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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98화


“뭐, 뭐야 그게. 이틀 전 들른 지부에서는 별다른 변동 사항 없다고 했잖아요?”

“강 하류 지역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는 소식이 신수성녀의 귀에 들어와 갑자기 배의 속도를 높인 모양입니다. 서둘러 뒤쫓아야겠습니다.”

으으… 일났다. 나는 다시 서둘러 사영의 뒤에 탑승하였고 사영은 말을 출발시키고 달리며 외쳤다.

“이 계절에는 바람이 강 하류로 불어 말로 배를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전염병이 돈다는 지역에서는 얼마라도 머물 테니까… 거기까지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로 얼마나 걸리는데요?”

“쉴 사이 없이 달려도 5일에서 6일 정도입니다.”

“자, 잠깐, STOP! 멈춰!”

에구, 다급하니까 얼결에 영어가 다 나왔다. 몽몽이 알아서 해석해 줬으려나?

“한시가 급한데 왜 그러십니까?”

“그게… 그럼 우리도 배 타고 가면 되잖아요.”

“오, 그렇군요. 하지만 신수성녀의 배… 그 신비선은 원래 백아(白鵝)라고 불리지만, 비호선(飛虎船)이란 별칭이 붙을 만큼 쾌속선이라 들었는데 그걸 따라잡을 배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 얘긴 나도 알지만, 그래도 현재 상황에서는 배가 말보다는 빠르지 않아요?”

사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다시 말을 출발시켰다.

“제 기억대로라면 여기서 한 시진(時辰, 약 2시간 정도) 거리에 제법 큰 포구가 있었습니다. 거기라면 배를 구하기 수월할 것입니다.”

사영 말대로 2시간 정도 뭐 빠지게 달렸더니 커다란 마을의 입구가 나타났는데, 우리가 도착한 반대편 끝이 강으로 나가는 포구였다. 선창 가에는 언뜻 보기에 꽤 큰 배가 하나 정박해 있는 상태였고 많은 사람들과 짐이 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저건 금방 출발할 것 같지도 않고 또 가다가 여기저기 들르는 완행(?) 여객선 같은 느낌이 들어서 사영에게 다른 배를 알아 오라고 시켰다.

에구구-! 그동안은 고급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오다가 오늘은 계속 말안장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파 죽겠다. 그렇다고 이 무수한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엉덩이를 매만지고 있다가는 남자들의 시선 집중을 받을 것 같고… 제기, 역시 여자는 여러모로 불편하군. 어, 어… 이 말은 또 왜 자꾸 이래? 제기, 팔 힘이 없으니까 말이 고개 짓하며 푸득거리는 정도에도 고삐를 쥐고 있기 힘들다. 계속 이 인간들 태우고 가다간 고생길이 훤하다,라는 생각을 했는지 자꾸 내 손에서 벗어나려 드는 말과 힘겨운 다툼을 하다가- 빌어먹을! 놓쳤다.

“워! 워~!”

음, 누구지? 대신 고삐를 잡아 말을 멈춰주는 저 손의 주인은?

“이놈! 아무리 우매한 짐승이라고는 해도 주인을 무시하는 못된 놈 같으니.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젊지만 굵직한 저음의 음성. 붉은 망토 때문인지 조금 화려해 보이는 복장의 20대 청년이 말을 야단치면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의 턱까지 이어지는 구레나룻이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추남은 아닌 얼굴… 등 뒤의 검과 내공 수치 그래프로 봐서는 무림인인 모양이다. …음? 저 나이에 1갑자가 훨씬 넘는 내공이라니, 사영이나 류혼만은 못해도 꽤 하는 친구인 것 같다.

“이런,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그 정도에 놀라긴… 그냥 너 관찰하느라 말 못한 거다.

“아,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일행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말이 말썽을 부려서 곤란을 겪을 뻔했네요.”

“이, 이 정도야 뭐, 도움이랄 것 있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녀석은 지가 더 황송하다는 듯한 태도로 내게 고삐를 건네준다. 이번엔 여자라서 편한 상황이었나?

“대사형! 거기서 뭐해욧!”

