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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08화


“음, 말씀하신 그녀라면 확실히 이 곳에 있는 것이 뜻밖이긴 하지만, 설마 눈치 없이 이런 곳에서 도련님을 아는 채 하겠습니까.”

그런…가? 하긴, 이화는 물론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인피면구를 알고 있지만, 그녀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비화곡 바깥에서 내 정체를 떠벌이진 않겠지? 게다가 눈치로 보아 사영은 이화의 이름을 들어보았다 뿐이지, 아직 이화와 나 사이에 벌어졌던 모종의 사건을 모르 는 것 같다. 하여간… 준 장인(?)하고 함께 다니려니까 여러 가지로 부담스럽군 그래.

음… 뜻밖의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내 입으로 비화곡 안에 있는 ‘소호루’를 들먹이는 등 필요 이상으로 버벅댄 것 같아 조금 민망해진 나는 애써 태도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그녀는 그럴 여자가 아니지. 하지만 지금 그녀를 호위하고 있는 자는… 그 자는 어쩌면 이 기회에 날 해치려 들지도 모를 위험한 인물이라 문제야.”

“설마… 그 곳에서 온 자가 어찌 도련님께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게, 그런 사연이 좀 있어.”

이화에게 목숨 걸고 있는 패권웅 왕정. 이화가 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다 하여 비화곡 안에서 가히 신이나 다름없는 위치의 곡주인 내게 게겼던 인물… 확실히 위험하긴 하다.

“큰일이군요. 지금 저 백룡군을 상대하고 있는 건 나중에 나타난 흑기룡 한 명… 주변의 나머지 고수들은 이미 우릴 보았을 터, 저 외길을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게 되면 일단 의심을 사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것도 그렇다. 만약의 가능성이긴 하지만 우리가 자신들을 피하는 거라 여긴다면… 제기, 무엇보다 지금은 ‘극악..’이 어딘가에서 은밀하게 이동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는 마당인 것이다.

“할 수 없군. 객점으로 들어가기로 해. 생각해 보니 그녀가 이런 곳에 나타난 정황 자체도 궁금… 쳇! 알아서 먼저 나오는군.”

내가 보았을 때 그녀도 이미 날 발견했던 건가? 문가에 홀연히 나타난 이화. 여전히 티 하나 없어 보이는 백의와 그에 못지않게 흰 얼굴의 그녀는 반가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고개만을 저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쳇! 저런 표정을 대하니 공연히 좀 전의 내 행동이 미안해지는 걸? 에효-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오- 소매가 여긴 웬일이오. 나 진유준은 진정 뜻밖이구려.”

내가 짐짓 인사를 건네며 내 본명이자 가명을 조금 강조해서 말하자 이화는 그제야 문득 정신을 차리는 것 같더니 비교적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있었다.

“…소매도 뜻밖입니다. 이런 곳에서 공자님과 재회라니, 필시 천신의 도움이 계셨던 모양입니다.”

천신…? 어지간히 할 일 없는 천신인가 보다. 이런 가능성 희박한 우연이나 꿰어 맞추고 있으니 말이다.

“반가움은 들어가서 나눕시다. 무림인들의 싸움이 자못 살벌하구려.”

암- 저런 자들이 우리에게 덤벼들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살벌하고 말고.

어쨌거나… 결국, 우리 일행은 객점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와 이화는 한 탁자에 마주 앉았고 그녀의 옆 탁자에는 전 하오문주, 현 보디가드 왕정과 그 일파 네 명… 가만히 보면 그들도 모두 낯이 익다.

“재차 강조하지만, 당신들은 어디서든 내 명령 없이 경거망동할 생각하지 말아요.”

이화는 낮고 엄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왕정은 매우 도발적인 시선으로 날 꼬나보고 있었다. 제기, 대체 이 인간은 또 왜 데리고 나온 거야?

“아가씨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까지 서 있던 사영이 슬며시 왕정의 바로 옆 탁자에 앉으며 한 말이었다.

“누구든 경거망동할 틈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으니 까요.”

예의 잔잔한 미소가 어린 표정에 사근사근한 음성으로 살벌한 의미의 말을 하는 사영. 그런 사영에게 시선을 돌렸던 왕정은 이내 알아서 눈부터 깔았다. 후 후~ 짜식, 눈치는 있어 가지고……

“뭐, 그나저나 소매는 여기 웬일이오. 매우 엄격한 집안이라 과년한 처자의 외출 허락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저희 집안이 비록 엄하다고는 하나, 소매의 정혼자가 워낙에 엄청난 권력자이신지라. 그 분을 만나러 간다 하면 누구도 감히 막아서질 못한답니다.”

윽-! 이 것이… 어쩐지 대답하기 전에 그때까지 얌전하던 표정이 사라지며 새액- 야시시한 미소를 떠올린다 싶었다.

