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4화 : 캔들 리(Kandl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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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14화 : 캔들 리(Kandle Lee)


4. 캔들 리(Kandle Lee)

내 입에서 흑주의 이름이 튀어나온 건 순전히 습관에 의한 사고(?)였다. 난 기본적으로 전생이 반복되는 패턴을 싫어하고, 전생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도 알아들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반응했어.

대교 자매의 이름들은 영혼 상태의 대교가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만난 모든 환생자들 중에서 자연스럽게(?) 전생의 이름까지 가 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던 셈인데… 흑주만은 또 흑주인 건가…………? 제기. 타임 씨, 이건 또 무슨 의미인 거요.

「흑주님의 저 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흑주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는 대교의 전음이었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 가지였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들 여다본다’는… 그런 느낌이랄까?

-주의하십시오, 주인님. 흑주님으로부터, 보다 정확히는 이상색체의 한쪽 눈으로부터 분석 불가의 에너지 반응이 있습니다.

쯧 그냥 기분만이 아니었구나.

ᅳ현재로서는 ESP 반응이 가장 크나, 다른 비공인 에너지와 복합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뭐냐, 이거. 이 시대의 흑주는 대체 어떤 옵션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저 녀석, 정체모호의 힘을 가진 눈동자로 나의… 뭘 보고 있는 걸 까…………? 아…………..! 총구를 거둔다.

나와 대교도 꽤 당혹스러웠지만, 흑주 역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당신, 누구?”

어? 마, 말했다!

“하핫! 들었지, 대교! 저 녀석 지금 말했지? 그치?”

“예. 저도 틀림없이 들었습니다.”

난 너무 반가워서 웃음을 터트렸고 대교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너무 짧은 말에 불과했고 어딘가 어색한 말투인 것도 같았지만, 그 래도 흑주가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했다.

“핫, 하아아….. 그러니까, 말야.”

나는 뒤늦게 녀석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는 진유준이라고 하는 사람이야. 여기 이쪽은 대교. 우리는 너의… 에, 뭐시냐…..”

에구. 그러고 보니 우릴 어떻게 소개할 건지를 생각 안 해놨었구나. 막상 닥치면 아무 말이던 나오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네 그려.

“…아빠, 알아?”

응? 흑주의 아버지? “어, 아니. 그건 아냐.”

“에스, 아저씨, 알아?”

“에스 아저씨?”

내가 고개를 젓자 흑주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흑주, 알아. 어떻게?”

이 녀석, 어째 말이 전반적으로 짧네? 아니, 지금은 그보다 당장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지………….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널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음… 어떻게 말해 줘야 할지 모르겠네. 일단은 우리, 얘기 좀 하자. 네가 내려 올래? 아니면 우리가 올라갈까?”

후미진 골목이라 그런지 아직 오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이런 구도의 대화는 좀 그러니까… 에? 저 녀석, 고개를 저어버리잖아? “흑주, 당신, 몰라.”

“그야 니가 지금 날 모르는 거야 나도 알지. 하지만 일단 얘기를 좀 해보면………

단호하게 또 고개를 젓는 흑주.

“당신, 이상해.”

이런 제기. 뭔가 특수 능력이 있는 모양인 저 눈동자에 내 정체… 혹은 영체가 거부감을 가질 정도로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가?

“좋아.”

으잉?

“그거.”

…아. 내가 아니구나. 괜히 깜짝 놀랬네. 짜식이 사람 헷갈리게 하기는…………….

흑주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건, 여전히 나한테 무슨 껌이라도 붙여 논 것처럼 주변에서 멀어지지 않는 새깽이 늑대 라프였다.

으음.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쬐금 기분 나빠지려고 하네? 마계(魔界) 직수입(?) 늑대는 맘에 들고, 난 이상한 놈.. •?

“갈 거야. 오지 마.”

