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1부 – 118화


“고, 곡주…님……!”

응? 소교가 깨어났나? 아니, 말문이 트였나,가 맞나?

“…전… 아직… 운…신을 못… 곡주님… 어서 몸을…피 하십시…오.”

“그만, 더 이상 말하지마. …넌 빨리 회복하는 것에 만 집중해.”

혹시나 하고 기대했었지만 역시 몽몽의 진단에서 벗어나는 기적은 무리였나 보다.

“아-하핫! 깨어났군, 그래. 마무리가 너무 약했었나? 아, 아니 너무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는 말아 줘. 나도 웬만하면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었다구. 눈… 많이 아팠어?”

몇 미터 앞까지 다가 온 홍초명에게 어색하나마 일단 주절거리고 말을 걸어보았으나 그녀는 대꾸도 없이 그저 미간에 잔득 힘을 준 험한 인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짜고짜 덤벼들지는 않고 있어 다행이다.

“…이봐, 알다시피 난 무공을 모르잖아. 그래서 편법을 좀 쓴 거라구. 에… 그리고 솔직히 우리, 같은 사마 외도끼리 그런 거 너무 따지지는 것도 우습지 않겠어? 안 그래? 에이~ 정말 화난 거야?”

시간을 끌려면 아무 말이나 지껄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째 정말 너무 아무 말이나 막 나와 버린 것 같다. 장난 같은 대사말고 좀 더 저 여자가 공감할 수 있는 걸 화제 삼아야 할텐데… 뭐 없나?

“크흠~! 음… 사영을 알고 있겠지? 그가 지금 혈의문 주에게 대적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지? 혈의문 주가 그의 가문을 멸문 시켰다는데, 과연 혈의문주는 너희들에게 뭐지?”

주제는 비교적 잘 고른 것도 같은데 여전히 반응은 불확실했다. 날 잡아 먹을 듯 노려보다가 간간이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젓고 있는 저 모습… 좋아, 뭔 생각인 지 몰라도 계속하라구, 그렇게 당신의 생각은 계속 되어야 해 쭈~욱~!

여하간 지금 상황에서 소교라도 먼저 회복되면 상황을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실은, 강호에 나서기 전 자매들의 사부인 총관 지천공은 자매들 모두에게 자신의 진기(眞氣)를 조금씩(?) 보태 주었다고 했다. 내공이 높아졌다고 실력이 별안간 급상승하는 건 아니라고 들었지만 소교는 본래의 내공 측정치도 홍초명보다 앞서는 아이였으니 실전 경험이 조금 부족하다 해도 그렇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니 혈도만 모두 풀리면(몽몽 식으로 복구가 되면)… 음, 좀 전에 43초라고 했으니 지금은… …엥? 뭐야? 34초? 그동안 고작 9초밖에 안 흘렀다고?

[조금 전 여성이 말을 함으로 인해 복구작업이 지체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아혈은 다시 막아 놓고 진행 중입니다.]

으… 소교야, 왜 그랬니. 그야 말로 1초가 아쉬운 이 판국에… 응? 별안간 홍초명이 눈을 질끈 감더니만 한 손으로 자신의 옷깃을 부여잡는다. 오옷~! 갑자기 옷 자락을 확 열어 젖혀 늘씬한 맨 다리를 드러냈다. 이 판국에 저 여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설마 나한테 맞은 충격으로 살짝 맛이 가서 내게 스트립쇼를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게, 역시 아니었군.

제기, 여자 살수가 각선미를 자랑하며 허벅지쯤에 셋팅되어 있던 단검을 뽑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나 볼 만했지 실제로는 상당히 썰렁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디서 뽑혀 나와도 칼은 칼이고… 찔리면 죽는다.

“…날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묻지 않겠어요. 잠시나마 당신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했던 것이 잘 못이었어. 살수인 내게 불필요한 의문은 곳 독(毒)인 것을……”

“이봐, 살수라도 꼭 그렇게 살 필요는……”

빌어먹을, 말을 끝까지 할 필요도 없겠다. 눈빛을 보니 ‘이제 니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정신적 방어막을 굳건히 한 상태다. 경험상, 저런 표정과 눈빛인 사람에게 설득이 먹힌 경우가 없었다.

