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89화
결국 자신이 가상의 상대에게 펼쳤다고 생각했던 무수한 공격의 여파로 내가 다쳤다는 걸 안 대교는 울음을 터트리기에 이르렀고, 그거 달래는 데 한참 걸렸다.
거참… 동생들이나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는 상당한 카리스마를 보이며 많은 이들을 이끄는 대교가 이럴 때보면 꼭 어린아이 같다.
가상 비무를 벌였던 장소에서 2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숲 속의 야영지가 특훈 기간 동안 대교와 내가 지낼 곳이었다. 내 지시로 혈랑대가 어제 미리 만들어 놓은 곳인데, 말이 야영지지 숲 속의 근사한 별장이라고 할까…? 참 대단한 혈랑대다 하루 사이에 통나무 집을 두 채나 지어 놓았고 실내에 침상 같은 기본 가구는 물론이고 한 쪽에는 근사한 벽난로까지 있었다.
대교는 장작 날라와 모닥불 피우고 나는 보관된 음식을 가져다 식탁을 차리는 등…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것이 다소 씁쓸하긴 했지만, 전원 휴양지 같은 분위기의 숲 속에서 대교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행복한 현실이 그런 사소한 불만을 잊게 해준다.
전에 야후 장로의 집에서 전책이 만들어 온 것과 비슷한 통나무 식탁에서 저녁 식사를 마칠 때쯤에는 서서히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대교가 공들여 준비한 차(茶)를 마시며 우리는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저녁에는 낮에 대교가 가상의 장청란과 대결한 결과를 함께 분석하고 연구하는 시간이 가지는 것이 본래 예정했던 일정이다. 하지만… 나는 며칠 전처럼 강호에서 겪은 재미있는 경험들을 내게 들려주며 즐거워하고 있는 대교에게 멈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멈추기는커녕 나 역시 장청란과의 대전 때 패한 원인을 묻는 것보다 대교가 떠나 있는 기간 동안 곡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을 들려주기 바빴다.
뭐… 굳이 변명을 하자면… 오늘은 달이 너무 밝다. 본래 이런 밤에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우쭐해하는 모습이 밉지 않은 법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의 합창도 새삼 정겹게 들려오기 마련이다. 그냥… 그랬었다는 얘기다. 그냥 그래서 할 일을 잊었고, 밤늦도록 마냥 대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다음날 아침.
간밤의 잔잔한 여운을 음미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문을 열고 상쾌한 숲 속의 아침을 맞았다. 여전히 느긋한 기분으로 오늘도 날씨 좋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중에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물소리가 내 주의를 끌었다.
대교였다. 그녀가 공터 건너편에 서서 물통에 든 물을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 붓고 있었다. 맑은 아침 햇살이 그녀의 드러난 어깨 위에서 물살과 함께 부서지고 있었다. 이어지는 대교의 희고 매끄러운 곡선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연히 숲 속의 요정을 목격한 나뭇꾼의 심정이 된 나는 그녀 대교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냉수욕을 마친 대교가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던 옷을 찾아 걸치고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나는 지금이 아직 겨울의 뒷자락에 쌓인 계절이란 것을 생각해 냈다.
“추, 춥지 않니……?”
대교는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생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정신을 가다듬는데 냉수욕 만한 것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몇 달째 시행 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었다고? 이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에 찬물을 뒤집어쓰며?
“…넌 가끔씩 날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구나. 좋아, 나도 분발하지.”
그렇게 특훈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진짜 본격적인 특훈이 시작되면서부터 시간은 참으로 빨리 흘러가기 시작했다. 첫날의 실수를 기억한 나는 대교가 가상의 장청란과 스파링을 시작하기 전에 멀찍이 떨어진 장소로 피해 있거나 아예 야영지로 돌아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낯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교와 내가 먹을 식사 준비에 간식 준비… ‘나도 분발한다’고 큰소리 쳐 놓고 고작 이런 것 밖에 할 수 없나 하는 회의가 들긴 했지만 군대에서도 ‘취사병’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대교가 가상의 장청란에게 당한 부상의 정도에 따라 하루에 적게는 한 번, 많게는 대여섯 번까지 스파링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밤에는 몽몽의 정보를 검토한 나와 대교의 토의가 이어졌다.
특훈 시작 7일 째까지 대교의 승률은 0% 였다.
“그래, 오늘 패인은 뭐라고 생각하지?”
“300여 초를 겨루었을 때였습니다. 장청란의 검초가 유(柔)에서 강(强)으로 현격히 변화하는 것에 대처하지 못하고 보법이 흐트러져서 이어지는 월신토망(月莘 吐輞) 수법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패하게 된 건 장청란이 월신토망 전에 펼친 지관낙뢰(止觀落雷) 수법 자체 때문이 아니야. 생각해 봐, 장청란이 오늘 대결에서 쓴 수법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 처음에 시전된 월형신공은 월하환무(月下幻舞)… 가조보행(歌調步行)… 그리고… 아~! 그렇군요.”
“이제 알겠니? 처음부터 장청란은 지관낙뢰를 쓰기 위해 널 일정한 흐름으로 끌어들였던 거였어.”
“최후의 한 수를 위해 그토록 많은 허초를 사용했다니… 아니, 그보다 비무 이전에 그 모든 계산을 하고 시행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섭군요.”