휴. 더 이상 쫓아오지 말란 말인 것 같은데. 어쩐다? 일단 안면은 터놨으니까 다음에 다시 차분한 대화 시간을 만들어 보는 편이 나으려나? 하지 만・・・ 어?

잠깐 고민하는 틈에 사삭 흑주의 신형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급히 대교와 공공보법을 펼쳐 흑주가 있었던 건물 위까지 뛰어 올랐다. 흑주는 벌써 순식간에 다른 건물들 위를 건너 뛰어 가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멈춰! 흑주!」

흑주의 제비처럼 날쌔면서도 안정적인 몸놀림이 흠칫-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주륵 눈에 미끄러져 쿵!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 미안! 괜찮냐?」

엑! 저 녀석 또 총 뽑는다.

「그만둬! 흑주!」

・오. 멈췄다.

「전음?」

「그래. 너도 쓸 줄 알면서, 뭐 그리 놀라냐?」

「…그만둬, 멈춰, 하지 마. 이상해져, 흑주」

응….? 갑작스런 전음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단 말이지? 나의 ‘그만둬, 멈춰.’ 이런 말들, 그러니까… 명령∙∙∙∙∙∙? 내 명령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한 건가? 이런, 이런 ・・・ 그러고 보니까 난 저 녀석하고 지낼 때 주로 그런 명령만 했었구나. 으음… 그렇다면.

「죽이지 마!」

이것도 통하려나?

「오늘 네가 노렸던 인물을 죽여서는 안 돼. 알겠어? 죽이지 마!」

예전처럼 ‘내가 확실하게 죽이라고 하기 전까지는’이라는 말까지 해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는 가운데, 흑주의 대답이 들려왔다.

「안 죽여. 그 사람」

‘와우. 효과 죽이는데?’ 라고 감탄하려다가 말았다. 이번엔 어쩐지 내 명령에 따르느라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흑주. 너・・・・・・・」

뭔가 묻고 싶었지만, 흑주는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결국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좀 불안했는지 먼저 전음을 보냈다.

「멈춰. 그거, 하지 마.」

「어… 그래. 그럼 담에 다시 보자.」

난 결국 흑주의 뒤에 대고 손을 흔들며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다시 ‘멈춰’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에효오~

난 정글도 집을 들어 스스로 내 머리를 두드리며 반성을 해야 했다.

전생의 현생 반복을 싫어하고, 특히 흑주는 진짜 새로운 운명으로 살 수 있길 바란다던 놈이… 흑주가 옛날 명령에 영향을 받는 걸 보고도 계속 장 난을 치고 싶어하다니…………!

그게, 물론… 저렇게 날아다니다시피 하는 녀석이 멈추란다고 진짜 멈추다가 자빠지질 않나, 항상 무표정이던 녀석의 당황한 표정도 꽤 재밌고 귀 엽… 으으~ 나란 놈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인가 봐.

“…괜찮으세요?”

“으응. 뭐・・・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암튼, 그럭저럭 일단락은 된 거 같지?”

“예. 흑주님이 더 이상 천우신님을 노리지 않게 된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애초에 그런 의뢰를 한 자는 우리가 찾아내야겠지요.”

“물론 그래야지. 음・・・ 몽몽. 위성만으로도 계속 흑주 추적이 가능하겠냐?”

-조금 전까지의 접촉으로 흑주님의 신체 데이터를 추가 확보했으므로 가능성이 10% 이상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장시간 지하 구조물 등의 폐쇄된 공간을 이용할 경우를 포함한 변수가 많습니다.

“어쨌든 최대한 좀 부탁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웬만하면 이제 요몽 좀 풀어 주지 그러냐? 혼자 고생하지 말고 말야.”

