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00화
모용란 관련 자료를 떠올리며 조금 불안해지고 있을 때였다.
“그럼 이 몸이 먼저 출수하겠소!”
외침과 함께 사영이 먼저 신형을 날려 선제 공격을 가한다. 내 시각 능력으로는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는 사영의 검은 옷자락만을 쫓아가기도 바빴으나, 역시 공격 순간은 포착하기가 힘들었다. 챙! 아니 쨍-? 하여간 표현하기 어려운 날카로운 파열음이 세 번인가 울린 후, 사영은 튕겨져 나오듯 모용란으로부터 물러선다.
“산 속에서 혼자 익힌 하찮은 검술이라 부끄럽소이다.”
여유가 배어있는 사영의 말이었다. 흠, 확실히 저럴 땐 평소와 달리 꼼꼼한 사영이다. 정체가 불분명한 자신이 먼저 선수 3초를 보여준 것도 그렇고… 사소한 언행까지 성실한(?) 정파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모용란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버리네?
“생전 처음 보는 초식… 허나, 혼자 익힌 것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되겠지요.”
뭐야, 오히려 음성이 더 냉랭해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모용란의 공격 개시! 챙! 촹! 카칵~! 촤창! 검과 검이 토해내는 소리들이 지극히 날카롭고 맹렬하다.
웃! 어엇-! 우… 오옷! 음… 앗!
대전을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감탄사와 신음소리가 더 재밌군. 그나저나… 대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모용란이 한 말, 설마 벌써 뭔가 눈치 챈 걸까? …그렇지만 뭘? 사영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걸? 그때까지 겨우 세 번 검을 받아 본 것만으로? 아니, 그보다 그게 왜 궁금해? …쳇! 남들은 저 재밌는 싸움 구경을 신나게 감상하고 있는데 난 왜 혼자 공연히 복잡한 생각을 굴려야 하지? 그렇지만 제기랄! 뭐가 제대로 보여야 재미를 느낄 것 아닌가 말이다.
저 두 남녀… 전체적인 움직임 자체는 ‘드래곤 볼’ 만화영화에서의 표현처럼 쉭! 하고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고 저만치서 또 쉭! 등장… 뭐 그런 식으로나마 보이긴 하는데, 양측이 검을 어떻게 휘두르며 치고 막고 공방하고 있는지는 못 보고 놓치는 것이 더 많다. 몽몽이 녹화 뜨고 있으니까 나중에 느린 동작으로 다시 보면 되겠지만, 이런 흥미진진한 격투 대전은 실제 경기를 보는 것과 결과를 다 알고 나서 녹화 방송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닌가. 으… 넓은 갑판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남녀 대결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관객들의 감탄사… 군대에서 근무 시간과 겹쳐 월드컵 생중계 방송을 놓치고 스포츠 뉴스 시간에 하이라이트를 봐야 했던 아픈 기억이 떠오르며 으으-! 점점 더 열 받는다.
톡! 톡! 톡!
“몽몽, 야 너 지금 당장 내가 저 대결을 실시간으로 정확히 볼 수 있게 해봐! 안돼?”
[ …주인님 신체의 아드레날린과 스테로이드, 지베카이닌 등 호르몬의 분비를 인공적으로 촉진시켜 몇 배 혹은 몇십 배의 시신경 향상을 즉각적으로 도모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2603년까지 확인된 총 1621종의 부작용 발생 가능성이 있으며, 장기 사용 시 따르는 해명 불가의 위험성 때문에 성인 남성의 최대 사용시간은 7일 이내 80분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
에…? 홧김에 해본 소리였는데 정말 된다고? 음하! 호르몬 분비 어쩌고는 뭔 소린지 잘 모르겠고 엄청난 수치의 부작용 위험이라던가 사용 시간 제한이 무지 짧은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여간 된다니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대교의 실제 시합 봐야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동안 가상 공간에서 무식하게(?) 연속으로 가상 대결을 지켜보며 안목 기르기 훈련만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좋아, 당장 시행하고, 말 나온 김에 그것도 아예 스크린 메뉴에 추가해 줄래?”
