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7-3화 : DP의 공주님.(3)
1-7. DP의 공주님.(3)
G.M과 DP의 동시 철수 후 우리도 시민공원을 떠나 본래의 목적지인 대교의 공연이 있는 콘서트 홀로 향하기 시작했다. 차가 올림픽 도로로 들어가 달리기 시작한 후로도 우리 양파남매는 둘 다 얼마간 별다른 말 없이 멀뚱히 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둘 다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망설임이 길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은아. 너 있잖아.”
“응.”
“가끔 이상한 나라 말로 중얼거리던데… 대체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는 거냐?”
스타트 질문이 좀… 음, 하지만 그것도 되게 궁금했었다.
“7개 국어.”
“7, 7개 국어?”
“응. 모국어인… 한국어와 영어 빼고.”
으윽! 이 녀석, 아무리 진하연의 환생이라 해도 그렇지… 이건 우리 진씨 집안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뭐 그리 놀래? 오빠도 아까 중국어와 영어 잘 하던 걸?”
아참. 몽몽의 하도 자연스러운 동시 통역 때문에 깜박했는데, 난 아까 G.M들과는 중국어로, DP의 론과는 영어로 대화… 응? 그 정도를 대화했다고 해야 하나?
“아… 그게, 나도 중국어는 좀 하는데 영어는 아직 별로……”
“발음 좋던 걸, 뭐.”
“나, 영어는 ‘Yes’ 한 마디밖에 안 했다.”
“응? 그랬던가? 근데 내가 왜 오빠와 론의 대화에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던 거지?”
“…히어링은 좀 돼. 헐리웃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내 어설픈 대답에 하은이는 깔깔대고 웃더니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론 같은 무뇌남이 쓸 수 있는 단어는 한정되어 있지. 누구라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을 거야.”
“쳇! 그래 나도 그런 수준이다.”
“아, 미안! 오빠한테 그런 거 아닌데……”
“그보다, 넌 한국에 한 번도 안 와봤다는 녀석이 뭐 그리 자연스럽냐? 다른 나라 말들도 그 정도 수준인 거야?”
“다 그런 건 아니야. 자주 오갔던 나라 말만… 음… 한국어 같은 경우는 엄마 때문이야. 엄마는 집안에서만이라도 항상 한국어를 쓰도록 강요했어. 보통의 경우 섞이기 마련인… 발음 같은 것까지 철저히 체크하면서까지 말야.”
“이모님이…? 왜 그렇게까지……”
“엄만 내가 언젠가 꼭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셨거든. 돌아가서… 마치 외국에서의 삶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어.”
“그, 그건……”
“엄마가 5년 전에 돌아가신 건 알지?”
“…응. 기억해. 연락 받은 날 우리 어머니께서 하도 슬피 우셔서……”
쳇…! 과거를 아는 것도 좋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중요한 거 묻기가 좀……
“…근데 아까 그 놈들이 널 DP라는 곳의 공주님이라고 하던데……”
“훗~! 그냥 유치한 별명이지 뭐. 자기들 마스터가 그리 부르니까 다들 따라서 그러는 것 뿐이야.”
드디어 나왔다, 그 마스터라는 인물!
“마스터? 니 오빠라는?”
하은이 녀석의 표정이 문득 변했… 으- 제기, 운전 중이라 표정 변화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겠다. 몽몽에게 녹화 떠놓으라고 하는 수밖에……
“그래. DP라는 괴물처럼 거대한 기업의 감춰진 후계자… 아니, 이미 실질적인 지배자인 남자… 그런 남자가 바로 나의 오빠야.”
“…저기, 이모부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는데, 그럼 역시 그 분도……”
“그 사람 말이지? 그 사람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어. 날 DP에 넘긴, 아니 그 전까지 십여 년 간 양육해 준 대가로 아주 근사한 위치에까지 올라가 있지.”
으음- 단순히 이모부까지 돌아가셔서 입양된 게 아닌 건가? 친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하는 건 물론이고 칭할 때 목소리가 어째……
“오빠! 그 얘긴… 더 이상 묻지 말아 줄래?”
“어, 그, 그래. 미안.”
젠장.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더 캐물었다가는 정말 뭔 일 날 것만 같은 분위기라 그만……
“…어쨌건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DP의 총수에게 입양되었어. 그래서 다섯 살 차이라는 오빠도 한 명 생기고… 그렇게만 알아 둬. 아니,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
“또 궁금한 건?”
쯧, 분위기가 어떻든 물을 건 물어야겠지?