사실, 몽몽은 요즘 나 못지않게, 아니 현재의 나보다는 훨씬 치열한 사이버 전쟁 중이다. 물론 상대는 세계적으로 몇 명인지도 모를 프리메이슨의 천재 과학자 집단이고 말이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요몽의 교육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몽몽 녀석, 이젠 어쩐지 ‘오기’로 밀어붙인다는 느낌도 드는 걸? 요몽 녀석이 어지간히 끈질기게 반항적인 모양이네. 그만큼 요몽이 풀려 날 때는 어떻게 되어 있을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왠지 조금 무섭기도(?) 하군.

“요몽 문제는 너에게 일임하기로 했으니 더 말하지는 않겠어. 그나저나・・・ 몽몽. 여긴 지금 대체 어디냐?”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리버티 호텔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시, 18분 가량이 소요되는 지점입니다.

역시 몽몽 선생. 잘도 내 맘을 알고 필요한 정보를 주는 행글라이더 쫓아댕기느라 중구난방 헤매서 그렇지, 별로 먼 거리가 아닌 것 같긴 하지 …….

“이제 뛰기도 귀찮다. 택시 좀 불러줘.”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후.

그 사이 나와 대교는 리버티 호텔로 돌아와 늦은 아침 식사를 마쳤다. 나는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으며 소령이를 돌아보았다.

“천우신, 그 친구. 인터뷰인지, 기자 회견인지는 언제 끝난다니?”

우린 지금 천우신이 묵고 있는 503호로부터 조금 떨어진 506호에 있는 것이고, 천우신은 ‘킬러에게 저격을 받았던 자기 방으로 잔뜩 몰려든 기자 들을 상대하고 있는 중이다.

“음~ 잘은 몰라도,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어요.”

뭐, 아직 그리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천우신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기다려지는군.

“소령이 너에게는 뭐라고 하던?”

“그냥… 본래 이런 일도 가끔 있다고 하던데요?”

쯧. 연인에게 지가 위험한 일 한다고 광고(?)하는 녀석이나,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녀석이나……………

나는 소령이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이번 일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흑주……………!

아까는 녀석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거 자체를 기뻐하다가 지나쳤었는데, 그 녀석… 한국말을 하고 있었어. 물론 세계를 누비는 탑클래스의 킬러라면 여러 나라의 언어에 능통할 법도 하지만, 흑주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목표물에 말빨로 접근하여 처리하는 스타일의 킬러는 못 돼.

결국 필요에 의해서 배웠다기보다는, 천년 전처럼 우리 한국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녀석은 천우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 는데, 그건 내 명령 때문이 아니라 본래 그런 의도였던 거야.

천우신이 서 있었다는 자리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책상 위에 총알이 박혀 있던 것만 봐도 그래. 그렇다면… 녀석은 대체 왜 굳이 천우신에게 ‘위협 사격’을 했던 걸까……? 혹시 진짜 노리는 건 천우신이 아니라. 이 메사츄세스의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라는 ‘캔들 리’라는 인물…………? 천우 신은 그의 일급 용병 참모이며, 일급 킹메이커니까 충분히 가능한 추리인 것 같기는 한데…………

“몽몽. 캔들 리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 보여줘 봐.”

-알겠습니다, 주인님.

한국계이고 이민 온 건 40년쯤 전. 매우 훌륭한 인품에 뛰어난 수완을 갖춘 인물이며 각종 스포츠에 능하고, 다양하고 깊은 인문학적 지식, 특출한 예술적 소양까지 갖추고 있어 다방면의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고 있음. 그를 바탕으로 빠르게 정가의 주목을 받으며… 이번 메사츄세스 주지사 선거의 다크호스로 떠오름.

…음. 택시 타고 오면서 한 번 봤던 거긴 하지만. 다시 봐도 엄청 스펙이 좋은 사람이네. 이건 당사자가 내놓은 선전 자료가 아니라 몽몽이 객관적 평가 자료를 뽑아서 만든 데이터니까, 이 정도 인물이라면 이미 멸종된 줄 알았던 ‘멋진 정치인’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는걸…………?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캔들 리라는 사람이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다는 건데 말야…………! “몽몽. 이 사람의 부인, 오래 전 LA 폭동 때 희생되었다던 그 여자 분 사진은 아직도 못 찾았냐?”

