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6-2화 : 마군황(魔君皇).(2)
5-3. 마군황(魔君皇).(2)
녀석들의 극단적인 환영 때문에 더욱 모든 돌발사태에 대비한 채 긴장하고 있다 보니 어느 사이 가마는 몽몽의 가상현실 속에서 무수히 오르내렸던 ‘태운산’이라 는 산의 중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는 동안 사방에 매복하고 있는 자들을 확인했지만 가마가 산 중턱의 한 공터에 도착했을 때까지 누구도 습격해 오지 않았다. 상당히 심하긴 했지만 가마에 폭탄을 설치해 놓았던 건 일종의 기초소양 테스트 같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공터의 한 쪽은 절벽이고 그 앞에는 몽몽의 데이터에 없는 오두막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주변의 지형 지물에는 당연하다는 듯 매복 병력이 우글우글했지만 일단 오두막 앞의 공터에 직접 모습을 보인 자들은 15명뿐이었다. 그 중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아홉 명이 아무래도 구중천인 것 같았다. 가장 나이가 들고 덩치가 작으며 얼핏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풍기는 노인네가 선 듯 내 앞으로 나섰다.
“…초사마군(貂蓑魔君) 세유황 이하 구중천이 후보자께 인사드립니다.”
선두의 초사마군과 함께 구중천 모두가 정중하게 상체를 숙여왔다. 후보자에 대한 예의는 확실히 깍듯했지만 이미 당한 일이 있는지라 나는 그냥 고개만 까닥하는 싸가지 없는 태도로 인사를 받았다. 본래 구중천끼리는 서열이란 게 없지만 현재 은연중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초사마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몇 백 년 동안 없었던 후보자께서 창졸간에 나타나신 터라 아직 많은 형제들이 연락을 받지 못하였으나, 곧 다른 형제들도 당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따블로 온다구……?
“저기,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설마 정말 지하무림 전부가 달려들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조금 기막혀하며 묻자 초사마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 달이란 기간은 지하무림의 형제들이 다 모이기에 너무나 짧은 기간입니다. 허나, 다행히 평소 마군황을 위해 준비한 병력들이 있으니 그들이 전체를 대신하여 후보자께 지하무림의 모든 것을 최대한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전체를 대신할 자들도 최소한 그런 숫자였다… 이건가?”
나 이거야 원. 천우신이 말한 ‘현재의 지하무림은 마군황을 원치 않는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아무리 내가 힘든 상황을 환영했지만… 그 거와 별개로 기분이 나빠지는 걸?
“후보자를 위해 약간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만……”
초사마군이 뒤쪽의 오두막을 가리키며 입을 열어서 나는 주저없이 걸음을 떼었다.
“좋아. 애써 준비했을 테니 먹어주지.”
초사마군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오두막 안은 별다른 장식이나 가구도 없고 오직 음식 접시가 늘어선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벌써 주인이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의자로 가서 앉아 흘끗 구중천을 본 다음 별다른 말도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긴 했지만 노친네들을 주욱 세워놓고 젊은 놈이 혼자 앉아서 쩝쩝 식사를 해대는 싸가지 없는 장면을 연출하면서도 스스로도 그리 어색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원판 생활을 꽤 했던 탓인 거 같다.
“음음~ 괜찮은데? 차도 좀 부탁하지.”
초사마군은 군소리 없이 수하를 시켜 차를 내오도록 했는데 향이 좋고 맛도 좋았다. 내가 차까지 다 마신 후에야 초사마군이 물었다.
“만약… 그 음식과 차에 독이 들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독 안 들었잖아.”
내 간단한 대꾸에 초사마군이 조금 동요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미 예상하신 겁니까, 아니면 지금 노부의 질문으로……”
“아무려면 어때. 난 맛있게 잘 먹고 마셨고, 그럼 됐지 뭐.”
“…과연 대범한 분이로군요. 진정 감탄했습니다.”
대범은 뭐… 앞선 문명인답게 좋은 기계 하나 차고 있어서 그런 거지.
“그럼 또 하나 후보자께 묻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이쯤에서 시험 치려면 이름부터 쓰시오(밝히시오), 정도의 요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묻고 싶은 ‘일’이라구? 마군황 시험에 필기, 아니 면접도 있는 줄은 몰랐기에 그건 대비 못했는데……
“여기까지 후보자를 모시는 동안 있었던 일… 그 때 후보자께서는 가마에 숨겨진 폭약의 폭발을 막기 위해 바닥의 심지를 잘라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게 뭐 잘못 되었나?”
