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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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구하면 알려주는 몽몽이 없기 때문에 대교가 수로 안으로 들어간 후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평소의 느낌으로 30, 40분 정도..? 아님 몇 시간? 어쩌면 내가 지금 느끼는 시간보다 훨씬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만큼 초조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기…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천리 행군을 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의 산 속, 무덤 가에서 판쵸우의 한 장 뒤집어쓰고 짱 박혀 밤새 매복을 할 때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수십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대통령 경호작전 때도 이렇게 지루하고 적막하지는 않았다.
내가 하는.. 내가 직접 겪는 일이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견딜 수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게 뭐냐. 저 어린 소녀에게 짐을 떠맡기고 병신같이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신세라니..!
‘피를 말린다’라는 표현, 몸 속의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걸 실제 겪어 보지 않은 이상 그 고통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내 기분을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대교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배수구에 또 무슨 함정이나 무서운 괴물이 버티고 있었던 걸까..? 미치겠다.
…..잘은 몰라도 이제 한나절 정도는 흐르지 않았을까? 대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오지 않는다. 죽..었을까..? 저 어두운 지하의 물 속에서 대교는 날 원망하며.. 피투성이로 숨을 거둔 것일까..?
힘이.. 빠져 버린다. 지금 내가 뭐 하러 여기에 있는 거지? 사내새끼라고 자처하면서 어린 여자아이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놈이 혼자 살겠다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가..?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성지를 나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관문에서 아수라 백작이 뭐라고 한 것 같지만 지금의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몽몽이 없으니 성지의 입구에서 날 기다리던 소교, 소령, 미령이를 만나도 난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당연히 대꾸해 줄 수도 없다.
몸짓으로 술잔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하니 눈치 빠르게 소교가 달려나간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미령이가 뭐라고 자꾸 말을 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어 말을 끊었다.
이봐, 미령아 나는 지금 니가 뭐라고 하는지도 몰라.
그리고.. 그리고 말야, 니 큰언니 대교.. 그 착한 아이를 나는 지키지 못했어.
그동안 이 것 저 것 어려운 일을 시키기만 했는데… 근데 이제 아무래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넌 아니..?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극악..’도 아니고 그 더러운 새끼보다도 못한 무능력자야. 난, 난….
소교가 가져다 준 술병을 말없이 받아들고 나는 다시 성지로 돌아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대교는 역시 없었다.
으우- 독한 술을 안주도 없이 나발을 부니 정말 쓰군. 제기.. 서울에 계신 아버지. 아버진 항상 그러셨죠. 사내자식이란 어디서든 제 한 몸 잘 간수하는 것은 기본이고, 남을 해꼬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여나 어린아이를 지키지 못하면 사내새끼도 아니라고, 그 딴 새끼는 어디 가서 콱 뒈져 버려야 한다고….
젠장, 아버지 아들이 지금 그 짝 났습니다. 나만 바라보고 살던 소녀를 내 손으로 사지에 몰아 넣었다고요. 나 정말 콱 죽어 버릴까요? 그럴까요..?
우이 쒸팔!!
술 마셔서 죽어 버릴 것처럼 나는 계속 깡술을 나발 불었다. 순식간에 비워진 술병을 집어 던져 깨고 나는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이 썅! 뭐가 이래! 내가 뭐 큰 거 바랬냐? 이제 제대했으니까, 그냥 좀 편히 지내자고! 그게 욕심이었냐? 그게 큰 욕심이었냐고!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야! 왜! 왜 이따위 곳으로 날아오고, 왜 그 아이를 만나고! 왜 그런… 그 아이를 지키지 못하고… 씨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왜…!!”
바닥에 벌렁 누워서도 계속 또 뭐라고 한참을 떠들며 혼자 주정을 부렸다. 빌어먹을…. 슬슬.. 눈이.. 감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또 지났을까..? 내가 눈을 떴을 때, 꿈결처럼 날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곡주님…?”
“…대교냐..?”
“예, 소녀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만취하셔서 차가운 바닥에서 주무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어찌..”
“이거.. 꿈 아니지…”
“그러합니다. 소녀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 꿈.. 아니지.. 그치..!”
“틀림없이 꿈이 아닙니다. 소녀 대교입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꿈이 아니라고 강조하듯 대교는 내 손을 이끌어 자신의 몸을 더듬게 한다. 젠장.. 이 빌어먹을 것아, 왜 이제야.. 나는 두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가슴 가득하게 느껴진다. 분명 꿈이 아니다..!
“고, 곡주님.. 성지의 비밀 통로는….”
“그런 건 상관없어, 임마. 왜 이렇게 늦게.. 짜식아 난.. 그러니까..”
이산가족 찾기 TV 프로에 나오던 사람들이, 반가운 가족을 만났음에도 기뻐하기 앞서 왜 그렇게 부등켜 안고 서럽게 울기만 했는지.. 그게 조금 이해가 간다.
사람이란.. 너무 반가워도 오히려 표현이 잘 안 돼는 것 같다. 나는 대교를 안고 새삼 확인하듯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결을 쓰다듬고 몸을 매만지며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었다.
