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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21화 : 하드 타겟


1 하드 타겟

서울보다 무지 긴 겨울을 가진 도시 보스턴.

나는 그 보스턴의 험한 눈보라가 부딪쳐 오는 리버티 호텔 객실의 창가에 서서 상념에 잠겨 있⋯을 틈은 당연히 없었다. 자룡 대주가 오전부터 찾 아와 어젯밤의 초대형 사고에 관한 보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조심스럽게 다각도로 확인해보고 있으나 아직 까지는 지난밤의 ‘민간인에 의한 핵무기 탈취 및 사용’의 범인을 조금이라도 눈치 챈 기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 뭐. 일단… 소령이 녀석도 명색이 정보 전문 조직의 실력자인데 꼬리가 잡힐 만한 수법을 쓰지는 않았겠지.”

소령이도 소령이지만, 몽몽의 수습 능력이 있으니 평범한(?) 국가기관들 상대로는 안심이다.

“하지만 사막 놈들이 이쪽을 습격한 직후에 핵 맞은 이상. 결국 우리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야. 앞으로의 대처는… 음… 자룡대주의 의견 은?”

“예, 천주. 저의 소견으로는, 섣부른 움직임을 보이면 더 의혹을 살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그냥 관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시침 떼고 생 까자……? 으음, 표현이야 어쨌든.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 방침으로 밀고 나가자구.”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소령님은………………”

“그 녀석은 걱정하지 마. 그게, 그러니까……….”

현재 상황에서 막연히 소령이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엄청 설득력이 없겠지…?

“내가 비밀리에 양성한 해커 팀이 있다는 건 알 거야. 앞으로 그들이 소령이의 행동을 철저하게 체크할 거고… 지금까지는 그렇다쳐도, 이제 녀석 들이 소령이를 위험인물로 인식한 이상 결코 놓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좋아.”

으음… 이 내가 장담하는데도 미심쩍어 하는 듯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섭섭해 하는 표정인 건가?

“아, 그러고 보니 그 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룡대주에게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었군. 그게.. 일단 팀장의 암호명은… 몽몽.”

“특이한 암호명이군요. 의미가..”

“딱히 의미는 없… 으음. 암튼, 나도 잘 모르는 구석이 많은 친구라서 더 설명하기가 곤란하군.”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 나도 정말 몽몽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앞으론 그 친구로부터 자룡대주에게 가끔 연락이 올 테니까 잘 협조해줘. 궁금한 거 있으면 직접 물어보던가 하고.” “…복명.”

‘암호명 몽몽의 실체는 나도 잘 모른다’는 말 때문인가…………? 몽몽에 대한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표정이다.

“사실… 이번 일도 그 친구 몽몽이 빨리 알아채고 대부분 막아 줘서 다행이었어. 자칫 사막 기지 정도가 아니라 사막 전체 혹은 그 이상의 재앙이 세상을 덮쳤을지도 몰라.”

에효, 말하다 보니 소령이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새삼 느껴진다.

“그런데도 정작 소령이 그 녀석은…….”

나는 문득 내 옆의 대교를 돌아보았고, 소령이의 관리 책임자(?) 대교는 다소 민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한다.

“…간밤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군.”

소령이는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며 대교에게는 더더욱 그러니, 소위 필름이 끊긴 건 사실일 것이다.

“어이없기는 하지만… 보안 유지 측면에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봐야겠지. 거참, 무슨 자매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술고래인지 몰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대교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사실 자룡대주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대교도 어제 소령과 대작하다가 꽤나 취했었는지, 내 방에 돌아와서 상당히 재밌는 술주정을 부렸었던 것이다.

혼자알기 아깝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은 대교 놀리는 재미를 즐길 때가 아니지…………! 소령이의 거창한 복수도 실질적으로는 KKK단의 하위 조직 하나를 없앤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게다가 소령이는 소령이고 나는 나다. 내 친구 몸에 흠집 낸 KKK단 놈들 토벌 작전은 계속 되어야 한다. 쭈욱~.

“자룡대주. 어제 쓰리 스켈레톤을 지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가… ‘데릭 허버트’ 라고 했던가? 그자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지?”

“아… 실은, 그자가 KKK단의 간부이며 이번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것은 의외로 쉽게 확인되었습니다.”

“의외로 쉽게?”

“예, 천주. 전투비행단의 ‘블랙 스마이커’ 소대를 이끄는 ‘터너’ 소대장이 그자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에? 터너, 그 친구가?”

