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9-3화 : 절화행(折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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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9-3화 : 절화행(折花行)


2-1. 절화행(折花行)(3)

‘멋진 남자’ 해동선생 이인경의 처가댁은 광동성(廣東省) 주직촌(珠織村)… 다행히 현재 장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써, 여기까지 온 마차 속도 기준으로 약 10일 정도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 곳으로 가자는 내 일방적인 결정에 진하연은 매우 협조적이었고 덕분에 그 동안 머물던 약산성(藥山城)에서의 철수 준비도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처음 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의 반응으로 보아 진하연은 세상에서 자신과 가장 닮은(용모뿐 아니라 성격까지) 쌍둥이 오빠가 고작 부하 한 명을 위한 일에 이토록 몰두하는 자체가 무척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물론 그 흥미가 계속 지속되어 별다른 시비를 걸지 않는 건 진하연 자신도 그녀가 거의 전 일생을 보내 온 묘강에서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커플의 후예일지도 모를 흑주에게 흥미와 호감을 동시에 느끼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약산성을 정리하고 나와 주직촌으로 향하는 우리의 여정은 비교적 평안하게 진행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처음 비화곡을 나설 때보다 그 목적이 훨씬 보람된 일이어서 기본적으로 기분이 좋았고 여행에 있어 가장 큰 요건 중 하나인 ‘좋은 동행’이 생긴 상황이라 그런 기분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 좋은 동행이자 동생… 본색은 극악녀인 진하연도 지 피붙이인 극악 놈에게는 애교 많은 여동생일 뿐이었으며 시대를 막론하고 악명 높은 ‘시누이(?)’라는 지위도 내팽개치고 대교에게 꽤나 살갑게 굴어서 오히려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또 대교의 동생들과도 쉽게 친해진 상태인데, 이 부분은 약간의 문제(?)도 있긴 했지만… 하여간 상부의 분위기가 그렇게 화기애애하니 밑으로도 그 영향이 이어져 묘강과 중원의 연합군이라는, 정파와 사파의 연합군만큼이나 무지 힘든 조합이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냥 맘 편하게 여행을 즐기기에는 입안의 가시처럼 껄끄러운 존재가 있어서 항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사갈서생(蛇蝎書生)… 그 놈이 언제고 또 수작을 걸어 올 가능성이 있어서 암혼자는 그렇다 치고 대교까지 경호에 신경 쓰느라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갈수록 떠올리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운 놈… 어쩐지 어떤 무협지에서인가 읽었던 한 문장, ‘무덤을 파먹는 쥐새끼’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갈서생을 대비한 효과적인 경호 대형에는 묘강의 역할이 아주 컸는데, 그건 수왕(獸王)이라 불리는 인물이 지휘하는(?) 늑대 특수부대 낭아군(狼牙軍)을 중심으로 한 야수대대(野獸大隊) 때문이었다.

중원, 특히 우리 비화곡에도 짐승들을 수색에 이용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묘강의 야수대대만큼 조직적이지는 못 했다.

기본적으로 몇 마리의 매가 고공 정찰을 나서고 늑대들이 지상 수색을 병행하는 식인데, 늑대는 그렇다 치고 매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기준이 좀 모호한 것이 문제이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인적 드문 장소를 주로 다닐 때는 최소한 ‘어느 방향에 인간이 있다’라는 보고가 빠른 것 하나만으로도 수색 시 사전 정보로서의 가치가 상당할 듯 했다.

인간의 오감을(혈랑대 백인장 수준의 고수 기준) 능가하는 짐승들이 그렇게 우리의 이동로를 폭넓게 커버하고 미리 수색해 나가는 것이 꽤 믿음직했기 때문에 당근스럽게… 나도 곡으로 돌아가면 꼭 야수대대 같은 걸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비화곡에 풍성한 인적 자원과 달리 수(獸)적 자원은 새로 키워야 하는 거라 보통 일이 아닐 듯싶지만……

암튼, 그렇게 평안하고 무사태평한 여행이 11일 째 되는 날.

