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7-2화 : 더블드래곤(Double Dragon).(2)
“…그런 이유로 본좌는 본좌의 좋은 친구이자 만세의 영웅이었던 진하운 전 곡주로부터 받았던 보물을 그의 여동생 진하연 공주에게 돌려주니… 공주 또한 비화곡의 보물을 비화곡으로 반환하는 것이 마땅한……”
대교가 읽어 주는 서찰들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죽은 후 날 대신했던 몽몽은 범인이 누구라는 걸 밝히지 않았으니 진하연이 대천마로부터 저 서찰과 보물들을 받았을 때는 대천마를 특별히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대천마의 요구도 대충 사리에 맞고… 그런데도 비화곡의 요구라는 사실(누군지 몰라도 배신자가 섞여 있다는) 하나 만으로 그런 패악을 떤 거 보면 역시 진하연의 성질 머리는… 아, 아니, 아니… 지금 엄한 하연이 성격 분석할 때가 아니지.
“대교. 그 금잔(金盞)을 먼저 가져와 봐.”
다른 것보다 황금으로 제작된 술잔… 저게 역시 가장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판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천마에게 황금 술잔을 선물했을까? 음… 이렇게 술잔을 손에 쥐고 정신을 집중해 보면… 응? 뭐야? 우쒸- 벌써……?
“대교…! 이 것들 전부 여기 놔둬. 내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며칠 정도 밤을 새다가 깜박 졸 때 와도 같이 쓰윽- 의식과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대교의 모습이 전처럼 서럽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번쩍!
거짓말처럼 뜬금 없이 눈앞의 영상이 바뀌었다. 변화의 중간 과정인 어둠이 거의 생략되다니… 내 본체가 이번엔 눈 뜨고 자고 있었나? 어쨌든… 뭔가 하다 말고 와서 찜찜하긴 했지만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경고’를 마치고 와서 다행이다.
[ 무사히 귀환하신 걸 축하합니다. 벌써 유체 이동 및 목표 신체 접속에 익숙해지신 것 같군요. ]
< 아직 익숙해 졌다고 하긴 그렇지만… 암튼, 벌써 걸린 거냐? >
내 몸을 지탱하고 있던 천잠사를 풀어 회수하면서 묻자 몽몽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일단 주인님을 깨웠습니다. ]
어디… 흐음~ 잘못 깨웠으면 타박 좀 하려고 그랬더니 아무래도 몽몽의 판단이 옳은 것 같다. 아직 정확하게 이 나무를 찍어서 온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아까 엄한 곳으로 유도되어 갔던 횃불의 무리들이 다시 이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멀직히서 계속 이 쪽을 향하고 있는 무리들이나 이미 주변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병력의 모습을 보니 아까 개들이 처음 헷갈려 하기 시작한 이 곳을 정밀 수색해 볼 생각인 것 같았다. 개들이 후각을 잃고 버벅대기 시작하자 즉시 이 곳을 의심해 돌아오다니… 지휘관 안인이라는 자가 생각보다 유능한지도 모르겠다. 웃…! 저 자식! 갑자기 내 쪽을 올려다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내 쪽에서는 횃불 옆의 안인이 보여도 안인의 눈에는 높은 나무 위 그늘 속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순간 섬뜩했다. 아니… 낌새가 어째… 보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 쪽을 의심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쯧-! 정말 전쟁이었다면 적의 저 유능한 지휘관을 먼저 저격으로 해치워 버리는 게 정석이겠지만… 흐음- 어쩐다?
[ 아직 주인님이 설치한 탈주 장치가 발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탈주 지점 부근에도 적들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어 장치 설치의 의미가 반감된 상태입니다. ]
과연 그렇군. 그렇다면……
“좋~아!”
나는 아예 대놓고 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잘하는군! 벌써 돌아 올 줄은 몰랐는데 말야!”
놀라서 다시 고개를 번쩍 든 안인과 더 놀라서 일제히 내가 있는 나무로부터 물러서는 적들… 나는 훌쩍 뛰어 내려 그들 한 가운데에 착지했다.
“아- 잠깐, 잠깐! 진정들 하라구. 할 말이 있으니까 말야.”