-그렇습니다. 코드명 캔들 리는 자기 가족의 비극을 여론 조성에 이용하고 싶지 않다 하여 가족사진의 공개거부 방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 여러모로 대단한 분인 것 같기는 한데… 현재의 내 입장에 서는 좀 갑갑하군. 그래도 집안에는 사진이 남아 있을 테니 수하들 시켜서 뒤져볼 까…………? 음. 할 수 없지. 천우신도 전후 사정을 잘 모르면 그렇게라도 확인해보는 수밖에.

나는 눈을 감고 몸을 좀 더 깊이 소파에 묻으며 다시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때… 천년 전의 주직촌(株織村). 그곳의 한 저택 안… 운치 있는 연못 옆의 별채… 그 벽에 걸려 있던 커다란 그림 속의 두 남녀…………! 바로 흑주 의 부모님, 해동선생(海東先生)과 동주부인 (同舟婦人)의 모습은 분명………….

나는 기억 재생 및 확인을 마치고 다시 눈을 떴다.

…제기. 역시 그림만으로는 판별이 힘드네. 과거의 해동선생 그림과 현재의 캔들 리가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되는 건 그냥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어. 흑주는 그때도 외탁을 해서 아버지를 별로 안 닮고 어머니 동주부인만 쏙 빼 닮았다고 했었는데…

“끄음. 게다가 확인이 돼도 문제지.”

나는 결국 눈을 뜨고 대교를 돌아보았다. 내가 명상(?)을 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대교가 힘내라는 듯 곱게 웃어 주었다.

“잘 결론이 나지 않으세요?”

“음. 흑주가 캔들 리와 어떤 관계인지도 문제지만, 만약 내 생각・・・ 예의 직관력인지 뭔지가 맞다고 해도 문제가 많지. 캔들 리가 LA폭동 때 잃어버 렸다는 딸 ‘펄 리(Pearl Lee)’…………! 그 소녀가 바로 지금의 흑주가 된 거라면. 흑주는 대체 왜 이제와 자기 친아버지의 목숨을 노리게 된 것일 까………? 그리고 오늘 본 흑주 녀석의 이상한 능력을 봤을 때, 우리가 흑주로부터 캔들 리를 지켜주는데도 애로 사항이 많을 거 같고………….”

“하긴, 흑주님의 그 신비로운 눈동자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아까 우리가 몸을 숨기고 있던 위치도 정확하 게 알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일단, 흑주와 캔들 리의 관계를 내 느낌대로 규정하고 일을 진행하긴 할 건데……………”

슬쩍 눈치를 살펴보나 대교는 아무런 이견이 없어 보였다.

“예. 당신의 그 놀라운 직관력은 이제 더욱… 음. 업그레이드, 그래요. 더욱 발전한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건 사실이었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확실하게 얼마나 적중률이 높아졌는지까지는 따져 보기 어렵지만, 분명 예전의 막연함에 비해서 ‘조금 뚜렷해 지기는 한 것 같았다.

친지파멸식이후로… 잃어버린 내공 대신은 될 수 없어도, 전반적으로 잡다한(?) 부분이 좋아지긴 했지. 달마역근경의 새 구결 덕분에 단전을 제외 한, 내 모든 혈도 및 신체 구석구석 ・・・ 몽몽 말대로라면 세포 단위로까지…………!

그렇게 모든 곳에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미지의 에너지가 가득했었다고 하지. 물론 그 에너지도 천지파멸식을 끝내면서 함께 사라져 버렸지만… 그 때 자극을 받아서 그런지 나의 몸을 이룬 세포들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 되었다나…………..?