“그렇습니다. 그는 과거에 한 번… 아마도, 터너 소대장이 ‘HT 비행 용역사’에서 막 일을 시작했을 무렵에 데릭 허버트에게 고용된 적이 있었던 모 양입니다.”

그랜드캐넌 전투에서 우리와 인연을 맺었던 터너와 그가 이끄는 블랙 스마이커 비행 소대는 아직 분명 독립적인 용병부대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와 장기 전속 계약을 맺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번 KKK단 토벌 작전에서도 동원하려고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흐음. 터너에겐 악연일지 몰라도 우리로서는 마침 잘 된 일이었군. 좋아…………! 현재 데릭이란 자의 위치는?”

“플로리다(Florida)주의 ‘마이애미(Miami)’에 그자의 별장이 있으며, 공식적으로는 며칠 전부터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이애미…………? 거긴 여기와 반대인 남쪽 바닷가에 있는 도시 아닌가……………? 흠. 아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고 있었단 얘기군.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줘. 아마. 두 시간 정도 후가 될 거야.”

“복명!”

기분 같아서는 당장 출발해서 그놈을 때려잡고 싶지만… 출발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자룡대주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몽몽을 불렀다.

“몽몽. 에스… 그 양반, 새벽에 돌아오긴 왔다고 했지?”

「코드명 에스는 금일 오전 6시경에 캔들 리의 자택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태양이 뜨기 전에 코드명 페트라가 확보해 놓은 ‘러브하우스’ 중 1호관 에 안착하였습니다. 1호관의 위치는…………」

역시나 캔들 리의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대략 40분정도 후.

나는 이틀 전에 작살난 테네시의 저택만큼이나 후미진 숲 속 언덕에 위치한 2층집… ‘에스의 러브하우스’ 1호관 앞에 도착했다. 원래는 캔들 리 진 형의 총지배인(?) 천우신이 가장 먼저 에스를 만나고 싶어 했었지만, 그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영만이 ‘경호대 대표’로 함께 올 수 있었다.

“흐음~ 아주 음험하고 사이한 기운이 모이는 장소에 자리잡은 집이로군. 이 집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고생께나 했겠어.”

사영 어르신네는 풍수지리까지 좀 볼 줄 아시는 모양인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내가 사윗감 잘 둔 덕분에 오늘 별스런 구경을 다 해보게 될 것 같군.”

“아이 참. 아버지도………….”

대교가 입술을 삐죽이자 사영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허허- 대교, 이 녀석아. 이번엔 정말 칭찬이었다.”

…음. 아무래도 거짓말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유원지에 있는 귀신의 집을 구경 온 사람처럼 흐뭇한(?)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쯧. 하 여간 취향도 참 별난 양반이야. 근데 그나저나…………….

‘이론으로 아는 것뿐’일 사영과 달리, 난 눈앞의 집이 정말로 ‘귀신의 집’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소위 영안(靈眼)을 억제하고 있는데도 집 주위를 맴도는 ‘회색의 안개덩어리’들이 너무나 잘 보이며 그들에게서 풍겨오는 소위 음기(陰 氣)가 찌인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영체들이 집안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마력에 이끌려 모여든 상황입니다. 제가 원인이 된 마력의 파장을 변조하여 몰아낼 수 있습 니다.」

“…아니, 됐어, 몽몽. 내가 구해 준 집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이제 엄연히 에스가 주인인데 함부로 그럴 수는 없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안개 뭉치(?)인지 잡귀인지 모를 것들은 일제히 알아서 사방으로 물러나며 길 을 터주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빈집에… 가구마다 유령처럼 횐 천이 덮여 있고… 대낮임에도 진짜 잡귀들이 우글대고 있는 그런 사소한 문 제들만 빼면… 으음. 정말 이렇게 가볍게 무시해도 되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기본적으로는 미국 영화에서 흔히 보던 구조의 가정집인 것 같군.

구조상 유일하게 특별한 점이라면 ・・・ 저 2층 계단 옆의 지하실 입구……….! 본래는 평범한 문이었겠지만, 지금은 몽몽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나도 알 아채기 어려웠을 정도로 벽의 일부처럼 보이게 잘 위장되어 있어. 역시 페트라도 자룡대주 닮아서 일 처리가 소소한 부분까지 참 깔끔해.