진하연이 지금까지 가끔 그랬듯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치를 발견하고 땡깡(억지?)을 부리는 바람에 난 해가 아직 위세 좋은 시간임에도 일찌감치 숙영지(宿營地)를 결정해야 했다.

그 동안 진하연이 간간이 일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으면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을 텐데 아직도 이틀이나 남았다는 생각을 하면 녀석이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내가 허락하자 기뻐하며 매달리는 녀석을 보면 또 그런 마음이 사라락 날아가 버린다.

음… 어째 갈수록 이용은커녕 내가 이용당하는 기분이 든다.

훗…! 그러고 보니 스스로도 잊고 있었군. 나 진하운이 실은 오래 전부터 ‘여동생’을 가지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저런 살인마녀 여동생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에구, 모르겠다. 기왕에 오빠 된 거 오빠로써의 의무(?)는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나는 마차 밖으로 나와서 수하들이 주변을 최종적으로 정밀 수색하는 사이 천천히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마차 길에서만 보면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인 너머로 조금 먼 봉우리들이 보이는 정도의… 그리 특출하게 느껴지지 않는 장소였지만 잠시 후 대교가 안내하는 대로 길을 벗어나 좁은 샛길, 아니 나뭇가지를 쳐가며 길도 아닌 코스를 5분 정도 들어가자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교묘하게 가려져 있던 절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너편 산들에 자리 잡은 소위 기암괴석들의 당당한 기세와 부드럽고 멋스러운 푸른 수목들의 조화도 지극히 아름다웠지만 그 편과 우리 쪽을 가르는 계곡의 시원한 물줄기는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까지 후련해지는 느낌을 준다.

이 정도만 해도 과연 ‘수려한 경관’이긴 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다니면서 이 정도는 그리 드문 경치가 아니다.

진하연이 이 정도로 일정 변경을 조를 리는 없을 것 같으니 아마도……

“…묘랑, 확인이 끝났습니다.”

암혼자(暗魂紫)의 보고가 있자 진하연은 대뜸 소령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목줄에 묶여 개장수에게 질질 끌려가는 표정의 소령이가 조금 안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 수밖에 없었다.

뭐랄 틈도 없이 관광에 나선 진하연의 걸음이 빨라서 그 뒤를 따르느라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기도 했다.

우리 연합군의 수색 능력과 진하연 자신의 독극물 대비 능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사갈서생(蛇蝎書生)이라는 놈이 전에 목야평에서 ‘화약’을 사용하는 병기를 썼던 걸 생각하면 일행이 머무는 장소의 위험 체크에 항상 몽몽의 스캔 기능을 추가하지 않으면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잘 따라 주지도 않는 몸을 혹사시키며 간신히 따라붙었건만… 진하연, 이 철없는 여동생은 이미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폭포 아래에서의 물놀이’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좁고 위태한 길을 서둘러 오느라 숨을 고르며 잊을 만하면 틈틈이 강조되는 원판 육체의 허약함에 불쾌했던 건 잠시, 당근 무지 흐뭇해하는 진하연뿐 아니라 소령이 미령이

도 주변 경관에 취한 채 얕은 물가에 발을 담그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기분도 빠르게 풀어져 버렸다.

사실 나도 이런 장소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음, 그러고 보니 진하연보다 녀석의 심복 보디가드인 암혼자가 문제로군. 녀석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진하연이 여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가 있다는 걸 어찌 알았겠는가.

“이봐, 암혼자.”

“예, 예!”

한마디하려고 슬쩍 불러봤더니 이 친구, 또 버벅댄다. 음… 그러고 보니 폭포수가 피어 올리는 물안개 속에 서 있는 진하연의 자태가 흔한 말로 ‘그림’이로군.

“어이, 어디가. 자넨 여기서 자리를 지켜야지.”

나에게 또 표정을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슬며시 도망치려는 암혼자를 붙들어 세웠다.

“전 상류 쪽 수색을 더……”

“됐네, 이 사람아. 거긴 천응(天鷹)이란 친구가 갔잖아.”