“조, 좋아, 좋다구! 까짓, 기왕 죽는 거 너 같은 미인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난 그렇게 뻔한 대사와 함께 조금 몸을 일으켰다. 대사도 대사지만, 몽몽이 있는 왼 손을 여전히 소교의 등 쪽에 대고 있으려니 왼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어정쩡한 자세였다. 다음 대사는 진짜 중요한데 말 그대로 자세가 안 나오는 것 같아 큰일이다.

“마지막으로 부탁하나 하자. 가능하면 고통 없이 단숨에 끝내 줘. 그러니까 여기, 여길… 노려 줘. 그렇게 해주겠나?”

난 나 자신의 왼 쪽 가슴, 정확히 심장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하려는 일을 그만두라는 설득은 택도 없을지라도 약간의 협조 요청(?)은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왜, 내가 안에 호신갑(護身鉀)같은 걸 입고 있을까 봐? 그럼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지.”

겉 상의는 아까 이미 벗은 상태라 난 군대 깔깔이 비슷하게 두툼한 솜이 들어간 속옷만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말한 대로라면 가슴만 드러내면 되겠지만 난 단추들을(우리나라 한복에 붙어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의도적으로 천천히 하나하나 전부 푼 다음, 상체를 전부 드러냈다. 추운 건 둘째치고, 여자 앞에서 스트립쇼 하는 지골로(GIGOLO, 리차드 기어 주연의 아메리칸 지골로를 참조.)라도 된 듯 매우 찝찝한 기분을 억누르며 다시 한 번 내가 원하는 바를 강조했다.

“어때, 이제 걸릴 것 없지? 그러니… 내 심장을! 정확히! 찌르도록 해.”

심장, 심장이야. 딴 데 찌르면 너 죽을 줄 알… 아니,

그럼 그 전에 내가 죽는구나. 하여간 정확해야 한다,

명색이 살수인데 설마 실수로 엄한데 찔러오는 거 아니겠지?

“역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또 고개를 젓는 홍초명. 말은 그래도 요청대로 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좋아, 좋아…!

“몽몽, 상대 공격의 루트와 타이밍 계산 좀 부탁해!”

몽몽에게 낮게 중얼거린 말이 유언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럼 이제… 가욧!”

외마디 고함소리와 함께 홍초명이 달려들었고 단검이 내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찔려왔다.

하낫! 둘! 으와악!

으으으~! 서, 서엉~고~옹~이닷! 으와~! 씨앙! 처음 맞아보는 소위 칼침…! 정말이지 환상적인(?) 고통!

그래도… 성공은… 성공이다.

홍초명은 자신의 단검이 내 심장이 아닌 어깨를 꽤 꿇었다는 사실에 당황한 듯 했으나 곧 입술을 깨물며 팔에 힘을 주어 당겼다.

그에 질세라 난 단검 손잡이와 홍초명의 손을 겹쳐 잡고 있는 내 손에 더욱 힘을 넣었다.

악으로-! 깡으로~! 이 여자야! 내가 심심해서 칼에 찔려준 줄 알아? 절대로 간단히 놔줄 수는… 비, 빌어먹을! 무슨 여자가 이리 힘이 센 거야?

“썅~! …좀…봐줘!”

으으~ 너 지금 뭔 소리를 한 거냐, 진유준. 홍초명의 손을 놓침. -> 단검이 뽑힘. -> 다시 찔림 -> X 됨.

순간적으로 이런 과정이 주욱 연상되자 별 소리가 다 나온 것 같다. 근데 비, 빌어먹을! 봐 주기는커녕 날 때려서 떼어내려는 듯 다른 한 손을 치켜 들고 있다.

어쩌지? 어쩐다? 에라, 그냥 놓자. 으와악!

