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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4화


정파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소림의 성승과 베일에 쌓인 암살 집단 혈의문의 문주… 이 두 극과 극의 신분을 한 사람에게 몰아서 지목한 내 말에 혈월과 그 수하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들이었다.

배신자 사영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기색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소이까, 곡주?”

“전부터 대충은… 애초에 혈의문의 특급 살수인 당신이 비화곡에 투신한 것 자체가 위장이라는 것도… 뭐, 솔직히 혈의문의 암호문 ‘꽃이 피는 순간 지는 장소’가 이곳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말이야.”

사영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그렇다면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이미 나와 내 진짜 주인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내 손에 당신의 생명을 맡겨 왔단 말이오?”

“당신이 당신의 의지로 배신을 했듯 나는 내 의지로 당신을 믿었을 뿐……”

아~ 쓰바, 조금 흥분되니까 나도 모르게 뭔가 있어 보이는 대사가 술술 나온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당할 때 당하는 한이 있어도 비화곡주답게 멋있는 척이라도 하자. 부루터스, 너마저~ 음, 이건 아닌가?

나와 사영의 대화를 듣고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이 된 혈월들이 조금 전부터 검을 뽑아 들고 사영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혈월들은 쭈뼛거리며 나와 사영의 눈치를 살폈을 뿐 섣불리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영은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태연히 마차에서 내리더니, 혈의문주가 서 있는 쪽의 꽃밭으로 걸어가 그 앞에 서서 다시 이쪽으로 몸을 향했다.

“헌데, 그거 아시오? 당신… 정말 못된 아버지요.”

“훗…! 대교와 아이들은… 내 욕심이었소. 맡은 바 임무가 너무 오랜 기간을 요구한 터라 잠시 꿈을 꾸며 쉬었던 게요.”

제기, 감정의 수습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을까? 사영은 이미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아직도 실감하기는 어려웠지만… 저 사영은 말하자면, 자그마치 20년 동안의 세월을 비화곡에 암약해온 혈의문의 비화곡파 고정간첩이다. 그런 자에게 혈육의 정을 기대했던 것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 정도로 가볍게 자신의 친딸들, 대교 자매들을 무시할 수 있는 사영을 보니 새삼 기분이 나빠진다.

조금 전 사영에게는 내가 그의 정체와 음모를 아주 오래 전부터 모두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지만, 물론 내가 제대로 눈치 챈 건 얼마 안 되는… 엊저녁이다.

비화곡에서 출발에 앞서 일정을 상의할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내가 중요한 것만 체크하고 구체적인 진행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로 사영에게 일임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비교적 안심하고 코스와 시간을 조작했을 것이다.

체크된 사영의 일정 조작 중 첫 번째는 이명환과 류혼 두 청년과의 인연으로 시간을 낭비했던 일이다. 그동안 내가 알게 된 일류 살수의 필수 조건 중 하나는 치밀한 관찰력이다. 그런데도 사영 정도의 특급 살수가 무림인과 황실인을 금방 구분하지 못했다고 하며 나와 이명환의 소개팅(?) 자리까지 유도했던 것이다.

뭐… 그 부분은 ‘실수였다’라는 간단한 말로도 변명이 되는, 소위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경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장한 나의 활약(?)으로 그들을 따돌린 후 도착한 신수성녀와의 도킹 지점… 그곳에서의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몽몽의 계산에 의하면, 이명환과 류혼을 따돌린 마을에서 우리가 이동한 속도와 경로로는 그 시간에 본래 예정한 장소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 도착한 다른 마을로부터 역으로 거리 계산을 해봐도 마찬가지의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다.

즉, 내가 처음 신수성녀의 배를 놓쳤다고 생각했던 나루터는 도킹 지점도, 월영당 지부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냥 평범한 나루터였거나 내가 나설 것을 대비해 혈의문의 인물들이 우리 월영당 요원으로 변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조작 의혹이 있거나 혹은 증거가 뚜렷한 상황이 꽤 되는데, 어쩌면 내가 아닌 원판을 대상으로 그런 사기를 쳤다고 해도 먹혔을지 모른다.

과학적인 첨단 측정 장비 없이 만들어진 이 시대 지도란 것이 사실 상당히 부실한 편이고, 혼자서 지 발로 강호에 나다닌 적이 없을 원판이 거리 감각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사영의 실수라면, 현재의 ‘극악서생’이 평소 이동 속도와 거리 정도는 기본으로 체크해 두었다가 지도상의 거리와 실제 거리의 오차를 계산해 내는 미래 로봇을 차고 다니는 놈이라는 것, 그리고 덤으로 과거 원판의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가장 최근의 월영당 지부 위치 같은 것도 달달 외우고 있다는 걸 몰랐던 점이랄까?

