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2화 : 사냥하는 자와 사냥 당하는 자
2 사냥하는 자와 사냥 당하는 자
일찍이 원판도 감탄했었던 의형수검(意形受劍)보다도 상위의 경지인 심검…………! 아니, 내 경우에는 심도(刀)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직접 손을 쓰지 않고 기를 날리는 것까지는 얼추 되고 있었다. 하지만 투입하는 내력에 비해서 위력이 형편없는데다가 겨냥도 정확하게 되 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날카로움’이 없다는 거…………..! 목표를 베지 못하면 이게 심도냐? 심총이지! 게다가 내력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서 총 중에서도 고무 줄 총 수준이니…젠장!
“어째 뽀대나는 고급 스킬 하나 생기나 했다. 내 팔자에 무슨…………….”
나는 결국 아직 감이 덜 잡혀도 한참 덜 잡힌 심검 쓰는 걸 포기해야 했다.
대신 직접 손을 들며 발뒤꿈치로 등 뒤의 도집을 툭 올려 찼고, 도집에서 가볍게 튀어나온 정글도의 손잡이가 자연스럽게 내 손안에 들어왔다. 뽀 대의 수준을 떠나, 이미 적이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에서 할 짓은 아니었지만…………
쾅! 쾅! 쾅!
총성이 울려 퍼지며 강력한 탄환이 허공을 꿰뚫었다. 당연히 허공만.
“이형환위煥位).”
난 우리가 총격을 피한 수법을 친절하게 알려주었건만, 깍두기들은 유령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나는 정글도를 돌려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퍽!
“장작!”
퍽!
“패기!”
퍽!
“신공!”
그동안 한층 원숙해진(?) 나의 독문절기(?) 한방씩에 깍두기들은 땅에 떨어트린 배추김치 마냥 찍- 뻗어 버렸다.
파츳!
섬광분소지(閃光分小指)가 대교의 섬섬옥수에서 펼쳐지는 파공성이었다. 돌아보니, 내가 깍두기들을 패는 사이 이쪽으로 권총을 겨누었던 데릭 허 버트가 총을 떨군 채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까아악~!”
비로소 여자들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달아나기 시작했다. 데릭 허버트와 금발 비키니 쭉빵 애인들, 그 리고 다른 세 명도 집안으로 달아나고 있었지만 두 명의 남녀는 따로 집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 봐라? 하필 보고되었던 ‘수상한 남녀’가 모두 데릭 허버트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으려고 하네………? 역시 에레보스 녀석들이며, 일단 싸움을 구경만 할 생각………? 아니면 날 유인하는 거………? 아, 가만!
일단 별장 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어깨 위의 정글도를 들어 휘릭- 끝을 밑으로 돌렸다.
쿠욱~!
내 정글도 끝에 찍힌 건 파티장 한 가운데 놓인 대형 그릴의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던 소갈비였다.
“고기는 둘째 치고, 질 좋은 참나무 숯과 양념 냄새로 보아 틀림없이 한국계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일 거야. 저녁을 헬기에서 햄버거로 대충 때워 서 영 허전했는데 마침 잘 됐군. 대교, 너도 좀…….”
“아, 아니요. 전・・・ 그 다이어트라는 걸 해볼 생각이에요.”
“에이~ 니가 거기서 더 뺄 살이 어딨다고 그래?”
“아뇨. 저도 보이지 않는 곳에 은근히……….”
으음. 어쩐지 날씬하면서도 쭉빵인 여자들이 진짜 살들의 저주를 받은 여자들 염장 지르는 멘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뭐, 하여간 본인이 먹 기 싫다니 하는 수 없지.
난장판이 된 파티장에서 정글도로 갈비살을 썩썩 베어내 먹고 있자니까 왠지 내가 평화로운 마을을 습격한 산적패 두목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물론 그 사이에도 머리로는 계속 신중하게 현재의 상황을 재검토했고, 결국 갈비 몇 대 간단히 뜯고 났을 즈음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있는 상황에선 일단 먹고 보… 아니, 그게 아니고! 애초의 예정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정도지, 암!
“커흠!”
난 대교의 손을 잡으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별장 쪽으로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잘 들어, 데릭 허버트!”
