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8-2화 : 무정한 정글도에 꽃잎은 떨어지고.(2)
나는 조금 더 투덜대며 경공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예정 외의 일로 잠시 흥분했던 감정을 빠르게 가라앉힐 수 있었던 건, 내가 달려가는 방향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살기…? 아니, 그 정도로 구체적인 건 아니다. 그냥 어떤 존재감 같은 것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 음, 도홍인가…? 그 자가 마주 오고 있는 건가?
나는 정글도를 쥔 손에 약간의 힘을 더 가했을 뿐 경공을 펼치는 속도나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나와 도홍은 서로의 목적지를 거의 정확히 알고 최대한 직선거리를 주파하고 있으니 도중에 마주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문제는 예정대로 기척을 숨기고 통과하여 원판을 노릴 것인가, 아니면 아예 도홍을 먼저 칠 것인가의 선택이다.
그러나… 도홍을 먼저 칠 경우, 론과 비슷한 급의 전투력을 가진 사내를 원판에게 내 기습을 보고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는 난감함이 있었다.
웃! 왔나?
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정면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듯 나타나 빠르게 커져오는 인형이 있었다. 서로 초고속으로 이동 중이니 만큼 인식과 동시에 거리가 좁혀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최적의 검기 사용가능 거리까지 약 3초… 2초, 1…
쯧, 일단!
거의 일직선으로 달려가던 경공의 방향을 조금 틀었을 때는 이미 그와의 거리가 10여 미터까지 좁혀져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달빛에 얼굴까지 확연히 드러난 도홍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그의 정면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불과 5, 6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와 지나쳐 가는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엇갈려 간 직후, 돌아보았을 때도 도홍의 뒷모습은 별다른 기색 없이, 나타났을 때 이상으로 빠르게 멀어지고만 있었다.
주변의 어둠, 서로가 기척을 죽인 초고속 질주… 그런 요소들 때문에 날 발견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혹시 알고도 무시하고 지나간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도홍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건가?
내가 원판을 노리듯 그 역시 나와 직접 싸우기보다는 대교를 먼저 확보하는 데 올인했다고…? 아니면 혹시……
나는 경공의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도홍에 대한 판단도 유보했다. 역시 처음의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은 같았다.
여전히 ‘그보다 빠르게’가 관건일 뿐.
그런데… 몽몽이 말한 지점은… 아직 먼 걸까? 설마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니겠지?
도홍이 마주 달려왔었던 걸 생각하면 더욱 틀린 방향일 리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공보법의 상승식을 펼쳐 숲 위쪽으로 뛰어올라 보았다.
우거진 숲 속의 어떤 나무보다도 높게 도약하여 달려간 탄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밤하늘을 날던 내 시선에 뭔가 반짝, 인공적인 느낌의 불빛이 잡혔다.
전방 100미터 조금 못 되는 지점…! 역시 몽몽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장 먼저 발 밑으로 다가오는 나뭇가지를 밟고 영점 조정된 방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좋아, 이제 10초도 안 남았다.
원판 놈에게… 그 재수 없는 과거의 망령 놈에게 오늘은 내가 오히려 죽음의 공포를…
어? 지금 뭔가……
불연 듯 우웅- 하고 알 수 없는 울림과 함께 섬뜩한 느낌이 엄습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시선 속으로 들어온 건 거짓말처럼 눈부신 달빛이었다.
그리고 그 달빛 속을 춤추듯 펄럭이며 날아드는 ‘어떤 것들’이 있었다.
은빛의 나비…? 새…? 아니, 아니, 암기! 적의 암기인가?
당연히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그 전에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야 했다.
20여 미터 정도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 바로 직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그 나무의 꼭대기에 처음 보는 놈 하나가 서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리호리한 체형에 붉은 옛날 중국식 옷을 걸치고 긴 머리채로 얼굴을 덮고 있어, 달밤의 귀신 그 자체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놈의 양손에는 각각 지름 1미터 정도의 커다란 링 같은 것이 들려져 있었으며, 놈은 그 양팔을 들어 교차하며 여자처럼 날카로운 미성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환영합니다, 진유준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놈의 양쪽으로 교차했던 두 팔이 바깥쪽으로 휘둘러지며 예의 링 두 개가 날 향해 쏘아져 왔다.