뭐…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사영의 음모를 뒤늦게나마 깨달은 나였지만, 다음으로 떠오른 의문은 ‘대체 왜…?’였다. 내 생각에는 도대체 현재의 사영에게는 배신 때릴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자그마치 20년 정도나 현역에서 은퇴했던 인물에게 다른 곳도 아니고 강호 최강의 조폭 연합을 적으로 돌릴 이유가 갑자기 생길 수 있을까? 그것도 큰 딸내미는 그 짱과 삐리리~ 모종의 관계가 성립되어 자신도 앞으로 떵떵거리고 살 수 있게 된 이 상황에서…? 그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그래서 나는 원인을 좀 더 먼 시간대부터 더듬어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가 본래의 신분을 버리고 비화곡에 들어온 멀고 먼 시점부터 의심을 하다 보니, 그럼 왜 하필 지금 움직이기 시작했는가를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20년 후를 예측하고 세운 음모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고… 그렇다면 최근 비화곡에 발생한 사건들 중 사영과 연관지을 수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를 따져 보았다.

장명…? 물론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복잡한 음모의 공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그와 마누라 구월화를 생각해 보면, 사영과 그들이 지금 접선하여 무언가를 추진하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일선녀 고화옥…? 말이 해남파지 화천루 출신이 분명한 그녀이다. 역사상 화천루가 뒷 공작으로 어딜 어쨌다는 기록은 없었다. 물론… 지난 역사가 앞으로도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거겠지만, 역시 사영과 연관짓기는 힘들 것 같았다.

성승…? 등장한 시기와 사영과의 인연으로 보면 가장 유력하기는 했지만, 정파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고매한 인물이 사마외도를 상대로 같은 방식을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밖에도 주변의 별의별 인물들을 다 의심하고 따져 보았지만 딱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의심하자면 다 의심스럽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또 전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시대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로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들도 수두룩 할 텐데, 그런 한정된 데이터로 추리를 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하는 걸 포기하려던 순간도 있었다.

뭐… 결국 내가 사영의 배후 인물로 가장 엉뚱하다고 여겨지는 성승을 짚어낸 것은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번 일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데이터를 발견했던 것은 바로 사영의 큰 딸 대교 때문이었다.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지하 성지를 뒤지고 다닐 때, 나는 역대 비화곡주들이 안치된 장소를 발견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무협지 고정 패턴인 ‘전설적인 고수가 자기 무덤에 남긴 무공서’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곳도 세밀하게 조사했었다.

결국 찾아낸 책자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무공서가 아니라 무슨 일기장 같은 거였다고 할까? 생전에 자기가 어떤 고수들을 상대했으며 이러저러해서 사뿐히 즈려 밟아 주었다…라는 기록이었다.

그런 기록을 남긴 곡주들도 근래 몇 명뿐이어서 나중에 생긴 전통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하여간 그때 대교에게 줄 무공서나 무기에만 관심이 있던 나는 원판 사부의 기록만 대충 훑어본 후 거길 나왔었다.

싸움에 관한 묘사가 구체적으로 누굴 무슨 초식으로 어떻게 이겼다고 나온 것이 아니어서 대교에게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제껏 무시한 채 잊고 있었던 그 기록에 바로 원판 사부와 성승과의 오랜 인연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기록만으로 보면 원판 사부와 적이었는지 친구였는지 모를 인물… 그 인물이 지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지금까지 만난 적들 중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물을 지금부터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이 되는… 아니, 솔직히 X나게 무섭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00살도 훨씬 넘은 노친네 하나 때문에 앞날이 창창히 남은 내가 제대 후 집에 가보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교를 다시 보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나기도 한다.

두 번째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며, 나는 일단 그동안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신경질적인 태도로 벗어 들었다.

“거기 재수 없는 복면 노인…! 당신도 그 복면 벗고 얘기나 좀 해보쇼. 소림사에 들어오는 시주가 줄어들기라도 했소? 부업으로 살수 일을 해서 벌어먹어야 할 만큼?”

비아냥거려 봤지만 묵묵히 팔짱을 낀 자세로 이 편을 보고 있는 혈의문주의 표정을 알 수가 없어 갑갑했다.

저 인간… 난 인피면구 벗었는데 지는 계속 복면을 안 벗고 있네?

