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0-1화 : 잠시의 평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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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50-1화 : 잠시의 평화(?).(1)


6-2. 잠시의 평화(?).(1)

나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까지고 눈물을 그칠 것 같지 않은 대교의 작은 어깨를 잡아 살짝 가까이 끌어당겼다. 대교는 내 손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안기지도 않은 채 가늘게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난 그게 섭섭하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지금은 이 정도 거리… 내 손에 닿을 수 있어서 지킬 수 있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거리로도 좋았다.

“…미안……”

“그만…! 이제 그만 미안하다 하고, 울지도 말아 줘. 난 항상 너보다 몇 배로 미안한 마음뿐이었어. 네가 자꾸 먼저 사과하면 나는 또 몇 번이나 용서를 빌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단 말야.”

내 말에 대교는 비로소 조금 진정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 그럼… 흑! 천년 전의 대교, 흑…! 에게 한 것처럼… 명령해 보세요.”

예전처럼 명령을…? 그럼 사과하지 말라는 명령을… 아, 아니지. 그게 아니었어. 나는 애써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어 예전처럼 짐짓 인상을 긁어 보이며 거칠게(?) 명령했다.

“우쒸~ 울지마!”

그래… 내가 예전에 이 울보 소녀에게 가장 많이 했던 명령은 이거였다. 그리고 대교의 대답은……

“조, 존명……!”

“그, 그 말…하지 말랬지?”

“예… 흑!”

기억이 되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냥 예전의 대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교는 곧 그때와 달리 입가에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떠올렸고 그 대신 조금 주춤했던 눈물은 오히려 더욱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연… 이젠 정말 말을 안 듣는… 못된 소녀가 되어버렸군.”

내가 웃으며 질타 아닌 질타를 하자, 대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흑-! 이번엔 기뻐서… 너무 기뻐서 그래요.”

“기쁘…다고?”

“예. 기억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익숙해요. 왠지… 그 울지 말라는… 명령이… 울지 말라고 할 때의 당신이……”

대교의 젖은 눈동자는 마치 지금처럼 나와 재회하기라도 한 듯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기억… 할 수 있을 거예요. 약속해요. 꼬옥… 당신을 기억해 낼 게요.”

약속… 아니, 이건 맹세…인가? 이 아인… 자신의 말과 달리 어떻게 이렇듯 천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토록……

나는 나도 모르게 대교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런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그녀의 눈동자와 달콤한 숨결은 수줍게 떨면서도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와장창~!!

윽! 뭐, 뭐야?

갑작스럽고도 요란한 소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무형의 장막 같은 걸 깨버렸다. 화들짝 놀라 현실로 복귀한 나와 대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나와 대교가 저 먼 안드로메다 성운 너머의 염장별에 가 있느라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런 우릴 숨죽이며 지켜 보고 있었던 모양인 수백 명의 관객(?)들이 험험, 헛기침과 함께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 핫핫~! 내가 이런 실수를……”

깨어진 술 상자 옆에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남자는 천음마군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천음마군은 소림사에 이어 두 번째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염장 불쇼를 펼치던 우릴 말려 준 은인(?)인 셈이었다. 그런데… 소림사의 완벽한 솔로부대 승려들과 이번 관객들의 반응은 상당히 달랐다.

“천주…!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죽을 짓을……”

전에 없이 말꼬리를 흐리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천음마군을 향해 하나 둘 술안주인 고기와 만두 같은 것들이 던져지는 가 싶더니, 곧 사방에서 더 수많은 술안주와 빈 술병들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눈치도 없는 작자!”

“젊은 친구가 왜 그래?”

“멍청이!”

“죽을 짓 했으면 죽어!”

“당신 인기 없지?”

순간의 실수로 별의 별 욕설(?)까지 얻어먹게 된 우리의 천음마군. 그러나 그는 그래도 역시 꿋꿋했다. 중상을 입은 자 답지 않게 잘도 날아드는 것들을 모두 피하는 것 같더니, 나중엔 아예 던져진 안주를 받아 먹어치우는 유들유들함을 보이고 있었다.