노골적으로 넌 그냥 그림 감상이나 하라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암혼자는 잠깐 쭈볏거리며 서 있다가 공연히 대교에게 다가가 비연대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그런 녀석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겠지만… 재미로 치자면 저쪽이 더 재밌다. 어디 보자… 진하연이 경치에 취해있는 사이 소령이가 슬며시 탈출(?)을 시도하고 있군. 그러나 그걸 놓칠 진하연이 아니지.

훗~! 그럴 줄 알았다. 눈을 감고 폭포 아래의 서늘한 공기를 전신으로 즐기는 듯하던 진하연은 소령이가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마치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소령이를 돌아보며 손짓한다.

‘이리 와~! 이 귀여운 것~! 이 운치 있는 곳에서 나랑 한잔 마시자구나~!’

대충 그런 뜻으로 해석되는 표정과 손짓을 본 소령이가 내게 눈빛으로 ‘헬프 미!’를 외쳤지만 나는 가벼운 헛기침과 시선 돌림으로 ‘난 몰라~!’를 표현한 후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적당히 마셔!’라는… 소령이가 바라지도 않는 허락의 뜻을 추가했다. 전 같으면 소령이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거 자체가 불안했겠지만, 몇 달 전부터 주화장창(酒和長蒼)이란 요상하고도 유용한 내공법을 익히기 시작한 소령이는 현재 어느 정도 스스로 술기운을 조절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뭐, 지금 소령이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현재까지 진하연과 대교 동생들의 관계를 내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보자면……

우선 둘째인 소교에 대해서는 그리 특별한 점이 없다. 서로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그런 정도의 느낌이랄까? 소교는 공손하고 진하연도 자기 직속 부하들 다루는 것에 비해 소교에게 잘 대해줘서 겉보기에는 좋은 분위기지만, 대교를 친동생으로 여기는 것에 비하면 소교는 괜찮은 후배 정도로 대하는 정도의 차이… 하여간 아직 소교와는 조금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상태라는 건데, 근데 소령이로 넘어가면 갑자기 얘기가 틀려진다.

소령이는 진하연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는, 사실상 거의 진하연의 애완용(?) 정도로 전락한 상태이다. 진하연에게는 자기 말에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는 소령이의 모습이 오히려 재미있고 귀엽게 느껴지는 지 공연히 자꾸 불러서 말을 걸곤 하더니, 이틀 전 저녁에 나와 마신 술 몇 잔에 알딸딸한 상태에서는 아예 소령이를 품에 꼬옥 끌어안고 토닥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볼에 연신 뽀뽀를 해대며 한동안 놓아주려 하지 않았었다. 졸지에 어린애 취급을 받게 되어 울상이 된 소령이는 그때도 그 큰 눈을 껌벅이며 내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진하연의 태도에 특별한 흑심(?)은 있어 보이지 않았고 단지 애완용 강아지를 안고 ‘에구 이쁜 거~’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위기라 나도 달리 말릴 명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미령이의 경우도 나름대로 뜻밖인 것이, 그 암팡지고 저돌적인 성격의 미령이가 어쩐 일인지 지가 먼저 진하연에 꼬리를 내리고…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거의 꼬리를 치는(?) 분위기였다. 소교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종종 적극적으로 우리 자리에 끼어 들어 진하연에게 애교를 섞어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습은 내가 봐도 단순히 자기 주인의 친동생이라는 신분에 굽히고 들어가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뭐… 그리 오랜 기간 동안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미령이에게 원판 극악이 아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숭배의 대상이라면 여자 극악 진하연은 자신이 되고 싶은 목표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위대한 인물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고 할까…? 대충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만약 앞으로 미령이가 진하연의 행동 패턴을 본받아 따라 하기라도 하면… 음, 앞으로 그게 조금(?) 걱정이긴 하다.

폭포수 아래의 진하연이 소령이, 미령이와 술 한잔하며 노닥거리는 걸 보며 이런저런, 특히 미령이 교육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까 대교가 다시 다가왔다.