“그 얼굴… 계속 가리고 있을 않을 참이오? 달마 대사의 재래라고까지 일컬어지며 그 무공과 사상의 심오함이 감히 가늠할 엄두도 낼 수 없다고 알려진 당신… 과연 그 명성대로 불성(佛性)과 살성(殺性)을 동시에 깨우친 이의 낯짝을 확실히 봐두고 싶소이다.”

“…혓바닥을 놀리는 재주밖에 없는 어린것이… 네가 무엇을 아느냐. 넌 사천대령신군의 새끼 손가락 하나라도 얻었더냐?”

비로소 입을 연 혈의승(혈의문주+성승).

쳇-! 음성은 확실히 지난번에 들은 성승의 음성이 맞는데도 말투나 분위기 때문인지 전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다. 게다가 지 정체도 다 뽀록난 판에 장난치나, 새끼손가락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 모습을 하고도 선문답… 아니, 말장난을 치고 싶으시오, 혈,의,문,주?”

“선문답이 무엇이고 말장난이 무엇이냐. 너는 네 존재가 곧 말장난임을 아느냐?”

제기, 또 여유 있게 헛소리하는 것도 그렇고 몽몽이 제공하는 살기 그래프가 거의 변동을 보이지 않는 거 보니까 어지간한 수준의 ‘비꼼’으로는 효과보기가 어려운 상대인 것 같다.

“넌 네 사부의 허망한 꿈… 그럼에도 지금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 닮았다. 역시 그를 닮았어.”

제기, 자꾸 애매모호한 말투를 쓰니까 지난번에 저 인간하고 나눈 선문답 분석해보느라 머리 빠개지는 줄 알았던 거 생각나면서 열 받는다.

그냥 노골적으로 아픈 곳을 콱 찔러 버리고 싶어진다.

“헛소리 그만 하시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이거 아닌가?”

난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한 손을 뻗어들고 그를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내 사부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패배만을 맛보았어. 설욕의 대상이 죽어 없어졌다고 하여 그 후계자에게 살풀이하겠다는 거 아냐, 지금!”

이번엔 반응이… 오, 있다.

아니, 있었다고 해야 하나? 불쑥 올라가던 살기 그래프가 재빨리 다시 내려가 버렸다.

“이곳이 그 장소겠지? 당신이 언제나 내 사부에게 패해 추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던 장소가 말야.”

살기 그래프 재 상승.

이번엔 다시 내려가더라도 상당히 완만하게 내려간다.

음, 한 번 찍어 봤는데 맞았나 보다.

내 업그레이드 된 기억력으로 떠올리는 대 성공한 원판 사부의 그 기록에도 사실 혈의승과 맞짱 뜬 장소나 상황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일한 라이벌 고수와의 일전을 기술한 부분에는 항상 사방에 아름다운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이 묘사되곤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화곡 역사상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던 원판 사부는 같은 상대를 또 이렇게 표현했었다.

‘일대일 승부가 두렵고도 즐거운, 천하에서 유일한 인물. 그는 무(武)의 길을 걷는 나의 고독함을 염려한 하늘의 선물이었다.’

“사부는 비록 사마외도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당신을 필생의 적수로써 인정하고 존중했었어. 헌데 잘난 정파의 정신적인 지주라는 당신은 밤과 낮이 다른 이중 인격자에, 정당한 승부의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고 원한을 품을 정도로 저열한 인간이었단 말인가?”

살기 그래프 급상승, 그리고 고정. 훗~! 내친김에 한 번 더 쏘아준 것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혈의승이 몽몽의 그래프를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살기를 전신에서 뿜어내며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나와 네 사부에 대해 무얼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무얼 얼마만큼 안다고 감히……”

낮고 무겁게 깔려오는 음성과 함께 걸어오는 혈의승 주변의 꽃들이 사방으로 밀려나며 형형색색의 이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 소위 내공의 무서운 분출이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신비롭고 멋진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멋있는 건 멋있는 건데… 근데 나 지금 뭐 한 거지?

[현재 주인님에게 주어진 전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주인님의 상황 대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몽몽아, 니가 말 안 해도 깨달은 참이다.

내가 미쳤지, 본래는 여기서 예상대로의 상황을 만나게 되면 시간도 끌 겸 대화를 길게 늘일 생각이었는데 공연히 나도 감정대로 지껄이다가 너무 빨리 저 인간을 빡 돌게 하고 말았다.

에구구~ 어쩐다?
잘못 읽으면 죽고 못사는 친구에 대해 쓴 글로 오해될 만도 한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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