“지난 번 에레보스의 흡혈귀에게 공격 당하셨을 때 생겼던 상처도 빠르게 치유되셨고, 영적인 예민성, 전반적인 운동능력, 그리고…….”

“굳이 따질 거 없어, 대교. 그런 모든 잡다한 업그레이드도 결국 ‘약간’에 불과한 것 같으니 말야. 기왕 업그레이드하는 거, CPU하고 램을 팍 올려 야 하는데… 기껏해야 하드하고 그래픽 카드 정도나 교체한 셈이랄까…………?”

“음. 그런 예는 잘 못 알아듣겠어요.”

대교 녀석, 주가혜였을 때도 PC하고는 안 친했었나 보군.

“하지만 어쨌든, 당신의 그 발전한 직관력은… 분명 저나 몽몽조차 파악하지 못한 어떤 부분에서 캔들 리와 흑주님의 일치점을 찾았을 거라고 생 각해요.”

…그러길 바라지, 나도.

“그러니 최우선 과제는 흑주님의 현재 움직임을 철저하게 파악하는 것과, 흑주님으로부터 캔들 리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를 캔들 리쪽에 배치하는 것일 텐데………….”

음. 대교의 시선이 향한 곳에 사영이 있군.

객실 한 쪽에서 미령이에게 단검술 단기 교육을 하고 있던 사영이 우리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왜? 나?”

“예. 죄송하지만, 아버지. 흑주님의 저격을 막을 수 있는 분은 아버지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건 나 역시 동감이었다. 내 수하들을 못 믿는다기보다, 사영도 흑주와는 꽤 인연이 있으며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전문가이니 가장 적임자인 것 같았다.

“뭐, 나도 오래도록 실전에서 물러나 있었으니, 재활 훈련 겸해서 나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오호. 의외로 선선히 수락해 주시네? ‘사윗감이란 놈이 장인을 부려먹는다’고 할까봐 내가 먼저 말을 못 꺼낸 거였는데 말야.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과연, 프로. 가족의 의뢰에도 공짜는 없다 이건가?

“은사마군(隱死魔君)…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네의 수하들 중에서 전문 살수가 하나 있지? 그 친구를 좀 빌려줘.”

“…저어. 은사마군은 아직 어린 아가씬데, 장인어른 연세를 생각하셔야………….”

쐐액~! 깡!

무섭게 날아든 단검을 이번에는 내가 스스로 정글도를 들어 막을 수 있었다. 뻔히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래도 대교가 불만을 담아 부르자, 사영은 슬쩍 대교를 외면한다.

“흠. 거, 자넨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결정이나 하게.”

“예, 뭐. 그건 그렇게 하죠. 신 혈의문은 아직 동원할 때가 아니니까요.”

살수계의 대형 스타 사영과 떠오르는 아이돌(?) 은사마군이 커, 아니 파트너가 되어 경호를 시작하면 캔들 리쪽은 일단 안심이라 치자. 그리고 문 제의 핵심인물 흑주는 아무래도 다시 나와 대교, 몽몽이 본격적인 추적에 들어가야겠고… 음?

“천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빨리도 달려온 은사마군에게 나는 사영을 가리켰다.

“지금 이 순간부터 별 명이 있을 때까지, 은사마군은 저분과 캔들 리라는 인물의 경호에 들어간다. 적은 아까의 저격수…….”

“예에?”

응? 이 아가씨가 왜 이리 놀래? 아니, 아니… 놀라는데 그치 것이 아니라… 이거 어째 좀 이상한 걸?

“흐후~ 잘 부탁하네.”

최강 동안 미 중년의 얼굴로 음흉하게(?) 웃는 사영과 나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은사마군의 모습은… 분명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자네, 아니. 마군황께서는 곧바로 보호 대상 인물의 자료를 좀 보내 주시게.”

사영이 그렇게 말하며 거침없이 뚜벅뚜벅 객실을 나서기 시작하자, 은사마군은 붉은 홍시처럼 상기된 뺨을 감추지도 못한 채 황급히 따라나서고 있었다.

