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62화 : 전쟁 준비 완료?!
2. 전쟁 준비 완료?!
“천주!”
초사마군이었다.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출구 쪽으로 돌아선 나를 부르며 한걸음을 내딛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졌다. “천…….”
나를 부르고 자기 제자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간청의 말을 하고 싶은 거라는 건 너무나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 를 떨구었을 뿐 나를 막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자룡대주!”
이번엔 내가 입을 열어 자룡대주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즉각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모니터 속의 소군황이 칼을 들고선 모습과 나를 번 갈아보며 빠르게 상황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쭈뼛거리고 선 그녀를 지나쳐 먼저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내 뒤로 따라 붙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무, 아니 가르침 장소를 하명하시면…….”
나와 소군황의 싸움을 굳이 ‘가르침’이라고 정의한 것이나, 따로 장소를 언급한 이유도 알겠지만..
“장소? 마군황이 언제 장소 가려서 도전을 받았던가?”
나의 ‘도전’이라는 표현이 자룡대주를 더욱 긴장시키는 것 같았다.
“그, 그건・・・ 아, 알겠습니다, 천주.”
자룡대주는 이미 손에 들고 있던 호출기로 어딘가에 지시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리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소군황 놈이 기다리는 지하무림 도시 구역을 향했다.
「주인니임! 설마 이렇게 흐뭇한 파티에서 정말 유혈낭자 깽판을 치실 건 아니겠지요오?」
요몽 녀석, 자룡대주의 걱정을 매우 직설적으로 표현해오는군.
-얌마. 니가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진짜 내 쪽이 나쁜 놈 같잖아. 칼 들고 쳐들어 온건 어디까지나 저놈이야. 더구나 소군황놈은 내가 살살 봐줘가면서 싸울 수 있는 놈도 아니고!
「그야, 그건 그렇기는 한 것도 같긴 하지만서두……………」
-짜식! 너도 이제 보니 꽤 발전하긴 했구나.
「예? 제가 뭘요? 칭찬해주심 좋긴 한데, 근데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해서 칭찬해주신 거죠?」
현재의 소군황이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는 자체가 그렇다는… 그런 얘기를 해주고 어쩌다보면 좀 길어지겠지? -일단, 너는 자룡대주에게 협조해야 할 타이밍 아니냐?
「아참참!」
요몽은 서둘러서 포릉 사라졌고, 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 같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구중천 네트웍 시스템 관리 및 감찰 특수 감찰반 반장 겸 특별 방송 지원팀 미소녀 요정 팀장… 뭐, 그런 식으로 길게 지껄인 다음에야 출동했을 녀석인데 이번에는 잽싸게 자기 할 일을 하러 가는군. 확실히 녀석도 여러모로 쬐에끔은 발전한 거 같아.
‘결국 최근 들어 오히려 정체되거나 살짝(?) 퇴보하기까지 했던 건 나뿐인가…?’ 라는 자기반성을 새삼 더 하면서 걷자니까, 도시 구역 출입구 중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까와 같은 분위기로 파티를 질기는 이들이 모여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놀람과 혼란의 기운이 느껴지더니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기운이 확산되고 있었다. 요몽이 출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작된 방송에서 나와 소군황 녀석의 싸움을 알리기 시 작했기 때문이었다.
“아! 천주께서 이쪽으로…………….”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황급하게 비켜서자 다른 이들도 빠르게 알아채고 길을 트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썰물처럼 좌우로 갈라져 길을 트는 것은 아까 대교와 함께 입장할 때와 비슷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분위기가 같을 수는 없었다.
이거, 이거… 내 예상보다 빠르고 강한 반응인 걸? 내가 좀 여유 있는 걸음으로 오긴 했지만 벌써 이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 줄은… 으음. 이 건 마치 내가 영화 속 글래디에이터가 되어서 대형 로마제국 경기장(혹은 격투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구먼.
물론 구체적인 비주얼이 그렇지는 않았다. 지하무림 도시답게 주욱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 여기저기의 창문이며 옥상 위로 모여든 이들도 그렇 고 스트리트 파이터 쪽 분위기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엄청난 군중의 뜨거운 관심과 시선 속에서 쌈박질을 해야 할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다.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상당한 부담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쯧. 무엇보다 소군황 녀석은 오늘 나에게 깨져도 소위 ‘밑져야 본전’, 아니 어떤 경우에도 ‘남는 장사’야. 그에 비해 나는 이겨봐야 딱히 생색낼 것 도 없고, 여차하면 개망신만…! 으으음~ 근데 왜지? 그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도 왜 난 지금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난 어느덧 소군황과 30여 미터 정도 거리까지 와있었는데, 녀석은 이제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가 아니라 두 발로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날 기다리 고 있었다. 검은 정장바지에 검은 목폴라티, 그 위에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친 채 한 손에 칼을 든, 그런 외견만으로도 ‘도시 검객’의 이미지에 저렇게 잘 어우리는 녀석은 드물지 싶었다.
