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1-3화 : 천년지애(千年之愛).(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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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41-3화 : 천년지애(千年之愛).(3)


5-8. 천년지애(千年之愛).(3)

소림사의 중죄인들이 갇혀 있지만 강호에서는 물론이고 소림사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의 고승이 아니고는 누가 갇혀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예의 금역! 그 곳의 입구는 천이단의 정보대로 소림사 뒤편 절벽에 위치한 참회동(懺悔洞)과 인접해 있었다.

우리는 비화곡 성지로 가는 길 못지 않게 음침한 지하동굴에서 청아 화상의 안내를 받아 지루할 정도로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했는데…

언뜻 공간이 넓어지고 많은 횃불로 환하게 밝혀진 지점에 도착했을 때, 청아 화상이 벽 한 쪽을 향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 청아가 인사드립니다.”

청아 화상의 인사를 받은 묘선 대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협물 속의 유폐된 고수 분위기였다. 동굴의 바위벽에 굵은 쇠사슬로 두 팔과 온 몸이 칭칭 감겨 매달려 있는 것도 그렇고 멋대로 자란 흰 머리카락과 수염, 눈썹 때문에 이목구비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인 것도 그랬다.

“화선을 데리러 왔다는 시주들은 이리… 내게 가까이 오시게.”

나한전 앞에서 들은 음성과 일치했으며, 전에 몽몽을 통해 들었던… 싸가지 진에게 ‘이봐~ 화선(畵仙)! 날 이렇게나 흥분시키고 어딜 간 거야?’라고 소리쳤던 그 음성이 틀림없었다. 몽몽의 1차 측정으로 판단되는 내공 수치는 비화곡 성지의 아수라 백작을 능가…!

나는 그야말로 희대의 괴물 고수 앞에서 잔뜩 긴장한 대교의 손을 잡아 이끌며 함께 앞으로 나섰다. 묘선 대사의 깊숙한 두 눈동자가 탐색하듯 우리의 면면을 살피더니 결국 날 주목하며 말했다.

“자네에게는… 아무래도 앞으로 언제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상이 보이는 군.”

이런 쓰바~! 무협지 주인공처럼 근골이 훌륭해 제자로 삼고 싶다고는 소리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허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 본승이 전하는 비결을 간직하고 있으면 운명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게야.”

으음~ 말을 이상하게 해서 그렇지 결국 뭔가 전수해 주려는 패턴은 맞군. 하지만……

“저기, 말씀은 고마운데 제가 좀 바빠서요. 바로 화선을……”

나는 고개를 돌려 한 쪽 구석의 횃불 아래에 쭈그려 앉아있는 싸가지 진을 보았다. 그녀는 얼핏 이 시대의 여자들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정신없는 여자를 데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만의 재회이고 그 동안 그렇게 기다려 왔음에도, 내 입에서 처음부터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저 진짜 싸가지 진이 우리가 온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고개도 들지 않고 자신 앞의 바둑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한 ‘정신없는 여자’라는 표현 때문일까? 묘선 대사가 갑자기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고 그 광소에 담긴 가공할 내공이 동굴을 쩌렁쩌렁 울리며 사방에서 흙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으아아~ 뭐 하는 거예요, 허닛! 바둑돌이 다 흐트러졌잖아욧!”

그제야 고개를 든 싸가지 진이 씩씩대며 일어서더니 묘선 대사에게 다가가 더 뭐라고 침을 튀겨가며 따지는 것을… 청아 화상과 우리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지켜봐야 했다.

“…화선. 그만 진정하고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 보게 나.”

“에? 아참! 이야-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요?”

비로소 날 돌아본 싸가지 진이 호들갑스럽게 반가움을 표하며 다가왔다.

“흐응~ 응~ 응~”

작게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마치 실험대상 동물을 보듯 연신 나와 대교의 위아래를 흥미롭게 훑어보는 이 여자를… 그냥 확 받아 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입을 열었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느라 연락도 안 받고 있었던 거요.”

“아- 그건 미안해요. 이 시대 ‘두뇌 게임’이 그렇게 재밌을 줄은 몰랐거든요. 세상에, 내가 두뇌 게임에서 50% 이하의 승률인 건 처음이라구요!”

“…그러니까, 바둑 두며 신선 놀음하느라 우리 연락을 씹고 있었다아~ 이거요?”

“후후-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뭐… 조금 전에는 도움을 줬잖아요.”

“이 것 봐욧!”

나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한 건 저 묘선 대사가 알려 준 걸 통신으로 전달한 것뿐이잖아. 게다가 우린 그런 도움 없이도 결국 백팔나한진을 깰 수 있었다구!”