나와 대교, 그리고 실내의 소령이와 미령이까지도 잠시 멍하니 입을 열지 못하다가 문득 동시에 외쳤다.

“에이~ 설마아~.”

하지만,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사영과 은사마군 커… 아니, 아니! 하여간 그 둘이 캔들 리의 경호를 위해 나간 후. 한 10분쯤 지났다 싶었을 때 천우신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아아 다들 미안해. 많이 기다렸겠군.”

천우신이 우리 맞은편으로 앉자 소령이와 미령이도 냉큼 주위로 모여들었다.

소령인 평소의 패턴인 ‘좋아하는 사람에게 달라붙기 신공’을 정작 천우신에게는 발휘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피실피실 웃고만 있었다.

사실 이 커플에게는 계속 이들만의 시간을 내주고 싶지만…당장은 어쩔 수 없지.

“하고 싶은 말이.. 아니.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군. 그 첫 번째는 아무래도 ‘왜 내가 저격을 받았는가겠지?”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나 자신에게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장담하건데, 이번에는 한 가지 이유뿐이야. 캔들 리…………! 그분이 지나치게 잘난 인물이라는 거라네.”

그야말로 확신에 찬 어조…………! 으음… 이 친구가 천재 혹은 여하간의 뛰어난 인물 애호가(?)라는 걸 잊고 있었군.

“난 캔들 리를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그분에게 미래의 지도자. 이 미합중국 최초의 동양인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어 본 적 이 없네.”

이거. 이거… 얘기가 좀 커지는데…………? 으음. 어쨌거나 이 친구도 업그레이드를 하긴 했어. 거물의 관찰 및 감상에서 스스로 거물을 만들어내는 것 으로 말이야.

“캔들 리가 이번 선거에서 주지사, 그리고 그 다음 과정으로 이어지는 수순에 막힘이 없을 거라는 건, 나를 비롯해서 여러 전문가들도 같은 의견을 내고 있다네. 물론 여러 가지 조작되거나 의도하지 않은 스캔들… 음. 우린 통합해서 ‘그레이 홀(Gray hole)’ 이라고 부르지. 그 어떤 훌륭한 정치 인이라도 항상 그래이 홀에 빠져 망가지거나 심지어 암살로 허무하게 사라질 위험까지 안고 있지. 언제 어디서나… 거대한 권좌에 도전하는 과정엔 지독히도 치열하고 추악한 전쟁이 따르기 마련이랄까?”

난 그 거대한 권좌까지 우습게 여기는 자들 떼거지와 이미 전쟁 중이며… 나 때문에 여차하면 자네도, 아니 이미 자네도 말려들어버린 건지 모른다는 얘긴… 굳이 지금 해줄 필요 없겠지?

“으음. 나도 그 사람 자료를 검토해 보니까, 자네 말대로 무지 훌륭한 사람이란 건 알겠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도 아닌데 벌써 암살 위협까지 받는 건 좀 오버 아닐까? 자네 같은 소위 ‘킹메이커’ 들의 예측이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건가?”

“아니. 그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제 그렇게 되는 과정이 오히려 빨리 시작되어 버렸다고 할까……?”

“뭐?”

“암살 위협은, 실제로 실현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큰 광고 효과로 여론을 형성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일세. 더구나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이 미 두 사람의 지도자를 암살로 잃은 아픈 경험이 있는 만큼, 모두에게 커다란 ‘공분(公憤)과 동정심’을 일으킬 여지가 있지.”

에…………? 그게 또 그렇구나.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사고가 불가항력으로 이미 발생했을 때의 가정일 뿐인데… 그게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버린 거라네. 솔직히 말해서, 기왕 일 어날 일이라면 나중의 대선 때가 더 좋았는데… 지금은 너무 빨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음.”

