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0-1화 :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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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0-1화 :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1)


2-2.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1)

“그래,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삼태자께서는 평안 하시고……?”

인사를 마친 류혼이 몸을 일으키자 나는 짐짓 그렇게 물었다. 류혼 정도의 능력이면 조금 아까 내가 숨어서 지 싸우는 거 지켜본 일을 다 알고 있을 것도 같았지만 류혼은 별다른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그 분께선… 건강하십니다. 전 날 아가씨의 은혜를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되어 늘 감사하고 있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류혼은 진하연을 향해 한 말이었지만 대꾸는 얼른 또 내가 했다.

“내, 아니, 동생의 은혜라면… 음, 아무래도 조금 피곤한 일을 겪고 계신가 보군.”

칠절지독에 중독된 조명환을 원판의 피와 몽몽으로 해독하는 과정에서 그의 몸이 만독불침은 못돼도 독에 상당한 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까지는 진하연에게 말해주지 않았었다. 어쨌든, 조명환이 그 덕을 보았다는 건 요즘도 툭하면 누가 독살하려 들고 있다는 얘긴데… 어느 시대나 권력 다툼이란 피곤하고 추잡한 일인 모양이다.

“두 분도 아시겠지만, 요즘 그 분의 주위가 조금 어지럽습니다. 허나 곧 정리가 될 터이니 진소저께서는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셔도 좋습니다.”

정리…? 그리고 기다리라고…? 누가 누굴 뭐 하러 기다리는데…? 쯧~! 삼태자께서는 여전히 혼자 김칫국 마시고 계시는 모양이군.

“흠, 그렇다면 안심일세. 나도 삼태자님을 늘 생각하고 있으나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는 이 비화곡주도 어길 수 없어 안타까웠다네.”

난 속마음과 달리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란 말은 이 시대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 중의 하나인데, 직역하면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 내지는 ‘~침범하지 못한다.’ 정도가 되겠지만 실제 의미는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상호불가침의 묵계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류혼은 내 유식한(?) 표현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분께선 결코 진소저나 비화곡주님의 수고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번에 제가 무례를 무릎 쓰고 진소저를 찾은 것은 그 분의 편지와 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흠~ 류혼이 품에서 꺼내 놓은 건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단 주머니였는데, 암혼자가 먼저 나서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는 걸 보니 단정하게 말려져 있는 두루마리 하나, 그리고 안목 없는 내가 봐도 아름답게 세공된 황금 팔지 하나였다. 몽몽이 스캔한 결과 순도가 거의 100%에 가까운 황금… 뭐, 어쨌든 선물은 고맙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부터 우리 족적을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류혼의 현재 행색 꼬라지를 보면 그동안 엄청 뺑이를 친 것이 분명한데… 쯧~ 류혼 저 친구도 주인 잘 못 만나 고생이다. 명색이 이 나라 태자의 보디가드씩이나 되는 인물이 여자한테 바치는 선물 택배나 하러 다니고……

“흐응~ 호의는 감사하지만, 소녀에게 이런 귀한 선물은……”

계속 조용히 웃고만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연 진하연은 자신에게(?) 배달된 팔지를 손에 들고 찬찬히 살피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의 낮은 안목으로도 천하에 드문 보물이 분명 하나… 이건 아무래도 한 쌍이 모여야 비로소 그 가치가 빛을 발할 듯 하네요.”

그냥 찍은 건지, 아니면 팔지에 새겨진 문양에 그런 의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류혼은 진하연의 말에 과연… 이라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그 팔찌는 당금 황제께서 그 분의 모친께 하사하신 보물로써, 그 화홍월(火紅月)과 흑태양(黑太陽)이 함께 할 때 지고의 무쌍일월(無雙日月)이 되는……”

류혼의 설명에 나는 새삼 다시 그 황금 팔지, ‘화홍월’에 시선을 돌렸다. 화홍월이라면 나도 몇 번인가 들어 알고 있는 건데… 호오~ 저게 바로 그거란 말이지? 조명환 그 인간, 과연 돈 많은 왕자님답게 선물도 화끈하네 그려? 하도 귀한 보물이라 진하연도 조금 놀란 듯한… 음? 조금…? 우리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1억? 10억…?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될지도 모를… 흔한 말로 ‘도저히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다’는 수준의 선물을 받고도 ‘뭐, 생각보다는 괜찮군’ 정도의 표정이라니… 진하연 저 것도 만만치 않군 그래.

