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4-3화 : 연구소의 실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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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54-3화 : 연구소의 실체.(3)


6-6. 연구소의 실체.(3)

“하, 핫!”
굳어짐이 풀림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애매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이건… 나름대로 반갑기는 한데… 좀,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도 하네? 이거, 이거… 어쩐…다? >

너무 뜻밖이라 조금 버벅대고 있자니까, 그런 나를 페트라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그게… 말이지. 이 메시지가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사실은 적의 본부라는 얘기야. >

< …연구소 같은 곳이 아니고 말입니까? >

< 아마도… 겸하는 거겠지. 하은이가 연구소로 알고 있는 걸 보면 말야. >

< …어느 쪽이든, 준비가 너무 부족했던 것 같군요. >

페트라 이 여자, 다른 측면은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급관으로서는 상당히 모범적인 타입이군. 으음~ 어쨌든 수하가 너무 냉정 침착 담백하게 나오니까 지휘관인 내가 버벅였던 게 좀 민망하네.

< 그래. 사실 DP의 중요 연구시설이라는 점만으로도 그리 쉬운 장소는 아니었는데, 실체가 정말 적의 총본부라면… 오늘의 병력과 장비로 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일 거야. >

< 그럼 일단 물러나는 겁니까? >

< …일단, 전군 정지. >

< 복명. >

‘뒤로 진격’명령을 내리려면 빠를수록 좋다는 건 알고 있다. 지금이라면 ‘신중한 지휘관’정도로 넘어가 줄지도 모르지만 수하들도 댑따 많은 적군의 출현을 알게 된 후에는 아무리 작전상 후퇴를 외쳐 봐야 적의 대군을 보고 쫄아서 튀는 대빵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물러서는 건 좀…… 그래… 나 진유준! 지금까지 살아오며 일단 칼을 뽑아놓고도 맥없이 꽁무니를 뺀 적이 있었던가? 칼 뽑기 전에 별의별 생각 다해보고 미친 듯 머리 속 맷돌을 굴리는 만큼 일단 뽑은 칼로는 면도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제기…!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애초에 카디가 닥터 제이를 속이고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었다. 아무래도 이건 일단 닥터 제이가 보낸 거라고 판단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는 왜 굳이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을까…? 내가 적의 대군을 보고 쫄아서 튈까봐 자극한 걸까…? 그건 그만큼 날 상대할 준비가 완벽하다는 뜻…? …에구, 결국 용감하게 튀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구나. 아… 아니, 아니다. 그건 예전의 혼자일 때의 나고, 지금의 나는 수하들의 생명까지 책임진 몸이다. 날 잘 아는 자라면 오늘의 나는… 음, 그래. 오늘 보니 어쩐지 닥터 제이는 날 잘 아는 것 같았어. 게다가 원판과도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닌 듯 싶었다. 그렇다면 그 역시 원판처럼 수수께끼의 조직에게 압력을 받고 있는 걸까…? 어쩔 수 없이 날 유인해서 공격하는 역할을 맞긴 했지만 속마음은 다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윽, 이거 역시 평화로운 귀가 길을 택해야 한다는… …아냐! 이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만약 원판과 닥터 제이의 관계가 정반대라면…? 닥터 제이가 사실 문제의 조직 사람이고 오히려 원판을 암중에 지배하는 인물이었다면…! 그렇다면 이건 내용만 다르지 결론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에서 달라지는 게 없잖아? 으으으~ 뭐야, 나 진유준! 진짜 이대로 튀어야만 하는 거야?

< …천주. >

< 이쒸! 왜? >

나의 신경질적인 대꾸 때문에 차분하기만 했던 페트라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 어… 미안! 페트라에게 화낸 거 아냐. 무슨 일이 지? >

< …조금 전부터 헬기 레이더에 뭔가 잡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 좋아, 교전 준비! >

< 아, 역시! 복명! >

에…? 나 지금 뭔 소리 한 거야? 으윽~! 그 만큼 머리 속의 맷돌을 돌릴 만큼 돌려도 후퇴라는 결론 밖에 안나왔는데도 막상 입을 여니 습관적으로(?)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려버렸구나! 그, 그러고 보니 맷돌 손잡이가 ‘어처구니’라고 했던가? 나란 놈은 결국 어처구니없는 맷돌……? 마군황으로서의 각성이후로는 간만에 현실도피를 하고있자니까, 조종석의 터너가 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 당신들! 이게 뭐야? 이거! 이 것들이 설마 당신들의 적이란 거야?”

레이더에 이제야 잡혔을 정도면, 아직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역시 전문가라 상황 판단이 빠른 모양이군.

“대수가 우리보다 조금 많을 뿐일 텐데, 그렇게 호들갑인가요?”

페트라가 태연하게 비웃자 터너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우릴 돌아보았다.