데릭 허버트는 별장의 2층 창가로 조심스럽게 얼굴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아까 ‘어딜 가나 이렇게 잘 사는 자들이 꼭 있다’고 했었지? 사실은 그 말 앞에 붙여야 할 말이 더 있었어!”
좀 더 상체까지 드러내는 데릭 허버트의 손에 커다란 머신건이 들려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별장 입구를 향해 걸음을 떼며 말을 이었다. “더러운 짓을 하고도! 알겠나? 그러고도 잘사는 자들이 꼭 있더란 말이었어! 네놈과 네놈 패거리들은 비열한 인종우월주의로 갈은 인간을 벌레 취 급했어! 그러고도 니들이 잘나서 신으로부터 면죄부가 주어진 양 거들먹거리고 살았지?”
나는 별장 바로 앞에서 정글도를 치켜올리며 내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대교의 예상 이상으로 대량의 내력을 요구한 것일 텐데, 대교 는 평소처럼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내력을 보내주고 있었다.
“데릭 허버트…………! 솔직히 말하지. 어떤 거창한 이유보다도 네가 오늘 끝장이 나야 하는 이유는 말이지. 네놈 때문에 나와 내 친구의 술자리가 미 뤄졌다는 사실이야!”
내가 들고 있는 것이 ‘단지 칼’로만 보였기 때문일까? 내가 정글도를 내려치는 순간까지도 데릭 허버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그것은 그가 희 미한 반격의 기회조차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소파천결(地笑破天訣), 지파랑(地波浪)!
쿠오오오오-.
지파랑이 일으킨 공진의 충격파가 해일처럼 별장 건물을. 아니 모든 것을 포함한 공간 전체를 덮쳐 뒤흔들며 꿰뚫어가고 있었다.
마치 부분적으로 손상된 영화필름이 상영되는 화면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진동의 파도가 순식간에 지나간 후의 풍경은 곧바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회복되어 있었다. 하지만……………
끼이익! 끼익! 까득! 깍!
일견 멀쩡해 보이던 별장 건물 전체가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삐걱대기 시작했다.
꽈득! 쿠쾅!
결국 건물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살짝(?) 내려앉고 말았다.
기본 형태는 어느 정도 유지된 상태로 2층 건물이 1.5층 정도가 된 사람으로 치면 취해서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랄까……? 어쨌든, 난 분명 인간 이 죽지 정도로 파장을 조절했는데… 고정 된 건물은 오히려 버티지 못했군.
「스캔 결과, 실내에 있던 모든 인간들의 생존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진에 의해 신체에 가해진 충격과 붕괴된 구조물에 의한 2차 충격으로 인해 반격을 도모할 여력을 가진 인간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좋아. 적당한 결과야.
대교로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의 내력을 끌어온 것에 비해 검소한(?) 결과인 셈이었다. 그건 내가 근거리의 확실한 파괴보다 광범위한 구역의 타격 을 원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지금 별장 뿐아니라 뒤쪽의 숲은 더 상당한 크기의 구역이 파괴되어 있었다.
“…몽몽. 숲은?”
「범위 내 식물들의 지면 유착 형태가 크게 변형 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자체복구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행이군. 으음. 역시 먼치킨 모드로 나갈 때 자연보호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 은근히 피곤한 노릇인 것 같네 그려.
나는 언제부터인가 먼치킨이 되어버린 자 나름의 비애를(?) 느끼며 경공을 발동했다. 당연히 박살이 나 있는 1.5층(?)의 창문을 통과해 들어가 보 니, 난장판이 된 실내 여기저기에 데릭 허버트와 일당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의식을 잃은 자 다섯에… 그렇지 않은 건 물론이고 거의 대미지가 없는 것 같은 자가 한 명………! 일단 수치상으로는 예상 및 우려대로의 상황이로 군.
‘초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수상한 자’라고 보고 된 자들은 분명 두 명이었고, 그 두 명은 현재 모두 별장 바깥의 숲 속에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수상한 자・・・ ‘자룡대주의 정보망으로도 아직 신원 파악이 되지 않은 자’는 실내에도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이 정도 충격파는 버틸 수 있는 모양이군.”