“가마에 장치된 폭약은 무취(無臭)로 특수 처리되어 설사 폭약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알아 내지 못합니다. 물론 절정의 고수라면 가마가 달리는 소음 속에서도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겠지요. 헌데… 어째서 그런 불확실하고 위험한 방법을 택하셨습니까. 그냥 몸을 피하면 될 일을……”
“그야 안 그러면 가마꾼들이 죽으……”
아, 가만? 면접관(?)들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좀 신중해야겠다. 태연히 자살 특공조를 동원하는 자들이 휴머니즘 넘치는 사람을 원하는 건 아닐테고… 여기서는 뻥이라도 좀 섞어서 기를 죽이는 편이 나으려나?
“훗-! 그건 농담이고… 실은 내게 그런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야.”
나는 일견 평범한 인상이지만 속에 구렁이가 몇 마리나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초사마군 앞에서 원판형(?)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아는 그 어떤 전문가보다 폭약에 대해 잘 알아.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무취 폭약이라는 것의 숨겨진 냄새를 미리 알아챌 수 있을 정도지.”
내 말에 구중천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특히 괴이한 표정이 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바로 폭약 전문가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뻥이 너무 심했나? 내가 무슨 개도 아니고… 으음- 하지만, 하다만 뻥은 아니 치느니 못하다고 했다.
“…그리고 난 가마에 오르면서 바닥을 두드려보고 그 반동의 파장으로 폭약의 양과 설치된 구조를 파악했지.”
뻥뻐러벙뻥~! 뻥뻥!
“그 다음에는 누가 심지에 불을 붙이는 가만 알면… 심지가 어떤 경로를 거쳐가는 지를 아는 것 또한 간단하지.”
뻥쟁이들의 기본 자세는 끝까지 단호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이는 뻔뻔함이므로 나는 거만한 표정과 함께 ‘이제 알겠나?’라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내 개뻥이 얼마나 먹힐 지는 모르겠지만, 잔득 먹혀서 적들이 폭약 사용에 대한 의욕을 잃기를 바랬다. 사실 폭탄은 있는 거 뻔히 알아도 대처하기가 힘든 물건이니 말이다.
“과연… 그렇다면 이 오두막 바닥에 힘들여 폭약을 묻어 놓은 것도 쓸데없는 짓이었군요.”
응…? 뭔 소리래? 그런 게 있으면 몽몽이 모를 리가 없잖은가. 아무래도 저 능구렁이 할배가 공연히 한 번 찔러 보는 거로군.
“무슨 소린가, 이 오두막에는 폭약 같은 게 없어.”
“아니? 설마… 이 번엔 모르셨던 겁니까?”
초사마군은 괜히 먼저 말했다는 표정이 되는 것과 동시에 약간의 비웃음까지 떠올린다. 확실히 고단수… 내가 지하 수십 미터 아래까지 스캔해내는 미래 로봇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오두막에는 폭약 설치가 안 되어있다’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리얼한 연기력이다.
“훗~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이야. 실망이군. 마군황을 위한 관문이 이런 말장난인 줄은 몰랐는걸?”
내가 마주 비웃어주자 초사마군은 그제야 안색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이번 시험에서 몽몽을 이용하는 것은 컨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먼저 떨어트리려 고 작정을 해서 시험문제 멋대로 바꾸며 시비를 건 것은 그 쪽이라우.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곧 우리 지하무림의 제 2대 마군황 등극 관문을 실시토록 하겠습니다. 후보자께서 원하는 시기에 시작하시면 그 때를 기준으로 삼을 것이나 앞으로 보름 정도 후면 아직 도착하지 못한 형제들이 모두 모이게 되니 보름 후에는 무조건……”
호오~ 웬일로 나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시작을… 응? 가만? 뭔가 빠진 거 아냐?
“잠깐!”
나는 손을 들어 초사마군의 설명을 중단시켰다.
“당신들은 내가 누군지, 당신들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지도 않은 건가?”
“…모든 관문을 통과해 마군황에 오르는 분이라면 구중천을 비롯한 지하무림의 모든 형제들이… 설사 후보자께서 부모형제의 원수거나 곧 원수가 될 예정이라 할 지라도 무조건 따를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마군황입니다.”
“그러니까… 능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이건가?”
“그러합니다.”
