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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7화


저 여자, 홍초명은 오늘 오전에 현재 내 몸의 상태를 직접 진찰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무슨 꿍꿍이로 혼자 게기는 건지 다소 경계는 하겠지만 약간의 속임수와 몽몽을 이용한 작전이라면 한 번 해 볼 만한 게임인… 응……?

“뭐냐, 명령 못 들었어? 비켜.”

내가 몇 걸음 나가기도 전에 앞을 가로막고 선 흑주는 거듭되는 내 말에도 아랑곳없이 고개만을 가로 저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양손으로 흑주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이봐 난 죽으러 가는 거 아냐. 날 믿고… 기다렸다가 상황이 반전되면 넌 즉시 저 늙은이를 쳐.”

가까이 오게 한 흑주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그렇게 속삭인 다음에 녀석의 옆으로 돌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명색이 보디가드인데 날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기가 죽어있는 걸까? 잠시 쥐었던 흑주의 어깨가 생각보다 작고 약한 느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자아~ 몽몽, 이제 너만 믿는……

[ 경고! 긴급 비상 경고입니다! ‘자살’은 일급 일탈 행위이며 ‘범죄’로 분류됩니다. ]

분위기 확 깨는 군. 이 자식아 같은 말이라도 자살이 뭐냐, 자살이.

[ 10분 전 보고 된 바와 같이 상대 여인의 전투력과 주인님의 전투력 비교 분석 결과 승률은 5% 이하입니다. 주인님의 요구대로 육체 기동 능력을 한계치까지 향상시켰을 경우에도 10% 이상의 승률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

“왜, 마이너스 승률은 아니고? 짜샤~! 너 아냐? 쌈은 꼭 확률대로 되는 게 아니라구.”

[ 저의 분석 결과는 전투 경험치를 포함한 복합 데이터 분석에 의해 도출된 것입니다. 현재 진행중인 행동을 중지하기 바랍니다. ]

“어허~ 니가 몰라서 그렇지. 나 원래 쌈은 좀 했던 사람이야~”

몽몽과 매우 진지한 작전 토의(?)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 사이 홍초명과의 거리 20여 미터, 그 뒤의 세 자매들이 묶여있는 기둥과는 23, 4미터 정도의 거리에 도달해 있었다.

[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생존 가능성이 없는 행동 결정을 이해할 수 없… 정정합니다. 낮은 확률이란 용어로 정정합니다. 확률 적용성의 최종 판단은 분명히 저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

몽몽이 말을 실수해 번복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나 나름대로 긴장을 푼답시고 몽몽의 말에 농담 위주로 반응해 주었더니 어째 녀석을 긴장시켜 버린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녀석, 초특급 미래 로봇씩이나 되어서 사람처럼 버벅대는 건 또 뭐냐.

“짜식. 실은 나도 정면으로 맞짱 뜰 생각 없어. 감마선 투시 기능은 지금 먼저 작동시키고, ‘신체 하이퍼 터보 모드’는 ‘전투 개시’라는 말을 신호로 시작한다. ‘전투 종료’ 전까지 내 다른 명령들도 최대한 즉시 실행한다. 알겠지?”

녀석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이 이제는 홍초명과 즉각적인 대결이 가능한 거리에 마주선 상황이 되었다.

난 우선 홍초명에게 예쁘게(?) 웃어 주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원판의 비정상적인 미모를 이용한 일명 ‘꽃미남 매력 어택’이었다.

[ …상대의 심장박동 및 신진대사의 일부 이상 징후가 감지됩니다. 다만 상대의 전투력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냥 한 번 해본 건데 그래도 효과가 없진 않은 모양이지?

“…좋군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남자를 베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정말 짜릿한 경험을 즐길 수 있겠어요.”

윽, 너도 여자 변태냐? 엄한 선제 공격(?)으로 상대의 투지 아니 ‘변태지’만 자극한 모양이다.