내가 말을 건 상대는 의식을 잃은 척 엎드려 있는 여자… 데릭 허버트의 금발 쭉빵 비키니 애인들 중 한 명이었다.
“난 사실, 에레보스의 멤버가 이런 놈의 애인이란 것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주인님!」
당장의 다급한 위기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나와 대교는 반사적으로 경공을 전개하여 뒤로 몸을 날려야 했다.
뭐야… 몰라. 무서워.
최근 인터넷상의 유행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여전히 엎드려 누워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쑥쑥 길어지며 수만 마리의 실뱀 떼처럼 스 멀스멀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옘병! 머리카락 자라는 초능력도 있냐?”
일견 짜증나게 유행하던 일본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지만, 저 여자의 머리는 금발이어서 왠지 이채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실뱀이든 황금빛 실뱀이든, 징그러운 건 오십 보백 보…………! 제기. 뭐 이런 초능력이 다 있어?
「…일반적으로 분류되는 ESP능력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분명 일반인 이상의 ESP에너지 방사도 감지되고 있으나, 특정 세포 조직의 변태 및 이 상 증식의 패턴으로 보아……………」
뭐? 의도적 돌연변이체? CR(Confidential Raiders)……! 즉, 원판의 아이들에 가까운 신체인 것 같다고? 뭐야, 이거. 에레보스가 아니었단 말야? 내가 이래저래 당혹해 하는 사이, 금발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무심코 봤을 때는 전형적인 백치미의 금발 미녀라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옛날에 본 임청하 주연의 영화 속 백발마녀를 보는 기분이었다.
“난 에레보스의 멤버, 넘버 나인 ‘금빛의 요정’… ‘프리제타’라고 해요.”
금빛의 요정?
금빛 마녀가 웬 요정을 자처… 아니, 호칭이야 어쨌든! 에레보스가 맞다고…………? 물론 소위 돌연변이체가 원판의 아이들뿐일 리는… 쯧………! 그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녀석들을 먼저 떠올리고 투지가 흐려지다니… 나도 참.
비로소 쓴웃음이 지어지며 다시 정글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저 여자가 레인을 비롯한 CR의 불쌍한 아이들에게 가해진 생체실험 데 이터를 바탕으로 탄생한 소위 ‘성공작’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혐오스런 마녀로 보이기 시작했다.
“돌연변이에 에스퍼라. 아니, 둘 다 돌연변이라는 말이던가?”
슬쩍 이죽대는 말을 던지자, 아직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고 있던 금발마녀의 기색이 빠르게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난 아직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금발마녀 프리제타의 몸이 서서히 귀신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자체적인 공중 부양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은 머리카락의 힘인 것 같았다.
사록~ 사라락~.
이미 실내를 반 이상 채우고 있었던 금빛 실뱀들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주의하십시오, 주인님. 적의 머리카락 한 올 강도가 같은 굵기의 철사 5배가량으로 분석됩니다.」
제기…………!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들 때문인지 머리카락 어택이라면 목을 감아 조여서 숨이 막히게 하는 정도만 떠올랐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몸 어디 한 군데라도 저런 머리카락 한 올에 감긴 채 당겨지면 그대로 토막이 난다는 얘긴데. 이럴 경우엔 역시 선제공격!
-대교!
대교를 부름과 동시에 나의 정글도가 정면의 허공을 좌우로 그었다.
스가악-!
그물처럼 펼쳐지며 시야를 가리던 금빛 머리카락들이 잘려져 나가는 순간.
파!
대교의 섬광분소지가 그 틈을 뚫고 쏘아졌다. 그러나……………
취리릭 –
심광분소지의 날카로우면서도 강력한 기세가 수백 수천 올의 머리카락 장벽에 막히고 있었다.
사륵~ 사륵~ 사륵~.
순식간에 실내 가득히 마치 정글도에 잘린 거나 섬광분소지를 막기 위해 쓰인 머리카락은 새발에 피라고 과시하는 듯… 빌어먹을!
