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4-1화 : 연구소의 실체.(1)
6-6. 연구소의 실체.(1)
혹시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상상해 봤던 여러 가지 이미지 중에서도 상당히 낮은 수준의 행색을 하고 등장한 닥터 제이. 그러나 그런 그의 겉모습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건 그렇다치고… 이 양반 지금, ‘하운 군’이라고 했지? 일개 연구소의 소장이 기업 전체의 마스터를 그렇게 부를 수가 있는 걸까…? 아무리 본인이 없는 자리라고 해도 저렇게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훗~ 자넨 아무래도 날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군. 하긴… 내가 자넬 만났었던 건 자네가 아주 어렸을 때, 하은이는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
그랬…었나? 난 그 딴 기억은 나지도 않… 아니, 그 보다…
짜악~!
불연 듯 울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닥터 제이의 얼굴이 피익- 옆으로 돌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옆으로 돌려졌던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다시 본래의 위치로 뒤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런… 이게 5년만에 재회한 아빠에게 하는 인사니?”
딸래미에게 따귀를 맞은 게 자못 섭섭하다는 표정과 음성이었지만, 하은이는 모질게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당신은 이런 인사조차 없이… 아니! 무엇보다 당신은 나의 아빠가 아니야! 5년 전 그때부터!”
난… 사실 나이에 비해 보수주의에 가까운 성향이라 이런 패륜적인 장면에서는 무조건 아빠 편을 들어주고 딸래미를 혼내주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무래도 하은이를 뭐라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해명…해 보실까, 닥터 제이? 당신은 5년 전, 정하 은이 아닌… 나 그레이스 화이트 크라우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버지, 아니 닥터 제이에게 묻는 하은이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매달려 있는 물방울 때문에 녀석이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으음- 이제와서 더 숨기기도 그렇긴 하다만… 자세한 얘긴 역시 돌아가서 하는 편이 낫겠구나. 물론 그건… 거기 있는 너, 카디도 마찬가지야.”
쳇…! 이 양반, 하고 있는 꼬라지와 달리 날카롭군. 변장을 한 것도 한 거지만, 지금은 아예 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기둥 뒤에 숨어있는 카디의 존재를 어떻게 안 거지?
“에이~ 시시해라. 놀라게 해 주고 싶었는데……”
짐짓 투덜거리며 몸을 드러낸 카디에게 DP의 요원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공주님…! 당신 설마……”
하은이에게 빅터의 의혹에 찬 눈길이 가해졌을 때, 카디가 이미 이쪽으로 달려오며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하이- 닥터 제이! 카디는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어요~!”
“임무 완수…? 귀환?”
빅터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무섭게 카디를 노려보았지만, 닥터 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팔을 벌리더니 어린아이처럼 달려드는 카디를 안아 주었다.
“아아- 그래. 모처럼의 큰 임무라 걱정했는데… 잘해 준 모양이구나.”
“으응~ 그래요. 제이가 시킨대로 두 사람 모두 이 곳까지 ‘유인’해 왔어요.”
뭐…? 카디, 이 녀석 설마… 이게 네가 말한 그 ‘대책’이었던 거냐?
“닥터! 속지 마십시오! 그녀는 우릴 배신하고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빅터의 고자질(?)에 닥터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오해야, 빅터. 카디가 배신을 가장하지 않았다면 우리 공주님은 카디를 진짜로 죽였을 거야. 어쩌면 진유준 군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을지 모르고 말이야.”
“하, 하지만… 카디는 그렇다고 해도 공주님의 행동은……”
“훗~! 우리 공주님이 제멋대로 인 건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은가.”
닥터 제이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일일이 따지지 말라는 말투였고, 빅터가 돌아 본 하은이 역시 자신이 카디의 탈출을 도우려 한 일이 들킨 것에 대해서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빅터는 잠시 질렸다는 얼굴로 닥터 제이와 하은이를 번갈아 노려보았지만, 결국 더 이상 따지지는 못했다.
“자아- 대충 재회의 시간이 끝났으니… 우린 이만 가보겠네.”
응? 아… 나에게 하는 말이군.
“자, 잠깐.”
“왜? 자네도 따라오려고?”
쳇.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물어오니까 오히려 말하기 민망하군. 하지만…
“그…야 당연하죠. 오랜만에 만난 처조카를 무시하깁니까?”
나도 일단 지지 않고 뻔뻔하게 반문하자, 닥터 제이… 여하간 이모부인 그는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극적이며 말했다.