갑자기 어딘 선가 들려오는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에 녀석은 흠칫하더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 참. 대사형! 한참 찾았잖아요. 이 중요한 때 뭐 하는 거예요?”

“아, 사매. 소저께서 말고삐를 놓쳐서 그래서……”

“변명하지 말아요. 하여간, 대사형은 여자만 보면… 음?”

나타난 여자, 아니 소령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망토가 없다는 것만 빼면 대사형이라 불린 친구와 복장이 똑같았는데, 대교 자매들만은 못해도 상당히 귀여운 타입이었다. 그 귀여운 얼굴이 처음엔 감탄의 표정이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더니 날 꼬나보기(?) 시작했다.

“흥-! 댁은 누군데 우리 대사형과 얘기하고 있었지요?”

“작은아가씨가 들은 대로예요. 아가씨의 대사형께서 달아나는 제 말을 붙잡아 주셨어요.”

“그, 그래서 어쨌다고요.”

“그래서 감사 인사를 했고, 그러니 이제 가봐야지요.
그럼……”

나는 다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제기, 또 말(馬)이 말(言)을 안 들어 쳐먹었다.
고삐를 당기며 말을 배 쪽으로 끌고 가려고 하다가 몇 번 거듭한 나는 쪽팔린 마음에 멋쩍게 웃으며 포기하고 말았다.
썅-! 말이 보기에 내가 무지 만만한가 보다.

“어딘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배를 타시려는 것입니까?”

“아, 아뇨. 곧 제 일행이 돌아올 겁니다. 더 이상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여전히 아쉬운 표정인 그를 사매라는 소녀가 재촉하며 잡아끌었다.
가면서도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구레나룻의 청년.
훗-! 보통 무협지 보면 ‘사매는 사부님 딸이고 대사형과 정혼한 사이’라는 설정이 가장 흔한데, 보아하니 두 사람도 그 정도 관계인 것 같지?
저 친구 오늘 바가지 좀 긁히겠구만.

“…아가씨,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제야 돌아온 사영이 구레나룻 청년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아뇨. 그보다 배는 구했어요?”

“그게… 공교롭게도 적당한 배가 없습니다.
속도를 내기 어려운 작은 배뿐이고, 큰 배는 지금 선창 가의 저 배가 정기적으로 운행할 뿐이라고 합니다.
저 배도 신수성녀의 행선지와 같긴 합니다만……”

“후우~ 할 수 없죠. 그냥 저 배라도 타고 가다가 다음에 멈추는 곳에서 다시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20세기라면 작은 모터보트가 더 빠를 테지만 지금 그런 걸 바랄 순 없고, 꼬인다 꼬여.

우린 하는 수 없이 대기하고 있던 배에 탔는데 온갖 부류의 인간들이 우글대는 갑판을 보고 있자니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흠, 어쩐 일인지 무림 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타고 있군요.”

웃! 사영 말 들으니까 더 불안해진다.
하긴 앞쪽 갑판에 어슬렁거리는 험상궂은 사내들만 해도 8,90프로가 무기를 지니고 있었고 그중 내공 수치를 봐서 뒷골목 양아치 수준은 넘을 듯한 자들이 또 절반가량이었다.
특출한 몇몇도 눈에 뜨이고… 쳇! 아직 배는 출발도 안 했지만 일단 선실에 들어가 있어야겠다.
근데 제기… 척 보기에도 서민용 배인 것 같긴 했지만 내부 선실도 그냥 통짜로 하나였고 백여 평 정도 넓이의 바닥에 사람들이 대충 앉아 있었다.
그나마 갑판 위와 달리 대부분 장사치나 하여간, 일반인들로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대충 구석에 자리 잡고 짱 박혔다.
여기서도 여전히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으나 일반인들 입장에서 보면 나와 사영일행이 무림인이라는 것이 티가 나는지, 나름대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어… 대부분 최소한 개나리 봇짐 비슷한 것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정신없이 오다가 마차 안의 짐을 하나도 못 챙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대가, 이 배 언제 출발한데요? 우리 지금 필요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데… 에?”