우리의 선제 콤보(?) 공격을 간단히 무산시킨 금발마녀 프리체타는 아예 머리카락으로 고치처럼 자기 몸을 감싸 버리고 있었으며, 우리는 언제라도 머리카락으로 펼치는 만천화우(滿天花雨)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의 보편적인 대처는 일단 원거리로 몸을 피해 방어 범위를 줄이는 것이겠으나, 지금은 이무래도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적에게 둥을 보여선 안 되는… 연인을 옆에 둔 남자는 피곤한 직업이랄까? 그리고 사실 만천화우식 공격이면 오히려 방어하기가 수월할 수
사라라락~.
쳇. 머리카락들이 몇 십 개 다발로 꼬이며 창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하네. 한 올씩으로는 우리의 호신강기(護身强氣)를 깨기 어렵다는 걸 아는 거야. 쐐액!
엄습해 오는 머리카락 창을 일단 정글도로 비스듬히 쳐냈다. 어지간히 내력을 싣지 않고서는 자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창(?)임이 확인된 것도 문 제였지만…부딪치는 순간의 퍽하는 소리와 감촉이 더 불쾌했다.
사라락-사라락-사라락-.
연이어 머리카락이 꼬이며 무수한 숫자의 기분 나쁜 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제기……!
‘환영의 천사’라는 재수 털리는 여자 때는 빡 돌아서 무심결에 살수를 썼었지만, 역시 여자를 해치기는 싫은데…
현재로서는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정글도에 월광절화결(月光切花訣)의 기운을 맺히게 하기는 했다. 그러나 왠지 한숨이 먼저 나왔다.
에효. 명색이 천하제일 도법의 최고 절기로 여자 머리나 깎아줘야(?) 하는 건가…………?
「주인님!」
응? 뭐, 뭐야?
금빛 머리카락의 창들 아래쪽의 마룻바닥에서 스윽-유령처럼 또 다른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에이 쒸, 진짜! 니들 자꾸 공포영화 찍을래?”
아까 별장 밖의 숲으로 달아났던 남녀 중의 한 명이었으며 수하들은 분명 벽을 통과하는 남자를 목격했었다고…에? 잠깐! 남자? 지금 저건 여잔 데?
나의 의혹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룻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여자 옆으로 남자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유령 같은 능력에는 다른 사람까지 무임승차시키는 옵션도 있는 건가?”
내 말에 남자 쪽이 먼저 희미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이 유대능력(?)의 남자는 아까 멀리서 봤을 때부터 좀 깡마른 타입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아예 환자처럼 핼쑥하고 창백한 안색의 얼굴이라 진짜 병 걸려 죽은 유령 같은 분위기가 나고 있었다.
여자 쪽은 비교적 덜 유령스럽기는 한데 다른 측면에서 인상이 좋지 않군.
평균 이상의 미모임에도 완고하고 날카로운 인상이 더 강한… 흔히 기숙사 사감 스타일이라고 분류하는 스타일 이랄까….? 어쨌거나 두 사람 다 같은 갈색 머리에 어딘가 닮은 이목구비라는 건………….
“남매 유령?”
여자 쪽도 피식 웃었고, 불현듯 내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으면서도 눈은 웃지 않고 있는 여자의 차가운 미소도 미 소지만, 실제로 물리적인 냉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집 뒤편의 수영장 폭 4미터 길이 8미터 정도 크기의 수영장 물을 순식간에 얼려 버린 것 같다고 했으니 저 여자의 능력은 역시 초강력 냉각 혹 은 냉동…………! 초능력을 무공에 비유하면 무림 사상 유래 없는 빙공(功)의 초고수인 셈이랄까…………?
“난 ‘겨울의 여왕’……! 동생인 ‘침묵의 유령’과 함께 에레보스의 넘버 텐을 부여 받았지요.”
역시 알기 쉬운 호칭들이로군. 근데 그보다… 둘이 같은 넘버라고?
공간의 지배자 시그마와 공간의 마녀 산드라는 철저한 주종 관계인데도 서로 다른 넘버를 가지고 있었어. 이 남매만이 하나의 넘버를 공유한다는 건 그만큼 서로의 능력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인가……………?
방금 서로 손을 잡는다거나 여하간의 접촉이 없는 상태로 동시에 마룻바닥을 통과해서 나타났으니 일단 유령 능력은 그게 가능하다는 얘긴데. 젠 장. 이거 예상보다 더 골치 아픈 콤비일지도 모르겠다.