“더구나 수십만 사마외도의 정점에 서있는 남자라니… 분수에 맞지 않는 만찬이라 조금 부담스럽네요.”

“살수치고는 말 잘하네?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처럼 보여?”

“필시… 체하겠죠. 비화곡주라는 거물을 삼키기에 제 위장은 너무나 작은 관계로……”

“삼킬 수 있어도 문제지. 날 죽인다고 비화곡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잘난 혈의문이 과연 전체 비화곡을 감당할 수 있을까?”

“훗-! 협박이라면 방향이 틀리셨네요. 그런 건 문주님께 해보세요. 전 다만 죽이라면 죽이는 살인의 도구일 뿐… 자, 죽을 준비는 되셨나요?”

“아니, 준비하게 잠깐 기다려 줘.”

“……?”

시작이 원래 이상해서 그런지, 저 여자는 지금 자신이 내 페이스에 말려들어 살수답지 않은 언행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이 때 얼른 선수치자.

“알다시피 난 무공이리곤 전혀 익히지 못했어. 그러니… 이 정도 핸디캡은 인정해 주겠지?”

“행디… 무슨……?”

홍초명이 생소한 용어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나는 재빨리 품에서 수류탄 정도 크기의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젯밤에 오늘을 대비해 준비한 것 중 하나인 ‘연막탄(煙幕彈, 우리 시대와 용도와 명칭이 같다.)’을 먼저 홍초명과 나 사이의 땅바닥에 던졌다.

콰앙~!

연막탄치고는 꽤 큰 폭음과 함께 흰 연기가 순식간에 일대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나는 미리 찍어 놓았던 장소로 연속해서 연막탄 몇 개를 더 던졌다. 계획했던 대로의 ‘배틀 존’ 완성!

“몽몽! 전투개시!”

나는 감마선 투시 영상으로 보이는 짙은 연막 너머의 홍초명을 노려보며 손에 있던 검을 입에 문 다음 상의를 벗어들었다.

“인질이다! 막아라!”

앞이 보이지 않자 당황한 태도로 사방을 살피고 있던 홍초명이 혈의승의 훈수(?)에 서둘러 세 자매가 묶여있는 기둥 쪽으로 몸을 트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달렸다. 몽몽에 의해 ‘오버웍(overwork)’을 시작한 원판의 신체 엔진(?)은 내 기대 이상이었다. 얼굴에 부딪쳐 오는 세찬 바람, 탄력 있게 발끝에 걸리는 땅바닥의 감촉, 간만에 느껴보는 이 속도감…! 순식간에 가까워진 홍초명이 재차 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죽엇-!”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그녀의 검이 날 향해 휘둘러져왔다. 상의를 양손에 펼쳐 든 채 달려나가던 나는 순간적으로 상의를 놓으며 몸을 숙였다. 내 상의를 가르며 머리 위를 스친 검날이 옆으로 멀어져 갔고 난 달려간 탄력 그대로 홍초명의 복부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홍초명은 헛-!하는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고 나는 머리의 둔중한 충격에 못 이겨 간신히 균형을 잡아야 했다. 제기, 이어서 끌어안고 뒹굴며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빌어먹을, 정말 이 짓까지 해야 하나? 미치겠다!

“우웃! 이- 이익!”

분노에 못 이긴 소리와 함께 허우적대기 시작한 홍초명을 보는 내 심정은 정말 더러웠다. 미안해! 나도 원래 이렇게 싸우는 놈 아니야. 당신 눈에 흙을 뿌려가면서 싸울 생각은 정말이지 없었단 말이야!