어찌 보면 내가 가장 바라는 대답이긴 한데 웬지 뭔가가 찜찜했다. 난 지금까지 스스로 정체를 밝혀서 내가 초대 마군황의 후계자 격인 인물이며 심지어 패도광협처럼 지하 무림을 위험한 싸움에 끌어들이려 하는 점까지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지금은 숨기고 나중 이들이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가 된 다음에 밝히는 편이 나을지… 그걸 고민했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은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그렇게 물으며 내 정글도를 탁자 위에 쾅!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초사마군은 본래는 군마도(君魔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초대 마군황의 애병기(愛兵器)… 내 정글도를 새삼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 군마도와 후보자의 특이한 복장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지하무림의 정보망도 쓸만한 편이라… 후보자께서는 2년 전 고룡포에서 의제인 독각와룡 진하운님의 원한을 갚은 후 행방불명되었던 진유준님… 아닙니까?”
“맞아. 나도 그 사이 꽤 유명해 졌군.”
“진유준님께서는 고려국 출신이지만 전 비화지천의 의형이며 측량키 어려운 잠재력을 지닌 천외천(天外天)…! 강호의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칭찬은 고맙지만… 당신의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에도 난 지금 별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구. 내가 돌아온 후 흐른 시간이 그리 짧은 건 아니었지만 그 동안의 행적이 이렇게 간단히 밝혀지고 정리될 수 있는 것일까? 그 것도 얼마 전까지는 나와 별 상관이 없었던 지하무림 사람들에게…? 이건 좀 아니다. 내 강호복귀나 행적에 대해 평소부터 관심을 가진 누군가라면 몰라도……
“좋아…! 그럼 나도 한 가지 묻지. 지하무림은 과거 패도광협이 초대 마군황이 되었을 때가 가장 전성기였다고 들었어. 하지만 반대로 그 마군황을 따라 출전한 전쟁에서의 희생 때문에 지하무림은 전성기 이전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고도 하더군. 맞나?”
내 질문에 초사마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패도광협 노사형(老師兄)와 아주 비슷한 성향의 인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 독문무공이 같다는 것 말고도 말이야.”
“지금 초대 마군황을… 노사형이라 칭하신 겁니까?”
“그래. 난 그의 사부 격인 인물로부터 생사금마도결을 직접 전수 받은 셈이니 그렇게 칭하는 것이 맞아. 솔직히 말해서 마음속으로는 그저 노선배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지만 말이야.”
“…후보자께서 초대와 같은 성향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노사형처럼 나 역시 마군황이 되면 지하무림을 사지(死地)로 몰아 넣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내 노골적인 말에 구중천들이 일제히 당황한 빛을 드러냈다. 그러나 초사마군만은 여전히 큰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뭔가 굉장히 착잡한… 그런 표정이랄까?
“초대께서는… 분명 당시의 지하무림을 사지로 내몰았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 것은 세간의 평일뿐. 적어도 우리 지하무림의 자손들은 그 분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은…혜?”
“그렇습니다. 한갓 밑바닥 인생의 우리들에게 보다 큰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셨던 점!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과 위대한 중원의 정의를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지켜냈다는 자부심! 그 것만은 세간의 저열한 잣대와 세월의 횡포에도 바래지지 않는 지하무림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래… 그런가?”
“후보자께서 언급한 사지란… 초대처럼 저희들에게 그러한 것을 안겨 줄 수 있는 곳입니까?”
쯧-! 결정적인 핵심을 찔러 오는 군. 이 부분은 설명하기가 좀 그런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역시 같은 것을 줄 수는 없을 거야.”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몰라도 초사마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초사마군이(눈치로 보아 다른 마군들도) 초대 마군황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호의는 아무래도 진심 같은데… 그럼 지금 엄청 오버해서 나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 건 마군황 탄생이 싫어서가 아니라는 거다.
“마군황 후보자로서… 구중천에게 한 가지 더 묻겠어! 지하무림과 구중천이 비록 예전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외부인의 괴뢰(傀儡, 꼭두각시)가 될 만큼… 그렇게 타락한 것은 아니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초사마군 사이에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초사마군은 대답과 달리 모르기는커녕 뻔히 안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저렇게 노련한 인물이 표정관리가 안 된다는 건, 자신의 자랑스런 지하무림이… 그 것도 마군황 등극의 관문으로 엄선된 병력들이 실은 다른 조직 인물의 배후조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인물이 아무리 천하 사마외도의 종주(宗主) 비화곡의 현재 주인 대·천·마·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