“프리제타. 이제 그만해.”
에?
겨울의 여왕이라는 여자의 말이 뜻밖인 건 금발마녀 프리제타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싸우지 않을 거예요? 당신들 남매야말로 그 사람과 싸우고 싶어 했잖아요!”
머리카락 고치(?) 속의 프리제타가 외치자 겨울의 여왕은 내게 서늘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그랬었지. 그리고 조금 전 우리 모두를 동시에 공격한・・・ 대규모 공진 능력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커졌었어.”
내가 굳이 지파랑을 쓴 건 분명 숲으로 짱 박혔던 이 유령 남매까지 동시에 치기 위함이었다. 물론 데릭 허버트 일당을 즉사시키지 않으려고 힘 조 절을 한 탓인지 에레보스 멤버들에게는 단지 흥미로운 공격’ 수준밖에 되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막상 프리제타를 상대로 싸우게 되자 왠지 ‘신경질적이고 단호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어. 이 진유준이란 남자가 ‘여자와의 싸 움에 약하다’는 데이터가 확인된 셈이지.”
나에 대한 분석 평가는 그렇다 치고.. 실내에서 진행된 일을 방금 온 여자가 잘도 알고 있네? 제기, 유령 능력과 냉동 능력에 투시 능력까지 있는 거야, 뭐야?
“…그러니 여자인 우리가 어설프게 싸움을 걸어 봤자 당신의 숨겨진 전투 능력을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응? 이번엔 나에게 한 말인가?
“그렇다고 넘버 식스, 환영의 천사처럼 당신을 지나치게 자극했다가 진짜 본성을 깨우고 싶지는 않으니………….”
‘진짜 본성’
…..? 젠장. 결국 내가 평소에는 나름 신사도를 지키다가 빡 돌면 개가 돼서 여자도 때리는 그런 놈이라는 말이구나. 환영의 천사인가 하는 여자 를 죽일 뻔했을 때를 생각하면 부정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왠지 억울한 기분이…………….
“아… 그렇게 판단했으면 좀 더 빨리 나와주지 그랬어요.”
작게 탄식하듯 말한 건 프리제타였다. 이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던 금빛 머리카락들이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광경처럼 스르르 물러나더니 순식 간에 프리제타의 본래 모습이 돌아오고 있었다.
・・・쯧. 어쩐다?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은 아무래도 데릭 허버트 족치는 일이 더 급하니, 여자들이 알아서 그냥 가주면 고마운 노릇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적들이 지들 멋대로 시비를 걸어 왔다가 그냥 갈 수 있게 두는 건 좀… 으음. 뭐 껀수 없나? 시그마 팀에게 삥 뜯었듯이 이 아 가씨들에게도 뭔가………….
“하아~ 괜히 나만 진유준 씨에게 밉보인 것 같네요.”
평범한 헤어스타일로 돌아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는 프리제타의 표정과 조신한 말투 때문에 적대감이 더욱 하강… 에구. 어쩌자고 이렇게 쉽게 마음이 풀리기 시작하는 거냐, 진유준!
짜증나는 검은 예수회 놈들처럼 저 여자도 결국 불쌍한 CR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탄생한⋯ 어, 잠깐? 방금 저 금발마녀… 한국말을 했잖아?
“당신은 그 아이들에게 잘 대해 준 분이니, 구체적인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는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금발 아가씨가 갑자기 한국말을 하니까 어색. 아니, 그보다!
“그 아이들?”
“…DP로부터, 아니 자신들의 마스터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당신이 거두어 주었다고 들었어요.”
“뭐야. 너도 CR 출신이었어?”
“그건…….”
“훗! 그럴 리가 없지요.”
끼어든 것은 겨울의 여왕이었다.
“우리 프리제타가 그들과 같은 연구소에게 탄생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프리제타는 그 연구소, 아니 모든 연구소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완성 체…………! 실패작들 중에서 그나마 조금 나은 정도인 치킨 립(Chicken Ribs)들과 비교하면 곤란하죠.”
“누나!”
침묵의 유령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지 누나 겨울의 여왕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낼 뿐 더 이상 뭐라고 말을 잇지는 않고 있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고는… 그게 다니?”