저 녀석! 눈뜨고 꿈꾸듯 몽롱했던 모습은 나에게 ‘진심으로 상대해 달라’고 하는 시점에서 이미 사라져 있었기는 하지만… 이렇게 직접 가까이 접하게 되니까 저 녀석이 지금 예전과 얼마나 다른지. 그러니까 흔한 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것이 절절하게 느껴지는군. 전신에서 흐르고 있 는 날카로우면서도 절제된 냉기가 저 녀석 자체가 한 자루 칼처럼 느껴지는… 쳇. 너무 흔한 표현만 떠올리고 말았다, 아니, 아니야. 이건 내 잘못 이라기보다 저 녀석이 아직도 뭔가 흠. 그래. 역시 직접 확인해봐야겠지? 내 칼, 정글도로!
“소군황!”
난 문득 떠오른 생각 때문에 웃음기를 거두고 녀석을 불렀다.
“넌 전에 나에게 그랬었지. 내가 마군황에 재등극하는 순간, 너는 다음 마군황 후보가 되는 거라고 말이야.”
나와 소군황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조용해지던 사방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소군황은 천천히 고개부터 저었다. “한때의 어리석은 치기였을 뿐입니다. 오늘 전 다만 천주께……….”
“아니! 내가 보기에 너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비로소 소군황의 초연해보이던 눈빛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내 말을 인정할 수 없다면… 너의 칼, 너의 무공으로 지금의 널 주장해봐!”
소군황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자신의 동요를 감추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입술과 이를 함께 지그시 깨물며 다시 시선을 들었다. 예전의 애매한 불안정함이나 조금 전까지의 나름 잔잔한 안정감도 아닌, 보다 원초적인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럼… 갑니다.”
‘얼마든지’라는 대꾸를 입 밖으로 내보낼 틈은 없었다. ‘갑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녀석의 바바리코트가 펄럭 날았고, 그게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녀 석의 신형이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칠성보(七星步)? 그리고 이건?!
촤라라라락~!
부채가 펼쳐지듯, 녀석의 검과 검광이 몇개로 나누어지며 쏘아지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틀며 권투의 잽 같은 삼시전결을 몇개 마주 날렸다.
칵!캇! 캇!캇!
네 개의 검광이 내 삼시전결 요격에 걸려 땅바닥에 꽂혔고, 두 개의 검광은 내 가슴 앞을 비켜 지나갔다. 검기의 여파가 피부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 각이 순간적으로 날 미소짓게 했다.
핫! 이것 봐라? 제법 ・・・ 음? 이번엔 설마… 잠종보(潛踪步)?
내가 녀석의 신형을 놓쳐버린 이유를 깨닫는 순간, 이미 뒤쪽에서 쉭! 쉭! 치명적인 바람소리가 일었다.
어엿차!
나는 주저앉듯 몸을 낮춰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흘려보내며 감지되는 녀석의 기운을 향해 삼시전결을 날렸다.
퍼퍽-!
삼시전결이 비스듬히 박히는 지면 옆으로 녀석의 신형이 빠르게 흐르듯 회피하는 걸 놓치지 않긴 했지만, 더 연속기를 펼치려는 본능을 겨우 억눌 렀다. 녀석의 가벼운(?) 인사에 너무 정색을 하고 집요한 공격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좌우로 꺾어 두득- 소리를 냈다. 소군황 녀석도 신형을 멈추고 공손한 태도로 고개와 상체를 살짝 숙였다.
“일단・・・ 천주께서 잘 아시는 수법으로 첫인사를 올려봤습니다.”
“그렇군. 이 시대에서 처음 구양대주와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펼치는 칠성보와 잠종보를 알아봤었지. 그는 네가 펼치는 걸 본적이 있었던 모양이 군.”
“그렇습니다, 천주. 저는 소위 기연을 얻어 몇 가지 실전된 무공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걸 사부에게조차 숨겨왔지만, 수련하는 과정을 구양대주에게 목격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연…! 그래서 그때 구양대주가 자신이 어떻게 칠성보와 잠종보의 오리지널 버전을 알고 있는지 내게 밝히지 않고 곤란해 했던 거야. 아마도 고의 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라이벌 초사마군의 제자가 수련하는 걸 훔쳐봤던 셈이었으니 말야. 뭐 그거야, 어쨌든!
-요몽! 다들 더 물러나게 해.
내가 명령을 내리자마자 요몽이 사방의 모니터로 동시에 떠올라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에 대며 소리쳤다.