빠, 빠르다! 게다가 뒤쪽에서 역시 다른 암기들도 날아들고 있다! 어떻게, 어디로, 어디로 피하지?
이, 일단 천근추(千斤墜)!
나는 천근추 수법으로 중력에 의한 자연스런 낙하 속도를 가속시키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 직후, 달밤의 귀신 놈이 던진 링이 내 가슴과 얼굴의 몇 센티 정도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뒤쪽에서 날아들던 암기들은 이제야, 하지만 그만큼 정확하게 날 포착한 것처럼 사방에서 웅-! 웅-!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 삼시전결!
다급한 김에 삼시전결을 10성까지 펼쳐 세 개의 은빛 암기들을 쳐냈다.
그러나 마지막 암기는 내 예측을 깨는 기묘한 괘도로 날아들며 끝내 나의 가슴을 베었다.
윽! 빌어먹을!
나는 차가운 섬뜩함과 뜨거운 통증이 혼재하는 가슴을 쥔 채 땅바닥으로 떨어지다시피 내려와 간신히 두 발로 착지해야 했다.
느낌상… 약 상처는 최고 0.5센티 정도 깊이. 범위는 넓지만 천음마군의 부상에 비하면 새발의 피!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이 정도 기습에 간단히 상처까지 입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링을 던졌던 달밤의 귀신 외에도 두 명의… 비슷한 외모와 분위기의 놈들이 각각 다른 나무 위에 서 있었다.
새로 나타난 놈들의 양손에 들린 은빛의 부메랑 같은 것들이 조금 전 날 공격했던 무기인 것 같았다.
내가 조금 전까지 저 걸 나비나 새로 착각했던 건 날아드는 움직임이 링에 비해 현격히 느리면서도 지극히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흐응- 이거 실망이군요. 첫 인사라 손속에 사정을 둔 공격이었음에도 부상씩이나 당하시다뇨?”
처음 환영하네 어쩌고 했던 달밤의 귀신 놈이었다.
나는 놈에게
“원판 놈 취향…이냐?”
“지금 뭐라고 한 거죠?”
“네 놈들의 그 재수 없는 분위기 말이다. 블러디 울프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네 놈들은 정말 짜증나는 몰골이구나.”
“후후후~ 우릴 그 단순한 기계식 군인들과 비교하시면 곤란하죠. 우린 마스터께서 재현한 과거의 호위 무사…! 마스터의 그리운 추억이며 시대를 초월한 이 시대의 암살자……!”
“…놀고있네.”
“뭐, 뭐라고요?”
귀신같은 장발 때문에 여전히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끈 흥분하는 기색은 여실했다.
사실… 조금 전 내가 당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의 암기술과 파괴력이 놈들의 순수한 능력이었다면 옛 비화곡의 1급 마인들과 견주어
도 손색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네 놈들 무기가 어떤 건지 눈치 못 챘다고 생각하나? 그 기분 나쁜 울림소리와 비정상적인 비행 괘적은 네놈들의 능력이 아니지? 무기 자체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도 시대를 초월한 무사니 암살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뻔뻔함은 뭐냐?”
나는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 충고하지. 기습에 실패했을 때는 그냥 튀어야 하는 거야. 시건방지게 남의 머리 위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니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놈들의 병기가 일제히 날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놈들의 병기가 날아드는 것을 응시하며 빠른 뒷걸음으로 등 뒤의 나무들 사이까지 물러났다. 엄청난 스피드지만 단순한 괘도의 링을 먼저 어렵지 않게 옆으로 흘려낸 직후, 나는 예상 밖의 광경에 흠칫하여 새삼 긴장해야 했다.
사사사삭-!
마치 잘 든 낫으로 풀을 베는 듯한 소리였다. 그만큼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두꺼운 나무들이 통째로 잘려나가고 있었다. 놀라운 절단력을 보여주는 것은 첫 번째 놈의 링뿐이 아니었다. 다른 놈들의 은빛 부메랑이 흐느적거리며 나는 괘적 앞의 나무며 심지어 바위까지도 같은 운명에 처하고 있었다. 저 병기들의 어떤 장치는 괘도를 바꾸는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월광절화결과 같은 위력…? 설마……
믿을 수 없었지만 일단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처럼 따라붙는 부메랑들을 검기로 쳐내는 순간, 나는 나의 검기가 놈들의 부메랑의 날에 오히려 잘려나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지만 역시 월광절화결 못지 않은… 아니, 아니! 아직 그러기는 이르지!
