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6화 : 흑주(黑蛛)의 과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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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4-6화 : 흑주(黑蛛)의 과거 (6)


  1. 흑주(黑蛛)의 과거 (6)

답파화미인(踏破花美人).
…몽몽이 재빨리 몇 가지 해석을 띄워 보여 줬지만 당장은 그 쪽에 신경이 가질 않았다.

“흑주 너, 이건 대체……”

나는 녀석이 처음으로 보여준 자신만의 행동에 기뻐하며 녀석의 두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 옛날 소악도의 이름 모를 소년,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어린 흑주를 해치지 못했던 그 소년이 흑주의 두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 지가 궁금했다.
내 모습이 그대로 비춰지는 거울 너머에 어른거리는 저것은 짙은 어둠…? 슬픔…? 외로움…? 두려움…? 아니면 희망…? 아니면……

먼저 슬쩍 시선을 돌린 것은 흑주였고 나도 비슷한 순간에 시선을 거두었다.
빌어먹을… 모르겠다. 우이 쒸~ 흑주의 눈동자에서 뭘 찾아내기는커녕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민망함이 밀려오는 바람에 나는 뒷머리를 극적이며 공연히 술잔을 홀짝였다.
제기,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상대의 눈빛만 봐도 생각을 줄줄이 읽어 내더구만 나 진유준에게 그런 초능력(?)은 무리였는지 결국 X라 쑥쓰러웠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흑주 같은 상대는커녕 그동안 여자들과… 특히 대교와도 이렇게 오래 시선을 합쳐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쩍 대교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고 흑주는 그 사이 다시 복면을 쓰고 본래의 위치와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흑주의 처절한 성장 과정과 거두마군 부부의 잔혹함 등에 분노하여 불타던 감정이 흑주와의 눈싸움(?) 한 방에 스러진 어이없음에 나는 웬지 전신에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기… 대체 나란 놈은……

에이, 기분 추스르고 흑주가 준 검은 천 조각과 거기에 써 있는 글이나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일단 이 검은 천은… 혹시 흑주의 복면과 같은 재질인가? 그걸 일부 찢어 글을 새겨 넣은 걸까?
답파화미인… 밟혀 깨진 꽃의 미인? 밟힌 꽃 같은 미인…? 이건 말도 안 되고, 음… 아무래도 몽몽이 직역한 몇 가지 중에 ‘꽃을 밟아 부순 미인’이라는 표현이 가장 유력한 것 같지?
의역해도 꽃을 짓밟아 부술 정도로 못된 미인…은 설마 아니겠지?
살짝 둘러치고 업어치기 기법을 동원해설라무니- 꽃(모란…?)과 비교하여 그 정도로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수준의 미인이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 근데, 그럼 누가……

설마 흑주가 대교자매나 다른 어떤 미녀에게 뻑가서 지금 그걸 고백한 거…?
흐음~ 흑주에게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그림이 안 그려지는 걸? 천장이나 기타 어둠 속에 짱박혀서 곰살맞게 수를 놓고 있는 흑주라……

[ 해당 직물과 구성물이 제조된 추정 시기는 20년에서 30년 사이입니다. 일부 조직이 변한 곳은 열에 의한 손상으로 추정됩니다. 보다 정확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 샘플을 제공해 주십시오. ]

빨리도 알려준다, 몽몽. 어쨌든 천 가장자리의 변색된 부분은 불에 탄 흔적이라 이거지?
게다가 그 정도 옛날 물건이라면 혹시 흑주가 거두마군 부부에게 발견되기 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건가?

“커흠, 흠, 흠~!”

내가 불쑥 쳐다보자 호기심 어린 태도로 기웃대던 거두마군과 소살파파가 어색한 태도로 헛기침을 하며 먼 산을 본다.