내가 패인을 분석해 지적해 줄 때마다 대교는 한숨을 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곤 하더니만, 가상 비무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대교는 빠르게 상대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특훈 12일 째, 대교의 승률은 10%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오늘 첫 비무는 반 초식의 패배였지만, 소녀가 만약 장청란의 장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요하삼결(曜夏三 訣)을 끝까지 펼쳤더라면, 비록 소녀도 중상을 입었을 지 몰라도, 끝내 무릎을 꿇은 것은 장청란이었을 것입니다.”
오전에 있었던 비무를 스스로 평가하며 분해하던 대교는 오후의 비무에서는 접전 끝에 승리를 해 보였다. 그 날은 저녁 먹으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연신 생글거렸는데, 그런 기분 깨기 싫어서 입가의 밥풀 붙은 건 나중에 가르쳐 줬다.
특훈 17일째로 접어들고… 대교의 승률이 드디어 50%를 훌쩍 넘어 버렸다.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난 좀 심심해진 것이… 대교는 점점 말이 없어져가며 비무와 그 비무 결과 분석에 혼자 몰두하는 시간이 많아져 버렸다. 사실 이 때쯤에는 내 쪽에서 말 걸기도 어려워져 있었다. 대교가 돌아오기 전까지 몽몽을 통해 내 딴에는 열심히 연구 분석한 결과로, 한동안은 대교에게 뭔가 충고해 주고 알려줄 수 있었지만 특훈 시작된 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가 내 한계였다. 그래서 ‘이젠 스스로 생각할 때다’라는 말로 슬며시 손을 뗀 상태인 것이다.
특훈 20일째. 대교 승률 57%. 대교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여느 때처럼 운기조식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으러 자신의 처소(두 번째 통나무 집)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혼자 탁자 앞에 앉아서 긴 나무토막 하나를 정글도로 깎아내며 공작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무 길이는 약 1M. 이걸 K2 제원에 딱 맞춰 97.73CM로 만드는 건 좀 무리가 있겠지? 어쨌든, 흠… 며칠 전부터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깎았더니 이제는 얼추 20세기 소총 비슷한 꼴이 되어있다. 비록 군대는 커녕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나 들고 다니던 어줍잖은 모형 총에 가깝기는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그 지겹고 끔찍했던 군대 시절이 불과 반년 만에 추억으로 각색되어 쬐금은 좋았던 기억처럼 느껴지다니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 내가 20세기로 돌아간 다음 “특명이 잘못되었으니 군대로 복귀하여 몇 달 더 근무하라.”는 통고를 받게 되면 그럴 것이다. 가더라도 탄약고 근무 잘 세워야 할거요. 확 다 날려 버릴라니까.
훗-! 그러면서도 난 지금 나무로나마 깎아 만든 소총을 쥐어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어쩐지 마음이 더 안정되는 기분이 든다. 뭐랄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남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전투 본능’이란 것이 있지 않나 싶다. 비록 간부들에게 깨지고 고참들에게 밟히느라(?) 적군은 구경도 못 해 본 군대 생활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훈련의 연속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난 ‘사격’은 참 좋아했다. 어깨 견착, 조준선 정렬… 그런 일련의 과정 끝에 발사된 탄환이 목표에 적중되는 순간의 쾌감…!
내가 마음속에 군대 생활을 그리워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것은 아마도 ‘군대’가 아니라 ‘총’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특훈 23일째. 대교 승률 72%… 하지만 그건 종합 승률이고 최근 이틀간은 100%였다. 직접 만든 모형 총으로 엎드려 쏴, 서서 쏴, 쪼그려 쏴 등의 자세를 취해보며 혼자 놀고 있자니 뒤에서 대교의 의아한 음성이 들려온다.
“곡주님? 들고 계신 그건 대체……?”
“어, 이거? 그냥… 심심해서 만들어 본 거야. 별다른 거 아냐. 보다시피 그냥 나무막대지 뭐.”
대교는 모형 총보다는 그걸 들고 헛짓거리 하던 내 행동이 의문이었던 모양이지만, 굳이 묻지는 않고 얌전히 점심 준비를 한다. 흠… 기분이 침울해 보이는 거 보니 오전엔 깨졌나 보지?
“이번엔 패한 모양이구나. 괜찮아-! 차츰 네가 이기는 횟수가 더 많아지고 있잖아. 실제 비무는 이것보다 더 쉬울 수도 있어.”
슬쩍 독려의 말을 건네 보았지만 대교는 기운 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나까지 밥맛 없어지게스리 묵묵히 식사를 마친 대교가 비로소 내게 말했다.
“저… 곡주님. 제가 계속 상대하고 있는 환상의 장청란 말이에요. 곡주께서는 그게 제 머리에 채워주시는 그 신병이기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또 곡주께서 미리 그 신병이기에 장청란에 대한 모든 것을 넣어 두셨다고 하셨지요?”
음… 조금 불안해지는군. 대교가 지금 말한 것처럼 대충 얼버무려 설명해 두긴 했지만, 새삼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면 곤란한데… 도대체 마음대로 환상을 만들어내는 그런 머리띠가 어디 있느냐는 노골적인 질문이 나오면, ‘하여간 그런 게 있어. 내가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찾아낸 거야’식의 무대포 주장을 펼칠 각오(?)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