“곡주님. 다행히 가까운 곳에 폐사당(閉祠堂)이 하나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을 숙소로 하시겠습니까?”

대교의 추가 보고에 난 자세히 묻지도 않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대교나 암혼자의 일 처리 패턴을 생각하면 내게 보고될 정도라는 건 발견된 건물 상태나 주변 여건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뜻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이곳으로 접근 중인 자가 한 명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조금 놀라 비로소 돌아보자 대교가 신중하게 덧붙였다.

“보고된 바에 의하면 행태가 아무래도 수상하고 보통 고수가 아닌 듯합니다.”

대교가 알아서 해결하지 않고 먼저 보고한 것은 만약 말썽이 생길 경우 내 불살(不殺)이라는 원칙을 지켜가며 제압하기 어려울 정도로 까다로운 상대로 보인다는 건데, 이건 또 웬 돌발 사태…?

나는 역시 내가 직접 보며 판단하고 싶어서 잘 놀고 있는 애들은 암혼자에게 맡기고 대교와 함께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음… 요즘엔 현재 내 육체로 불가능한 활동이 필요할 때면 자존심 접고 대교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조금 전처럼 경공을 발휘하여 단숨에 높은 장소로 뛰어오르는 대교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자세로 함께 이동하는 과정에 예전만큼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솔직히 어떤 식으로든 대교와의 스킨쉽이 나쁘지는… 흠, 하여간, 현재 우리가 위치한 곳은 아까 우리가 지나 온 길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바위 사이인데 각도나 거리가 길가에서는 일부러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장소이다. 소위 수상한 인물은 아직 내 시야에까지 들어오지 않아서 일단 몽몽에게 시력 터보 모드를 대기시키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과연…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교의 보고대로라면 약 4킬로미터 정도 후방 즉, 후방 감시조의 맨 마지막 병력이 우리가 온 산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가끔 마차의 흔적을 살피며 우리를 추적해 오는 기색이 역력한 자를 발견한 것이 약 20분 전이다.

대충 우리 시대 군바리들 주간 행군 속도의 두 배 정도인가…? 시청각 터보 모드로 가깝게 당겨보면(이럴 때 내 눈은 줌 렌즈?) 그리 서두르는 발걸음이 아닌데도 산길을 그런 속도로 온다는 건 역시 경공을 쓰고 있다는 건데… 음,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지만 그리 나이든 인상은 아니고… 일단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닌… 아니, 아니.. 웬지 조금 낯이 익은 느낌도… 그리고 정말 우리 마차를 추적해 오긴 한 모양이군.

길에는 우리 마차 자국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까 우리가 멈추었던 장소에 정확히 멈추어 스윽 훑어보는 기색이더니 바로 마차가 숨겨진 숲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뭔가 생각하며 망설이는 눈치…

소위 추종술(追踪術)…! 목표한 상대를 추적하는 전문가로 현 중원에서 가장 이름 높은 인물은 거지들의 집단 개방(丐幇)의 후개(後继, 방주 후계자)인 ‘만리추종(萬里追踪) 개차반’이다. 그 만리추종에 비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굉장한 추종술을 가진 또 한 명의 인물을 나는 알고 있다.

뭐… 한동안 내가 직접 추적을 당하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저 친구가 여긴 웬일이지? 으… 그 인간… 내가 그렇게 당분간 기다리라고 했건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저 친구를 동원한 건가? 제기, 사갈서생이나 원판의 다른 원수는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 골치 아프게 되었다. 어쩐…다……?

내가 ‘추종술’에서 연상작용으로 소위 수상한 인물의 정체를 기억해내고 돌아보자 대교도 비로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곡주님, 저 사람 혹시……”

“음, 그래. 너도 보긴 했을 거야. 저 친구… 음?”

잠깐 대교에게 신경을 돌린 사이 우리 혈랑대 백인장 백상이 매복을 풀고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아하니, 누군가를 추적 중인 모양인데 잘못 짚었으니 그냥 지나가시오.”

“…잘못 짚었다…? 그대는 내가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지를 아는가?”