나는 조금 놀라서 내 눈앞의 바닥으로 밀어 놓여지는 크고 작은 상자 두 개를 보았다.
둘 다 눈에 익은 것이… 큰 상자는 옷과 화장품 등이 든 거고 작은 상자는 의약품 상자였다.

“흑……”

반가운 마음에 하마터면 사람들 앞에서 흑주라고 이름을 부를 뻔했다.
어느 틈에 흑주가 모습을 드러낸 채 상자를 내 앞에 놓고 자기는 내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것이었다.
이거야 원. 흑주 신출귀몰한 거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설마 마차에서 짐까지 챙겨 가지고 따라왔을 줄이야.

“전 이걸…….”

사영이 품에서 꺼내 상자 위에 내려놓은 보따리는 그 한쪽에 대나무로 만든 휴대용 물통이 꽂혀있는 것으로 보아 도시락인 모양이었다.

“후훗-! 다들 준비성이 좋군요. 맘에 들어요.”

사영은 비로소 웃었지만 흑주의 표정은 당근 볼 수가 없다.
어디 안 짱 박혀 있고 나와 내 옆에 앉아있다는 것이 좀 뜻밖이긴 해도 복장은 평소 그대로였고 복면을 한 것이 눈에 뜨일까봐 그랬는지 어디서 삿갓을 구해와서 깊이 눌러 쓰고 있는 것이다.
참 내……
그나저나, 앉아서 한숨 돌리고 나니 오히려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다소 불편한 여행이 되어 버린 정도야 상관이 없지만 일정이 결정적인데서 어긋나 버린 것이 영 불안하기만 했다.
가짜 곡주 행렬은 지금쯤 대교일행과 헤어져 돌아가 버렸을 것이고… 슬슬 극악이 다른 루트로 강호에 나왔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텐데…
당근 앞으로 난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처지인 것이다.
아무리 여장을 했다고는 해도 무림인들 중에 본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들키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녀의 배가 빠르긴 빠른 모양이죠? 보고와 그 정도로 오차가 나다니… 자칫 따라 잡을 수 없게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그 땐 어떻게 든 본래의 일행에 합류하는 편이 낮지 않겠습니까?”

본래의 일행이라면 다른 루트로 비무 장소에 가고 있는 대교 일행을 뜻하는 것이다.
내 쪽에서 보면 그 편이 더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럴 경우 대교가 너무 피곤해질 것이다.
날 노리고 떼거지로 몰려드는 자들을 상대하는 와중에 혹시 부상이라도 당하게 되면 곤란하다.
내가 없을 경우는 화천루의 체면을 봐서라도 정파들도 대교를 굳이 노리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해요. 아직 시간이 좀 더 있으니까.”

“예, 그리고 이제 배가 출발하는 모양입니다. 잠깐 밖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사영이 나간 후 나는 몽몽의 스캔 기능으로 다시 한 번 선실 내의 사람들을 찬찬히 살폈다.
실제로는 중국을 통틀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닐 텐데 무협지 주인공 주위로는 심심하면 등장하는 소위 ‘기인’, 무공을 감춘 고수가 섞여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음… 이 안에는 없는 것 같군. 일단 다행… 응?
안보다는 바깥의 기색이 웬지 이상한 걸? 조금 소란스러워진 것도 같은데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몽몽에게 막 음향 증폭 명령을 내리려던 참이었는데 날카로운 소리가 먼저 안에까지 들려왔다.

“깔깔깔깔~!”

뭐야, 이거. 여자의 웃음소리?

“까알~ 깔깔깔깔깔~!!”

듣고 있자니 이상한 웃음소리는 얼마간 더 이어졌는데, 그만큼 나는 더 심하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웃는 거야 지 맘이라지만, 매우 천박하고 또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불쾌한 느낌을 주는… 하여간 뭐 이런 재수 없는 웃음소리가 다 있

나 싶다.
어…? 어랏-? 이 인간들이 왜 이래?
선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들이 대부분, 특히 남자들은 심하게 맛이 가서 마치 약 먹은 듯한…
뭐, 뭐야. 남자들이 갑자기 입까지 헤에- 벌린 징그러운 얼굴로 하나 둘… 아니 떼지어 내 쪽으로 오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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