겨울의 여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침묵의 유령은 호칭 그대로 계속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방금 겨울의 여왕이 한 말은… 일단 프리제타를 칭찬한 거기는 해도… 프리제타가 자신의 형제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면 그 형제들을 비하하는 발언은 프리제타가 싫어할 테고. 그런 부분까지 걱정해서 침묵을 깬 유령 청년의 하트 방향은. 으음. 근데 이거 자꾸 분위기 왜 이래?
나는 이래저래 싸울 맛이 사라져 버려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정글도를 내려트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유령 남매는 결국 올 때처럼 유령같이 사라져버렸고 프리제타도 그 뒤를 따라 떠났다. 그리고 유령 남매 중 누나인 겨울의 여왕은 사라지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네 명만이 남았군요. 그들은 모두 남자이니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네요.”
이제까지 만난 넘버들과 합쳐서 세어보면 총 12명이라는 얘기였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저 나에 관한 데이터 수집중일 뿐이라고…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고 가네.”
내가 다소 어이없어하자 대교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왠지 뭔가 다른 효과도 노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다른 효과?”
나도 짐작하는 바가 있지만 일단 대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초롱이와 산드라, 그리고 오늘 만난 금빛의 요정 프리제타 모두 기본적으로 여자인데다 당신께 호감을 줄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으음. 우리 대교가 설마 질투심 위주의 분석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본성이 그런 건지 꾸민 연출인지를 떠나서… 일단 당신께 통하기는 한 거 같아요. 당신께선 여자와 싸우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분이기는 해 도, 오늘처럼 적을 그냥 보내 줄 분은 아니거늘…..”
“… 인정.”
“또한, 오늘까지 만나고 싸워 본 에레보스 멤버들 모두 너무 약했어요.”
그래. 그게 진짜 문제의 요점이다. 물론 나와 대교가 반칙적으로 강해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적들 역시 전 세계를 지배하는 조직에서 엄선된 암살 단 멤버들인데도 그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에게 죽을 뻔했던 시그마와 산드라, 당신의 심검에 속수무책이었던 환영의 천사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까지 더 강한 능력을 쓸 수 없도록 금제가 걸려 있었거나… 진짜 정 예 멤버가 따로 있다거나………….”
대교는 말끝을 흐리더니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패를 숨기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에레보스의 수장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방심시키고 나서 그 패를 꺼내들 생각이겠지요.”
나도 솔직히 한숨을 내쉬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다. 냉정하게 따져보니 ‘약했다’인 거지, 사실 지금까지 겪은 녀석들의 수준만으로도 장난이 아니었 는데 그것도 날 ‘방심시키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면……………
“하지만 뭐, 어찌 되겠지요.”
에?
“대교. 그건 내 대사야.”
“후후- 아무려면 어때요. 중요한 건 제가 뭔가 걱정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점이죠. 이렇게 당신과 함께하고 있는데 말예요.”
“어. 뭐, 그야, 음. 당근이지.”
난 대교의 ‘반짝반짝 믿음의 눈빛 공격’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음~ 걔네들 걱정은 담에 하기로 하고… 그럼 이제 기분전환이나 좀 하기로 할까?”
나는 여전히 마룻바닥에 엎어져 있는 데릭 허버트 쪽으로 걸어가서 발끝으로 팔을 툭 찼다.
“어이 일어나. 자는척하지 말고.”
프리제타가 떠날 때쯤 정신이 들었다는 몽몽의 보고가 있기는 했었지만, 이 백인 놈팽이의 불규칙한 숨소리는 내 귀에도 아주 잘 들리고 있었다. “에이~ 나름대로는 거물이라고 자처하며 살아왔을 양반이 왜 그래. 응?”
살짝 비웃어주자 비로소 데릭 허버트가 움찔하더니 주춤주춤 움직여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까 해변의 모래사장에서는 그래도 전 현직 특수부 대 팀장 겸 인간 사냥꾼답게 제법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던 자였지만, 지금은 태도나 표정에 맥이 없었다.
훗. 하긴, 이미 현실을 벗어난 우리 커플의 전투력을 겪어본데다 그런 우리로부터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 같았던 초능력 암살단 멤버들은 생까고 가버렸으니……………
“대체 넌… 으윽!”