“대수가 조금…? 이게 조금이야? 게다가 난 이제야 당신들이 우리 헬기들마다 굳이 꽉꽉 채워 놓은 것들이 생각났다고! 특히 플레어(flare)! 채프(Chaff)!”

본래 단어의 뜻은 아닐테고… 아마 적의 열추적 미사일과 레이더를 교란시키는 섬광탄과 금속조각탄(?) 같은 것들을 말하는 모양이다.

“혹시나 해서 추가 주문한 건데… 잘 됐군요.”

“이봐, 아가씨! 우린 ‘교전 시에도 엄호활동만을 지원’이라고 쓰여진 계약서에 사인했다고! 근데 당신들! 이 터무니없는 숫자와 공중전까지 벌일 생각인 거야?”

“그건 아직 몰라요. 공중전이 되든 뭐가 되든, 싸움은 우리가 할 테니 당신들은 운전이나 정신차리고 하면 되요.”

“미, 미친! 현실이 무슨 3류 액션 영화 같은 줄 알 아? 설사 당신들이 전부 람보 같은 자들이라고 해도 첨단 전투헬기와 게임이 될 거 같아?”

“그건… 그 개인의 전투력이 현실적일 때의 얘기죠. 안 그렇습니까, 천주?”

말싸움 끝에 날 돌아보는 페트라의 시선에 담긴 기대감이랄까…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곤란합니다’라는 협박이랄까… 하여간 상당히 부담스런 느낌의 시선 앞에서,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내가… 쌈 좀 하긴 하지. 물론 내 수하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야.”

아아~ 조금 전의 교전 명령은 말 실수였고, 난 사실 냉정하게 물러나고 싶었다구. 하지만… 이젠 하는 수 없게 되었어. 수하의 기대를 저버리는 마군황이 될 수는 없으니…… 난 그렇게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하며 명령을 내렸다.

< 일단, 전기 착륙! >

적의 부대가 오기 전에 병력을 재편성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고, 곧 다섯 대의 헬기가 일제히 사막 위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착륙한 헬기에서 나와 페트라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우리에게는 차가운 권총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었다. 처음 총을 겨눈 건 부조종사였고, 그 옆의 조종석 난간(?)에 걸터앉아 우릴 내려다보는 터너 역시 천천히 권총을 꺼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계약서와 다른 일을 할 마음은 없어. 더구나 미!친! 자들과는 말이야!”

이런, 이런…! 아직 전투 전이라고 너무 방심했나? 게다가 이거… 꽤 곤란한 입장인 걸? 나와 페트라가 타고 있던 이 대장기는 본래 2인승인 슈퍼 코브라를 약간 개조해서 부조종사 좌석 뒤에 두 세 사람이 겨우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봉고 차의 맨 뒷좌석처럼 앞자리의 부조종사가 먼저 일어나서 자기 좌석을 앞으로 밀어서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나가기는커녕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는 구조인 것이다. 물론 현재의 틈새라도 현재 내 무릎을 베고 태평하게 누워 자고 있는 금동이라면 문제없이 나갈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지만, 역시 저 빈틈없이 겨냥된 총구들을 먼저 처리하지 않고서는……

“자아- 아가씨 먼저 숨기고 있는 총을 내게 주실까?”

느물거리는 터너의 말에 페트라는 나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시선을 던졌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터너의 입에서 휘익~ 휘파람 소리가 나온 건 페트라가 치마를 걷어 올려 늘씬한 각선미와 눈부신 허벅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터너는 물론이고 부조종사의 시선까지 그 쪽을 향하는 짧은 순간, 당연히 내 손이 슬쩍(?)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터너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건 페트라가 허벅지에 차고 있던 소형 권총을 건네주지 않고 총구를 그에게 겨냥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우릴 너무 우습게 보는 걸? 당신 보스는 총을 어디다 숨기고 있는지 몰라도 우린 이미 두 정으로 겨누고 있는 상태라고! 또한 시간을 끌어도 소용없어. 우리들만의 암호로 다른 헬기에도 알렸으니 이미 당신 동료들도 같은 신세가……”

“대, 대장!”

“…응?”

터너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굳어져 버린 건, 자신이 지껄이는 사이 부조종사가 두 팔을 들고 항복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너 왜… 어?”

터너는 그제야 어느 틈에 부조종사가 들고 있는 총과 자신의 총까지 싹둑 잘려서 손잡이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터너보다는 짧게 페트라의 다리를 보았었던 부조종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 보고를 했다.

“자, 잘라버렸어요. 저 남자가, 저 칼로.”

잠시 후. 나는 다섯 대의 헬기들 중앙 공간에서 모두를 모아 놓고 작전지시를 할 수 있었다. 자세한 과정은 모르겠지만, 다른 어사조 멤버들 역시 우리처럼 조종사들의 반란을 간단히 제압해 버렸던 것이다.