싸우는 중에 이런 말이 통할까 싶었지만 다행히 녀석들은 주춤거리며 섣불리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안인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난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 한 달 동안 계속… 너희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을 거야.”
“…무슨 말씀이시오.”
“말 그대로야. 나는 계속 살수를 쓰지 않고 너희들을 상대할 거야. 물론 너희들은 살수를 써도 좋아.”
내 말에 무표정하던 안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엉뚱한 말 때문에 우리의 살수가 무뎌지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오.”
“그런 생각한 적 없어. 다만 한 가지 제안하지. 나와 싸운 후… 나에 의해 부상을 입거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 내가 일부러 살려 줬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뒤로 빠져 주는 게 어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눈치로 보아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기보다는 내가 이런 제의를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 한 사람과 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싸울 수는 없잖아? 하지만 나는 초사마군 말처럼 지하무림의 수법을 가능한 많이 겪어 보고 싶어. 게다가 곧 내 수하가 될 자들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도 않고 말야. 그러니까… 내 손에 죽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알아서 뒤로 빠지고 새로운 사람이 덤벼들라는 거지. 알겠어?”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설명하자 안인은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심…이오?”
“그야 물론!”
“당신이 정말… 살수를 쓰지 않고도 마군황이 된다면… 그렇다면 나 안인은 당신에게 내 검, 내 영혼을 바치겠소.”
응? 그런 비장한 맹세를…? 당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그러나… 당신은 우리 지하무림 형제들의 역량… 또 한 마군황이라는 존칭의 무게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소. 장담하거니와…! 당신은 한 달 후까지 결코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선언하는 안인의 표정… 그리고 다른 병력들의 분위기도 좀더 험악해져 있었다. 에구구~ 그냥 하면서 요령껏 안 죽이면 되지, 괜히 당사자들에게 말했나? 아무래도 뭔가 사태를 더 악화시킨 듯한 기분이 드는군.
[ 다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데요? 그것두 무지하게 요. ]
< 나두 알아, 요정 몽. 내 말실수… 인정. >
[ 흐응~ 클났다, 클났어, 우리 주인님! ]
이런 빌어먹을 꼬맹이 같으니. 이런 상황에서 주인님 약을 올리다니… 철없는 요정 몽을 어떻게 혼내 줘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할 틈은 물론 없었다. 원판 몽몽이 알아서 요정 몽 제재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사방의 적 병력들이 더 살벌해진 살기와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 중 오른 쪽을 선택하여 먼저 마주 몸을 날렸다. 평소의 힘에 한 박자 늦은 스피드로 정글도를 쳐 올리니 두 명의 칼이 허공으로 퉁겨 올랐다. 빈손이 된 칼 주인들의 바로 앞까지 선뜻 다가선 나는 삼시전결로 동시에 세 명의 가슴을 베었다. 감촉으로 보아 겉옷과 피부 약간을 벤 듯했다. 나는 후읍-! 한 번 숨을 삼킨 후 사방으로 총 열 다섯 번의 검기를 날렸다. 그 수만큼의 적 병장기들이 갈라지고 부서지며 흩어졌고 나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런 내 기세에 눌려 순간 주춤했던 다른 병력들이 다음 순간 이를 악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달밤의 체조… 아니 달밤의 칼춤이 시작되고 있었다.
…30분. 싸움 재개 후 불과 3, 40분이 지났을 때였다. 내 주변에는 대 여섯 명의 병력이 쓰러져 있었지만 곧 스스로 기거나 굴러서라도 물러섰다. 만약 지금까지 계속 저렇게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내게 덤벼든 모두에게 살수를 써서 죽였더라면 지금쯤 이 장소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만큼 강하다…라는 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이런 상황 진행 속에서도 적들이 기가 죽는다거나 해서 공격이 멈출 분위기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까의 내 말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래 이런 놈들인 건지 몰라도… 하여간 나는 아직 상처 하나 입지 않았음에도 어느 사이 아까 숨어있던 나무에 등을 기대야 할 만큼 밀려난 상태이다. 아까 내가 제의 한 것을 받아들인 건지 한 번 내게 당한 자들은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적 병력의 수는 오히려 두 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그야말로 인해전술(人海戰術)! 후우… 인해전술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조금 지쳐버렸다. 연습 때는 비슷한 상황에서 몇 시간을 싸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실전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몸에 힘이 들어 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좀 쉬어 볼까나?”