“에고! 여러분! 울 주인님이 진짜 본격적으로 날뛸… 아니 하여간, 다들 빨리 대피하세요! GO! GO!”
숨죽이고 모여들어있던 모두가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결국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져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좀 전까지도 몇 십 미터는 떨어져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이 영 불편했었다.
“후후. 이제 너도 맘 놓고 보따리를 풀어 봐. 기연으로 얻은 무공이든 뭐든 말야.”
허참. 이 녀석, 또 공손한 인사부터 앞세우네? 예전의 느물깐죽이를 다시 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과도공손 총각도 좀 불편하네. 응? 오~ 태도의 공손함과 칼질은 별개라는 건가?
소군황으로부터 갑자기 폭사되기 시작한 기세는 결코 공손하지 않았고, 첫 인사 공격 때처럼 절제된 날카로움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대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휴화산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듯한 묵직한 뜨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좋아! 정글아! 이제 진짜 시작이다!
소군황이 먼저 스윽- 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나 역시 마주 걸음을 떼었다. 스윽- 녀석이 검을 머리위로 치켜 올렸고 나는 정글도를 더욱 굳게 쥐었 다.
쉬이익!
나와 녀석의 공간을 가르며 내려 찍히는 검날을 향해 나의 정글도 역시 수면폭결(睡面爆訣)로 쏘아졌다.
쩡!
거대 범종을 울리는 듯한 타격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이미 다음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똑같이 무서운 속도와 기세가 단지 오는 각도만 바뀌어 찍혀왔다. 나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쩡! 쩡! 쩡!
연신 격돌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섬광이 일었지만, 소리는 계속 한 박자 늦고 있었다.
빠, 빠르다! 그러면서도 하나하나 전심전력, 일격필살의 위력…! 치이- 내 정글도가 살짝씩 밀리는 듯한 이 감각.. 진짜 장난이 아닌데?
쩡! 쩡! 쩡! 쩡! 쩡!
거의 비슷한 타격음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문득, 녀석의 검이 물러난다 싶더니 수평으로 내려지며 내 쪽으로는 한 점만이 보이고 있었다. 찌르기?웃! 온다!
슉!
짧은 파공음이 너무 작아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까각!
겨우 옆으로 쳐냈다 싶은 순간, 녀석의 검은 이미 뒤로 당겨져서 다시 쏘아졌다.
슉! 깍! 슛! 깍! 슛! 깍!
다시 비슷한 박자의 공격과 방어가 몇 번인가 반복되는데도 나는 반격의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을까? 문 득 아주 짧은 리듬의 공백이 생겼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반격 찬스, 아, 아니, 젠장!
쉬이익! 쩡!
처음과 같은 음속 이상 스피드의 베기를 다시 간신히 맞받아쳤다.
다시 찌르기?
슉! 까각! 슉! 깍!
두 번의 찌르기 직후 다시 베기 공격을 하기 위한 리듬의 공백이 너무나 뻔히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반격의 틈을 파고들 수가 없었다. 정글이와 의 이심전심이 완벽하지 못한 현재의 나로서는 무리일 정도로 그 틈이 너무나 작았기 때문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두 번째 이유는… 윽! X될 뻔했다.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살았어!
빈틈을 노린 반격을 하지 못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지금 나의 정글도… 정글이가 삘 받아 신나게 상대의 칼질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군황도 생전 처음으로 이런 전심전력의 한수한수를 쏟아내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한 가지 동작만 반복했다가 차츰 두 가지 동작을 섞어 가며 밀어붙여 오고 있었다.
그래봤자, 겨우 두 가지, 패턴…! 그런,데,도… 이, 이거… 젠장, 너무나, 신선해!
초단순 공격이 신선하다. 너무나 모순된 말 같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세상 누구보다도 반복 패턴을 싫어한다. 그런데도 지금 몇 합인지도 모를 합 을 반복하고 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고대의 어떤 초절정 고수가 했다는, ‘검법은 오직 찌르기와 베기 두 가지뿐이다’라는 말에 난 완전히 공감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게 정말일지도?’라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근데, 이거, 미안해 지는걸?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라 정글이와 함께…웃! 오, 온다!
어떤 근거도 없이 그냥 느껴졌다. 이번에야말로 상대의 모든 것이 담긴 최후 일격이 온다는 것을.
아냐! 정글아! 내가! 이익! 몰라!
정면으로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찔러 들어오는 한 점을 향해 내 의지가 담긴 일도를 내리쳤다.
쩍!
아마도 그런 소리?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냥 ‘형언할 수 없는 소리와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최후의 일초를 끝으로 나는 한걸음, 소군황은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하아아~ 아쉽기도하고 뭔가 후련한 거 같기도. 훗! 뭐가 어찌되었든, 이런 기분 좋은 싸움… 대체 얼마만인거지?
