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84화
산책은 특별한 일 없이 끝났지만 왕이 마중을 나온 것 때문에 왕비는 기분이 퍽 좋았어요. 왕이 오늘 아침도 병사들과 함께 식사하겠다고 말하며 양 해를 구할 때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지요. 어쨌든 왕이 여기까지 온 것은 코볼드들의 결사적인 저항 때문에 심신이 지친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 으니까요. 왕비는 그를 쾌히 보내주었습니다.
천막에 들어서서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예언자를 목격했을 때도 왕비의 즐거움은, 비록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어요. 왕비를 따라온 시녀들이 놀란 소리를 냈지만 왕비는 경쾌하게 말했습니다.
“지난 밤에 다시 미래를 보시었소? 미안하오. 잠시 산책을 나가느라 자리를 비웠소. 지금 당장 듣도록 하겠소.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시녀들은 알았다는 태도로 얌전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둘만 남게 되자 왕비는 예언자에게 다가가 왕자를 그 품에 건넸습니다. 그 동작이 조금 난폭 하여 던지는 것에 가까웠기에 예언자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왕비는 그대로 걸어가 상자 쪽으로 다가가서는 왕지네가 있던 상자를 조사했습니다. 빈 상자를 확인한 왕비는 쑥스러워 하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였습니다.
“그 여자가 여기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소? 미래를 보셨나? 이거 참 민망하군.”
“기분이 좋으신가 보군요.”
“당신한텐 다행스러운 일이지.”
왕비는 물병에서 물을 따라 마시며 턱으로 왕자를 가리켰지요. 그러고는 말이 좀 부족했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들어보시오. 조금 전 산책에 나섰던 나를 왕께서 마중나와 주셨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소. 그 분은 어떤 장애도, 어떤 위험도 없이 승승장구하실 거요. 하지만 그 모든 승리와 영광 후에도 그 분은 여전히 나에게 오실 거요. 내가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더라도!” 왕비는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습니다. 볼을 부풀리던 왕비는 마침내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렸지요. “사실은 내가………… 사실은 내가 그 모든 장애물을 다 없앤 건데………… 하지만 왕은 모르실 테지. 나도 모를 테고.”
“그게 그렇게 좋은 일입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요. 왕을 위해 온갖 일을 다 하고도 그 사실에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수도 없고 감사의 말도 들을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어리석군! 이건 한두 번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계속될 일이오. 그런 긴 시간이라면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은 오만한 마음으로 바뀌었다가 끝내 깔보 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거요. 자신이 그런 감정을 용케 다스린다 해도 상대방이 스스로 자격지심을 느낄 위험도 있지. 모르겠소? 내가 한 일을 모르 는 이상 나는 결코 왕을 내 꼭두각시로 여기지 않을 거란 말이오. 그리고 왕 또한 당신께서 나의 꼭두각시가 된 듯한 굴욕적인 경험은 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이고.”
예언자는 놀랐습니다. 왕비가 보여준 심리 분석의 수준에 놀란 것이 아니라(사실 대단찮죠.) 그런 말을 한 것이 왕비라는 사실에 놀랐지요. 예언자는 입이 거친 사람이었고, 또 왕자가 자신의 품에 안전하게 있었기에 주저없이 말했습니다.
“왕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과부가 된 백모와 결혼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나 보군요. 하긴 씹는 맛이 있는 이야깃거리일 테니까.” 예언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왕비는 빙그레 웃었지요.
“그렇소. 바로 그거요. 나는 내가 그를 왕으로 만들어주었다고 거만해할 수 있소. 그런 생각을 품게 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울 거요. 왕께서 그런 생각 때문에 나를 경원시한다면 살고 싶지도 않을 테고.”
예언자는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자, 이제 시녀들에게 들려줄 예언이 필요하겠군. 마침 적당한 것이 있소. 추락하지 않는 드래곤의 레어가 어디 있는지 말하시오. 한때 거기 갇혀 있 었으니 당신이 싫어하는 그 폭, 력, 적, 인 예언을 할 필요도 없겠군. 또한 예언할 사건에 대한 당신의 선, 택, 권을 침해하는 일도 아니고, 당신이 경 험한 일을 묻는 거요. 대답하시오.”
예언자는 품 안의 왕자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왕비는 짜증을 냈죠.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코볼드 포로들을 심문하거나 수색대를 파견하면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소. 나는 시간 낭비를 피하려는 거요. 시에프리너는 어디 있소?”
왕자가 팔을 뻗었습니다.
신경쓰지 않고 지나치려던 왕비는 잠시 후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아기는 물론 팔을 뻗기도 하고 다리를 뻗기도 하죠. 세상의 경계를 확인하고 싶다 는 듯이. 하지만 그 동작이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왕자의 왼팔은 어느 특정한 방향을 가리킨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평범하지만 꽤 성숙한 동작이지요.
왕비의 맥박이 빨라졌습니다. 그녀는 예언자를 보았지요. 하지만 예언자는 왕비에게 정수리를 보인 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기의 팔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듯이 슬그머니 구부러졌습니다. 왕비는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속삭였어요.
“시에프리너는 어디에?”
구부러지던 아기의 팔이 다시 용수철처럼 튕겨졌습니다. 그 팔은 조금 전 가리키던 방향을 정확하게 다시 가리켰어요. 아기가 그런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절대적 확신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