“두 사람… 이거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하는 꼴이 두 사람답지 않고 이상해서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두 사람 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는 소살파파가 거두마군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흑주를 얻었을 때, 우린 흑주가 가지고 있던 것, 걸치고 있던 모든 걸 거두어 태워버렸지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양반이 갑자기 손수 불 속을 뒤져 그 나마를 건져냈지요. 소악도에서 흑주가 망토처럼 걸치고 있던 천의 일부인데… 설마 흑주가 아직까지도 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거두마군… 당신이?”

거두마군은 내가 말릴까를 망설이는 사이 그 불편한 몸으로 땅바닥에 내려가더니 날 향해 엎드리며 말했다.

“그 때, 하늘 아래 일체의 인연이 없는 자를 만들라는 신군(神君)의 명을 어기고 과거의 흔적을 남긴 것은 저입니다. 이제라도 벌하시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왜, 그랬지?”

“그저… 그때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순간에도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흑주에게 측은지심이 생겼었는지도……”

“당신이…? 그 수많은 아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거두마군, 당신이?”

“…모르겠소이다. 단지 지금 와서 그렇게 생각할 뿐인지도……”

제기, 어느 틈에 자리에서 소살파파도 함께 땅바닥에 엎드려 있다.
표현이 괴팍하고 과격해서 그렇지 당신들도 소위 제자 사랑이란 것이 있다는 건가?
어쩐 일인지 두 부부 사이에는 자식도 한 명 없다고 했던가?
후… 그래도 역시 간단히 ‘알고 보니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긴 싫지만… 근데, 나참~ 광박사 저 양반은 왜 괜히 덩달아 따라서 엎드려 있고 난리야?

“거~ 쌩쇼 하지 마쇼.”

“예……?”

“그냥… 괜한 짓 하지 말라는 말이야. 내가 그런 걸로 당신들을 치죄할 생각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잖아.”

사실 나란 놈이 이 노인네들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 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노인네들 붙들고 핏대 낼 때가 아니다.
흑주가 모처럼 자신의 의지로 행동한 사실을 기뻐하고 흑주의 과거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지도 모를 이 천 조각을 분석해 보는 것이 더 급했다.

고룡촌을 찾은 것이 오전이었는데 거두마군 부부의 오두막을 뒤로 하고 본단의 창천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몽몽에게 답파화미인이란 글자가 수놓아진 천 조각의 분석을 부탁해 놓은 나는 다시 혼자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크으~ 쓰다. 쓰고 또 독하다. 지난 일년 동안 가장 즐겨 마시던 백화주인데도……

소령이가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몇 잔을 원샷으로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흑주가 겪은 일들을 곱씹던 나는 차츰 거두마군 부부와 있을 때보다도 더 우울해져갔다. 흑주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 알 수 없는 분노… 그 것들은 결국 나 자신에게 향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주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더러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길을 걸어왔지만, 나는… 나 진유준은 어떤가. 내게는 선택권이 있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쩌면 나는 흑주와 다르지 않은 길을… 계속 다른 사람을 해쳐야만 살아남는 길을 택한 건 아닐까…? 나는 꼭 이 길을 선택해야 했을까…? 나는… 얼마나 더… 나쁜 놈이 되어가는 걸까……?

또 한 잔… 후… 어째 저 소령이 녀석이 담당일 때… 유독 이렇게 많이 마시게 되는 것 같기도… 녀석에게는 이번 수련에 대해… 따로 칭찬도 못해 줬는데… 좀… 미안하군. 제기… 간만에… 술이 날… 마셔간다.

빰빠라밤빠밤빠바아~~~~ 다음 날, 나는 변함없는 혈랑대의 기상 나팔 소리와 함께 부활(?)했다. 잠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담당인 소령이까지도 내보내고 또 흑주에게도 내 처량한 표정을 보이기 싫다는 마음에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는 건데, 눈을 뜬 아침에는 평소처럼 천장을 향한 대자였다.