손을 놓아 버리는 순간, 내 어깨에 거의 자루까지 깊숙이 박혀 있던 단검은 섬뜩한 감촉과 함께 뽑혀져 나갔고 홍초명은 낮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응…? 비명과 함께? 어…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입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대고 있다. 마치 누군가에게 기습공격이라도 받은 양… 아, 소교. 그 사이 소교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곡주님!”

기동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홍초명을 공격한 모양인 소교는 안타깝게 날 부르며 일어섰지만 난 반대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전신을 그물처럼 압박하던 긴장감이 저절로 풀어진 건지 다리에 힘이 들 어가지 않았다. 조금 전 상황에서 내 몸이 쏟아낸 피가 소교의 얼굴과 몸에 적지 않게 튀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소교는 홍초명과 달리 같은 처녀 귀신이래도 천녀유혼 급 분위기를 자아낸다.

“곡주님! 아아~ 곡주님!”

“잠깐! 소교야, 뒤! 뒤!”

홍초명이 재차 악받힌 모습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나는 그렇게 다급하게 외쳤고 소교는 재빨리 뒤로 몸을 틀었다.

소교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희고 치렁한 소매 자락이 파라락 날리는가 싶더니 홍초명의 단검과 팔을 동시에 휘감았다.

그리고는 앗 하는 순간에 홍초명의 몸이 회전하며 땅바닥에 쳐 박혀 버린다. 와우-! 내가 그동안 소교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인가? 이렇게 순식간에 홍초명을 제압할 줄이야.

“그만! 소교야, 죽이지는 마!”

쓰러져 있는 홍초명의 목을 밟고 선 채, 그녀에게서 빼앗은 단검을 치켜들고 있던 소교의 팔이 파르르 떠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못된 것!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평소 같지 않은 표독스런 음성을 내뱉은 소교는 재빨리 홍초명의 혈도를 잡아 놓고 내게 돌아왔다.

“훗~! 난 괜찮아. …견딜 만 해.”

“세상에… 아… 이를 어째……”

말과 표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 흘리기에만 바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재빨리 할 건 다 하는 것이 참 용타.

소교는 먼저 내 상처 주위의 혈도를 짚어 지혈을 하고는 이어 자기 치마를 북북 찢어 붕대를 만들어서 빈틈없이 상처를 감아준다.

“그래, 난 이제 됐으니까, 넌 빨리 저 쪽을 도와. 소령이와 미령이도 해혈(解穴)이 끝나는 대로 합류하게 될 거야.”

소교를 ‘연합군 대 혈의승 전투’에 지원병으로 보낸 후 나도 내게 남은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곡주님… 저, 전… 전……”

“난 괜찮아, 임마. 너도 빨리 저 쪽에 합류해.”

“…존명!”

소령인 됐고. 이제 미령이만 남았다. 제기… 터보모드든 이미 중지된 상태고 손을 미령이의 등에 대고 앉아있는 현재의 자세조차 유지하기가 힘겹다.

의식도 갈수록 엄청 오래된 형광등처럼 깜박이기 시작했다.

으왁! 우워어어어~우우으으으~

제기랄…! 정신이 번쩍 든 건 좋지만 다시는 칼침 맞은 상처를 내 손으로 치는 짓은 말아야겠다.

후유… 그래도 어쨌건 이번엔 나도 내 몫을 한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좀 아까 검에 찔렸을 때를 가만 생각해보면, 첫 경험(?)이라 놀라서 ‘아프다’라고 지래 의식해 버린 거였고 이상하게도 엄청나게 화끈거리기만 했을 뿐 ‘통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깨에 칼을 심어(?) 놓은 상태에서도 홍초명과 힘 겨루기를 하는 미친 짓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조금 시간이 흐른 지금은 몸이 낯선 감각의 정체를 뒤늦게 눈치 까기라도 한 듯 갈수록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고 있다.

마치… 벌겋게 달아 오른 쇳덩어리가 살과 뼈 사이에 박혀있는 기분이랄까? 으~ 의식하니까 더 환장하겠다. 딴 생각하자, 딴 생각……!