데릭 허버트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나온 건 내가 정글도의 등으로 놈의 어깨를 찍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어나라고 했지, 지껄여도 된다고는 안 했어.”
“내,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미국에서……….”
사각.
대교의 청명검이 언제 뽑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는지 나조차 제대로 못 봤을 정도였다. 당연히 놈은 자신의 이마가 좌우 일자로 베어졌다는 것을 상처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오기 시작한 다음에야 겨우 깨닫고 있었다.
“어.. 헉?”
“듣지 못했나요? 천주께선 조용히 하라 명하셨습니다.”
오. 역시 적에게는 무서운 우리 대교 마님.
사실 지금은 피부만이 살짝 베어진 거였지만 데릭 허버트는 결국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놈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인지라, 우리 대교가 내 앞이라서 최대한 얌전을 뺀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디가 잘렸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감 잡은 것이다.
“천주!”
날 부르며 조심스럽게 실내로 들어서고 있는 아가씨는 당연히 자룡대주였다. 유령 남매와 프리제타가 사라지자마자 모두를 호출했기에 자룡대주 의 뒤로 전황마군과 그의 전마부대원들도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천주. 현재 이 별장 안에 있는 자들의 추가 신상정보가 있습니다.”
“어, 그래? 혹시 저자들도 KKK단과 관계가 있는 건가?”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데릭 허버트의 친구들을 턱짓하자 자룡대주는 약간 애매한 표정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저 소파 위에 함께 늘어져 있는 중년 남녀는 부부로서, 둘 다 ‘기자’ 입니다. 정치가와 연예인을 비롯해 인기인들의 사생 활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캐낸 다음 자극적으로 왜곡된 특종을 만들어서 명성과 부를 얻은 자들이기는 하나. KKK단과의 직접적인 연관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쯧. 어느 나라에나 훌륭한 동료 기자들을 욕 먹이는 사이비 기자들이 섞여 있는 모양이군.
“나하고 직접 원한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냥 보내긴 좀 섭섭하네.”
“허면…….”
“똑같이 해주는 거지 뭐. 바쁘지 않은 정보요원 있으면 당분간 저자들 스토커 좀 하라고 해. 침실이고 화장실이고 어디건 사생활 전부를 고화질로 찍어서 인터넷에 뿌려. 그리고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사생활에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으면 소설을 그럴 듯하게 써서 퍼트리기도 하라고 해. 음… 난 역시 너무 착한 모범청년이라 그런지 심한 짓은 잘 생각이 안 나네. 그냥 그 정도만 실시.”
“…복명.”
처분이 결정되자마자 전마부대원들 몇 명이 부부기자를 짐짝처럼 들어 밖으로 나갔다.
“남은 두 명은?”
“저 금발 미녀는 배우 지망생이며 현재는 데릭 허버트의 여러 애인들 중 한 명이지만, 그저 철없는 아가씨일 뿐, 역시 KKK단과의 직접적인 연관 중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한 명은…………….”
자룡대주의 시선이 남은 한 명의 남자, 이제 보니 꽤 등빨이 좋은 편인 중년의 남자를 향했는데,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자는 데릭 허버트의 고향 후배로서, 과거 하이 스쿨의 ○○종목 감독으로 지내며 어린 여자 선수들을 농락하다 체포된 전과가 있는 자로 서…….”
이런 썅!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이런 보고까지 드려야 할지……….”
뭐야. 자룡대주가 갑자기 왜 내 눈치를 살피지?
“체포될 당시 자신의 행동은 한국 유학시절 배운・・・ ‘효율적인 여자 선수 관리법’이라는 주장을………….”
“…뭐?”
“선수는 자기가 부려야 하는 종이다. 선수를 장악하려면 성관계가 주 방법이고 둘째는 폭력이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오히려 대접받으며 지내고 있더라고…………….”
뭐야? 나 지금 우리나라 얘기 듣는 거 맞아?
“송구스럽습니다, 천주! 제가 공연히 확인되지 않은 사항까지 보고를……
“아냐, 자룡대주. 아는 건 다 보고해야지. 음… 수고했어. 잘 들었어.”