< …그러니까, 적의 규모만 더 커졌을 뿐, 처음의 작전에서 크게 변한 건 없다. 나와 은사마군, 은사도객 다섯 명은 저 3호기를 이용한다. >

헬기들 중 두 대는 전투전용 슈퍼 코브라였고, 내가 선택한 3호기를 비롯한 나머지 세 대는 모두 UH-60, 일명 블랙 호크(Black Hawk)라고 불리는 다목적 전술 공수작전용 헬기였다. 간단히 말해서 전투헬기로서도 쫌하고, 짐과 사람도 잔뜩 실을 수 있는 팔방미인형 헬기랄까?

< 그 외의 편성과 구체적인 전투 지휘는 전황마군이 맡고, 페트라는 나의 대리로서 전투 종결 시기와 같은 전체 작전권을…… >

< 자, 잠깐! 하명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는 자룡대의 부대주로서, 여러 대주와 마군들을 통솔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모든 지휘권을 전황마군이 맡고 저는 천주를 수행하는 편이…… >

< 아니. 지위와는 상관없이 각자에게는 자기에게 적합한 역할이란 게 있는 거야. 더구나 페트라 자넨, 지금 부대주가 아니라 대주의 대리로서 어사조에 편성된 거야. 어사조에 있는 한 다른 대주들과 동급이란 얘기지. 뭐… 설마 이걸 모르고 있던 사람도 있었나? >

나는 스윽 모두의 표정을 돌아보았지만, 누구하나 껄끄러운 기색인 자는 없는 것 같았다.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페트라 자룡대주 대리는 천주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

전황마군의 농담 섞인 말에 다른 어사조 멤버들도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페트라는 언뜻 얼굴을 붉히는 것도 같았으나, 곧 본래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대로 천주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

페트라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그럼 다들 각오하셔!’라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나뿐인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건 이들끼리의 문제고!

< 자아- 그럼 이제…… >

“비행용병단 여러분!”

나는 한 쪽에 모여 앉아 포로로서 감시 받고있는 터너와 그의 부하들에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약간의 트러블이 있게 된 건 유감이지 만……”

“흥! 더 이상 아무 말 마시오!”

대뜸 내 말을 끊은 터너는 고개와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우리가 가고 있던 방향을 보았다. 그는 그 사이 육안으로도 식별 가능한 거리까지 나타난 적의 헬기부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했는데, 저 괴물 아파치까지…! 훗! 난 전세계 용병들에게 무모한 짓을 하다 몰살당한 멍청이들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소. 아까 그 아가씨는 댁들에게도 조종사가 있다고 큰 소리 치던데, 댁들끼리나 실컷 싸우다 죽던지 말던지!”

터너의 퉁명스런 말끝에 다른 자들도 맞다, 맞아 어쩌구하며 맞장구를 쳐댔다.

“또한, 더 이상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기라도 하면 나중에 ‘더치 패밀리’가 가만있지 않을 거요. 계약을 깬 건 당신들이 먼저였으니까!”

페트라가 잔금을 ‘믿을만한 인물에게 공탁했다’고 했던 건 더치라는 이름의 마피아 대부를 말했던 모양이 군. 그거야 뭐, 어쨌든.

“…내가 언제 당신들을 해치기라도 한다고 했소?”

“뭐?”

“어차피 우리도 헬기 조종이 가능한 사람은 네 명뿐 이니 나머지 한 대 가지고 돌아가쇼. 우리가 빌린 헬기가 파손되었을 때는 따로 변상하기로 하고… 아- 하지만, 이런저런 계약 변경에 대한 건 나중에 페트라와 다시 협의해 봐야 할 거요.”

“계, 계약은 전부 당신들이 먼저… 아, 아니 그보다! 정말 당신들, 이 정도 장비와 병력으로 저 부대와 싸울 셈이야? 진심이야?”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다들 빨리 가기나 하쇼. 저 무서운 괴물들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나는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와 함께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전황마군의 직속 수하 두 명도 총을 거두고 내 뒤를 따랐다.

“자, 잠깐! 대장! 설마!”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에 이어 터너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놔! 열 받잖아! 저렇게… 저렇게 태연하게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뭐야! 정말 우리들 없이도 하늘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응…? 난 지금 ‘내가 미쳤지, 내가 미치고 만 게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게 저 남자 눈에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보인단 말인가?

“저 바보들에게 뭔가 보여 주고 말겠어! 이 블랙 스마이크, 제임스 터너가!”

거참…! 저 제임스 터너 대장, 겉보기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양아치 용병 같은 남자인데… 알고 보니 소위 열혈바보 쪽인 모양이다. 뭐, 덕분에 나는 잠시 포기했던 전문 조종사를 다시 얻게 될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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