“아, 이제 보니 못 본 사이 소매는 정혼을 했구려. 그것 참 축하할 일이구려.”

내 반격에 이화는 별안간 서글픈 표정이 되는 듯 하더니 깊은 한숨을 몰아냈다.

“아- 너무 하시네요. 비록 집안끼리의 정략적인 정혼이라지만 끝내 절 타인 취급하시렵니까?”

으… 이봐. 결국 그럴 거야? 에구, 사영은 또 왜 그런 야릇한 표정으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괜히 불안하게 스리……

“커험! 소매,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소.”

실은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고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화가 지난번처럼 소호루에서처럼 막나갈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그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세계로 와서 지금까지 내 뜻대로 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건 거의 사영과 이화 이 두 사람과 함께 있을 때였다.

이거… 웬지 점점 더 불안해지는 걸?

“공자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막막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공교롭게 만나게 되다니… 역시 공자님과 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인가 봅니다.”

갈수록…? 제기, 도대체 가경촌 담당자가 누구야? 어떤 띨한 인간이기에 이 중대한 시기에 곡주 찾아간다는 여자를 곡 밖으로 내보내?

아무리 곡주인 원판의 옛 애인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말도 안돼는 일 처리를… 음… 음…? 그래, 역시 말도 안되지…? 흠, 사건 몇 개가 겹쳤다고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나보다. 이화의 단순한 말장난 몇 마디에 넘어갔었다니 말이다.

“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소매의 집안에서 그런 이유로 장기간 외출을 허락하진 않았을 것 같소. 하필 이런 때 밖에 나온 이유를 말해주지 않겠소? 경우에 따라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오.”

매우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내가 여유로운 태도로 묻자 이화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역시 소매의 잔머리가 통하지 않는 분이군요. 그래요. 실은… 오래 전에 가출한 저의 친부를 찾는 것, 그리고 그 분을 집안으로 돌아오시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나왔답니다.”

“설마 소매의… 현재 집으로 말이오?”

내가 조금 놀라서 묻자 이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봐라? 이화의 친아버지라면 ‘화산일검(華山 一劍) 손한성’이란 인물이다. 그의 사부이자 장인인 악 정보가 데릴사위인 그에게 직접 그런 명호를 지어 주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화산파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인된 차기 장문인이자 화산제일검이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망가진 것은 당근, 원판 때문이다. 6년 전 원판에 의해 아내와 딸까지 잃게 된 그는 매일같이 술에 절어 폐인처럼 지내다 결국에는 화산파로부터 파문을 당함과 동시에 어디론가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저속하게 표현하면 인생 조졌다는 얘기다.

“소매의 친부를 집으로 불러들인다…? 그건 도대체……”

그가 지금 다시 나타났다는 것 자체는 어찌 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의 철천지 웬수 극악서생이 곡 밖으로 떴으니 말이다.

그런 그를 오히려 웬수의 품안인 비화곡으로 끌어들이겠다고? 얘가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비록 아버지께서 과거 공자님과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고는 하나, 유일한 혈육인 소매가 나서 설득한다면 반드시 우리 사이를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뭐시라고라고라?

“지, 지금 그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시오?”

“공자님을 따르는 소매의 진심을 아시게 되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요.”

어처구니가 없어 뭐라 대꾸할 말을 못 찾고 있는 나를 이화는 매우 애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냥 나 만나러 나왔다는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잖아?

세상에! 뭐 이딴 계집애가 다 있냐? 아내와 딸을 겁탈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날려 버린 사람에게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원수를 딸의 짝으로 인정하라고 조르겠다고?

그것도 그 겁탈 당했던 딸인 네가 6년만에 나타나서?

이건 도대체 두뇌 구조가 어떻게 구성된 계집애 길래 저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적어도, 혹시 아버지와 공자께서 만나게 되면 싸움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적어도,가 아니라 그게 다라고 해도 비상식적인 거잖아 임마.

원판을 사랑하게 된 상황도 어이가 없는데 거기다 그런 반인륜적이며 엽기무쌍한 발상을 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겠다고 나서?

으…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이렇게 섬뜩하게 여겨지긴 처음인 것 같다.

머리 속으로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스쳐갔는데, 영화 ‘미져리’에서 여주인공 ‘애니’가 소설가인 남자 주인공의 다리뼈를 아작내며 사랑 운운하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이화 역시 그런 극단적인 방향으로 재능(?)이 넘치는 여자인 것 같은데… 에구, 누가 재 좀 말려 줬으면 좋겠다.

“도련님, 아무래도 바깥의 싸움이 끝난 것 같습니다.”

끝까지 구경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사영의 말이었다. 어쨌건 마침 잘 됐군.

“아, 그래? 길이 열리면 우리도 다시 출발하도록 하지.”

나는 혈월에게는 객점 주인을 통해 마차를 알아보라고 하고 그의 부하 한 명에게는 바깥의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해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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