마지막 순간에는 내 의지가 좀 더 강했기 때문에 정글이가 불만이었지 않았을까하여 슬쩍 살폈지만 정글이도 그런 기색 없이 기쁜 감정을 우웅~ 희미하게 진동하며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소군황의 짧고 가뿐 호흡소리를 이제야 인지하며 돌아보았다. 녀석은 거친 호흡과 함께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격돌 도중 언제인가부터 우리 의 기세에 의해 흩날리기 시작했었던 안개 같은 그것은 녀석의 땀이었던 모양이다.
난… 뭐, 나도 땀깨나 빼긴 했지만 녀석 정도는 훗! 이게 실전 쌈박질 경력 차이인 셈인가?
기구한 팔자로 인해 지난 몇 년간(혹은 천년에 걸쳐?)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생사를 넘나들었던 나에 비해, 소군황은 완전히 탈진하여 서있는 것도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거의 최소의 흐트러짐만 보이며 버티고 서있었다.
저녀석, 육체의 체력은 다 소진한 것이 아닌 모양이군. 정신, 혹은 마음은 한계까지 쏟아내어 지금 저렇게 뭔가 후련하고 행복한 대충 그런 감정 을 만끽하고 있는 거고 말야.
확실히 녀석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감정을 음미하느라 꽤 오래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르는 자세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뭔가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는 이 기분은… 으음. 그렇군. 저 녀석은 몰라도 나는 아직 녀석에게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아있 어.
“소군황!”
내가 부르자 녀석은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바로 하였지만, 왠지 내 시선을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다소곳이(?) 눈을 깔았다.
“아직 아니야.”
내가 낮게 말하며 고개를 저어보이자, 칼을 거꾸로 쥐고 인사를 하려던 녀석의 동작이 멈추었다.
“너의 마음… 잘 봤다. 네가 전과 다르지 않다고 한 건 ・・・ 취소한다.”
녀석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넌 아직 남겨두고 있는 것이 몇 가지 더 있지?”
살짝 지워지는 것 같았던 미소를 다시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의 사부 초사마군과 여섯 마군들의 내력을 이어받은 자로서, 지난번에는 미처 마군황께 보여드리지 못했던 모든 것을 오늘 모두 끄집어 내보았 습니다. 그래도 남았다고 하시면… 제가 혼자 익힌 일천한 재주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일천한 재주? 기연으로 얻은 실전 무공을 일천한 재주라고 하는 건 너무 지나친 겸손인걸?”
“…무공자체의 크기와 깊이는 천주께도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담은 저라는 그릇이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문제였지요.”
짜아식. 겸손 떨기는, 이제 막 새로 시작하는 놈이 이정도면 솔직히 내가 수하로 부려먹기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음. 하여간 지금은 이런 격려 멘 트를 날려줄 타이밍이 아니지?
“……그래도 원하신다면, 감히 좀 더 재주를 피워보겠습니다.”
“좋아! 와라!”
내가 웃으며 정글도를 다시 어깨에 걸치자, 소군황은 주저 없이 걸음을 떼어 낯익은 보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엄청 낯익은, 아니, 뭔가 이상, 으왓! 뭐야! 이건 오행미종보?
낯익은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머리 빠개지게 연구하여 대교에게 전해줬으며, 천 년 전에도 아는 이가 거의 없어서 이후로는 대교의 독문 절기로 인식되어버렸던 그 오행미종보(五行迷踪步)였다.
“분광가검식(分光加劍式)!”
뭐, 뭐!
녀석의 입으로 예고된 초식명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맙소사! 천 년 전 비화곡 총관의 아내이자, 대교 자매들의 사모였던 월영당주! 야후장로의 양녀이기도 했던 소운연, 그녀의 무공이잖아!
촤라라라라라~!
순식간에 수십 개의 검광이 환영처럼 내 눈앞에 펼쳐지며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 아깐 설마, 하고 말았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똑같이 오행미종보를 밟아 회피하며 왼손을 들어 탄지공(彈指功)을 날렸다. 지금의 나는 정글도를 통한 내력 방출이 아니면 위력 적인 수법을 쓸 수가 없는데도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통했나?
분광가검식에 의한 검기의 폭우가 쏟아진 내 주변 바닥이 요란한 폭음과 함께 먼지를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오행미종보를 늦게 펼쳐서 검 기의 폭우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내 몸에는 단 하나의 검기도 적중되지 않았다. 내가 날린 너무나 위력없는, 탄지공이라고 부르 기도 민망한 지력방출이 가져온 결과였다.
내가 분광가검식의 파해 식을 알고 있는 건, 월영당주와 총관의 부부싸움…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처음으로 구경한 절정고수들의 대결이어서 몇 번 이고 몽몽의 녹화 영상을 돌려보면서 연구하고 분석했기 때문이었어.
