팍한 예언자를 설득한 끝에 왕비는 프로타이스가 루트에리노의 후손에게 쓰러질 거라는 예언 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런 예언을 받은 왕이 역사상의 그 어떤 용맹한 전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승리감과 자신감을 뿜어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지요.
어떤 전설과 달리 그림자 지우개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