나는 이를 악물며 공공보법을 펼쳐 부메랑들의 사정권 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놈들은 일제히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허공에서 각자 자신의 병기를 잡아 회수했다. 달밤의 귀신 세 마리는 동시에 나와의 거리를 좁히며 웃었다.
“히힛~! 한눈에 무상혈환(無相血環)과 살접(殺蝶)의 정체를 눈치챈 건 대단하지만, 설마 이런 병기를 누구나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쳇…! 나의 공공보법을 따라잡을 정도의 움직임은 확실히 인정해 줘야겠군. 게다가 저렇게 제멋대로 나는 암기를 간단하게 잡아 회수할 수 있다는 건 익숙해질 때까지 엄청난 수련을 했다는 증거…!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월광절화결을 쓸 타이밍을 잡기 위해 계속 놈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달렸다. 놈들도 지지 않고 잘도 따라붙었지만 나는 곧 놈들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놈들…! 저렇게 절대적인 위력의 무기들을 가진 놈들답지 않게… 왜 이렇게 신중하지? 난 내력 소모가 너무 심한 월광절화결을 연속으로 쓰기 어려운 형편이라 이러는 거지만… 아, 그런…가? 그래…! 내가 몽몽은 아니지만 저런 병기에 얼마나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야 하는 것 정도는 알 것 같다. 그렇다면… 그 기술이 가동될 때 필요한 에너지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나는 놈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라는 판단을 확인하기 위해 경공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급속으로 내닫다가 일시에 급제동, 뜬금없이 가볍게 허공으로 도약하여 무방비 상태를 연출하다가 가까운 나무를 차고 몸을 날려 회피!
역시… 기회다 싶었을 때 무기를 날릴 태세였다가도 재빨리 포기하곤 한다. 바보들…! 초반에 두 번씩이나 공격을 실패한 게 실수였어. 이제 와서 완벽한 협공 찬스를 줄 것 같으냐?
나는 계속 달리면서도 주변 지형을 확인하여 드디어 원하는 장소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곳은 작은 동산 규모의 바위가 반으로 자연적으로 갈라져 형성된, 짧은 동굴 같은 통로였다. 나는 놈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경공의 속도를 조금 줄이며 그 통로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내 머리 위로 무상혈환인지 하는 링이 지나갔고, 그 무상혈환은 출구에 해당되는 바위 부근에 틀어박히는가 싶더니 후웅- 여전히 기분 나쁜 울림 소리를 내며 튕겨 나왔다. 역회전이 걸려 부메랑과 마찬가지로 돌아 날아온 링은 다시 내 머리 위를 통과해 던진 놈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놈의 무상혈환이 자르고 부순 부분의 바위가 무너져 내리며 출구를 막아버리는 걸 확인하고 놈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무상혈환을 든 놈과 다른 두 놈이 내가 들어온 출구를 막아선 채 또 예의 귀신 소리를 내며 웃었다.
“히히힛~! 기껏 도망쳐 온 곳이 자신의 무덤이 되겠군요.”
“글쎄… 과연 그럴까?”
놈은 막다른 골목에 갇힌 형국이 된 나와 장소의 규모를 새삼 가늠해 보는 것 같더니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허세는 소용없습니다. 마스터께 당신의 토막 난 시체를 보여 드리는 건 유감이지만, 솔직히 생포할 자신은 없……”
놈이 엉거주춤 말을 맺지 못한 것은 그제야 내 정글도가 극도로 응축된 기운을 버거워하는 것처럼 창백한 달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월광절화결… 영월금(盈月襟)!”
놈들은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과 정글도의 얼어붙을 것 같은 달빛에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자신들의 병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듯 괴성과 함께 그것들을 날렸다. 짜증 나게 여섯 개나 되는 무상혈환과 혈접인지 하는 것들이 비로소 한 방향에서 날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