음… 사실, 지나고 나니 비로소 느껴지는 건, 애초에 살수의 칼날에 몸을 내맡긴 행동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뭐 하러 그토록 재수 없어하던 원판의 여성에 대한 비정상적인 지명도를 이용하여 ‘한 곳을 정확히 찌르는’ 상황을 유도했겠는가.

당근, 그렇게 정확하게 장소를 지정해야만 결정적인 순간에 살짝 피하기 더 좋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무방비는 아니었고 결정적인 순간 몽몽이 타이밍을 알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인정할 건 인정하자, 진유준. 그런 과정을 통해 나도 살고, 따라서 세 자매들도 살리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엄청나게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홍초명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게 내 페이스에 말려든 것도 그렇고, 여자라고는 해도 직업 살수인 상대의 공격에 정확한 타이밍을 맞춘 것도, 다시 재현하라고 하면 차라리 재현하라는 놈을 받아 버리는 것이 나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위험천만한 곡예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건 그거대로 어렵고 복잡한 문제… 으… 스바~ 너무 아프니까 생각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으쓰… 이봐, 몽몽. 아직 멀었냐?”

[ 지금 완료되었습니다. ]

…말 꺼내기가 무섭군. 오늘 무슨 ‘타이밍 데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음, 미령이 이 녀석,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몸을 돌려 덥석 내 손을 잡아온다.

“곡주님, 흑~!”

눈물은 그전에 그친 것 같았는데 새삼 울먹이며 날 바라보는 표정이 웬지 평소보다 더 귀여워 보인다. 맘 약해지게스리……

“그래, 고생했다. 에… 해혈이 끝나자마자 미안한 말이지만 너도 저 싸움을 지원해야……”

어…? 나 또 왜 이래…? 아직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급속도로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뭐야…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설마… 미령이 너……?

“죄송해요, 곡주님. 명령을 어긴 죄값은 나중에 치르겠어요.”

한 손으로 제 눈물을 훔치는 미령이의 작은 입술이 앙 다물어져 있었다. 제기… 이건 또 뭐야. 미령이 너, 내 마혈(痲穴)을 짚어서 어쩌겠다는 거냐, 응?

===========================================

<< 극악서생 외전(外傳) >>

◆ 그 때 그들은……?

  1. 비취각주 취음란의 경우.

극악기원후(極惡起元後) 1年. 1月. 13日.

“어서 말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그래, 여기서 자네에게 무슨 얘기를 듣든 밖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경박한 인물들은 없으니… 어서!”

그렇게 말씀들을 하시지만 쉽게 꺼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지요. 지위 높은 분들의 숨겨진 얘기를… 게다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분들의 적나라한 부부생활을 밝히라니……

“대체 무얼 그리 꾸물대는 게야? 앙?”

“쯧쯧…! 상관당주의 인상을 보면 나오던 말이 있다가도 다시 기어 들어가겠소이다.”

“뭐요? 아니, 우당주! 내가 뭘 어쨌다고 시비요, 시비가!”

“어허! 두 분 다 그만 두지 못하겠소? 간부들이 이만큼이나 모인 자리요!”

“대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간부씩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런 골방에 모이라고 한 거요?”

“쯧쯧…! 하긴, 이번 일로 폭풍당은 별 피해가 없는 것 같으니 상관당주는 가보셔도 상관없을 것 같구려.”

“닥치시오! 우리라고 별 수 있었겠소? 하지만 우리가 이런 곳에서 수근거린다고 해결이 될 일이오? 차라리 내 그 분을 만나 따지겠소. 대체 왜 갑자기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지 말이오!”

“뭐요? 상관당주, 당신은 대체 문제의 요점을 알기나 하는 게요?”

다들 이 비화곡 본단의 간부라는 신분의 무게 때문에 욕설이나 험한 행동은 자제하고 있지만 이미 각자의 살기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군요.

후우~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사내라고 불리는 자들이지요. 저렇게 흉흉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이처럼 연약한 심성을 가진 여자의 입이 떨어지기를 바라다니 말이에요.