참아왔던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 정말 뭐 하는 여자야? 내가 다른 시간대에 무슨 문제 생길까 봐 얼마나 조심하며 고민하고 살았는 줄 알아? 근데 당신은 뭐? 인공위성씩이나 가져와서 날리질 않나? 광선총으로 사고 쳐서 이런데 갇히지를 않나! 여기 사람들에게 미래에서 왔느니 어쩌느니! 귀신 운운하는 얘기가 나오는 거 보니 당신 입체 영상도 사람들 앞에서 막 쓴 거지? 당신 정말 과학자 맞아? 응? 게다가……”

“그만!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쳇-! 무슨 남자가 이렇게 말이 많아요?”

“으으~”

빌어먹을! 이 싸가지와 말하다보면 감정 제어가 너무 힘들다. 대교가 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말리지 않았다면 최소한 뺨이라도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으음- 미안해요. 어쨌든 다 내 잘못이었는데… 내가 말을 너무 함부로 했죠?”

쳇! 이제야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는 군.

“당신이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가긴 가야겠는데……”

싸가지 진이 그렇게 말하며 청아 화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싸가지 진은 갑자기 사람이 변하기라도 한 듯 조신한 표정으로 바뀌어 묘선 대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여자 설마… 자신보다 세 배가 넘는 나이의 이 노승을 진심으로 좋아했었다는 건가?

“허허- 내 화선이 이 곳에 왔을 때부터 오랜 인연은 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네. 나의 마지막 묘수는 작별 선물로 생각하게나.”

묘선 대사의 말에 싸가지 진, 아니 화선은 갑자기 바둑판을 가지고 오더니 거기다가 재빨리 바둑돌을 늘어놓았다.

“이건 그 동안의 제 답례예요. 앞으로 일주일 안에 이 국면을 풀지 못하면 내가 이긴 거고… 그리고 그 시점에서 제 쪽의 종합 성적이 위가 되는 거예요. 알겠죠?”

답례라기보다 그냥 집요한 승부욕의 산물일 뿐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당사자들은 만족하는지 싸가지 진은 주섬주섬 자기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묘선 대사의 잘 보이지 않는 얼굴도 웬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저어… 백팔나한진을 깼다고는 하나 너무 쉽게 풀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스승이라고 해도 묘선 대사는 금역에 갇힐 정도의 중죄인이고 화선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대교의 말을 듣고서야 나도 청아 화상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내 보았다. 그런데 그는 웬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스승인 묘선 대사를 보고 있다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승께선 소림의 죄인이어서 이 곳에서 지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여 자신의 몸을 결박하고 고행의 길을 선택하셨을 뿐……”

호오~! 천이단도 모르는 비밀스런 사연이 있었다는 건가?

“그런 말을 하지마라, 청아. 나는 분명히 부처님을 대할 면목이 없는 죄인이니라.”

“하지만, 스승님! 스승님은 그 때 그가 누군지도 몰랐으므로……”

청아 화상은 새삼 복 받히는 감정을 주체 못하면서도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자세히 묻기는 어려웠지만, 아무래도 묘선대사가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고, 그게 다른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는데 본인이 인정을 못해 스스로 이 금역으로 들어와 30년 넘게 저런 모습으로 참회하고 있다는… 그 정도의 사연인 듯 싶었다. 웬지 숙연해지는 분위기…였지만!

“아, 그리고 이건 보너스~!”

싸가지 진이 갑자기 그렇게 말하며 묘선 대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가 대사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하자 청아 화상은 정신없이 아미타불을 찾았고 묘선 대사는 다시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 몽몽… 이거 아무리 봐도 우리가 생각하던 원조교제(?)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

[ 그렇습니다. 전의 통신에서 묘선 대사가 ‘흥분했다’고 했던 말은 아마도 진이 낸 바둑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

< …그럼 청아 화상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우릴 막은…… >

어느 사이에 싸가지 진이 나와 대교에게 다가오더니 왼손을 들어 전에 본 적이 있는 손목시계형 타임머신,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에 있는 타임머신 본체(장난 아니게 크다 함.)의 제어기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럼 가죠. 정말 이렇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잠깐! 멈춰!”

어이가 없었다. 마치 옆집에 놀러왔다 돌아가려는 것처럼 하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냥 보고 있을 뻔했던 것이다.

“뭐…죠?”

“나 참! 뭐 할 때 미리 말 좀 해요. 이제껏 신선놀음하고 있던 사람이 이런 일은 또 이렇게 느닷없이… 왜 이래요, 정말.”

“그럼 뭐, 대단한 송별 행사라도 벌이며 떠나야 한다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사실 난 아직 이 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 당신이 또 사고 칠까봐 먼저 구하러 온 거니까, 이젠 제발 좀 차분하게 좀 굴어요.”

“훗~ 내가 차분하지 못하다고요? 그런 얘긴 또 처음 들어보는군요. 난 항상 합리적으로 움직일 뿐인데……”

“합리적? 그게 이런 곳에서 바둑 두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몰랐던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뭐어- 사람이 항상 똑같이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기막혀하는 내 앞에서 싸가지 진은 손목의 제어기를 다시 만지작대더니 피식- 짧지만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웃음을 보였다.

