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4-3화 : 꿈속의 남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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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4-3화 : 꿈속의 남자.(3)


나는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여 얼음처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웠다. 구름 한 점 없음에도…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을 별무리가 보이지 않았다.

흑주의 고향을 찾아가던 길의 한 곳… 청량한 계곡의 물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대교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던 중원의 하늘… 난 그보다 아름다운 내 고향의 하늘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도시의 현란한 불빛은 별을 가리고… 대교는 그 약속을 잊어 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대교가 원한 건 내가 보여주는 별빛이 아니었던 건가…?

대교… 그런… 거냐?

은발 소년 모드의 몽몽과 요정 몽이 소리도 없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요정 몽은 평소의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머뭇대다가 다시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몽몽은 남았지만 녀석 역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말없이 날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몽몽……”

[ 예, 주인님. ]

“전화 다시 해, 원판에게.”

조금 당황하는 듯했던 몽몽이 결국 전화를 연결하자 이번에도 란의 매혹적인 음성이 조심스럽게 날 확인했고, 나 역시 짧게 내뱉었다.

“그 녀석, 바꿔.”

“죄송합니다, 진유준님. 마스터께선 다시 잠이 드셨습니다.”

“…바꿔.”

“…아무리 당신이라도 더 이상은 마스터께서 주무시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음성에 약간의 불쾌감까지 섞여 있었다. 지금… 화를 내야 할 게 누군데 이 것들이……

“내가 놈의 잠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시켜 주지.”

“진유준님!”

이번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몽몽. 근처 콜택시 전화 번호 찾아서 대기해.”

“대기…입니까?”

“그래.”

물론 당장 내 발로 달려가고 싶었고, 직선거리가 아닌 이상 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경공을 쓰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얼마간 운기조식을 실시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이제 호텔 앞까지 택시 불러.”

어제부터 대교와 만나기 전까지 회복되었던 내력은 대략 60% 정도, 지금의 두 시간 정도로는 그리 많은 내력이 추가될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은 가슴속의 불길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는 얌전히 옥상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까지 내려갔다. 로비 구석의 현금 지급기에서 예상되는 택시 비를 찾은 후 천천히 밖으로 나가 몽몽이 불러 놓은 택시에 탔다. 새벽 도로여서인지… 택시가 호텔에서 원판의 아파트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 물론 그것도 지금의 내게는 너무나 지루한 시간이었다. 나는 원판의 아파트 앞에 도착해 새삼 호흡을 가다듬으며 놈의 거처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다는 건… 내가 오거나 말거나 여전히 잠이 들어 있다는 건가? 아니면……

나는 새삼 몸의 어깨며 목, 두 팔… 여기저기의 관절에서 두둑 두두둑 소리가 나게 움직여 풀면서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2층… 로비에 앉아 있던 젊은 경비원이 들어오고 있는 나를 발견했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패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내가 누른 30층이 아니라 27층에서 제멋대로 멈추었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정글도를 들고 집을 벗기며 몽몽을 불렀다.

[ 죄송합니다, 주인님. 엘리베이터 조작에 관련된 전원부가 차단되었습니다. ]

처음부터 놈의 침실까지 얌전히 길을 열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27층이라……?

엘리베이터 안의 스피커가 치익! 소리를 냈고, 이어 란의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유준님…! 부디 마음을 바꿔 주시기 바랍니다. 이쯤에서 돌아가시겠다면 다시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겠습니다.”

나는 란의 권고에 대한 대답으로 정글도 끝을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찔러 넣었다. 내력을 집중시킨 정글도를 스윽 비틀자, 끼기긱~!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문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만두세요! 알겠어요!”

란의 고함소리에 손을 멈추자, 곧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힘없이 열려졌다.

“정말 무례한 분이군요. 그 엘리베이터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설인데……”

가벼운 탄식이 섞인 란의 음성은 27층 복도… 아니 층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집의 문을 열어 보세요.”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첫 번째 집의 문고리를 잡고 돌려보았다. 잠겨 있지 않아서 그냥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문 안쪽 전체가 정상적인 아파트의 실내가 아니었다. 어두워서 끝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연 문틈으로 들어간 복도의 불빛이 미치는 곳까지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27층은… 복도에서 보면 정상적으로 몇 개의 호수로 나누어져 각각 문까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는 전부 통합된 하나의 광장인 모양이었다.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에요. 아래층에는 진유준님이 보호하고 싶어하는 소위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란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의 불빛이 일제히 밝혀졌고, 예상대로… 아니 문을 여는 순간부터 느껴지던 심상치 않은 기운의 정체… 21세기 혈랑대가 십여 명, 정확히는 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너머, 이 아파트의 내부치고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넓은 공간의 끝에 문이 하나 보이고 있었다. 멈춰진 엘리베이터 부근은 물론이고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복도의 양쪽 어디에도 통로가 없는 것 같았으니… 저 문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인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내가 들어선 문의 맞은편 벽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이 피웃- 하고 켜지더니, 머리에 헤드셋을 쓴 란이 나타났다.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 진심으로 진유준님을 만류하고 있는 겁니다. 마스터와 진유준님의 게임… 시작하자마자 끝내실 생각인 건가요? 마스터께서… 아니, 저부터 너무나 실망할 거예요.”