“거, 좀 조용히……”

아, 다행히 저 분이 나서 주셨네요. 다들 아직 저분이 입을 여신 걸 모를 정도로 소란스러우니 곧……

꽈쾅~!

음… 예상대로군요. 비화곡의 핵심 간부들이 모여 앉은 이런 자리에서 저런 식으로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저 분, 소장로님 뿐이 아닐까요?

“…!?!!”

“…!?!!”

다들 일제히 입을 다무니 조금 전까지가 거짓이었기라도 한 듯 조용해져서 좋아요. 다만, 방금 소장로님께서 일장에 부숴 버린 탁자는 보기 드문 명품인데… 조금 아깝네요.

“흠~! 거… 곡주께서 내게 금제를 걸었다고 하니, 다들 내가 우습게 보이는가 본데, 어디 계속 그렇게들 해보게!”

후훗~! 소장로님은 금제를 당하신 이후 입담이 더 늘으셨나 봅니다. 웅대한 공력과 좌중을 압도하는 살기도 너무나 멋지십니다.

“어이쿠…! 이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소장로님께 무레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장로님께서 직접 이번 모임을 주도해 주시지요.”

마극파천대의 단대주님은 소장로님과 친분이 좋은 분이시고 적당한 때 나서 주셨어요.

“흠…! 이번 일의 발단은 나와도 무관하지 않고, 내 여식과 사위의 일이라 오히려 나서지 않으려 했네. 하지만 이리 다들 중구난방이니 하는 수 없구먼.”

소장로님은 제 쪽을 지긋이 응시하시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여셨지요.

“네 안전은 이 소진광이가 보장하겠다. 그러니 안심하고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아 보거라.”

어머~ 누가 보면 소장로님께서 제게 반말을 하신 줄 알겠네요. 이쯤에서 저도 제 옆에 붙어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장지화’에게 몇 마디 해주어야겠지요?

“장매… 물론 어려운 사정이란 것은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이 곤란해하시고 이젠 야후 장로님까지 나서셨으니 숨김없이 얘기하는 것이 좋겠어요.”

장지화는 현재 지총관님의 처소를 담당한 시비들의 부장이지만, 한 때 비취각에 소속된 적이 있어 저와는 비교적 가까운 사이이지요. 엉뚱한 일 때문에 뜻하지 않게 저 무시무시한 사내들의 압력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

“그, 그럼… 비마각(秘魔閣) 제 1 부장, 장지화가 야후 장로님과 각 부처의 장들께 제가 목격한 저간의 일들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허, 헌데… 어디서부터, 어떤 일을 먼저 말씀 드려야할지……”

장지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상 입을 열자, 그토록 요란스럽던 간부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표정으로 딴청을 하고 있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요. 사내들이란 본시 일을 벌일 줄만 알았지, 하나하나 챙기거나 뒷수습에는 무관심하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상대가 당대의 사마제일검으로 추앙받는 혈마검호 지천공님인 다음에야……

“소장로님과 여러분들께 비취각주 취음란이 청합니다. 아무래도 같은 여자의 입장이라 말하기가 수월하니 제가 장지화 부장에게 질문하는 것이 어떨까요.”

…예상대로 모두 은근히 반가운 기색을 띠고 고개를 끄덕이는군요.

“곡주님께서 총관님과 월영당주 부부에게 가한 금제가 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은 다들 잘 아시거나… 개중에 세세한 바를 모르시는 분들도 대강은 짐작들을 하시는 터, 공연히 되풀이 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머…? 제 말을 듣고 몇몇 분들은 웬지 실망하는 표정을 떠올리네요. 훗~! 이런 기회에 대하기 어렵기만 했던 총관 부부의 속사정을 귀동량하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그러하니… 장지화 부장은 최근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좋겠어요.”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 하시면……”

“우리가 실감할 정도로 총관께서 행동에 이상을 보이기 시작한 시점부터라고 해야겠지요. 내 생각에는 지난 번 본녀의 생일 잔치 때 이후라고 여겨지는 데……”

“응? 취각주께서 이번 일에 관련이 있었소이까? 설마 총관께서 취각주를……?”