“흠, 이거 태자께서 내 동생에게 너무 과한 선물을 보내주신 듯 하네.”

내 말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보물 화홍월과 흑태양에 얽힌 사연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거절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진하연에게 운을 띄운 것이었는데… 음, 진하연 이 녀석 이번엔 편지를 펼쳐 보고 있군. 옆에서 슬쩍 보니 ‘슬픔에 찬 달이 스스로 몸을 태우는…’ 어쩌구 하는 문장이… 아, 아니, 아니다! 이럼 안 돼지. 아무리 오빠라도 동생 연애편지 훔쳐보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암!

난 무지무지하게 궁금했고 진하연도 특별히 숨기려는 태도가 아니었지만 꾸역꾸역 솟아나는 호기심을 꽉! 꽉! 밟아 누르며 참았다. 애초에 시작은 내가 가짜 여자이며 가짜 진하연으로 분했던 일에서 비롯된 거지 만 현재, 진짜 여자이며 반쯤(?) 진짜 진하연과 바톤 터치했으니 나 진유준은 이제 앞으로 조명환이 사랑하는 ‘신비의 미녀 진하연’에서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고 싶었던 것이다. 난 속으로 ‘유준독립만세’를 부르며 진하연의 쌍둥이 오빠라는, 두 번째 가짜 신분으로의 자기 세뇌를 새삼 거듭해보았다. 음… 이렇게 신분을 넘나들다 보니 어째 내가 무슨 수많은 가명과 신분증을 가진 첩보원이라도 되는 기분이 되는군.

비화곡(秘花谷)을 영어로 하면 대충 SFV(Secret Flower Valley?)…?

음~ ‘곡’이란 단어는 ‘Group’이나 ‘Zone’이란 말로 바꾸는 것도 괜찮겠다.

SFG…? SFZ…?

음, 하여간 일단은 SFV로 해볼까?

전직 대한민국 특공대 하사 진유준, 전역 후 국제첩보 조직 SFV 소속의 첩보원 되다.

음… 그렇게만 표현하면 그럭저럭 무난한데…

암호명 ‘군바리’ 진유준, SFV 본부 견학 왔다가 조직의 짱인 암호명 ‘극악’ 진하운을 얼·결·에 대신하여 조직을 장악하다…?

이렇게 하면 좀 썰렁하다.

후… 어떤 장르로 각색해도 내가 겪은 과정과 현재 상황을 멋있게 묘사하기는 어렵군.

최소한 그때 원판 극악과 맞짱뜨고 이겨서 얻은 지위라면 몰라도…

아니, 원판이가 육체적으로 너무 약하니 그런 녀석을 싸움으로 쓰러트린다는 건, 나 스스로 지보다 약한 사람만 괴롭히는 ‘양아치’로 전락하는 짓일 테고…

그럼 장기나 바둑, 오목, 혹은 스타 한판, 고스톱…

훗~ 누가 물어보면 ‘비화곡주? 나 그거 고스톱 쳐서 딴 거야.’라고 하면 되려나?

아-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머리 쓰는 게임은 반대로 내가 녀석에게 상대도 안 되겠다.

오히려 우리 아부지께서 평생 뺑이 치셔서 장만한 집을 도박으로 날리는 불효자식이 될 가능성이…

“…곡주님!”

“응? 나 도박 안, 어…? 아…하~?”

에구구~! 나 언제 또 망상 모드로 빠졌던 거지?

대교가 부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로소 진하연이 옆에서 날 노려보는 시선이 바늘처럼 따끔따끔하다.

“미안, 미안! 설아, 그리고 류혼에게도 미안! 내가 잠시……”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를 거듭하자, 그 사이 몇 번이나 날 불렀다가 씹혔는지 삐친 표정이던 진하연이 문득 피익 실소했다.

“여전하시네요. 혼자 만의 생각에 빠질 때면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 버릇 말이에요.”

원판도 그랬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그 질이 틀리지.

X팔리지만… 녀석은 ‘생각’, 나는 ‘망상’.

에효~!