“맹세해도 좋아! 앞으로 결코 너를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을 것이며,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걸겠다. 알아? 아느냐고, 넌, 넌 이미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야.”
으으~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는 건가? 내가 이런 쑥쓰러운 대사를 마구 해대다니…
나는 대교를 안은 채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치다가.. 그리고 또 깜박 잠이 들었다. 술이 웬수지….
“곡주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응..? 어, 그래 괜찮아.”
어라..? 이 아이가 지금 왜 내 품 안에서.. 으으- 기억이 조금 나긴 난다. 아이고 쪽팔려라, 술 취해서 17살짜리 소녀에게 무슨 소리를 했던 거지? 서울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두 분의 아들이 결국 미성년자에게 목숨을 건 모양입니다.
“아… 그게, 괘, 괜찮은 거니? 왜 그렇게 늦었던 거야..?”
나는 대교를 안은 손을 풀고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어색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교는 상기된 얼굴로 자세를 추스려 앉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출구를 발견하긴 했지만 그게 좀 멀어서…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스럽습니다.”
“휴우~ 하여간 다행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 잠깐만..!”
나는 대교의 얼굴에서 몽몽을 떼어낸 다음 아무 석실이나 들어가 다시 손목에 장착했다.
< 주인님 신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 사이 무슨 문제라도… >
깡술 퍼마신 후유증이다, 이놈아.
< 장시간 접촉이 없어 저도 걱정했습니다. 그 동안 특별한 사항이라도 있습니까? >
어째 이 놈도 갈수록 말하는 것이 로봇이라기보다 사람 같은 기분이 든다. 인공 지능이 그만큼 뛰어나서 그런가..?
“특별한 건 없어. 니가 없어서 조금 갑갑했지만.. 하여간 너와 대교에게는 위험한 일이 없었던 거냐?”
< 수로가 끝나는 지점에 종을 알 수 없는 호전적인 생명체가 있어 위험했으나 임시 사용자의 전투력이 그 생명체보다 앞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
흠… 역시 뭔가 있긴 있었군. 그간의 상황은 대교에게 직접 듣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소녀의 판단으로는.. 아무래도 이 수로가 본래 비밀통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축골신공을 익힌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협소한 곳이 많고..”
연못 옆의 탁자에 나와 마주 앉은 대교는 조용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400장 거리에 이를 때까지 수로가 계속되어 솔직히 소녀도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 더 가보니 희미하지만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500장 조금 못 미치는 정도가 수로의 끝인 것 같았습니다. 소녀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갑자기 눈앞에 어둡고 측정할 수 없는 크기의 공간이 펼쳐져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듣기만 해도 썰렁하다. 아무리 어두워도 손에 뭔가 걸리면 대충 주위를 파악하여 덜 무섭지만 어느 정도인지 모를 크기의 어두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면 그건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이다.
“야명주의 빛도 그 곳을 다 비추어 주지는 못했고.. 그래서 잠시 망설였습니다. 제가 빠져 나온 수로를 잊어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기도 해서.. 헌데 갑자기 소녀는 굉장한 한기를 느껴야 했습니다. 느닷없이 눈앞의 암흑 속에 두 개의 커다란 불빛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 것이 어떤 거대한 짐승의 눈동자임을 깨달은 소녀가 경악하여 어떤 대응을 하기도 전에 거대한 무언가가 강력한 힘으로 소녀의 몸을 쳤습니다.”
이런 제기.. 근데 아무렇지 않은 건가? 다쳤는데 말 안 한 거 아냐? 대교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 곱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의 저였다면 꼼짝없이… 하지만 그 동안 곡주께서 주신 영약으로 내력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마봉후 님의 무공을 익혀서 그런지 소녀는 비교적 큰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즉시 내공으로 안력(眼力)을 높이니 야명주의 흐린 불빛만으로도 그 괴물의 모습을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생긴 모양으로 보아 아마도 전설에 나오는 ‘이무기’인 것 같았는데…”
용이 되기 일보 직전에 실패한 그 이무기..? ‘전설의 고향’에 단골로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괴물… 지금 대교가 말하는 묘사대로라면 생긴 건 조금 작은 용 정도인 것 같다. 내가 직접 안 봐서 실감은 안 나지만 이 시대에는 정말 별의별 것이 다 있나보다. 전에 ‘피라니아’는 그렇다 치고 정말 이무기가 있다니…
“후..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이무기의 강력한 힘, 이빨과 발톱의 날카로움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곡주님의 안배로 착용한 천잠의와 영물들의 가죽이 아니었으면 소녀도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소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청명검이 있어서… 두 식경 정도의 싸움 끝에 그 무서운 이무기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괜히 걱정했나..? 최근 내가 키워 준 거긴 해도, 이 아이 전투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로군. 앞으로 내가 지켜주긴 커녕 거꾸로 빌붙어 살아야 하는 거 아냐..?
“음.. 이무기를 처치한 후 잘 살펴보니 반대편 공간에 그 이무기가 밖으로 드나들었던 듯한 입구가 있었습니다. 거기로 나가보니 갑자기 별천지가 펼쳐진 듯 밝고 아름다운 빛이 가득한 공간이 펼쳐졌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장관이어서 소녀도 한동안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소녀가 빠져 나온 그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