“…금동이는 왜 데리고 도망친 거니? 아까 그 도홍이란 사람 말처럼……”
“아하하~ 그 사람은 항상 그래. 머리를 너무 쓰다 보니 지나치게 앞서 간다구!”
“그럼 아니라는 거니?”
“난 본래 잠시 DP를 떠날 생각이었어. 스키장에서 우연히 만난 금동이를 데리고 나온 건 단지 그 직전에 만났기 때문이고… 후후- 정말 기대 이상의 여행이야. 설마 금동이가 G.M이라는 거물들을 끌어들여 줄 줄이야! 아핫-! 얜 정말 나의 보물이야!”
하은이 녀석, 새삼 금동이를 끌어안고 뺨으로 부비부비 하고 있었다. 소중히 여기는 자체는 좋아도 그 동기가 아무래도 불순하다.
“…좀, 그렇다. 내가 보기에 넌 미리 금동이에 대해서 알았다 하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 같은 걸?”
“음~ 인정! 굳이 부인하진 않겠어. 하지만…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야. 만약 G.M이 나쁜 뜻으로 이 아이를 원하는 거였다면 난 벌써 ‘화이트’ 오빠에게 항복하고 보호를 받았을 걸?”
“화이트… 오빠?”
“아, 아직 이름은 말 안 해줬네. 화이트 W 크라우드 (White W Cloud)… 그게 DP의 마스터이자 나의 오빠 이름이야.”
화이트 W 크라우드…?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근데 그보다, 자기 친아버지를 얘기할 때도 냉기가 줄줄 흐르던 애가 외국인 의붓 오래비 이름을 말할 때는 좀 다른 느낌인 것 같은 걸?
“호호홋~ 재미있는 사실 말해 줄까? 내가 크라우드 가문에 입양되면서 얻은 미들 네임이 뭔 줄 알아? 그것도 화이트…! 즉 우리는 화이트 화이트 남매라구!”
이어 더블 화이트니 어쩌니 하며 녀석은 깔깔대며 즐거워한다. 나로서는 대체 뭐가 재밌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가 자기 의붓 오래비를 상당히 좋아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아까 도홍에게 하던 말들은 그저 최근 바쁘다고 잘 안 놀아주는 오빠에 대한 ‘투정’에 불과했던 걸까……?
“음- 오빠도 우리 화이트 오빠를 만나게 되면… 다른 사람들처럼 일단은 놀라기부터 하려나?”
“놀라…? 그렇게 잘 생겼냐?”
“그것도 그렇지만… 후후… 하여간 그런 게 있어.”
“쳇~! 못생긴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음… 근데 아까 그 도홍이란 사람, 어쩐지 전부터 날 아는 것 같은 눈치던데… 어떻게 된 거지?”
“그건… 내가 더 궁금해. 도홍은 DP에서 양성한 SF… 아, 하여간 화이트 오빠의 심복인 사람이야. 미국에서도 괴물로 불리는 론도 그렇고… 도홍까지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오빠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거지? 아, 그 전에 G.M들은 오빠를 ‘전설의 인물’이라고까지 했지?”
으음~ 아직 묻고 싶게 더 있는데 마이크(?)가 넘어가 버렸군.
나는 하는 수 없이 G.M들에게 밝혔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하은이에게도 말해 주었다. 평범한 예비역으로밖에 안 보이는 내가 실은 G.M들의 전설에 나오는 1000년 전 인물의 후계자로 무공과 비밀조직까지 물려받았다는… 날 아는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들으면 처녀 귀신 씨나락 까먹다가 날콩 까먹는 도깨비와 눈 맞았네 소리 정도로 들을 법한 얘기를, 하은이는 매우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 같았다.
“…대단하네. 단시간의 어설픈 분석으로 파악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어, 유준 오빠는.”
“분…석? 날?”
짐짓 모르는 척하고 묻자 녀석은 피식 싱겁게 웃었다.
“모르는 척 하지마, 오빠도 오빠 나름대로 날 관찰하고 분석하고 있었을 거면서.”
“그, 그야… 누구나 처음, 아니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면 어떻게 변했을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거지.”
“후후-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쨌든… 그랬었구나.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줄 알았던 오빠도… 그랬…었어.”