[ 시행하겠습니다. 그러나 시행 후 반드시 부작용에 대비해 주십시오. 대표적인 예상 현상은 현기증, 환각, 구토, 전신무기력…… ]
제기랄! 끝까지 겁주는구만. 그러나 소년 소녀 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는 저 두 고수의 대결을 놓칠 수는 없지.
“언능 시행이나 해, 임마.”
음…? 어… 우으… 이, 이거… 이게 호르몬 분비가 촉진되는 느낌인가…? 허… 기분 꽤나 이상해지는… 갑자기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몽롱한… 오옷-! 보인다, 보여! 마침 모용란은 자신을 찔러오는 사영의 검을 옆으로 쳐내며 뒤쪽으로 크게 도약해 물러나고 있었다. 이어 자신의 뒤쪽에 위치해 있던 돛대를 돌아보지도 않고 정확히 밟고 사영의 머리 위 몇 미터 정도로 솟아오르는 저 동작… 거리를 둔다? 무언가 큰 기술을 쓰려나?
“상소검우(爽梳劍雨)!”
우뚝 선 사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모용란의 일성과 함께 그녀의 검 끝은 사영의 머리 위 허공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려지는 원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공기가 아래로 밀려나며 갈갈이 찢겨지는 느낌! 검기… 검기가 정말 비처럼 사영과 그 주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큰일이다! 무대협의 위기다!”
그 짧은 틈에 용케 끼어드는 구경꾼의 일갈이 있었다. 그러나 사영은 생각보다 여유 있는 동작으로 자신의 검을 머리 위에서 옆으로 누인 채 그 무수하게 쏟아지는 검기를 검의 옆면으로 막아내기 시작했다. 말이 쉬워 그냥 막는다고는 했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송곳 같은 검기를 4-5cm 정도 폭의 면으로 모조리 막아내다니…
비결은 모용란의 검 끝이 그리는 원을 따라서 검을 돌리는 것인 듯한데… 음? 그보다 사영의 다음 동작이 이상한 걸? 정작 난해한 검기들은 다 막아 내 놓고는, 그에 비하면 오히려 막기 수월한 속도로 내려꽂히는 모용란의 검 자체는 피하는 거지? 마치 모용란의 검과 자신의 검이 부딪히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보이는 걸?
어쨌거나 재빨리 뒤로 물러나는 사영이 있던 자리에 착지… 아니, 착지와 동시에 모용란의 신형은 사영을 향해 쏘아졌고, 그녀의 검 끝 또한 자석처럼 사영을 따라붙고 있었다. 목 줄기, 아니 그건 허초(虛招)? 짧게 끊어 찌르는 검이 연속으로 어깨 아니 가슴, 다시 어깨로…
하핫-! 이거야 원. ‘시청각 하이퍼 터보 모드’로 업그레이드된 시력으로 봐도 정신이 없네 그려? 아, 그나저나 내가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후부터 계속 밀리기만 하던 사영이 결국 뱃전으로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더 밀리면 위험… 응? 뭐, 뭐야!
“위험해-!”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내 고함 소리! 제기랄! 늦었다. 어디선가 쏜살같이 날아온 암기를 막느라 모용란의 검에 가슴 한복판을 찔린 사영의 몸이 갑판 바깥으로 날아가 버리고 있었다. 이, 썅-!
“안돼~!”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그쪽으로 달려나가는 내 눈에… 모용란의 행동은 지금까지보다 더 느리게 슬로우로 보여지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달려나가 오른손에 든 검을 뱃전에 박고는 상체와 왼손을 갑판 밖으로 길게 뻗었다. 그 정도로는 강물에 떨어질 사영과의 거리를 채울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왼손에 자신의 검 집을 들고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 사영이 손을 내밀어 간신히 그녀의 검 집 끝을 잡았다. 모용란은 그대로 자신의 상체와 팔을 잡아당겼고, 사영은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게 갑판으로 복귀하여 착지한다. 후우~ 빌어먹을, 간 떨어질 뻔했다. 근데… 윽! 뭐, 뭐지? 나 방금 갑자기 머리 속이 띠잉-하고 울렸다. 으… 이거 설마 벌써 부작용이 발생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냐?”
“어떤 비열한 자가 대협께 암기를 쓴 거냐?”
“음혼귀모! 음혼귀모닷!”