이우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시 뭔가를 생각해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캔들 리의 약진을 벌써부터 두려워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기는 하네. 그래서 그들 중 누군가가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막 연한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한 번도 나의 정보망에 걸려든 적이 없었다네.”

천우신은 이미 GM을 떠났지만, 자신만의 루트를 새로 개척한 모양이군.

“그런데… 불과 얼마 전 갑자기 ‘전설적인 에메랄드 킬러’가 움직였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난데없이 오늘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세. 하지만 어이 없게도 전설적인 킬러의 총탄은 나의 책상에 틀어 박혔을 뿐이고……”

이제 내 머리 속에는 확신에 가까운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다.

“에메랄드 컬러, 흑주는 정말 캔들 리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되고자 한다………….! 게다가 아직 시기가 이르대도 어쩔 수 없이 시작했다 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 예를 들어 다른 킬러의 진짜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경고한 것일지도…….”

내 말에 천우신은 분명 긍정의 표정을 지으면서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유준. 자네의 생각도 충분히 일리가 있어. 하지만 아직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무엇보다 에메랄드 킬러가 등장한 이유 자체가 불명확해. 그… 아니. 놀랍게도 여성이라고 했지? 그녀와 캔들 리의 관계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이상 모든 가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으음~ 이 친구는 아무래도 흑주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군.

“일단 캔들 리의 경호를 강화하면서………….”

“어, 그건 이미 내가 사람을 좀 보냈어. 굉장한 실력자들이니까 믿어도 될 거야.”

“오~ 그거 정말 감사해야겠군.”

“우리 사… 아, 뭐 별거 아냐.”

만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우리 사이에 뭘 같은 대사를 하는 건 이상할 것 같아서 얼버무렸다. 하지만 어쩐지 천우신은 내가 무슨 말 을 하려다 만 것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참 이상도 하지. 난 분명 유준 자네를 오늘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벌써 이렇게 많은 얘기들을 내 일의 ‘기밀’에 속하는 부분까지 아무렇 지도 않게 나누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자네 또한 날 대하는 것이 수십 년 지기처럼 자연스러우니 마치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질긴 인연의 상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네.”

정답!

어찌된 건지 소령이가 먼저 ‘현재의 천신조가 천년 전 천우신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천우신은 지금 전생에 관한 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정확하게 정답을 맞춘 것이다.

“어쨌든… 이제 흑주를 다시 만나서 감춰져 있는 사실을 확인 해야………….”

ᅳ주인님! 패티가 흑주님의 초재를 파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나이스타이밍, 몽몽! 패티!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유행(?)했다가 어쩐지 최근에는 별로 못 본 것 같은⋯ 붉은 벽돌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건물의 용도는 ‘병원’ 이었다. “여기라고?”

-그렇습니다, 주인님. 흑주님은 주인님과 대교님으로부터 벗어난 후에도 얼마간 여러 장소를 배회한 끝에 이곳을 찾았습니다. 현재까지 1시간 14 분 가량 같은 병실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환자는 누군데?”

-병원 데이터에 ‘한진희’라는 48세의 한국인 남성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검색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신분으로 나오지만, 저의 2차 검색 결과 ‘가상 인물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한진희・・・・・・?

우리나라의 연기파 중견 배우 한진희 씨의 이름을 쓰는 정체불명의 남자라.. 흐음. 어쨌든 흑주가 언급했던 체스 아저씨일 가능성이 높겠지? 게다 가… 흑주가 전음까지 쓸 수 있는 걸 보면 그 사부 격인 사람일 경우, 상당한 내공의 고수로 봐야 할 거고 말이야.

“좋아, 가자.”

나는 걸음을 옮겨 병원 로비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런 내 옆으로 ‘낯선’ 여자 한 명이 나란히 따라 붙으며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왔다. 누가 보면 내가 바람을 피우는 줄 알 법도 했지.