벽 같은 지하실 문을 열자, 공포 영화에서 너무나 흔히 보아왔던 나무 계단이 지하의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바깥은 분명 환한 대낮이건 만,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공간은 저승의 입구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으며,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나무 계단의 삐걱- 삐걱- 음침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정말 공포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지하공간의 암흑 속으로 완전히 잠겨 버렸을 때. 대교가 먼저 뭔가를 발견하고 낮은 신음성을 울렸다.

“아! 저기, 저기에…………!”

밤바다 위에 떠 있는 검은 조각배처럼 음산한 자태의 커다란 물체는 분명 ‘관’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관에 다가가 똑똑 노크를 했다. “여보세요~ 집에 아무도 안 계세요~?”

역시 폐인, 아니 뱀파이어답게 주침야활인 모양이군. 그로서는 정상적인 취침시간이라서 더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어쩔 수 없지. 쿵! 쿵!

으음. 그래도 안 일어나네?

쾅! 쾅! 쾅!

“가까운 교회에서 나왔습니다아! 우리 성경 얘기 좀 해요~!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천국! 불신지옥!”

오- 드디어 관뚜껑이 열린… 윽!

조금 열린 관 뚜껑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자, 잠깐!”

내가 손을 들어 저지해야 했던 건 에스가 아니라 대교였다. 우리 대교 양께서는 에스가 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청명검(淸明 劍)을 뽑아 에스의 손목을 겨누었던 것이다.

“켓! 저기. 나예요, 나! 진유준! 큽! 이거 촘・・・ 노코 얘기………….”

목이 눌린 채 애써 신분을 밝히자, 그제야 에스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리더니 다시 관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이어서 관 뚜껑이 스으윽- 열리며 신형(?)에스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으음~ 잠결에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일단 목소리는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지…………..?

“미안하네. 괜찮은가?”

“커훔. 음. 예, 뭐……………”

하도 강력한 힘으로 멱살을 잡히는 바람에 숨이 좀 막히긴 했었지만, 사실 그래도 싸다 싶을 정도로 끔직한 폭언을(?) 한 건 나였으니……

“끄음. 그보다, 불 좀 켜도 될까요?”

“태양 빛이 아닌 이상 상관없네.”

에스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팟-하고 조명이 일제히 켜지며 꽤 넓은 지하실을 빈틈없이 밝혀 왔다. 계단 옆에 서 있던 사영 어르신이 조명 스위치를 올려준 것이다.

근데 에고. 삼파장 형광등인가? 깜박임도 없이 바로 켜져서 내가 오히려 눈이 부시네. 에스는 어찌된 뱀파이어가 나보다도 밝은 조명에 동요하 지 않는 것 같은.. 어, 가만? 이거, 이거………………

나는 에스가 관에서 걸어나와 입고 있는 검은 양복의 매무새를 바로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잠시 눈을 뗄 수 없었다.

에스에게서는 우려했던 송곳니나 괴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눈동자 같은 외견상의 문제점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간으로서 엄청나게 업그레이드 된 사양을 갖추게 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호오~ 뱀파이어가 되면 ‘회춘’까지 하나 봅니다.”

병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에스는 실제 나이보다 10살 이상 더 먹어 보이는 중년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누구 봐도 ‘젊은 청년’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젊어져 있었다.

게다가… 저 미모(?)는 본래 바탕이 괜찮았었다고 쳐도, 거기 에 더해진 이 기묘한 느낌은 그래. 분명 뱀파이어 귀부인 카라가 발산하던 ‘비정상 적으로 강력한 성적 마력’이야. 이거 웬만한 여자들은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 졸도시켜 버릴지도 모르겠는 걸?

“…흑주는?”

훗. 아무리 외형이 변했어도 역시 제일 먼저 찾는 건………….

“흑주야지 아빠 지키느라 바쁘죠. 작은 아빠로써(?) 섭섭하시∙∙∙ 어, 아니지? 새벽에 캔들 리 댁에 먼저 들르지 않았나요?”

“분명 그랬었지. 하지만 그때도 아직 내 육체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선뜻 흑주 앞에 나서기가 으음. 어떤가, 지금의 내 모습은?” “안정되지 않았다’는 게 어떤 모습을 말하는 건지 몰라도 지금은 그냥 전에 내가 봤을 때보다 20년쯤 젊어 보이고 좋은데요, 뭐. 그게……….” 나는 약간 망설였지만 결국 말했다.