“호호홋~! 총관님께서 상관당주님이 생각하시는 것 같은 분이었다면 오히려 이번 사태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요.”

“…그건, 무슨 뜻인지……?”

“거, 상관당주는 모르면서 끼어 들지 좀 마시오!”

“내 생각도 같아. 자네는 이제부터 일체 입을 열지 말게.”

또 한바탕 할 태세였던 상관당주였지만 역시 소장로님께는 꼼짝 못하는군요. 그럼……

“이제 얘기해 봐요. 장지화 부장.”

“예… 실은 취음란 각주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제 수하 시비들에 따르면 총관께서는 어쩐 일인지 그 날밤부터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밤새 방안을 서성이시거나, 심지어 실내에서 홀로 검무(劍舞)를 추시는 경우까지 있었다 합니다.”

벌써부터 좌중에서 오~ 하는 탄식성이 낮게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주 별관으로 사모님을 뵈러 가시곤 하시는데, 그 것이… 저어… 그 것이……”

“실제로는 만나지도 않고 그냥 돌아오신다는 말이지요?”

“그, 그러합니다.”

“어차피 다들 짐작은 하고 있는 일이니, 숨길 것 없이 말해요. 그 때마다 월영당주께서는 무얼 하고 계셨나요?”

“…전에는 보통,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고 계셨는데 최근에는… 곡주님께서 전파하신 ‘태구노단수’를 즐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총관님의 한숨과 불면증은 더욱 심해지셨습니다.”

역시… 그랬었군요. 대부분 이해를 하는 것 같지만 상관당주처럼 아직도 의아한 표정인 사람들도 있네요. 귀찮지만 보충 설명을 좀 해볼까요?

“태구노단수! 월영당주 소운연님처럼 아름다운 분이 그런 자극적인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하였다면 당연히 어떤 영웅호걸이라도 심기를 안정키 어려울 테지요. 더구나 총관께서는 오래도록 부인이신 소운연님과 별거(別居)에 들어 계시니… 아~ 그 안타까움이 오죽하겠습니까.”

이제야 낮은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한 편으로는 어색한 침묵과 헛기침 소리가 조금씩 번져가고 있습니다.

“장지화 부장…? 얘기는 끝났나요? 아니면 아직 남아 있나요?”

“모, 모두 다 얘기했습니다.”

“흠… 대답 소리가 이상해요. 숨기는 것이 있다면 나중 후회하지 말고 얘기하도록 해요. 여기 있는 분들이 모두 곤란한 일들을 겪고 있는데, 장부장이 일을 숨겨 대책을 세우기가 어려워지기라도 하면… 훗~! 그런 것을 원치는 않겠지요?”

“그, 그럴리가요. 전 다만… 총관님의 기습(奇習)까지 말씀드려야 할지 어떨지……”

“기습…이라니, 어서 말해 보아요.”

제 독촉에 이어, 하기(夏期)의 급청객(急請客, 소나기) 같은 좌중의 시선에 새삼 당혹감을 드러내던 장지화는 결국 결심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지요.

“그리 오래 된 현상은 아닙니다만, 총관께서는 사모님의 처소 근방에서 사모님의 자태를 물끄러미 보고 계시다가 돌아오신 날은 시비들을 모두 처소 밖으로 물리신답니다. 그런 후 총관님의 음성이 분명한 우워어어어~하는 괴성이 얼마간 들린다 하며, 어떤 시비는 총관께서 한밤중에 벽을 상대로 응조공(鷹爪功)과 두타신공(頭打神功)을 연마하신다고도 하며……”

이런…! 제 예상보다도 심한 상황인가 봅니다. 나름대로 갑갑했던 듯 그동안 망설였던 만큼이나 거침없이 쏟아냈던 장지화는 뒤늦게 후회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좌중의 모든 이들, 심지어 소장로님 마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실 정도니… 후후-! 어쩌면 더 잘 된 일일지도!