그래도 보는 눈들은 있는지 갑판 위의 사내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술렁이고 있었다. 선실 입구 계단 아래에서 갑판까지 올라온 상태인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선실의 지붕 위에 치렁치렁한 분홍빛 옷자락을 날리며 서 있는 삼십 대 정도의, 아니 그렇게 보이는 한 미모의 여자가 서 있었다. 서양 모델을 연상케 하는 늘씬한 키와 풍성한 몸매가 날리는 옷자락 사이로 노골적으로 드러난, 에로틱 무협 만화 표지를 장식한 캐릭터를 보는 듯한 여자였다. 쳇! 나도 쌈 구경하느라 깜박했군. 아까 그 재수 없는 웃음소리의 주인공도 이 배에 타고 있다는 걸 말이다.
“소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우린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여자의 음성에는 매우 느끼한(보통은 색정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감이 섞여 있었고, 역시… 재수 없었다.
“흥! 내가 싸우는 시간과 장소는 내가 정해! 만약 또 한 번 이런 일이 있으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내 손으로 죽일 거야!”
모용란의 대꾸는 한패거리라는 생각이 안 들 만큼 냉랭했으나 음혼귀모는 개의치 않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어머~ 그렇게 화내지 말고, 저기나 보고 그런 소리를 하도록 해.”
음혼귀모가 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의 강물 위에는 몇 척의 작은 나룻배들이 떠 있었고, 배마다 몇 명의 무사들이 타고 있다. 열심히 노를 저어 이리로 오고 있는 배 중에서 선두에… 응? 저 친구가 왜 저기 타 있는 거지? 몽몽이 아직 시청각 하이퍼 터보 모드를 끄지 않았는지 꽤 먼 거리 떨어진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비교적 잘 보였는데, 선두 배에 아까 선창에서 내 말고삐를 잡아주었던 구레나룻 청년이 타고 있던 것이다.
“설마… 소매는 여기서 또 소매의 옛 식구들과 만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옛 식구…? 저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누가 누구의 식구들이라는 거지?”
매우 낮으면서도 서늘한 살기가 느껴지는 모용란의 반문이었다.
“아, 미안, 미안. 내가 말을 실수했어. 어쨌든… 우리가 지금 그리 여유 있는 처지가 못된다는 건 알겠지?”
느긋한 태도였던 음혼귀모도 이때는 왠지 움찔하는 기색이더니 조금 어색한 음성으로 얼버무린다. 동료인지 어쩐지 몰라도 모용란이 무공 짱인 건 확실한 모양이고, 그리고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건 아까 만났던 구레나룻 청년이 모용세가의 제자라는 것이다. 18년 전 모용란이 패륜의 죄를 저지른 그녀의 본가, 모용세가.
“좋아. 여기 내가 맡을 테니 저들을 따돌리기나 해.”
모용란은 선배 격인 음혼귀모에게 명령조로 말하고는 사영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어떤가, 그대. 지금 승부를 계속하겠소?”
“음… 나는 이미 당신의 검에 부상을 당했고, 보아하니 당신도 일이 생긴 모양이니……”
상의 위로 피가 배어나고 있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입을 연 사영의 말을 끊은 것은 엉뚱한 사내들이었다.
“대협! 부디 저 요녀들을 막아 주시오.”
“그렇소. 대협께서 모살부취를 치신다면 우리도 돕겠소이다.”
“저 살인 요녀들의 무림 공적이니, 우리도 힘을 보태겠소.”
얼핏 봐도 사파나 마파의 인물 같은 자들도 함께 나서서 설치는 걸 보니 비인사기에 대한 강호인들의 인식을 새삼 알만하군 그래. 하지만… 난 웬지 저 모용란만은 그런 파렴치한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흥-! 시끄럽게 짖어대지 말고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들은 나서라!”
역시…! 진짜 악당이면 말할 것도 없이 그냥 달려들어 죽여 버릴 테고, 그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저 여자는 먼저 경고를 하는군. 훗-! 갑판 위의 모든 사내들은 한 번 찐하게 당해서 그런지 그녀의 말에 섣불리 대꾸를 못하며 하나같이 사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때, 나에게는 몽몽의 경고가 들려왔다.