“밤에는 어떨지 몰라도 말이죠.”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에스는 별다른 기색 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일단 다행이군. 처음엔 나 스스로 거울을 보는 것조차 두려웠었거든.”

거울……? 아,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고 하던가…………? 쯧. 굳이 내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 본 이유가 있었구나.

“아… 이거 다른 손님들께 결례를 하고 있었군.”

에스는 비로소 대교와 가벼운 목례를 나누었고, 이어서 사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계속 말없이 서서 관찰 모드로 있던 사영도 슬며시 진의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새벽까지도 형님댁을 저 대신 수호해주신 분이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정중하게 상체를 숙이는 에스와 달리 사영은 가볍게 고개만을 숙여 인사를 받는다. 들어오기 전에는 신기한 구경을 하러 오는 사람처럼 굴더니 지 금은 왠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유준 군에게 대충 듣기는 했네만… 자네가 ‘사신(死神)에스’. 맞나?”

“…저의 옛 별명을 알고 계시는군요.”

지난 번 테네시의 저택에서 에스의 활약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특히 피해자들?) 비슷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에스가 킬러 활 동을 할 당시의 실제 별명이 ‘사신’이었다고 한다.

“그야 나 역시 같은 세계에 있던 사람이니, 사신 에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 개중에는… 은퇴하기 전의 나와 비교 하는 자들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에……? 사영 저 양반, 혹시 같은 계통에서 잘 나간 후배 에스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후후~ 그 재능에 인간을 초월한 힘까지 더해졌다니, 이제 나 같은 퇴물은 상대도 되지 못하겠군.”

“지나친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데쓰 쉐도우(Death Shadow). 사영 선배님.”

어……?

“호오. 날 알고 있는가?”

“저 역시 은퇴하기 전까지… 자주 선배님과 비교되는 말을 듣곤 했으니까요.”

어라…………? 이 미묘하게 흐르기 시작한 기류는 뭐시여?

“사신 에스가 불치의 병 때문에 일찍 은퇴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꽤 아쉬웠었는데… 흣~! 설마 이런 식으로 부활한 자네를 만나게 될 줄은 몰 랐어.”

“후후. 저도 항상 제 이름 위에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은퇴해야 했던 것이 아쉬웠었지요.”

어라라랏? 점점 분위기 왜이래?

“허어~ 말에 뼈가 있군 그래.”

“선배님이야말로……….”

슬며시 불꽃이 튀기 시작…………..?

“흐음.”

“흠.”

윽! 이거 안 되겠다!

“잠깐!”

나는 서둘러 한 손을 뻗어 가로막는 폼으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가 심판 보…….”

에구구. 나도 왜 이래?

“…자는 게 아니라!”

나는 겨우 얼버무리며 애써 인상을 긁기 시작했다.

“대체 뭣들 하시는 겁니까? 같은 편끼리!”

나는 먼저 사영을 가리키며 에스를 돌아보았다.

“이 분은 현재, 당신이 죽고 못사는 형님을 지키는 경호팀 팀장!”

다시 에스를 가리키면서는 사영에게 말했다.

“이쪽은 불치병으로 고생하다가 겨우 재기하기 시작한, 게다가 당신의 후배인데… 선배로서 꼭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셔야겠습니까?” 으음. 일단 자신들의 현재 입장을 새삼 깨닫는 것 같기는 한데·

“어째 나를 더 나쁜 놈처럼 말하는 것 같네만…………….”

“물론 선배님의 은혜는 잊지 않겠지만…….”

쳇. 좀더 강한 처방(?)이 필요하겠군.

“다 큰 어른들이 뭐 이래요?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진짜 심판 봐줄 테니까, 어디 애들처럼 쌈박질 한번 해봐요!”

내가 손을 번쩍 치켜들어 싸움 시작을 알리려는 심판의 포즈를 취하자, 비로소 두 사람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 렛츠 겟 잇 온(Let’s get it on)!”

에…………? 뭐시여? 막상 개시 구호를 외쳐주니까 표정들이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하는데……………? 에구! 내가 멍석을 잘못 깔아 줬나?

“그건 빅 존 꺼야!”

“그건 빅 존 꺼야!”

엥?

거의 동시에 외쳤던 사영과 에스는 새삼 자신들끼리 시선을 맞추는 것 같더니 사영이 먼저 한 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들어 보인다.