…그거야 어쨌든!
“…179!”
내가 이걸 보안을 위해서 전음으로 물어야할지 어떨지를 망설이는 사이에 녀석은 이제 정말 밑천 다 떨어졌다는 기색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때는 천주를 놀라게 할 히든카드쯤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천주께선 지하무림 2대 마군황이자, 당시를 기점으로 일백마군과 구룡대 무공 의 시조이시니 말입니다.”
뭐, 그렇기는 하지. 나와 몽몽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지하무림의 무공들은 천년의 세월동안 뭔가 약간씩 변형되며 전수된 것도 같지만, 그래도 기본 흐름은 거의 같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이 녀석도 지난번 나한테 개길 때는 특별한 초식 없이 적당한 칼질로 대항해 왔던 거였어.
“그렇다고는 해도… 제가 따로이 얻은 비급들까지도 천주의 손바닥 안이었을 줄이야…………….”
녀석은 새삼 허탈해진다는 듯 포옥- 한숨까지 내쉬고 있었다.
“…소군황. 너, 방금의 무공들을 누구에게 전수받은 거지?”
나는 몽몽의 거짓말 탐지기 기능을 켜고 나 자신도 내심 바짝 긴장하여 녀석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별다른 기색 없이 가볍게 고개를 저 었다.
“누군가에게 전수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뒷골목 좌판에 고서적 몇 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훗. 기연치고는 참으로 어이없는 형태이기는 했습니다.”
거짓말…아닌 거 같지? 내 느낌은 그렇지만………….
…대교! 넌 어때? 지금 이 녀석의 얘기, 거짓말 같지 않아?
내 예상대로 몇 분 정도 전부터 내 뒤쪽에서 느껴지던 대교의 사랑스런 기운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보기에도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렇지? 총관 부부의 후인, 혹은 그들의 환생…! 이 친구가 얻은 무공비급에 뭔가 단서가………….
-후후. 서두르지 마세요, 오라버니.
-뭐?
돌아보니, 뜻밖에도 대교는 침착하면서도 밝은 표정으로 다가와서 내 옆에 섰다.
-그분들이라면 현생에서도 부부의 연을 맺고… 금실 좋게 살고 계실 거예요. 우리가 방해하는 건 급하지 않아요. 그러니 오라버니께선… 하아아아 이런 영특쟁이 아가씨 같으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
나는 내 마음을 미리 읽은 대교가 들고와준 뭔가를 힐끔 확인한 후, 다시 소군황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어느 사이 다시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내 앞에 자신의 검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검을 거꾸로 쥐고 ‘내 검과 영혼을 바칩니다’ 정도의 충성맹세를 할 시점이고, 녀석도 아깐 무심결에 그러려고도 했었지. 하지만 결국 택한 저 태도는 ‘모든 것을 당신의 처분에 맡깁니다’라는 의미였다. 나는 새삼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절정고수들의 싸움 중에 발생하는 유 탄, 아니 유칼(?)을 피해서 멀찍한 곳에서 모니터 중계방송을 보던 수많은 군중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들어 있었다.
처음 나와 소군황의 싸움이 알려졌을 때에는 소군황을 욕하거나 반대로 불쌍히 여기는 소리들이 흘러나오기도 했던 것 같았는데…흐음. 지금은 시 선부터가 소군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지? 뭐, 저 인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야. 지난번 소위 ‘반역사건’ 때, 소군황이 내 손에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었었던 소군황 구영웅의 절친…………!
“천음마군!”
내가 부르자 군중들 사이에 서있던 천음마군이 나는 듯 달려왔다. 나는 나와 소군황 중간쯤 위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명령대기 상태가 된 천음마군 을 내려다보며 ‘당장 아까 내가 못 본 치정사건의 전말을 고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자제해야했다.
솔직히 이 인간 보니까 그게 먼저 궁금하긴 한데 일단은 좀 참자.
나는 의도적으로 표정관리를 할 생각이었었지만, 천음마군과 은사마군 사이의 일을 궁금해 하는 마음을 억누르다보니까 저절로 뭔가 험한 인상이 되는 것 같았다.
“…천음마군!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이 소군황을 용서하기 어렵군.”
흠칫 놀라 나를 올려다보는 천음마군의 눈동자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나름 분위기 좋은 칼부림 전개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이 인간 뒤끝 심각한 인간이었어’ 라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따라서, 나는 천음마군, 당신을 저 반역자 소군황 사형을 위한 살객으로 임명한다!”
“처, 천주! 설마 진심으로…………….”
훗. 내가 극악서생 시절이었다면 여기서 더 장난을 이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긴 비화곡이 아니라 지하무림이지.