복잡한 과거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질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도, 녀석은 계속 그랬었구나,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녀석이나 나나 이렇게 길지 않은 대화만으로 밝히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음… 근데, 이 녀석 미들 네임이 화이트면 풀 네임은 그레이스 화이트 크라우드…! 프린세스 그레이스 화이트 크라우드…! 이름만 들으면 정말이지 낯선 별세계의 여자라는 느낌이로군. 그리고 프린스… 아니, ‘마스터 화이트 W 크라우드’라는 친구는 또 어떤 남자일까? 나이는 내 또래인 모양인데 벌써 암중에 거대 다국적 기업을 리드하며 마스터로 불린다니 나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한 인물인 모양… 음… 근데 그런 수준의 인물이면서 어떻게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벌써 올해의 경제인이니, 세계를 움직이는 젊은이 같은 타이틀 하에 스타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본인이 매스컴을 싫어해서 나서지 않는 거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사진 몇 장 정도는 인터넷에라도 돌아다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째서 지금까지… 몽몽도 사진은 고사하고 이름… 아니 그 존재조차 찾아내지 못했을 정도로 세상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 걸까?
화이트 W 크라우드…! 기본 신상의 비밀스러움부터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두 가지 측면 다 매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인 셈이다. 게다가… 음… 게다가 또 뭐지? 왜 자꾸 이상한 예감이 드는 거지? 도홍이란 남자의 말도 그렇고… DP의 마스터도 나와 뭔가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이 느낌… 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짚이는 데가 없다.
나, 대한민국 모범청년 진유준. 몇 년 전 종로에서 길을 묻는 백인 남자에게 엄한 곳을 가르쳐 준 걸 포함해서 외국인과는 30초 이상 대화를 나눠 본 기억도 없으니…
아, 아닌가? 비화곡 시절에 야후 장로가 잡아 온 백인 여자와는 좀 길게 대화를 했었지? 그때는 물론 몽몽이 통역을 해 주었기 때문이지만…
음, 그 여자 이름은 아마도 새라, 혹은 사라 코너였던 것 같다. 나와 서양인과의 찐한(?) 인연은 내가 정조와 목숨을 구해 준 그 여자뿐인 것 같은데…
설마 그 여자가 크라우드 가문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으~ 근데 겨우 이틀 정도 왜 이렇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지는 거야?
대교만 아니라면 당장 신생 연옥도든 미국에 있다는 DP 본사든 쳐들어가서 이 모든 상황들을 파헤쳐볼 텐데… 으으… 으… 음… 대교… 대교만 아니라면…
으음… 쯧! 내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왜 대교일 만도 바쁜 이 때에 자꾸 다른 일들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거지? 냉정히 따지고 보면 결국 호기심일 뿐, 천천히 알아봐도 되는 일들인 것을……
그래, 진유준! 일의 선후를 생각하자. 천이단의 후예들이건 하은이와 관련된 일이든 대교의 안전과 중요도를 비교하면 결국 다 별 것도 아닌 일들이다.
그야말로 태양과 호롱불, 바다와 우물물, 태풍 앞의 성냥팔이 소녀…는 좀 아니군. …하여간!
“…마침 다 와간다.”
“응? 마침?”
“아… 그런 게 있어.”
대충 얼버무리며 핸들을 돌려 차를 바깥차선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아직 대교의 콘서트 시작에서 40분 정도가 남은 시각이었기에 콘서트장까지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도 참 대단하네, 아까 그런 일들을 겪어 놓고도 기어이……”
웃으며 말하던 하은이의 안색이 문득 굳어졌다.
“그런데, 무슨… 아니 누구의 콘서트인 거지?”
“너야말로 대단하다. 오라버니께서 어렵게 모셔 가는 콘서트의 주인공을 이제야 묻다니 말야. 그 왜,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는……”
짐짓 태연하게 대꾸하기 시작했지만, 속마음은 웬지 조마조마했다.
“…주가혜로군. 훗~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금동이 일 때문에……”
“가기… 싫으니? 차 돌릴까?”
“그래.”
“어 야아~ 기왕 왔는데 보고 가자, 응?”
“…알았어. 마음대로 해.”
음, 1차 관문은 얼렁뚱땅 통과인가? 그런데… 윽!
나는 미리 확인해 놓은 콘서트장에서 5분 정도 거리가 남은 지점에서 서둘러 적당한 길가를 찾아 차를 세웠다. 그 사이 벌써 하은이의 표정이 또 진하연 모드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주가혜… 잘 모른다며. 근데 왜 그렇게 미워하는 거지? 아니… 그냥 좀 미워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아. 넌 다른 여자 애를 질투할 정도로 못난 애도 아닌데… 이유나 좀 들어보자.”
게다가 사실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교는 니 예비 시누이고, 예전엔 니들 무지 친했어, 라고 말해 줄 수도 없고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