“유준, 자네도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s. 종합 격투기 대회)를 보는 모양이네만, 그렇다면 그 구호가 ‘빅 존’ 즉, ‘존 매카시’ 심판 전 용 멘트란 것도 알았어야지.”

“맞습니다. 빅 존의 명 구호는 다른 어떤 심판도 따라하지 못 하죠.”

“아니, 전 그냥 무심코………….”

“유준 군. 표절은 나쁜 거야.”

윽.

“실사 몰랐었다고 해도 나쁜 건 나쁜 거죠, 진유준 씨.”

으으- 이 양반들이 이제 보니… 막상 한 판 뜨려니까 자신들이 그럴 관계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고는… 날 희생양(!)으로 삼아서 화재를 바꾸려 고 하는구나.

“그나저나. 사신 후배도 격투 시합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혹시 언더 월드(Under World)에서 벌어지는 대회도 알고 있는가?”

“후후. 물론입니다, 선배님. 운 좋게 지난 13차 대회를 관람하기도 했습니다.”

“오~ 자네도? 이거 반갑구먼! 난 그 대회 우승자 ‘스카페이스(Scarface)’의 팬이라네!”

“아 저도 그렇습니다! 그의 실력과 카리스마는 당대 최고죠!”

…쳇. 오히려 금방 잘도 죽이 맞는 것 같네.

나는 안도와 허무함을 동시에 느끼며 뒤로 물러섰지만, 두 전직 살수들의 지하세계(?) 격투 대회에 대한 수다는 어째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어영부영 1시간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간신히(?) 대교와 함께 에스의 러브 하우스에서 나설 수가 있었다.

“이건 어둠의 세계를 주름잡던 전설들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인터넷 격투기 동호회 정모를 보는 것 같았어.” 내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오늘의 만남을 총평하자, 대교는 킥 웃었고 뒷자리의 사영은 짐짓 모른 체 딴청을 피운다. “근데…….”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도 결국 한 번 붙어 보긴 할 생각이죠?”

…쯧. 이 양반, 피식 웃기만 할 뿐 바로 대답을 하지 않네. 아무리 겉으로 분위기 좋아 보였어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성격인 건 에스도 마찬가지인 데… 으으음.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나는 살짝(?) 복잡한 심정이었지만, 결국 더 이상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뭐… 아무리 서로 예전부터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해도, 둘 다 명색이 프로이니 적어도 공식적인 임무가 끝나기 전까지는 말썽을 일 으키지 않겠지……?

취미생활뿐 아니라, 캔들 리 경호에 관한 상의를 할 때도 죽이 척척 맞는 것 같았고 말야. 아직 천우신과 에스의 미팅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친구는 당연히 사영과 달리 에스와 트러블이 생길 요인이 없고… 좋아. 이제 안심하고 KKK단 손봐주기에 올인 해도 될 것 같아.

결론을 내리는 나에게 몽몽이 알려왔다.

「주인님. 마이애미로 이동할 비행장비가 접근 중입니다.」

몽몽이 알려주는 방향의 차창 밖 하늘로 헬기 한 대가 날아오고 있었으며, 그 헬기의 꼬리날개 부근에는 낯익고도 반가운 스마일 마크가 찍혀 있었 다.

“하하핫~! 오랜만입니다, 보스!”

블랙 스마이커 소대의 대장 터너는 여전히 호탕한 목소리를 앞세우며 우릴 반겨 주었다. 사영은 캔들 리 경호로 남았기 때문에 나와 대교, 자룡대 주 이렇게 세 명이 오늘 터너 기사(?)가 운전하는 헬기의 승객이었다. 터너는 헬기를 출발시키고 방향을 잡자마자 더욱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데릭 허버트! 그 돼지 녀석에게 빚을 갚을 수 있게 될 줄이야! 이거, 역시 보스에게 고용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아- 얘긴 들었어. 예전에 그자와 한바탕 했었다면서?”

“그렇습니다, 보스!”

페트라에게 전해 듣기로, 그때 터너는 자신이 수송해야 할 ‘물건’이 팔려 온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당장 계약을 파기한 건 물론이고 고용주 에게 시비를 걸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핫! 그때 그놈의 기름 낀 배에 총알을 박아줬어야 했는데, 부하들이 절 방해하는 바람에………….”

“거짓말하지 맙시다. 대장! 우리가 대장의 생명을 구한 거였지 말입니다!”