내 중얼거림에 ‘어림없다’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는지, 놈들은 아예 무슨 유명가수의 광팬들이 가수의 사인이나 머리카락, 옷 조각 따위를 강탈(?)하러 오는 듯한 기세로 우르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앞으로 달려나가며 뛰어 올랐고 정면의 무수한 적과 병장기들에 몸을 던지는… 척, 하다가 찔러 들어오는 창 하나의 위쪽을 밟고 그 탄력으로 뒤쪽으로 날았다. 허공에서 아까 숨어있던 나무의 중간쯤 가지를 살짝 디딘 나는 경공을 발휘하여 곧바로 더 위쪽 가지 사이로 달아났다. 이런 식의 회피 정도는 적들도 예상했었던지, 즉시 아래쪽에서 암기며 화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걸 적당히 피하고 막으면서 아까 설치한 도주 장치로 이동했더니 그 사이 몇 명인가는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돌리고 있었다. 저 녀석들이 올라오면 처리하고 갈까도 했지만… 이미 밧줄을 타고 올라오던 놈 하나가 자기 편 대공포화에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같은 편이 있거나 없거나 사격을 멈추지 않다니… 징한 놈들! 도주 장치라는 게 사실 그리 대단한 건 못 되고, 아까 내가 쏜 화살에 천잠사를 묶어 놓았었고 그 끝을 다시 여기 나무의 가지에 연결한… 극히 원시적인 리프트인 셈이다. 나는 기를 상단전으로 운용하여 체중을 줄이면서 정글도 손잡이 부분을 천잠사에 걸었다. 그리고 몸을 날려…
아아아아아~! 타아잔~! 실제로 그렇게 소리치진 않았지만 그 비슷한 기분과 함께 나는 맹렬한 기세로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았다. 안인의 고함소리와 화살 몇 대가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 같았으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뒤로 멀어져 갔다.
헌데… 화살이 꽂힌 곳이 출발한 장소에 비해 현저히 낮은 지형이어서인지 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속도가 내 예상 이상이었다. 엄청난 스피드에 의한 공기의 압박으로 정신이 멍해질 정도의 상태에서 별안간 내게 달려드는 거대한 나무의 몸통…! 즉시 뛰어내리며 경공과 낙법을 써서 몸을 보호했지만 지면과의 충돌 충격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에구구구구~ 팔다리 어깨 허리 팔…! 제기. 영화에서 보면 다들 가뿐하게 이 짓을 하던데… 말짱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나 정도 고수가 땅에 꼬나 박아서 부상(?)을 입을 정도라니 말이다.
[ 이 부근에는 적의 병력이 없습니다. ]
암, 그래야지. 저기서 그 개떼들을 계속 상대했던 건 여기에 아무도 없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이래야 보람이 있지. 귀중한 남자의 허리가 다소 뻐근하긴 했지만, 어쨌든 불과 몇 분만에 간단히 포위망을 탈출한 나는 즉시 화살을 회수하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는 했는데, ㅎ 그 과정이 좀 썰렁했다. 이럴 때 영화나 만화의 주인공들은 그냥 튀던데 나는 아까운 천잠사를 회수하기 위해 100미터가 넘는 천잠사를 실타래에 계속 감으면서 달려야 했던 것이다.
천잠사는 사실 비화곡 성지에나 많지 시중에서는 무지 귀하고 비싸서 천이단이 아니었으면 내가 원하는 만큼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멋진 친구 천우신도 더 이상 현물의 무상 서비스는 곤란하다고 하면서 천잠사 대금으로 내 몫의 진주를 몽땅 쓸어갔기 때문에 사실 난 얼마 전부터 빈털털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한 달 동안 천잠사가 또 쓰일 일이 많아서 그러는 거지 결코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건… 음, 하여간 이런 탈주법은 앞으로 좀 삼가야겠다. 실 감는 거… 디게 번거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