“과연… 그렇군요. 하긴, 나도 이렇게 쉽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믿기지는 않았어요.”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일을 하려던 사람이라고 믿기지가 않았지만… 하여간 내 딴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또 다지며 왔던 싸가지 구출 작전은 이렇게 상당히 허탈하게나마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소림사를 나와 돌아가는 중에 싸가지 진은 나와 몽몽이 오해했던 얘기를 듣더니 깔깔대고 웃었다. 묘선 대사와 싸가지 진 사이에 있었던 교제는 바둑을 통한 정말 순수한 교제였던 모양이었다.

싸가지 진의 얘기와 금역을 나오면서 청아 대사에게 들었던 증언까지 해서 종합해서 정리해보면… 처음에 싸가지는 금역이 아니라 그냥 빈 창고 같은데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청아 대사가 몸에 지니고 다니던 바둑 묘수 문제를 떨구고… 싸가지가 풀고… 문제 낸 묘선 대사를 만나게 되고… 대충 그런 과정을 거쳐서 금역으로 초대되어가게 된 거란다.

그리고 멍멍이 응가도 약에 쓸데가 있다더니, 웬일인지 싸가지 진이 묘선 대사의 마음에 들었고 계속 함께 바둑 두며 오손도손 놀다 보니 지난 30년 동안 웃는 건 고사하고 감정 표현 자체가 거의 없던 묘선 대사에게 차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스승이 이제 조금만 더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면 스스로 금역을 떠나 본래의 위치로 복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청아 대사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게 될 소문까지 감수하면서 그녀를 금역에 붙들어 두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뭐… 마이 허니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대체 묘선 대사를 왜 허니니 뭐니 부르는 겁니까?”

“뭐 어때요. 그리고 사실… 귀엽잖아요, 그 사람.”

“나참~ 몽몽에게 듣기로는 그런 타입도 아니면서 사람 헷갈리게스리……”

“후후- 당신이 몽몽이라 부르는 그 로봇에 입력되어 있는 내 신상 정보는 사실 거짓이에요.”

“에?”

“사실 꼭 당신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누군가에게 넘길 생각이었기 때문에 시간 여행을 시작하기 얼마 전에 좀 손봐 놨어요.”

“몽몽 정도의 로봇은 아무리 제작자라도 나중에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들었는데……”

“호오~ 벌써 그 정도로 등급이 올랐나요? 어쨌든 그건 맞는 말이지만… 당신 시대에도 있죠? 해킹이란 용어가.”

나보다도 몽몽이 더 기가 막힌 지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였다.

[ …죄송합니다. 해킹 여부를 파악하지 못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

<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이 여자가 사악한 거야. >

“과연 과학자 비슷한 사람인 건 맞나 보군요.”

“후후~ 날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알겠고 또 그런 이유도 알겠어요. 하지만 사실 딱히 내가 큰 잘못을 했다기보다 당신과 내가 뭔가 코드가 맞지 않는… 말하자면 ‘악연’이라는 거겠죠?”

“…다시 묻자면, 과학자 맞아요?”

내 퉁명스런 반문에 싸가지 진은 또 즐겁게(?) 웃어댔다.

“과학자가 악연이란 개념이나… 혹은 신과 같은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될 건 없겠지만… 암튼, 이제 대충 그간의 사정은 알겠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에 말려들지 않도록 얌전히 우리만 따라 다니도록 해요. 당신 장비들도 함부로 쓰지 말고요.”

“예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이번에는 ‘결과’만이 흥미로운 거니까요.”

무슨 결과를 말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걸 참은 건, 이 여자와 얘기하다보면 어쩐지 자꾸만 내 페이스를 잃고 꼬이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

“뭐요?”

조금 뒤쪽에서 따라오던 대교 쪽을 돌아 본 사이 싸가지 진이 뭐라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난 잠시 앞서 가줄 테니 당신은 저 아가씨를 혼란의 늪에서 건져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싸가지 진이 웬일로 날 배려해 주며 걸음을 재촉해서 나는 반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조용히 뒤를 따라오던 대교도 흠칫 놀라서 멈춰서고 있었다.

소림사에서 나오는 동안이나 나와서 산을 내려가면서 싸가지 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도 계속 대교의 반응을 살펴왔는데…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까지 크게 격동하는 기색은 없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떼었고 대교도 나란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대교……!”

“……”

“일단 한 가지 사실은… 알겠지?”

“……”

“그래… 믿기 어렵겠지만 나와 저 여자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야. 따라서… 나는 애초에 비화곡 곡주 진하운도 아니지.”