[주인님 신체의 호르몬 분비를 중지했습니다. 호르몬 비율의 정상화 작업을 시행하겠습니다. 주인님은 최소 70분 동안은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비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어, 그래. 부작용이라… 흐음…! 갑자기 잘 보이던 것들이 스르르 멀어지며 흐려져서 그렇지 당장 크게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 걸? 그 동안 계속 가상 현실을 이용해서 조금 전까지의 그런 모드의 적응력도 좋아진 걸까? 뭐, 그럼 다행이고… 어쨌든 여기 갑판 위의 일방적인 패싸움(?)은 중지시켜 놓은 상태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인사기니 뭐니 해도 내가 정의의 용사도 아닌 바에야 굳이 해치울 마음도 없다. 얼마 전 밥 먹는 데 방해한 독수사갈 놈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만 두세요. 모두들.”
내가 입을 열자, 사영에게 몰려 있던 시선들이 모두 내게 우르르~!
“이미 선원들을 음혼귀모가 인질로 잡고 있어요. 우릴 더 이상 해치겠다면 몰라도 아니면 뜻에 따를 밖에요.”
“누, 누구시오. 소저는. 지, 지금 우리가 비인사기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안 따르면 어쩔 건데? 사영을 포함한 우리가 손 떼겠다고 하면 네가 해볼 껴?…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뭐라 다른 말로 설득을 하려고 나는 사람들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여러분들의 협의(俠義)는 충분히 알겠… 어-?”
뭐야~? 왜 갑자기 눈앞의 풍경이 고장난 TV 화면처럼 일렁이는 거지? 어, 어? 어어…? 왜 갑자기 사람들이… 동시에 아래로 가라앉는 거지? 에…? 뭐야? 나 지금 하늘을 보고 있잖아? 어, 어? 하늘이… 돈다…? 설마 나… 말하다말고 허수아비처럼 픽 쓰러진 건가? 아이고 쪽팔려라.
[위험했습니다. 주인님이 최소의 방어행동조차 없이 쓰러졌기 때문에 호위인이 없었다면 최악의 경우 충격에 의한 뇌손상의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몽몽… 부작용에 대한 대비를 좀 구체적으로 말해줬어야지. 이렇게 대책 없이 쓰러질 정도인 줄 내가 알았냐?
“아가씨! 어찌 된 겁니까! 어째서 갑자기……”
사영이 옆에서 외치는 소리는 대충 위와 같은 말들… 그리고 또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웅웅거리는 귀 울림 때문인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내용 파악이 잘 안된다. 뭐라 대꾸하려고 입을 열긴 했는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제대로 나오는 건지 어쩐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 괜찮아요. 하지만… 일단 선실로 좀……”
제기…! 내가 한말을 내가 듣지 못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경험이란 말인가. 빙글거리고 도는 풍경이 전체적으로 크게 움직이며 이동하는 느낌이 드는 것으로 보아 전달은 된 것 같은데… 에구, 정신없다. 눈감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슬며시 눈을 떠보면 선실 천장으로 여겨지는 것이 빙글빙글 돌거나 어떨 땐 전체적으로 아득해지며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가 잠시 지나면 또 보이고… 으으… 더 괴로운 건 그러면서도 잠이 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술을 오버해서 마셔 괴롭거나 가상 현실 후유증을 겪을 때는 한참 자고 일어나면 어느 정도 개운해지곤 했는데 이건… 으… 으윽! 아, 안돼… 여기서 오바이트를 하면 무슨 개망신… 으읍! 으… 오바이트는 간신히 참긴 했는데, 으으… 정말 미치겠다. 눈앞에 간혹 나타나서 날 내려다보다가 사라지곤 하는 저 흉측한 괴물들은 사영과 흑주인가…? 제기, 몽몽… 부작용 수준(?)이 이 정도라고 진작에… 으으… 따질 기운도 없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보이는 주변의 모든 것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을 깨닫고 비로소 안도하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내가 쓰러진 이후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만사가 귀찮고 그냥 잠들고만 싶었다.
[신체 내 호르몬 균형은 정상 치로 회복되었으나 예기치 않은 후유증을 대비하여 상비된 약제 중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의 복용을 권고합니다.]
…우황청심환? 뭐야, 내 약상자에 그런 것도 있었어?