행색이 전과 하도 달라서 첫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백상에게 대꾸하는 음성을 들으니 더 확실하군. 저 친구… 삼태자 조명환의 보디가드 류혼(流魂)이다.

“그대가 찾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상관없다. 적어도 여기는 없다는 말이다.”

“확인…해야겠다면?”

“그럼, 죽는다.”

“내가? 아니면 그대?”

우이쒸~! 정체는 알았어도 어찌 대처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백상은 주인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전형적인 혈랑대 식으로 류혼을 대하고 있었고 류혼도 만만치가 않다. 류혼의 냉랭한 대꾸에 백상이 슬며시 웃고는 한 걸음을 더 나서는 순간, 나보다 류혼이 먼저 한 손을 들어 잠깐! 이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여기에 진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계시오? 그것만 대답해 주면 물러나겠소.”

내가 알기로 류혼은 분명히 강·하·다. 백상은 혼자 절대로 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류혼은 주변에 백상 수준의 고수들이 더 잔뜩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 깠는지 스스로 한 발 물러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물론… 백상이 그걸 인정할 리가 없지만.

“확인하려 들면 죽는다고 했을 텐데?”

백상의 비웃음 섞인 말에 류혼은 또 잠시 뜸을 들였다. 추적 대상이 맞든 틀리든 쓸데없는 싸움을 과연 벌여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 다른 의미로 고민하는 사이 기어이 백상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이길 수는 없어도 간단히 질 수준이 아닌 백상이 류혼과의 공방에 잠시 버티는 사이 다른 백인장이 한 명 더 튀어나와 협공에 들어간다. 그래도 떼거리로 몰려나와 완전히 몰매 모드로 들어가지 않는 건 혈랑대 나름의 자존심이겠지만… 흐음~ 류혼 저 친구, 그 동안의 내 예상보다도 더 강한 것 같다.

백인장을 두 명이나 상대하면서도 거의 밀리는 느낌이 안 드네? 과연 삼태자의 호위… 그래… 삼태자… 쳇! 아무리 싸움 구경이 재밌어도 역시, 말려야겠지?

“대교, 일단 멈추게 해. 그리고……”

난 일단 신호를 보내 싸움을 멈추게 한 후, 류혼을 손님으로 인정하여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도록 하면서 대기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류혼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루트로 진하연이 놀고 있는 폭포로 돌아왔다.

내가 진하연으로 변장하고 삼태자를 만나 있었던 일은 진짜 진하연도 이미 대충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이어지면 안 되는 것이 삼태자의 관계지만 그렇다고 지금 정부 소속 무사인 류혼을 우리가 죽여 없앨 수도 없으니, 일단 적당히 구슬려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상황을 강조해서 설명해 준 후에야 류혼을 우리 쪽으로 부르도록 했다.

류혼은 나와 진하연 남매(?)를 보자 대뜸 엎드려 절을 하며 인사를 했고 나는 그런 류혼의 전에 없던 태도가 더 찝찝했다.

사실 류혼은 진하연으로 분했던 나에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지만 그건 당시 류혼이 모시는 삼태자가 칠절지독(七絶之毒)에 중독 된 상태여서 그걸 해독해 달라는 부탁의 의미였지 상대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중 삼태자와 함께 몇 번을 만났어도 인사는 정중한 태도의 포권… 그러니까, 회사의 직원이 자기 회사 회장님의 친구를 대하는 정도의 예의만 보였다고 할까?

근데 지금은 스스로 땅바닥에 엎드릴 정도라는 건 류혼이 보기에 그 주인인 조명환의 진하연에 대한 마음이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에 들어 앉히고 싶어하는 정도라는… 그런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한 류혼의 태도도 그랬지만, 류혼을 내려다보는 진짜이며 가짜인 진하연의 표정도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상대를 속이거나 사태를 적당히 무마하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진하연이 연기력에 자신이 있어서 불안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현 상황을 무척 재밌어하며 반기는… 그런 표정이라는 건 단지 내 기분일 뿐이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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