“그래. 그러니까, 시행하라. 이걸로!”
난 대교의 손에 들려있던 술병을 받아서 다시 천음마군에게 던져주었다. 비로소 천음마군의 얼굴이 풀리며 좌우로 벌어지는 입매가 굵직한 웃음을 그렸다.
“반역자 척살이 완료되면, 그때 다시 차기 초사마군 구.목의 인사를 받겠다.”
“가, 감사합니다, 천주! 제가 반드시 과거의 반역자 소군황을 끝장내겠습니다!”
우렁차게 외친 천음마군이 벌떡 일어나서 술병을 들고 자신의 친구를 죽이러(?) 움직였을 때, 어디선가 또 다른 우렁찬 외침이 있었다.
“천주-! 여기 살객 지원입니다!”
바다의 천음마군, 흑해마군이었다.
“어, 그래. 생각해보니 소군황의 발칙한 공력이 장난 아니군. 천음마군 혼자서는 무리겠어.”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곳에서도 굵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천주! 저도 살객 지원합니다!”
경찰 특공대 전경하로군. 훗~ 지하무림 최고의 터프가이 술꾼들 총출동인 셈인가? 이거 진짜 소군황이 아니라 구목까지 술 먹다 죽는 건 아니겠 지?
“이, 이 봐들, 설마 진짜 나를…”
살기(?) 가득한 술꾼들이 자신에게 모여드는 것을 보며 구목이 당혹해 하거나말거나 생까고 돌아서는 내 옆으로 너무나 당연히 대교가 붙어 섰다. 만약 비화곡에서 이런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주님 만세’를 연호하며 난리인 분위기였겠지만, 역시 여기는 지하무림이다. 개명에 개인(?)까지 하면 서 지하무림으로 복귀한 미연자, 구목을 환영하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나는 왠지 그것이 무엇보다 좋아서 웃었고 대 교역시 같은 이유로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다.
대략 삼십분 정도 후.
구목 녀석이 술로 살해(?)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벗어난 우리는 알리바이를 만들러… 아니, 그냥 좀 별생각 없이 걸었다. 계속 그렇게 암 생각 없이 걸어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구목 녀석이 발견했다는 무공비급이 마음에 걸렸다.
-대교. 우리 저기서 좀 쉬었다갈까?
내가 턱짓해 보인 건, 이제는 나도 알아보게 된 휴게실이었다. 도시 구역은 물론이고 기지 내 복도 곳곳에도 삼삼오오 모여선 이들이 파티를 즐기 고 있었지만 정작 휴게실 안에는 아무도 없어서, 우린 더 부담 없이 아무 테이블에나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대교. 아까 그 문제의 무공비급들 말인데……………
말을 꺼내고 보니 왠지 어이없는 웃음이 먼저 나오기 시작했다.
-핫! 무슨 코메디 무협물도 아니고, 칠성보와 잠종보, 심지어 오행미종보에 분광가검식까지… 그런 엄청난 무공비급들이 뒷골목 좌판에서 팔리고 있다니, 이거 원!
-후후. 그러게요. 지금은 과거와 달리 그런 무공비급 때문에 혈풍이 부는 일은 없겠지만요.
-그렇기는 한데… 무엇보다 우리의 오행미종보가 허투루 돌아다닐 가능성도 찝찝하고, 겸사겸사 빨리 조사팀을 만들어야겠어. 우리가 직접 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에레보스 놈들도 상대해야 하고……….
내가 에레보스 놈들을 언급하자 대교가 흠칫 굳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극히 짧았다. 빠르게 긴장을 푼 대교가 피식- 싱겁게 웃었 다.
-이상해요. 전 분명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오히려 그들과 싸울 일은 잠시 잊고 말았었네요.
-그래? 흐으음. 하긴, 울트라 짱 쎈 대교마님이 맘 독하게 먹으면 그깐 놈들 한칼거리도 못되긴 하지. 암!
-아이 차암. 그런 얘기가 아니구요.
대교는 곱게 눈을 흘기면서도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멈춘 건 삐릉(?)하고 등장한 요몽이었다.
「주인님! 대교님! 제 입장에서는 조금 불쾌한 보고를 드려야할 것 같아요.」
녀석은 웬일인지 진짜 뭔가 불만인 듯 팔짱을 낀 자세로 입술을 몇 번 삐죽여 보인 후에야 말을 이었다.
「그게요. 제가 오늘 주인님 보좌하느라 많이 바빴잖아요. 그런데도 몽몽 오빠는 패티 편만 들어주고… 우~ 하여간 패티가 이거 찾았어요.」
요몽 녀석이 툭 던지듯 보여주는 영상은 매우 낯익은 보석 분위기의 돌멩이였다.