웬지 무지하게 친근감이 느껴지는 약 이름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눈을 떴다.
대학입시 바로 전날 긴장 풀라고 어머니께서 사다 주셔서 먹었던 ##표 우황청심환이 갑자기 생각이 난다.
“사… 아니, 무대가. 내 약상자에서 우황청심환 하나 꺼내줘요.”
“아, 이제야 정신을 차리셨군요. 다행입니다.”
사영은 반가운 표정으로 약상자를 열고 뒤지더니, 이내 조그만 가죽 주머니 같은 곳에서 우황청심환을 꺼내 가지고 왔다.
흠… 이 향기, 그리고 독특한…
“…맛은 좀 다르군.”
“예?”
“아, 아니에요. 역시 우황청심환은 코리아 교의 것이 제일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호오- 그렇습니까? 확실히 들을 수록 신비로운 종파로군요.
약재에도 그렇게 독특한 기법을 간직하고 있었다니…
흠, 그보다 왜 갑자기 쓰러지신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설마, 저나 이 친구가 모르는 수법에 암습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아뇨. 내가 좀 무리했어요.
두 사람… 비인사기 중 최강이라는 모용란과 무대가의 대결을 자세히 보고 싶어서 시력을 돋우는 금침대법을 좀 오래 썼거든요.”
“이런~ 침으로 기력을 순간적으로 증폭시켜 주는 수법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제가 싸우는 것이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고 그런 무리한 일을 하셨습니까.”
훗! 변명한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미리 어렵게 준비하지 않고도 ‘내가 이러저러한 수법을 썼다’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그게 통한다는 자체가 흐뭇하다. 그간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느껴지는군.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모용란의 검에 찔렸잖아요. 괜찮아요?”
내 말에 사영은 한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거의 닿을 듯 모아 보이며 웃었다.
“그저 요정도였지요. 배에서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피한 덕이었지만.”
“훗-! 다행이네요. 그럼 지금 전체적인 상황은 어떻죠?”
“후후…! 아가씨가 때마침 실신하시는 덕분에 저는 아가씨를 모시느라 자연스럽게 싸움에서 벗어났고,
결국 싸움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알만하다. 사영 떴을 때만 뒤에서 큰 소리 쳤지, 지들끼리 모용란에게 덤벼봤자 개죽음이란 거 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배가 돛을 올리고 마침 바람이 잘 불어 주어서 추적하던 작은 배들은 현재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갑판 위는 현재 양측 섣불리 다 움직이지 않는 소강상태인데 문제는 음혼귀모가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 얌전히 물러나 줄지…
그게 남은 걱정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혼귀모… 그럼, 모용란은요? 그녀의 태도는 어때요?”
“글쎄요. 조금 전까지 뱃머리 부근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왔는데…
싸움 중에 동료에게 암습 당한 저를 도와 준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는 소문과 많이 다르고 음혼귀모처럼 음모를 꾸밀 인물은 아닌 듯 보입니다만,
역시 비인사기 중의 일인이니 방심할 수는 없겠지요.”
“알겠어요. 대충 그런 상황이군요.”
대화를 하다 보니 잠이 달아나서 나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선실을 스윽 훑어보았다.
아까의 소동이 있어서 그런지 선실 안은 반으로 딱 구분이 되어 한쪽엔 일반인 승객들이 오밀조밀 모여 앉아 있었고 우리 일행 쪽에는 덜렁 우리뿐 아무도 없었다.
특히 남자들은 무슨 죄인들 마냥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었고, 이 편을 보고 있던 몇몇도 내 시선이 가자 바로 눈을 깔아 버린다.
그 눈들의 대부분이 시퍼렇게 멍이 든 밤탱이인 걸 보니 음혼귀모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가 흑주에게 얻어터진 사람들인 모양이다.
음… 근데 나 맛이 가 있는 동안 지금처럼 계속 흑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나?
호오-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다리일 줄 알았더니 감촉이 의외로 부드러우면서도 쿠션 좋은 베개처럼 느낌이 좋은 것이 이대로 더 누워있고 싶기도 하지만…
역시 멀쩡한 의식으로 같은 남자의 무릎을 베고 있는 건 좀 그렇지?
에구, 일단 일어나서 컨디션을 좀 점검해야겠다.