그게 좀 민망하긴 했지만 컨디션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듯했다. 우선 일찌감치 시작해서 그런지 마신 양에 비해 비교적 숙취가 적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미 타임씨와 대화라는 형태로 많은 부분 스스로 정리를 했기 때문인지 나는 전날 들은 흑주의 과거보다 그 상황에 처하기 전의 흑주를 알기 위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거두마군의 말로는 흑주가 하도 말이 없어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소악도에서 죽기 전의 한 아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흑주가 소악도에 살기 시작한 것은 그 3년 전쯤이고 그 전의 일은 다른 아이들이나 흑주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소악도의 고아들이 대부분 그렇듯, 본래 천인군도 출신인지 아닌지 조차도 말이다.

아마도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 사고를 당했거나 버려져서 부모와 헤어졌던 모양인데… 어떻게든 녀석의 과거를 찾아 연결시킨다면… 그렇다면 혹시 저 흑주도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비화곡주 진하운의 그림자 이전의 자신을 말이다. 무엇보다… 이미 흑주가 한 번 보여준 일탈 행동이 희망적인 기대를 하게 했다.

“몽몽, 시작하자.”

[ …분석 결과, 해당 직물의 제조 시기는 27-28년 사이이며 염색 시기와 글을 구성한 실의 생산 시기도 유사합니다. ]

“음… 이 천의 무슨 특징 같은 거 없냐? 여긴 그러니까… 전부 수 작업으로 만든 거 아냐. 천 짠 방식이라던가 염색 수법… 아, 그렇지. 이 답파화미인이란 문장이 들어간 글과 글자들의 서체도 한 번 검색해봐.”

[ 이미 저에게 입력되어있는 문서들과의 비교는 끝냈습니다. 같은 문장이 들어간 글은 8건이나 모두 100년 이상 전의 문서들입니다. 유사 서체의 기록은 2114건 발견되었으며 원본의 글이 작성자의 고유 서체라는 근거가 적습니다. ]

그건… 음, 하긴 그렇다. 붓으로 쓴 것도 아니고 실로 수를 놓은 거라 특징 잡기가 힘들 것 같고 또, 이 천의 주인이 남자일 경우 다른 사람에게 시켰을 수도 있겠다.

“그럼 일단 그건 넘어가고, 다른 특징은?”

[ 해당 직물의 모든 구성물 제조 기법을 분석해 놓았습니다만, 원본과의 비교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

“것 두… 그렇겠군.”

결국 일단은 내가… 아니 우리 훌륭한 비화곡의 일꾼들이 수고 좀 해줘야 할 일들이 우선인가? 근데 막상 일을 시키려고 해도 문제가 보통이 아닐세? 이 넓은 중원대륙에서 생산되는 모든 천의 샘플을 구한다는 걸 기준으로 하면 수집하는 이들이나 일일이 검사해야 할 몽몽과 나도 과연 늙어 죽기 전에… 아니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24시간 뺑이 쳐도 가능한 일일까?

나는 얼마간의 고민 끝에 몇 가지 방법을 병행하여 밀어붙이기로 하고 우선은 처음 떠올린 대로 월영당과 외당을 동원해 지역별로 가능한 한 많은 천 조각의 샘플을 모아 오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그다음엔 비화곡 내의 직물 전문가들을 모두 불러모으도록 했다.

당근스럽게도 본단 쪽에는 없고 다들 일반시민(?)들이었는데, 처음엔 그 자체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곡주가 직접 불러 모인 자리이다 보니 다들 너무 쫄아서 도무지 섣불리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대교까지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더니 겨우 다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별 소득은 없었다. 공통적인 의견은 ‘매우 드물게 질이 좋은 비단’이라는 건데, 질 좋은 비단이 어디 한둘인가? 심지어 내 화장지(?)도 질 좋은 비단인 것을……

그 상황에서 뜻밖의 인물이 나섰는데 그건 바로 총관 지천공이었다.

“제가 전에 이 것과 비슷한 재질을 만져 본 것 같습니다. 헌데… 기억이 잘……”

총관은 물론 ‘생산자’가 아니지만 시간이 되는 한 본단에 반입되는 물건들을 일일이 자신이 직접 확인한다는 성실 공무원(?)이다. 그 진가가 이런 때 드러난 셈이다.