으음. 무전기로 끼어드는 이 음성은 터너의 부하 중에서… 울보라는 별명을 가진데다 본명까지 티미한(?) ・・・ ‘티미’ 라는 이름의 금발 청년인 것 같 은데……………? 지금 우리 뒤를 따르고 있는 또 한 대의 헬기 조종사는 그 친구였던 모양이군.

“대장은 하늘에서나 무적이지, 땅에서는 아니지 말입니다!”

“야! 티미! 너 땅에서 나한테 한 번 혼나 볼래?”

“마음대로 하시지 말입니다! 권투는 제가 한 수 위지 말입니다!”

“야! 티미 너! 너 감히 대장에게……….”

훗~! 확실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걸 보니 울보 티미가 의외로 한 주먹 하나보다. 으음… 근데 그러고 보니… 데릭 허버트란 자도 막강한 특수 부대 출신에다 제대한 후에도 현역 팀을 이끌 수 있을 정도로 꾸준하게 실전 경험을 쌓아 온 자로구나. 나도 너무 가볍게 보면 안 되려나……………?

드넓은 미국의 북부 보스턴에서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마이매미까지 가는 길은… 길었다. 사실, 최근 내가 싸돌아다녔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거리 야 우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헬기에서 내리며 유독 특별한 여행을 한 기분이 드는 건………….

…덥군. 실제로는 서울의 한 여름처럼 무더운 건 아니지만, 보스턴의 겨울에 비하면 거의 찜질방 수준이네. 눈 덮인 풍경을 떠난 후 한나절 정도 지 났을 뿐인데 반바지 입은 사람들까지 보이는 해변가라니……………

“이런 데는 역시 맘 편히 놀러 와야 제격인 곳인데 말이야.”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대교도 살짝 웃으며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헬기에서 내린 수하 들이 집합하며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하명하신대로, 전황마군(戰湟魔君)과 그의 전마부대(戰魔部隊)만을 대동하고 다른 병력은 모두 캔들 리와 천우신님 경호로 남겨 두었습니다. 하지 만 동남부에 거주하는 지하무림인들에게 비상을 걸어두었으니, 다각도의 지원은 물론이고 빠른 시간에 인원 보충까지 가능할 것입니다.”

자룡대주의 보고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목을 돌려 풀며 우득두득 소리를 냈다. 천우신에게 따끈따끈한(?) 폭탄 선물을 해주었던 놈의 별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전투모드에 스위치가 켜지고 있었다.

“현재 데릭 허버트의 별장을 방어하고 있는 공식 병력은 보디가드 세 명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초대한 것으로 알려진 남녀 친구들 다섯 명 중 두 명, 그리고 그의 애인들 중 한 명의 신상 정보가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지하무림의 정보망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정체불명의 인물이 세 명이라………….

“또한, 현재 별장을 감시 중인 요원들로부터 기묘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기묘한…보고?”

“예, 천주. 그게 신원파악이 되지 않은 자들 중 한 명의 남자가 마치 유령처럼 벽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목격됐다는…

뭐?

“또한, 별장 뒤의 수영장 물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버렸다가 곧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한 것 같다는… 믿기 어려운 보고도… 이런・・・ 제기! 또 이상한 초능력자들 퍼레이드인 거냐?

「죄송합니다, 주인님. 지금 보고 된 광경은 위성 촬영하지 못했습니다. 패티가 해당 궤도에 있던 위성의 주도권을 일시적으로 빼앗겼었기 때문입 니다.」

당장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가 없다는 건 다소 짜증이지만, 그렇다고 패티를 탓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극도소심심약소녀 패티치고는 최근 오히려 굉장한 분투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여하간 적어도 두 명은 평범한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데릭 허버트, 혹은 KKK단도 그런 초능력자들을 자체보유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또 에레보스의 암살자들일까…………?

…뭐, 어떤 경우든…………….

“알게 뭐야.”

물론 에레보스일 경우에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황마군!”

“예, 천주.”

“먼저 출발해서 놈들의 퇴로를 차단해.”

“복명!”

오는 동안 갈아입었는지 해변가 관광지에 어울리는 복장의 전 황마군과 역시 같은 차림인 그의 수하들이 특유의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룡대주는…………….”

나는 자룡대주에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일을 과연 시켜야 하는 건지 망설였지만, 결국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힘들겠지만, 적들을 유인하는 미끼 역할을 해 주어야겠어.”

차룡대주는 평소와 같은 후방지원만을 예상하고 있다가 조금 놀라는 것 갈았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얼마 후.