「・・・ 대교. 용근확골공(用筋擴骨功)을 벌써 마스터했군.」

내가 대교에게 역용술(易術)의 최고 경지에 속하는 용근확골공의 구결을 가르쳐 준 건 불과 열흘 전이었다.

「아뇨. 아직 완전하지는 못한 걸요. 보시기에… 어떤가요?」

순전히 겸손이었다. 현재 대교의 얼굴은 나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다른 여자의 얼굴이었다.

「완벽한데 뭐. 어・・・ 그런데 유지 시간은?

「두어 시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역시 내가 내공을 잃기 전의 99분보다도 길군. 어쨌거나 이제 매스컴을 피하느라 귀찮게 변장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

-주인님! 바로 지금, 흑주님이 이쪽을 감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뭐?

-곧바로 병실을 나서… 현재 병원 내 카메라들의 사각지대로 사라졌습니다.

이런, 이런・・・ 문제의 그 에메랄드 빛 눈동자의 힘인가 보군. 근거리에서는 몽몽의 스캔 기능에 버금갈 정도라는 건가・・・・・・?

암튼, 흑수가 벌써 눈치 깟으니.. 이제 어쩐다? 그냥 계속 병실로 갈까? 아니면……….

주인님. 주의하십시오.

으음. 흑주 녀석, 3층에서 사라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기에 있네 그려?

흑주는 우리가 오르려던 계단 옆의 복도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에 봤던 킬러 유니폼(?)이 아닌・・・ 나름 평범해 보이는 바지와 폴라 티, 그리고 정장형 코트 차림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올 블랙.

「흑주, 따라, 왔어?」

처음 재회했을 때보다도 엄청스리 경계하는 눈빛이어서, 우린 일단 더 다가서지 않고 멈추었다. 우리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당 연히 누구도 우릴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그게, 우리가 직접은 아니지만 딴 사람이(?) 따라다니기는 했지.」

기본 경계+자존심 상함+불쾌감 기타 등등…………! 여전히 저렇게 무표정 얼굴이면서 눈빛만으로 온갖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왠지 신기하기 까지 했다.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아줘. 널 따라다닌 건 ‘굉장히 귀엽고 어린 녀석(패티)’ 이거든.」

약간의 의아함이 떠오르기 시작한 흑주의 시선이 문득 내 가슴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장소가 아무래도 병원이라 내 점퍼 안쪽에 숨기고 있던 새깽이 늑대 라프가 살짝 주둥이를 내밀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이 녀석 말고.. 음. 암튼. 이번에는 너보다 너의 에스 아저씨를 만나러 온 거야.」

라프 때문에 살짝 풀리려던 눈빛이 일시에 냉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파. 오면, 죽여.」

독특한 말투 때문에 오히려 더 살벌하게 느껴지는 협박아긴 하다만………! 자기 편 아픈 걸 순순히(?) 밝히는 걸 보면 확실히 전략형 킬러는 못될 녀 석이군.

“인마. 너도 명색이 킬러에, 그 개성 있는 눈으로 뭐든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말야. 말 그대로, 보면 몰라? 우리에게 살기가 있는지 없는지?”

음.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 같지………? 그렇다면 연타공격(?).

“캔들 리에 관한 일이야. 그 사람,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거든.”

완전 동요. 이번엔 표정까지 완연하게 변해버린다.

「지금? 지금?」

흑주가 발산하기 시작한 심상치 않은 기운 때문에, 근처 의자에 앉아 있던 백인 꼬마 아이들 몇 명이 놀라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아아ᅳ 진정해, 진정! 당장 그렇다는 거 아냐! 그리고 내가 경호원을 더 보냈어! 그러니까 안심하라구!」

「…경호? 당신이? 아!」

흑주는 불현듯 이상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 곳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 아무래도 누군가와 전음으로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흐음. 드디어 ‘에스 아저씨’께서 나서신 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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