“으… 우~!”

나는 결국 괴상한 신음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쫑알쫑알~ 정말 말 많군. 당신은 당신 주인 걱정이나 해!”

그제야 흠칫하며 입을 다문 란의 민망해하는 표정에서 시선과 몸을 돌렸다. 나는 천천히 나와 문 사이의 중간쯤에 운집해 있는 21세기 혈랑대, 천 년 전 무림의 초고수 수준으로 강화된 신체를 지닌 인간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서양의 인종이 혼합된 다국적군… 그러나 전원이 검은색 군복 차림에 베레모를 썼고, 그 베레모에는 혈랑대의 상징인 붉은 늑대 머리 모양 마크가 찍혀 있었다. 누구도 총기류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허리에 찬 대검은 거의 내 정글도에 근접할 정도로 크고 위압적인 디자인이었다. 몽몽의 분석에 따르면 내 정글도 못지않은 강도를 가지도록 강화 처리된 대검인 것 같았다. 강화 처리된 칼을 지닌 강화 인간들… 그런 놈들 중 금발의 백인 남자 한 명이 선뜻 앞으로 나서 대검을 빼들며 입을 열었다.

“난 블러디 울프 7중대 대장, ‘워커’ 대위! 마침, 도홍 대령님이 자리를 비운 덕에… 내가 먼저 당신을 상대할 기회를 얻게 되었군. 론 중령이 이 사실을 알면 꽤나 분해할 테지만……”

놈은 비죽이 웃으며 몸을 낮춰 빈틈없는 자세를 잡았다.

“빅 고렘(Gorlem) 론 중령이 고대하던 이 시대 최강의 사냥감… 그 진면목을 내게 보여 주실까?”

이죽거리면서도 팽팽하게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곧 그 위에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대체 원판 놈에게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었기에 날 사냥감 운운하는 건지 몰라도… 정작 나란 인간의 전투력과 스타일에 대한 사전 지식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점차 공격권에 접어들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을 뿐, 별다른 전투 태세로 보이지 않는 모습의 나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등하며, 그제야 워커 대위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날 상대하겠다고 나선 자신의 행동이 실수라는 걸 깨닫는 것 같았다.

시익- 쉭! 그리 크지 않아 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워커 대위의 대검이 공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탐색전치고는 위협적인… 계곡의 돌 사이를 헤엄치며 먹이를 쫓는 물고기처럼 유연하면서도 빠른 연속 공격이었다.

그러나 내 생사금마도결의 발도(拔刀) 스피드와 동체포착의 수준은 그 이상…! 내 어깨를 떠나 발동한 정글도가 물속의 물고기를 사냥하는 곰의 발톱처럼 정확하게 놈의 대검 중간을 찍었다.

까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양단된 워커 대위의 대검 끝이 허무하게 회전하며 내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특수 강화 처리된 자신의 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순간적으로 자신의 대검 파편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 워커 대위의 두 번째 실수! 나는 워커의 몸이 굳어진 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대시해 들어갔고, 그제야 그는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워커가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는… 아니 그러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번쩍! 내 정글도의 섬광이 놈의 허벅지를 갈랐다. 빙글~ 탄력에 의해 계속 돌았지만 본래 목적했던 움직임의 3분의 1정도밖에 이어가지 못한 워커 대위의 몸이 쾅! 하고 등과 옆구리부터 바닥에 떨어진 후 주르르- 저만치 미끄러져 갔다.

“으으으~”

그래도 역시 혈랑대의 후예답다고 해야 할까…? 다리의 근육까지 상당 부분 잘려 나간 부상에도 비명은 없고 억눌린 신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다른 블러디 울프 부대원들 쪽으로 걸음을 떼며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사람을 사냥감이라 칭할 때는… 너희들 쪽이 사냥당할 각오도 했겠지?”

바로 조금 전까지 전체적으로 차분한 모습이었던 녀석들이 이제야 자신들의 사냥감이 가진 송곳니의 위력을 깨닫고 동요하고 있었다. 그때,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도 기어이 한쪽 발로 반쯤 일어선 워커 대위가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질렀다.

“레건 중위! 네가 지휘를 맡아라!”

워커 대위의 명령에 레건 중위라 불린 자가 짧게 “예썰-” 하고 대답하고는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냈고, 그를 중심으로 다른 아홉 명의 혈랑대가 일제히 움직여 특정한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내게도 상당히 익숙한 저 포맷은……

[ 과거 혈랑대의 혈재진(血才陣)입니다. ]

그래, 그거다. 개개인이 지닌 능력을 평균 50%는 상승시키며, 중원의 다른 문파들이 자랑하던 절진들이 특정한 숫자로 구성되었을 때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과 달리 구성원의 숫자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효율적인 진법, 혈재진! 혈랑대 고유의 진법이며 당연하게도… 부대의 창설자인 원판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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