“아악~!”

자룡대주의 비명소리가 어두워지기 시작한 숲 속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헐리웃 영화 속의 살인마에게 쫓기는 여주인공처럼 정신 없이 달아나고 있었으며, 그녀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남자의 손에 들린 칼이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이거…………….

난 나도 모르게 정글도를 움켜쥐고 숨어 있던 장소에서 뛰쳐나갈 뻔했지만, 결국 억제할 수 있었다. 내 옆의 대교 역시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움직 이지 않고 있었다.

“아아아아~.”

다시금 자룡대주의 입에서 절망적인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당당했던 두 눈이 눈물과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는 모습은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까악!”

맙소사! 설마?

“자룡대주!”

나는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눈앞의 수풀을 뚫고 뛰쳐나갔다. 그러나 자룡대주는 이미 땅바닥에 처절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녀를 쫓아왔던 남 자의 손에 들린 칼이 번쩍 섬뜩한 빛을 발하며…슬그머니 내려 뜨려졌다.

“어……? 진짜 넘어진 거요?”

남자, 터너 대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칼을 허리춤에 꽂으며 자룡대주를 살피기 시작했고, 나 역시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룡대주! 괜찮아? 안 다쳤어?”

너무나 실감나게 자빠져서 걱정이 된 거지만, 그녀의 손은 천천히 움직여 손가락 두 개를 펴 V자를 그리고 있었다.

“자룡대주도 참… 알고 보니 헐리웃 배우들 뺨치는 연기파였구만.”

“맞아요. 꾸민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조마조마 했어요.”

나와 대교의 칭찬에 이어 칼 든 악당 역할을 해주었던 터너와 캠코더를 들고 뒤를 따르며 촬영기사를 했던 티미도 짝짝- 박수를 친다.

“훗. 자꾸 다들 그러시면, 저 진짜 배우를 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대꾸하고는 있지만, 자룡대주도 자신의 희생자 연기에 꽤나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나는 티미가 뛰어다니며 역동적으로 찍은 캠코더를 돌려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삐딱한 KKK 놈들 중에서도 인간 사냥을 즐기는 변태놈들이 보면 확실히 ‘사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할 수 있을 것 같군.”

데릭이란 자가 헐리웃 제작자답게 희생자들의 영상을 먼저 찍어서 회원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사냥꾼들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몽몽에 게 적당히 합성 영상을 만들도록 시킬 생각이었었다. 하지만 막상 자룡대주의 실감나고 입맛 땡기는(?) 미끼 연기를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그런데 아무래도 미끼는 많을수록 좋을 테니….”

나는 페트라나 미령이, 흑주 등을 생각한 거였지만. 터너 대장은 갑자기 내게서 캠코더를 달라고 하더니 엉뚱한(?) 인물을 찍기 시작했다. 

“어? 뭐하는 겁니까? 대장!”

블랙 스마이커 비행 소대에서는 드물게 훈남 용모의 티미가 찜찜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터너 대장은 군침을(?) 삼키며 티미에게 더욱 다 가서고 있었다.

“후후~ 잔말 말고 티미! 어디, 그 상의 좀 벗어 봐!”

“대장이 미쳤지 말입니다!”

결국 겁을 먹고 달아나기 시작한 티미를 터너 대장이 쫓아가며 낄낄대고 있었다.

“표정 좋고! 좋아! 좀더 매력적으로 울상을 지어보라고, 티미!”

내 입장에서는 썰렁한 광경이었으나… 저것도 변태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미끼로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플로리다의 인심 좋은 겨울 햇살도 완전히 자취를 감춘 시간.

나와 대교는 데릭 허버트의 별장에서 불과 30미터 정도 떨어진 모래사장에 도착해 있었다. 당연히 적진을 직접 신중하게 살피며 전투에 유리한 상 황을 재점검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어째 다른 요소에 자꾸 관심이 갔다.

별장 뒤로는 이국적인 아열대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고… 그 앞은 아름답고 깊은 색채의 바다…………! 거기에 별장 자체적으로 수영장에 개인 바 (Bar). 각종 부수적인 위락시설까지 그야말로… 살판나는 장소로군!

“아아~ 부럽다, 부러워!”

나는 그렇게 외치며 별장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완전히 천국이네! 천국!”