초돌? 지가 무슨 밀가루반죽이라고 만두피처럼 넓게 펴져서 미령이의 문신인지 헤나인지가 되어버린 녀석의 원형 모습 사진을 왜 새삼스럽게… 응? 뭐지? 사진 배경이 어째 좀…….
-요몽. 이거 설마………….
「네에, 우리의 초돌군, 옛날 사진되겠습니다아.」
옛날 사진? 이걸 대체 어디서 찾았다는 거지?
「어~ 그게 말이죠. 초돌군이 우리 쪽에 포획된 후, 저와 패티는 평소처럼 ‘검색 배틀’을 시작했지요. 원래 같은 조건이면 제 승률이 더 높걸랑요? 그야 당근, 제가 인공지능 짬밥 한참 높은 왕땅 언니요정이니까요. 근데 오늘 유난히 주인님께서 패티보다 제 서포트 받아야 할 일을 자꾸 벌이시는 바람에 제가 져서 짱나게…………
-비,출! 몽몽!
「에? 주인님! 제가 잘못… 윽! 벌써?」
푸륵- 날아서 가상공간 어딘가로 튀려했던 모양인 요몽을 반짝이는 뭔가가 나타나 따라붙고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건 얼핏 봐도 밧줄이었 고, 요몽의 다급한 회피비행을 비웃듯 빠르게 휘리릭- 요몽의 몸에 감기고 있었다. 그러자 요몽은 곧바로 비행 능력을 상실하고 피유우~ 떨어져 내 린다.
흠. 요즘 좀 뜸했다고는 하지만, 몽몽의 요몽 체포 작전을 한두 번 봐온 것도 아닌데… 오늘은 뭔가 새로운 느낌인 걸? 과정이 더 디테일하고 실감 이 나는… 음.
“왔냐, 몽몽.”
스윽- 등장한 몽몽은 먼저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요몽이 진행하던 상황을 체크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요몽의 보고 패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요 사항은 제가 먼저 보고 드리겠습니다.」
말과 함께 일반적인 인터넷 창 하나가 떠올랐다.
「이것은 순수한 인터넷 사용자의 개인 데이터의 일부입니다. 이 데이터는 이미 정밀분석하여 인위적인 왜곡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따라
…과연 몽몽 선생. 보고되는 내용과 관련 영상 데이터 제공 타이밍도 그렇고, 전체적인 안정감이 요몽 녀석과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수준이야.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미령님의 신체에 헤나 형태로 일체화 중인 초고밀도 에너지 집약체는 프리메이슨의 연구소에서 제조된 것이 아닐 가 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됩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런 거 같다. 프리메이슨 놈들도 참!”
내가 어이없어 하며 대교를 돌아보자 그녀도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가끔 하시는 말씀,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가 생각나네요.”
“흐흣. 그래.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음. 우선 닥터 제이에게도 알려야겠군.”
난 현재 ‘미령이+초돌 합체 변신 대책 위원회 상임 고문’쯤 되는 닥터 제이를 호출하여 조금 전의 보고 내용을 대충(?) 전달했다. 닥터 제이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부터 웃음기를 보이는 것 같더니, 결국 핫핫핫- 소리 내어 웃었다. 호출기 너머로 들리는 거였지만 진심으로 재밌어하는 것 같았 다.
“역시 그랬었군.”
쳇. 나야말로 ‘역시나’를 외쳐야겠군.
“이것도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그냥 추측해 본적이 있었을 뿐이야. 난 자니가 탄생했던 그 연구소와 구성원들을 그렇게 높게 평가할 수 없었거든. 한 명 정도. 모험심과 탐구심이 강한 타입의 연구원이 있어서 주목했었지. 그녀라면 다른 겉멋 든 과학자들과 달리 자기 주변의 사소한 것들부터 탐구하여 하찮은 돌멩이 들 속의 특별한 보석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었어. …음. ‘아니타’, ‘아니타 그레이엄’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군.”
“그 이름 맞아요. 정말이지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로군요, 닥터 제이.”
“뭘 새삼스럽게. 그리고 자네도 만만치 않다는 거 알지?”
“됐구요. 이따 시간 봐서 한잔 더 하죠, 우리.”
닥터 제이와의 통화를 마치고 돌아보자 몽몽은 여전히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몽몽. 앞으로는 너를 비출, 그러니까 비상 호출하는 건 좀 자제하마.”
닥터 제이 못지않게 몽몽에게도 묻고 싶은 것이 적지 않았지만 그리 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의 새로운 서포터 관리 모듈이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음을 인지하셨을 텐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예의바르게 감사를 표한 몽몽이 다시 스윽- 점잖게(?) 사라지자, 녀석 뒤에서 비교적 얌전하게 앉아있던 요몽이 당황해서 어색한 몸짓으로 일어서 며 외쳤다.