“죄송합니다 곡주님. 좀처럼 정확한 기억이 나질 않으니, 하지만 어쩌면 그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금포사신(錦袍死神)이라 불리던 ‘신세의’라는 자인데 3년 전 입곡한 2급 거민입니다.”

금포사신이라는… 어째 많이 들어 본 듯한 명호를 가진 신세의는 꽤 잘나가던 마도인인데 항상 비단 복장을 입고 있는 건 물론이고 집안 인테리어까지 가능한 한 모두 비단으로 도배를 할만큼 비단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날로 본단으로 한 번 불러서 얘기해 보니까 과연, 이건 보통 매니아가 아니었다. 오십 평생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비단을 찾고 수집하는 재미로 살았다는 그는, 무공은 대체 언제 익혔을까 싶을 정도로 비단을 짜는 온갖 기법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으며 지금은 스스로 제직한 비단으로 2차 생산물 제작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곡주 앞이고 뭐고, 한없이 비단의 아름다움에 대해 떠들어댈 것 같은 금포사신의 말을 막고 흑주의 천을 보여 주자, 그는 면밀히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비단 자체는 양읍산(孃邑産)인 것 같아 보입니다만… 염색은 하남성(河南省) 부근에서 많이 쓰는 기법을 쓴 듯합니다. 확실한 건 조금 더 시간을 주셔야만 알 수 있겠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변색이 적은 것으로 보아 적산수(籍傘水)에 3일 동안 담근 후 빛이 약한 장소에서……”

“저기, 그 정도로 하고. 앞으로 시간을 넉넉히 줄테니까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서 보고하도록 해. 필요하다면 출장도 허가할 것이고… 일이 끝날 때까지 그걸 가지고 있도록 해.”

“조, 존명!”

총관이 비화곡주의 문장이 새겨진 금패(金牌)를 건네주자 금포사신은 새삼 정신이 확 드는 모양이었다. 내가 금포사신에게 준 건 우리 조선시대의 암행어사 마패와 비슷한 개념이니 임시직이라고는 해도 2급 거민인 그에게는 엄청난 벼락 출세인 셈이랄까?

뭐… 거기까진 좋았다. 금포사신 신세의를 비단 제조지 수색 전담 암행어사로 만든 후 일주일이 지나자 슬슬 수집된 천 조각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다시 일주일쯤 되니까 내 옆 방 하나가 거의 차서 완전히 창고화 되어버렸고… 결국 난 보름 만에 항복하고 모두에게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난 보름 동안 참고 있던 술상 앞에서 한 잔 찌끄리며 쓴웃음을 안주 삼아야 했다.

에구구~ 그냥 천도 아니고 비단씩이나 되는 고급 제품이라 그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좀 질려버렸다. 내가 이번에도 일을 너무 만만히 봤나? 사실 내가 했던 일이라곤 가져오는 거, 내가 조사하는 척 하면서 몽몽에 입력시키고 비슷한 천이 발견되면 따로 정리하는 정도였다.

그런 내가 이런데 느닷없이 첩보원에서 택배원으로 변신하여 뺑이치며 전국을 누비는 월영당과 외당 요원들은 오죽할까.

이런 일 안 시켰다고 해도 어차피 그냥 놀며 지내는 요원들이 아니긴 하다만… 하여간 좀 쉬게 하는 편이 더 일에 능률이 오르겠지?

쳇, 기대했던 금포사신에 대한 실망도 컸다. 빌어먹을, 뭘 어떻게 조사하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금포사신의 조사로 지역 범위가 좀 좁혀지기를 바랬는데 말이다.

아무리 지겨운 단순 작업이라지만 불과 보름 만에 항복하고 다른 사람들 핑계대며 꾀부리는 나 자신에게 조금 한심한 기분도 들어서… 또 한잔!

에효~ 흑주야… 우리 흑주야~ 네 과거 찾기는… 아무래도 좀 시간이 걸릴 것 같구나. 이 무능하고 불성실한 주인을 용서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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