<…고마워, 천음마군.>

<예, 예?>

내 전음을 받자 오히려 조금 당황하는 표정이 되는 걸 보니 나에게만은 제대로 야단을 맞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천음마군이 아니었으면 수하들 앞에서 더 민망한… 크흠! 음… 내가 본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하핫핫핫~! 제가 실수한 것일 뿐,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로 흉을 보겠습니까!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하하하~!>

<…아, 암튼, 금주해제.>

<예? 저,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몸을 생각해서 조금만……>

…아무래도 뒷부분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이냐고 반문할 때 이미 몸을 돌린 천음마군은 재빨리 은사마군에게 달려가 약올리듯 술잔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크하하핫-! 은사마군! 천주의 금주령이 해제됐어! 자- 당장 한잔 따라 보라구!”

“흥~! 그 몸으로 술을 마시고 죽던 말던 당신 맘대로 하지. 왜 남에게 달라고 해요?”

은사마군도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높다 싶은 게, 그 사이 자룡대주와 술께나 걸친 모양이었다.

“이 몸은 이 정도 상처에는 죽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어! 천주와 대교님의 사연만은 못해도, 우리 역시 오랜만의 재회이니 밤새 축하주를 마셔 보자구!”

“무슨 소리예요! 누가 당신을 걱정했다고 그래요? 전 이렇게 좋은 날 송장 치우기 싫을 뿐이에요!”

“학핫핫~! 어디 날 송장을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 보시지!”

“차암- 정말! 알았어요! 어디 한 번 죽어 봐요!”

은사마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금 전 천음마군이 깨트렸던 술 상자 밑의 다른 상자를 통째로 들고 와 천음마군 앞에 터억 내려놓았다. 그러나 천음마군은 바로 이런 걸 기다렸다는 듯 더욱 기분 좋게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으음, 어쩌면 오늘 지하무림 최고의 살수 명부화가 정말 천음마군을 술로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아직도 조금 남은 쑥스러운 분위기를 지우기 위해서 공연한 관전평(?)을 하며 대교를 돌아보았다. 대교도 처음 얼마간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었지만, 사람들이 천음마군에게 주의를 돌리고 있는 사이 눈물도 닦고 비교적 말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속이 깊은 분이네요. 보기보다.”

“응? 누구? 설마 천음마군을 말하는 거야?”

“예. 실수가… 아니었을 거예요.”

대교의 말을 듣고 보니,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본래 오지랖이 넓어서 비화곡 내에서도 여기저기 안 끼는 일이 없는 양반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저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대교의 시선은 천음마군을 지나 그 앞의 은사마군, 아니 은사마군 옆으로 조금 더 떨어진 자리까지 옮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 있는 이는 주변의 왁자한 분위기에서 혼자 동떨어져 조용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여자……

“자룡대주…? 천음마군이 자룡대주 때문에 그런……”

“예.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나의 직관력을 능가하는 여자의 육감…?
…아니, 그러고 보니 정황상으로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천음마군이 무심코 기대어 섰다가 쓰러트렸을 뿐인 것처럼 행동했던 술 상자 바로 옆이 현재 자룡대주의 자리인 것이다. 오늘 자룡대주가 대교 앞에서 보였던 행동으로 보아 나와 대교의 염장질이 그녀에게 어떤 기분을 들게 했을지는 안 봐도 뻔한 거지만, 제3자인 천음마군이 바로 알아보고 걱정했을 정도라면……

“몽몽은… 당신이 이 지하무림이라는 조직 사람들과 자룡대주를 만난 건 며칠 되지도 않았다고 하더군요.”

“…응. 그랬어.”

“그런데 벌써 주종관계를 넘어설 정도로 당신에게 빠져들게 하다니……”

에…? 이거 대교의 말투가 어째……

“어, 그게…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한 것 같기는 한데… 그건 저기, 역대 자룡대주들이 지금 자룡대주에게 나에 대해 뭔가 잘못된 인식을 심어줘서… 그래서 그런 거지, 내가 뭘 어쩐 게 아니라……”

나는 나도 모르게 변명 같은 말투로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어색하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나를 지긋이 올려다보기 시작한 대교의 얼굴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웬지… 그게 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바람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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