내가 애써 웃어주며 말했음에도 자룡대주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자룡대주. 저자를 어떻게든 엮어서 감옥에 보낼 수 있지?”
“예, 천주!”
“그리한 다음, 그 안의 악질들만 섭외해서 저놈에게 비누 줍게 아니, 요즘은 다른 말이 유행이라지? 그 뭐냐. 주머니 좀 잡고 다니게 해.”
“아, 프리즌 브레이크…………! 복명!”
-몽몽.
「예, 주인님.」
-방금 들은 얘기의 진위를 확인하고. 만약 사실일 경우……! 한국의 나와 나의 자랑스런 조국 남자들의… 명예를 더럽힌… 그 짐승들 명단 뽑 아놔.
맹세하거니와, 그 짐승새끼들의 구멍이란 구멍에 전부 독사를 쑤셔 박아줄 테다!
원래 KKK단 사냥을 앞두고 있었는데 귀국하면 국산 짐승사냥까지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약간(?)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교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아왔다.
-릴렉스 릴렉스~.
조심스러우면서도 약간의 애교가 담긴 전음에 나의 흥분과 살기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전황마군.”
“예, 천주!”
하아… 그래. 참자 참아. 아무리 빡 돌았어도 힘없는 포로에게 화풀이하는 건 마군황이 할 짓이 아니지.
“전황마군에게 맡기지. 먼저 알아낼 것은 이자가 주최하는 사냥대회 참가자들의 명단과 연락망이지만… 뭐, 정보는 많을수록 좋을 테니 알아서 해.”
“복명!”
전황마군은 명령을 받자마자 자신의 수하들 쪽을 돌아보았고, 그가 누굴 지목하기도 전에 한 명의 부대원이 알아서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살벌무쌍한 인상의 전마부대원 중에서는 비교적 얌전한 분위기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년 전 혈랑대(血狼隊)의 십인장(人 長) ‘백상’처럼 토실토실한 얼굴형에 가느다란 눈매의 남자인데, 그 실눈 사이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쳐 왕’. 그런 이름이었지?”
“아- 기억해주시는 겁니까?”
아쳐 왕은 나름 감격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솔직히 나는 마군 이하의 말단 수하들 이름까지 전부 외우고 있지는 못하다. 이 친구 이름은 아더 왕이 연상돼서 그냥… 음. 암튼.
“그럼 수고해.”
간단히 말하며 돌아서자니, 뒤에서 데릭 허버트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 대검은 설마 너희들이 워 워커(War Walker)와 디먼스(Demons) 부대?”
데릭 허버트도 참전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전장을 산책하는 자와 부하 악마들… 즉 전황마군과 전마부대를 알아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네가 고문 전문가, 변태 악마 아쳐 왕?”
별명이 다소 거시기한 친구였군. 제네바 협정의 전쟁 포로 보호 조약 같은 건 메롱이라는 신념의 친구인 모양인데…………….
과연,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별장 안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룡대주가 후다닥 뛰쳐나와 한 손으로 입을 막 으며 숲 쪽으로 달려가 버린다.
자룡대주도 보통 여자는 아닌데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으음. 아무래도 비화곡(秘花)이 재건되면 지옥전(地獄殿)에 특채로 스카우트해야 할 인재인 것 같구먼.
우린 이미 별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져 있었지만, 적막한 바닷가여서 그런지 데릭 허버트의 비명소리는 여전히 뚜렷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 리하여 바다 쪽을 향하기 시작했지만 대교는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응……? 대교, 이 아가씨 보게? 말뿐이 아니라 정말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네?
“저도 저런 소리가 듣기 좋을 리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주님과 지옥전(地獄殿) 부근을 산책하던 추억이 생각나기도 해서…………….”
아…………! 그러고 보니 지옥전 부근에 유독 향기가 좋은 꽃이 많아서 밤에 가끔 데이트 코스로 삼기도 했었지?
“그때는 물론 바닷가가 아니었지만 아~ 하늘은! 저 밤하늘은 그곳과도 같아요.”
적어도 오늘의 전투는 종결되었기 때문인지, 대교는 새삼 마이애미의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확실히 천하마인들의 아이돌 소녀와 마인들의 두목인 자의 데이트에 누군가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는 건 나름 어울리는 것 같기 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