“으음. 나도 사실 시스가 그토록 귀여워하던 조카를 홀대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본사에서 위험인물로 규정한 자네를 회사의 중요 시설에 초대하게 되면 내 입장이 뭐가 되겠나.”
“정론…이군요.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말입니다.”
“후후- 날 너무 과대 평가하지 말게나. 나도 결국 DP에 속한 월급쟁이에 불과하니까 말야.”
“그럼 이 자리 이후로는 당신을 이모부가 아닌 DP의 간부… 즉, 나의 적으로서 대해도 되겠죠?”
“그야… 어쩔 수 없겠지.”
“그 전에 한 가지, 이건 우리 어머니의 전언… 그 분이 하는 동생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 말에 아직은 이모부인 그에게서 조금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내 동생을 정말 사랑했나요?'”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며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나의 어머니, 아내의 언니에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진실에 맹세코.”
“당신은… 내 동생이 숨을 거둘 때… 그 곁을 지켜주었나요?”
그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심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아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랬…군요.”
“…그 뿐인가?”
“그래요. 한 가지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요.”
“조건……?”
“그 두 가지 질문 중 하나에라도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 때는 ‘더 이상 내 동생의 남편이 아니다. 내 대신 한 방 날려버리고 하은이를 데려와!’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예전보다 많이 과격해지신 모양이군.”
“그건 아들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아마 곧… 새 직장을 구하셔야 할겁니다.”
“지금 그 말은……”
“당신의 연구소인지 뭔지,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장난치거나 당사자가 원하지도 않는 복제인간을 멋대로 만드는 시설 따위… 제가 전부 박살내 버릴 거니까요.”
난 사실… DP의 생체공학이 무조건 ‘악마의 기술’같은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뛰어난 미래의 과학이 현재의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나는 기꺼이 무지한 자가 되어 그 것들을 없애 버릴 것이다.
“훗~! 쉽지는 않을 걸세.”
“그 쪽도 절 막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역시 집안에 들이지 말아야 할 손님이 맞았군. 어쨌든… 건투를 비네, 시스의 조카.”
닥터 제이는 말을 마치며 내게서 몸을 돌려 공항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하며 따르는 배신녀(?) 카디가 날 돌아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런… 자신을 제외한 부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은이가 말했다.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화이트 오빠에게는 병이 있어. 재발하면 닥터 제이의 연구소 정도의 시설이 아니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그러니까……”
“연구소를 파괴하지 말라는 거냐?”
“…아니. 조심하라는 거야. 마스터가 행차한 장소의 호위가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
“진심…이냐?”
“…화이트 오빠라면 자신의 치명적인 병을 진정시킬 수 있는 장소를 단 한 곳만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쯧! 아직도 그 녀석에 대한 믿음은 변함이 없다는 거군. 자신의 복제를 만든 건 닥터 제이 일지 몰라도 그리하라 명령을 내린 자는 역시 그의 보스 원판일 거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할 녀석도 아닌데 말이다.
“…오빠. 이제 나도 가야겠어.”
“그래. 이번에는 미리 가있지는 못하겠지만… 곧 데리러 가마.”
하은이는 돌아서며 작게, 아주 작게 웃었다. 내 말을 신뢰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지 모를 웃음이었다. 나는 하은이가 닥터 제이의 뒤를 따르는 모습이 공항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지켜보았다.
“…천주!”
신진 멤버, 자룡대주의 대타(?) 페트라였다.
“카디아나 정, 그녀는 15분 정도 전… 천주께서 동생 분의 환영 문구를 종이에 적고 계실 때, 저에게 이런 물건을 맡겼습니다.”
페트라가 나에게 내민 건 명함보다 약간 클 정도의 작고 얇은 카드형 기계장치였다.
“얼핏 일반 규격의 무선 랜 카드처럼 보이나……”
페트라는 어느 사이 자신의 가방에서 꺼낸 노트북의 소켓에 그 카드를 꼽더니 화면을 내게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특정 주파수를 내는 발신기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한 수신장치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페트라의 노트북 화면에는 그물처럼 치밀한 좌표가 그려진 지도가 있었고, 지금 막 공항 밖으로 나간 이들의 위치를 작은 점이 깜박이며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내게는 몽몽이 있으니 카디가 페트라에게 저런 걸 전해 주었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카디 녀석이 발신 장치를 하은이에게 전해 주거나 할 생각인 줄 알았지, 설마 녀석 자신이 직접 닥터 제이를 따라 연구소로 돌아가 버릴 줄은 몰랐었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끝내 어느 편에 설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이라고 할까…? 어쨌든 일단은 녀석의 안내인지 유인인지를 따라 나설 수밖에 없겠지 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