“어허~ 이거 심각하구먼!”

“그, 그러게 말입니다. 그토록 수양이 깊은 분이 그럴 정도면……!”

“…내가 찾아가 허튼 소리를 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다행이다, 다행이야.”

“월영당주가 원망스럽구먼, 어찌 그렇게 매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좌중들은 충격에 겨워 혀를 차고, 고개를 젖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는 모두 곡주님께서 친히 내리신 금제에서 기인한 것이니 근본적인 해결은 당분간 어려울 터… 오늘 이 자리에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고견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근바위처럼 무거운 침묵이 좌중을 누르기 시작하는군요. 이 역시 예상했던 바이지만……!

“아무래도…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소이다. 취각주 께서는 혹시 묘안이 없소이까?”

“총관께서 행하시는 일이 표면적으로는 잘못된 점이 없으니 전들 어쩌겠습니까. 아~ 그렇다고 월영당주께 미움받을지도 모를 일을 자처할 수도 없고……”

살짝 운을 띄었더니 즉시 다들 안광을 번득이기 시작하는군요. 난 조금 더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요.

“취각주께서는 그럼 생각하는 일이 있긴 있으시다는 말이구려!”

“어서 말해 보시오. 취각주.”

“그러고 보니 취각주는 총관님의 제자이자 그… 비연대의 소녀들에게 대모와 같다 들었소이다. 취각주께서 나서시는 것이 가장 좋겠소이다.”

“동감이오. 취각주가 적격이오.”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는 것 같고… 이제 손을 내밀어 열매를 거둘 때가 왔군요.

“허험, 취각주… 내 애초에 이 일을 해 낼 사람은 취각주 뿐이라 여기고 있었소. 내 얼굴을 봐서라도 부디 그 두 사람을 중재 시켜 줄 수 없겠소?”

“어머, 소장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뒤로 물러설 수가 없군요. 하지만……”

“어서 말해 보구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 주겠소.”

“취각주, 비취각은 어떠한지 모르나 우린 아주 죽겠소이다. 총관님의 검열을 준비하느라 수하들에게 훈련을 시킬 시간이 있어야지, 시간이!”

“나도 적극 협력하겠소이다. 이대로는 못 살겠소.”

“휴우~! 이건 도대체 총관께서 처음 취임하셨을 때 못지 않으니, 수하들도 나도 숨쉴 틈이 있어야지 원.”

모든 이들이 한 마디씩 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난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한 번 나서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지금 약조하신 대로 협조를 아끼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말이겠나! 이 소지광이가 보증할 테니 염려하지 말게.”

후훗~! 사실… 이제 곡주님께서 외유를 나서시게 되면 월영당주는 그 지원업무로 곡을 떠나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이 해결될 것임을 다들 깨닫지 못하고 있네요. 하긴, 그래서 제가 오늘 이런 자리를 유도해 사태의 심각성만을 강조한 거지만…

이번 일은 곡주께서 두 열정적인 성격의 부부를 곡에 장시간 함께 있게 만들어 놓고 두 부부의 행동에 족쇄를 해 놓은 것에 기인한 것… 그러니 곡주께서 곡을 나서시기 전까지 두 부부를 바쁘게 만들면 해결될 일이지요. 전 핑계 김에 월영당주를 부추겨 함께 놀러 다니고, 총관께는 소교와 동생들의 무공 수련을 도우는 것에 전념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우리 비취각도 조금 피곤했던 총관님의 지나친 검열과 간섭을 배제하면서 덤으로 각 당, 각, 전주들 사이에서 나 비취각주가 차지하는 비중을 더 높일 수 있었고 앞으로 그들로부터 내 귀여운 아이들, 소교와 동생들에게 많은 것을 챙겨 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일석삼조의 묘미란 이런 것이겠지요. 이럴 때면 저 단순하고 거친 사내들의 행동이 귀엽게만 느껴지니… 오늘밤은 오랜만에 한 명을 택해 사랑해 주고 싶네요. 누가… 좋을까요……?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