그렇게 속으로 외치면서도 나의 몸은 어느새 본능적으로 입에 물고 있던 검을 손에 쥐고 치켜든 상태였다. 아주 순간적인 망설임이 한 차례 지나가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목 줄기를 내리쳤다. …제기,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팔목이 다 지끈거린다. 팔목 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난 결과적으로 내 영혼인지 아니면 원판의 육체에 담긴 건지 모를 살기의 본능을 이겼다. 칼등으로 가격된 것 때문만인지 아니면 그 순간의 정신적인 충격(당연히 목이 베어 진다고 생각했을 테니.)이 컸던 건지 힘없이 쓰러져 있는 홍초명을 내려다보던 내 입에서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돌아보니 아직 자욱한 상태인 안개 너머의 다른 싸움도 치열했다. 미리 지시해 놓지는 않았지만 내가 연막탄을 쓰는 시점에서 사영과 흑주, 혈월 등의 연합군(?)이 눈치 빠르게 혈의승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자~ 온갖 반칙과 더티 플레이를 하긴 했지만 하여간 내가 이겼으니 소교와 동생들의 혈도 좀 풀어 주고 이 아이들까지 가세한 연합군과 한 판 떠보시구려…라고 혈의승에게 제안할 분위기는 아니지?

천하의 혈의승을 상대한다 해서 쉽게 당할 사영과 흑주는 아니지만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우선 세 자매 모두 묶인 팔을 풀어주고… 제기, 칼로 끊자. 뭐 이리 단단히 묶어 놨어?

의식은 깨어있는데 몸을 마비시켜 식물인간처럼 만든다는 마혈(痲穴)과 말을 못하게 하는 아혈(啞穴)을 동시에 제압된 상태인 자매들은 이미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아직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에구, 불쌍한 것들 주인 잘 못 만난 죄로 어린 것들이 이런 고생이라니……

“괜찮니? 조금만 더 참아. 내가 곧 혈도를 풀어 줄게.”

세 명을 나란히 앉힌 자세로 만든 나는 우선 소교의 등 뒤로 돌아가 해혈을 시작했다. 아니 지시했다. 몽몽의 촉수(이제는 봐도 별로 안 징그럽다.)가 소교의 몸으로 파고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약간 긴장이 풀린 나는 새삼 눈앞의 숫자에 주목했다.

45, 46, 47……

몽몽이 제공하는 이 카운터 숫자는 하이퍼 터보 모드의 사용 시간을 의미한다. 하도 집중해서 그런가 엄청 긴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 1분이 채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암튼, 엽기적일 것이 분명한 후유증을 생각했을 때 최대한 사용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겠지?

“몽몽, 이제 전투 종……”

[ 주인님. 조금 전 쓰러졌던 ‘적’이 잃었던 의식을 되찾는 징후가 있습니다. ]

뭐… 시라… 고라고라고라~!

[ …전투 대상이었던 여성이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

아이고 이를 어째. 시선을 들어보니 소교의 어깨 너머로 홍초명이 비틀대며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X됐다.

[ 혈도 복구 작업을 중지하고 대비하시겠습니까? ]

“으… 빨리 소교나 살려 놔. 안개도 점점 걷혀가고… 난 이제 밑천 다 떨어졌어.”

[ 혈도 복구 완료까지 약 43초가 더 소요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 복구 완료 후 이 여성이 본래의 전투력을 회복하는 시간은 추정이 어렵습니다. ]

으… 이 상황에서 최소한 43초 이상을 버텨야 한다 이거지? 홍초명은 비틀대는 몸짓과 함께 일어난 다음에도 여전히 불안정해 보이는 걸음으로 이 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참이다. 처음 나와 싸우기 전과 달리 그야말로 악에 받힌 얼굴이었다. 이제는 산발이 된 머리도 그렇고… 불안정한 걸음걸이마저 무시무시하다. 마치 일본 공포 영화 ‘링’에 나오는 재수 없는 여자 귀신 ‘사다꼬’를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빌어먹을… 좀 전에 눈 딱 감고 그냥 죽일 걸 그랬나? 으…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는데… 그럼 몽몽 시켜서 혈도를 잡아 놓는 다거나… …응? 그, 그건…. 으으~ 으아아~ 뒤늦게 생각나니까 더 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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