“아가씨, 괜찮으시겠습니까?”
몸을 일으키는 날 부축하며 사영이 물었다.
나는 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몇 번 흔들어 본 다음 완전히 일어섰다.
“이젠 괜찮아요. 바깥에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
“그러시죠. 헌데… 얼굴을 가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나 지금 맨 얼굴이다. 음…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새삼 가릴 필요가 있을까?
처음 배에 탈 때 면포로 얼굴을 가리기로 한 건 물론 이명환 때와 같은 일을 방지하고자 하는 뜻과 혹시나 원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근데 그게 현실상 문제가 된 것이…
무협지에서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없었지만 무협 영화나 만화를 보면 천 쪼가리 하나 얼굴에 늘어트리고 있으면 날라 다니며 싸우고 별짓을 다해도 계속 얼굴이 가려지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아까 막상 면포를 구해 쓰고 있어보니 바람 불 때마다 면포가 획 뒤집어지면서 얼굴이 다 드러나는 건 물론이고,
그게 눈을 가려 걸어가다 자빠질 뻔하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 땐 결국 어색하게 면포 끝을 양손으로 붙들고 선실까지 들어 왔었지만, 그 후 사영과 모용란의 대결을 구경할 때는 자꾸 눈앞에서 펄럭이는 것이 거슬리고 짜증이 나서 그냥 확 떼어버렸던 것이다.
에이- 그래. 관두자. 이미 볼 놈 다 봤을 테니 그냥 나가자…
라는 결론을 내리고 과감하게 맨 얼굴로 선실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사영 말대로 뱃머리 부근에 홀로 앉아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모용란의 옆모습이었다.
거친 강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과 길고 짙은 머리결… 사영이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태인지였다.
18년 전의 천하제일미라… 아무리 망가졌어도 바탕은 어디 안 가는 건가?
“허어- 무대협! 아가씨께서 무사하신 듯 하니 다행입니다, 그려.”
뭐야, 분위기 깨는 이 걸죽한(?) 목소리는. 쳇! 소강 상태라고 하더니 모용란과 대치하느라 모두 반대편인 선실 입구 쪽에 모여 있었나 보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사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아까 살아남은 자들이 나와 사영 주위로 모여들더니만
사영과 나에게 인사하고 말을 거느라 난리가 아니었다.
본래는 ‘거참, 사람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쪽팔리게 왜 다 몰려와서 이래?’라고 하는 것이 내 타입이지만…
“제가 몸이 약해 그만 여러 군웅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시늉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닭살 내숭도 자꾸 하면 느는 것 같다.
“저어… 헌데 음혼귀모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내가 고개를 들고 묻자, 지들이 아팠던 것도 아니면서 웬지 붉어진 얼굴로 넋을 잃고 서 있던 이들이 모두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가 싶더니
모두 선실 위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여서 나는 무리로부터 벗어나 갑판 중앙 쪽으로 좀 더 걸어나가서 선실 지붕 위를 보았다.
“홋호호호~ 이건 또 누구실까? 아무래도 당금 강호의 다섯 미녀 중 한 분이신 것 같네요?”
또 들어도 역시 재수 없는 웃음소리다.
“그럴리가요. 전 이번에 처음으로 강호에 나왔는 걸요?”
어쨌든 일관된 포석은 깔아 두어야 할 것 같아 먼저 그렇게 대꾸해 주었다.
그런 내 말에 음혼귀모는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이더니 다시 예의 재수 없는 소리로 얼마간을 웃는다.
“…본녀는 오랜만에 강호에 돌아왔지만 실은 내키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하늘의 뜻을 알겠어요.”
“무슨… 말이죠?”
“아가씨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지금 대답은 음혼귀모가 한 것이 아니다. 소리가 들려온 것은 뱃머리 쪽의… 모용란이었다.
“음혼귀모는 같은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인… 아가씨는 불행히도 귀모의 눈에 들었네요.”
동정심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모용란의 말.
그럼 저 음혼귀모는 레, 레즈비언? 가만…?
그러고 보니 음혼귀모에 대한 자료에 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탐하는…’ 이라는 내용이 있었지?
우이쒸! 저거 지금 흑주더러 콱 없애버리라고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