진심 어린 평이었다. 저 탐나는 별장 앞의 모래사장에는 지금 데릭 허버트와 그의 친구들이 바비큐 파티를 벌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세상 참 더럽다! 어딜 가나 이렇게 잘 사는 자들이 꼭 있단 말씀이야! 안 그래?”

“예! 맞아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죠!”

나의 외침에 대교의 점잖은 맞장구가 더해졌고, 예상대로 한창 해변의 파티를 즐기던 인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난 놈들로부터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 채, 몽몽의 통역이 없어도 될 만큼 자신 있는 영어 쌘! 몇 번 더 외쳐 주었다.

-저 중앙의 긴 비치 의자에 누워 있는 짧은 흰머리의 백인이 데릭 허버트………!

그 좌우의 두 금발 글래머 비키니 쭉방 미녀들 이놈의 애인들인 모양이군. 저렇게 팔자 좋은 남자의 주위로 그에 못지않게 즐거운 인생들로 보이는 남녀 다섯 중에서 누가 과연 위험한 초능력자…려나?

일견. 20대에서 40대까지 폭넓은 나이대라는 것과 남자가 세 명에 여자 두 명이라 짝이 안 맞는다는 사실밖에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곳을 계속 정찰했던 수하들의 보고로 유력한 용의자를 꼽을 수는 있다. 문제는… ‘과연 저 둘뿐일까?’ 라는 점이었다.

“가보게.”

거만하게 누워 데릭 허버트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낮게 명령했다. 놈의 뒤쪽에는 소위 조폭 깍두기 스타일의 백인 남자 세 명이 서 있다가 비로소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전 인원 파악할 때 세지 않았던 깍두기이자, 등빨 좋은 깍두기… 으음. 역시 우리나라 말은 꽤 오묘해.

“꺼져!”

이래저래 깍두기 두 명이 으르렁거리듯 외쳤지만, 나와 대교는 그저 웃어줄 뿐이었다.

앞의 깍두기 두 명은 거의 무시해도 될 수준인 것 같고… 조금 뒤에 서 있는 깍두기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익어서(?) 맛이 좀 있을 법한 분위기로군. 하지만 그래봤자 일반인 수준인 것 같은데…………….

“공산주의자 커플?”

조금 익은 깍두기께서 그렇게 물으며 여유 있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어딜 가나 이렇게 잘 사는 자들이 꼭 있다’고 외친 말을 오해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중국 공산주의 거지들인 모양인데, 당장 조용히 돌아가지 않으면………….”

“틀렸어.”

암. 틀려도 아주 한참을 틀렸지.

“난 공산주의 같은… 어설픈 평등주의자가 아니야. 나는 파워자본주의가 탄생시킨 괴물이자, 가끔 먼치킨. 마군황은 본래 자신 외의 모든 수하들끼 리만 평등하다는… 지멋대로 평등주의자란 말씀.”

깍두기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고용주인 데릭 허버트와 일당들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헛소리 말고 당장 꺼지…………….”

팟!

좀 익은 깍두기 옆의 바닥에서 모래가 한 움큼 튀어 올랐고, 그는 재빨리 몸을 낮추며 동시에 허리 뒤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팍! 파앗!

연이어 모래사장의 모래가 부분적으로 튀어 오르자 안 익은 깍두기들도 비로소 놀라며 몸을 낮추고 있었다.

“허버트 씨!”

좀 익은 깍두기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데릭 허버트 일당들은 그 전에 이미 저마다 모래사장에 납죽 엎드려 있었다.

데릭 허버트 외에는 다들 훈련된 움직임이 아닌 것 같았지만… 여하간 일반인들도 곧바로 총격에(?) 반응하다니… 과연 미국이라고 해야겠군. 뭐, 물론 지금은 진짜 총격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데릭 허버트가 소리쳐 물었지만, 좀 익은 깍두기는 바로 대답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팍! 팍! 팍!

디시 몇 번 더 보이지 않는 총격(?)이 주변의 모래사장에 가해지고 있었지만, 정작 수상한 인물들인 나와 대교는 처음부터 계속 손가락 하나 까닥 하지 않는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기 때문인 것이다.

으음. 근데… 괜스레 엎어져 있는 자들도 자들이지만… 나도 참 젠장일세.

“지금 네놈이 뭔가…….”

내가 바라본 지점의 모래가 튀어 올랐다는 것을 좀 익은 깍두기가 깨달은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심검(劍)연습 해보는 건데, 잘 안 되네? 난 역시 발동 거는 게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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