나는 대교에게 내가 처음 이 시대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과 내 정체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 숨김없이 말해 주었다. 드디어 내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대교는 뭔가 말하려고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입을 다물고 내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저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창천각(創天閣)에 니가 온 시점부터 분명히 곡주는 나……”

“잠시만! 잠시만 혼자 생각하고 싶어요.”

역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말로는 잠시라고 했지만… 대교는 소양호에 남겨 두었던 일행을 만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나는 대교가 아무런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나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에 그렇게 걱정했던… 내 정체가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은 이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나의 형식적인 상황 설명을 듣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지들 멋대로 내가 소림사를 완전 평정했다는 식으로 떠들며 축하하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내 시선은 오직 대교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섬백(纖魄)… 생사금마도결로 만든 청섬백이 아닌 진짜 초승달이 하늘에 매달려 지상으로 가냘픈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대부분 잠이 든 일행들을 뒤로하고 혼자 호수의 기슭을 찾아갔다. 그리고 가지고 간 장작에 불을 붙여 모닥불을 피우고 그 앞에 서서… 술병을 입에 대고 마시며 얼마간을 말없이 하늘과 호수와 불길을 바라보았다. 약해지는 불길 속에 나뭇가지 하나를 더 던져 넣었을 때…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사박사박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너도 한 모금 마실래?”

내가 내미는 술병을 대교는 말없이 받아들었다. 대교는 나를 스쳐 지나 모닥불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내게 등을 보이고 자신의 두 무릎을 안은 자세로 앉은 채 대교는 술병을 입에 대고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또 한참을 나와 대교는 말이 없었다. 평소에는 견디지 못했을 것 같은 정적이 오늘은 웬지 그리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어딘가……”

소근대는 것처럼 작은 대교의 목소리가 내게는 너무나 뚜렷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가끔 들었어요. 하지만… 설마 그게 사실이었을 줄은… 하아- 정말이지 끝까지 저를 놀라게 하는 분이네요, 진유준님은……”

대교의 음성에 웃음기가 살짝 섞여 있는 것 같았고, 나는 대교의 바로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 대교는 자신의 무릎에 기대듯 고개를 기울여 날 돌아보며 가만히 전음을 보냈다.

< 이 곳에서의 모든 은원이 정리되면… 떠나…실 거죠? >

< …그래. >

대교가 이제 내 정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널 데리고…라는 말이 나와 주지가 않았다.

< 어째서요…? 진유준님은 설사 진짜 비화곡주가 아니더라도, 패도광협이라는 천하제일인의 전인이며 당금 지하무림의 마군황이란 지위를 스스로의 힘으로 얻으셨어요. 진유준님은 본래의 세계에서도 그러한…… >

< 아니, 내 세계에서 난 그저 평범한… 소규모 상업을 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보통의 청년일 뿐이야. 군대를 막 제대했으니 곧 대학교라는 학문을 익히는 곳에 다시 돌아가 공부하고… 나중에는 남 밑에 들어가 돈을 받아가며 일하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갈 예정이지. >

< …그런데도 돌아가시겠다는 건가요? >

나는 손을 내밀어 대교에게 다시 술병을 건네 받았다. 벌컥 한 모금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 …보고 싶어. 부모님과 형제들 모두…! 그리고 내가 꼭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어. >

난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 몇 개를 더 모닥불 속에 던져 넣으며 말을 이었다.

< 대교, 난 내가 원해서 이 곳에 온 것이 아니야. 비화곡주의 신분이 된 것도, 그로 인해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들… 무엇 하나 내가 원했던 것은 없었어. 오늘은 웃지만 내일은 또 어떤 고통이 있을지, 내 사소한 손짓 하나에 또 어떤 사람이 희생될지… 잠 못 이룬 날은 셀 수도 없었어. 하지만… 난 결국 이 세계의 상황에 적응했고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지금… 지금 내가 그 무엇보다 끔찍하게 싫은 게 뭔지 알아? >

내 질문에 대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그건… 내가 점점 더 이 곳에, 강호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그 자체야. 난… 더 이상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

모닥불의 타닥타닥 소리가 차츰 커지고 있었다. 나는 전음을 그만두고 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나를 이렇게 재단해 가는 운명이란 것이 정말이지 싫어. 하지만… 그런 내가 내 운명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어. 그건… 내가 널 사랑해도 되는가 망설이기 전에 이미 널 사랑하게 만들었다는 거야.”

늘 생각하면서도 할 수 없었던 고백이었다. 나는 손에 든 술병의 술을 바닥까지 단숨에 들이켜 버렸고 뒤로 던져 버린 술병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교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도망치려고 해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품 안에서 대교 역시 전음이 아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멀고 먼 해동 땅… 그리고 천년이라는 시간… 대교는 참으로 먼 곳에 시집을 가게 되네요.”

대교의 가는 두 팔이 마주 날 안아 왔고, 나는 아무런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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