“헌데, ‘도박’이라니요? 감히 오라버니께 도박으로 승부를 거는 자라도 나타났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전에 의형과 장난으로 승부를 가릴 일이 있었는데… 서로 장단점이 있어서 종목을 선택하지 못했…었거든.”

아차차! 실언했다. 지금 내 본체 얘기를 꺼내면……

“후후~! 하긴, 천하에서 오직 저의 그 분만이 오라버니의 적수가 될 수 있겠지요. 물론 두 분이 진심으로 다툴 일은 없겠지만요.”

아이고~ 내가 내 무덤 팠다.

그것도 그렇지만 제기, 진하연 이 녀석!

그냥 대충 넘어가 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더 강조하다니!

뭐? ‘저의 그분…?’

으~ 아니나 다를까, 류혼이 즉시 ‘예의바름’을 접고 호전적인 기운을 발산하며 슬며시 다가선다.

“실례지만, 지금 두 분이 언급한 사람이 혹시 진소저와 과거 약혼한 일이 있다는… 그 인물입니까?”

형식상으로는 길게 늘였지만, 류혼의 음성과 분위기로는 그냥 ‘아, 쓰바, 그 X가 그 X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지 주인과 사랑의 라이벌(?)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렇겠지만, 쒸…!

아무리 그래도 역시 내 입 장에서는 은근히 불쾌하군.

“그래요. 하지만 당신… 류혼,이라고 했었죠?”

“그렇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하연은 자신도 한 걸음 류혼에게 다가가 그의 눈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가느다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류혼, 그대는 잘못 알고 있군요. 그분과 저의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요.”

“하, 하지만… 비화곡주, 아니 소저의 오라버니께 선……”

“오라버닛~!”

“으,응?”

어휴, 놀래라. 기집애, 부르고 싶었던 건 난데 지가 왜 먼저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그 분, 진유준님께서 저와의 파혼을 선언하시기라 도 했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게……”

또 아차,다. 그냥 그랬다고 할 걸 진하연이 하도 매섭게 물어보는 바람에 무심코 그만……!

“흥~! 너무 하세요. 오라버니께서 대체 삼태자께 어떤 말을 했기에 이런 오해가 생긴 거죠?”

어, 야아~! 류혼에게 보이는 연기치고는 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으~ 안되겠다. 대화 방향은 둘째치고 나도 빨리 내 독문절기(?) ‘급속단발변신마공’을 써야겠다.

“…흠! 설아야. 너도 알다시피 그 분은 너와 앞날을 기약하기 힘든 몸이 아니냐. 더구나……”

이어서는 ‘어렸을 때 집안끼리 정혼을 했을 뿐 진짜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 않느냐’는 대사를 하려 고 했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진하연은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허공을 응시하는… 그런 모습으로 진하연은 조용, 조용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소녀더러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그 분이…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홀로 싸우고 계신 지금…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그런 현실만도 소녀에게는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을…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선 소녀까지 그 분을 배신하라는 말씀입니까?”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린 진하연은 원망과 슬픔과 그리고 기타 등등 온갖 애절한 표정은 다 골고루 섞여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무 하십니다, 오라버니. 그 분과 의형제를 맺기까지 한 분이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오 마이 갓~!

으~ 이건 전에 잠깐 연극 활동 해 본 정도의 난 명함도 못 내밀 엄청난 연기력이 아닌가.

진하연의 분위기에 말려들어 나도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 이~ 제기! 정신차리자, 진유준! 정신차려! 네가 주도를 해야지 끌려가면 어떻게? 응? 으~오오 옷~!

“…그런 말 말아라. 내가 너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느냐.”

속으로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간신히 대사를 쳐서 (?)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손을 내밀어 진하연의 두 팔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인력으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니 어찌 하겠느냐. 더구나 그 형님은… 그래, 알았다. 내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으마. 미안하다, 얘야.”

내 연기에 반응하여 진하연… 비련의 여주인공은 내 넓, 아니 별로 넓지는 않지만 하여간 가슴으로 뛰어들어서 비로소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계속 어깨를 들썩이는 녀석을 안고 달래다가 조금 멈추는 기색을 보이기에 슬며시 내려다봤더니… 아니나다를까, 녀석은 내 품안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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