「몽몽 오빠! 그냥 가면 어떠케! 이 ‘오랏줄은 풀어주고 가야지이!」
웬 오랏줄? 응? 오랏줄인지 뭔지가 좀 더 반짝이며 뭔가 변하네?
예의 오랏줄은 요몽의 결박 상태를 풀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요몽은 자신의 허리에 띠처럼 감겨있는 오랏줄을 조금 당겨보다가 포기하고 울상을 지었다.
「우띠! 이 주인님들 앞에서 스타일 다 구겼네.」
“어머. 그렇지 않아, 요몽. 그… 허리띠, 참 예뻐.”
“어, 그래. 몽몽이 디자인에 신경 좀 썼나보다.”
나와 대교가 위로해 줬지만 요몽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예요! 이거 디이따! 불편하단 말예욧! 내가 무슨 손오공도 아니고……………」
뭐야? 저 오랏줄 허리띠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요몽의 허리를 조여서 압박한다는 건가? 아무리 요몽 교육 및 관리가 중요하다고해도 그런 가혹행위는 좀… 응? 그게 아닌가?
불연 듯 요몽의 앞에 책상과 의자 세트가 놓여졌고, 책상 위에는 현실에서 우리가 보통 쓰는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 등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자 요몽은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익숙하게 의자를 빼고 앉아서 머리에는 헤드셋을 썼다.
아까 처음 포박되어 떨어져 내릴 때부터 계속 요몽의 날개가 생기 없는 느낌인 것도 그렇고, 저 은빛 오랏줄은 요몽의 사이버 공간 활동을 전반적 으로 제한하는 봉인의 기능이 있는 모양이네? 요몽 녀석, 조금 발전 내지는 철이 들었던 게 아니라, 요즘 각성한 몽몽에게 군기를 잡혔던 건가?
「네, 네에~ 주인고객님, 사랑합니다. 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기왕 망가진 거라는 심정인지 전화 상담원 개그까지 펼치는 요몽을 보며 나와 대교는 그저 난감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소미령이들이 있는 나의 연무실로 향했다. 녀석들은 우리가 온 것도 모를 정도로 소령이의 노트북 모니터를 함께 들여다보며 수다 삼매경 에 빠져있었다.
“얘들아.”
“아, 유준 오빠?”
나는 반갑게 돌아보는 소미령이들에게 다짜고짜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미령이의 그 초돌 말인데, 그거 원래 5달러짜리였단다.”
소미령이들의 황당해하는 반응은 아까 나와 대교 이상이었다. 나는 요몽에게 초돌의 과거 진실 데이터를 소령이 노트북으로 보내도록 지시한 다음 에 나도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아핫? 진짜네? 진짜 아까 콩알일 때 그 아이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소령이였다. 녀석은 어느 틈에 초돌의 사진을 찍어두었는지 자신의 분석 프로그램으로 두 사진을 비교분석한 모양이었다. “꺄하하~ 이거 봐, 미령아. 유준 오빠 말대로 정말 5달러 주고 산거래!”
소령이는 천진하게 웃으며 재밌어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싸구려 돌멩이를 물려받은(?) 미령이는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미령이는 조용히 사 진 아래 올려져있는 글까지 다 읽은 후에야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었다.
“프리메이슨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얘기네요.”
“그래. 몽몽, 그리고.. 닥터 제이에게도 확인했어. 애초에 그런 걸 만들 능력이 없는 연구소여서 이상했었데.”
미령이의 지금 표정은… 안도…? 초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병기가 아니라서 너무나 다행이라는 그런 마음이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고 있어. 쯧. 조금 부끄러워지네. 난 솔직히 프리메이슨에서 초돌을 확보하게 된 과정이 어이없다는 의식이 더 강했었으니 말야.
“…5달러. 노점상에서 5달러에 구입한 걸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할 정도로 가난한 남자. 그런 남자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었네요, 이 아이 에게는.”
미령이는 가만히 시를 읽는 것 같은 음성으로 말하며 자신의 한 손을 목과 가슴 사이의 불꽃 헤나에 올리고 있었다. 불꽃 헤나가 된 초돌 역시 영향 을 받았는지, 조금 붉어지며 보일 듯 말 듯 살랑살랑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실제 불꽃이 일어나지는 않고 있었다.
“흣! 자니, 그 바보!”
미령이가 웃음을 앞세워 자니를 언급한 건 노트북 화면에 추가로 뜬 사진 때문이었다. 조금 빛바랜 옛날 사진을 스캔한 거지만 그 안에서 웃고 있 는 여자가 얼마나 행복한 마음으로 사진에 찍혔는지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계정 주인인 오십대 정도로 보이는 대학교수는 자신이 젊은 날 짝사 랑했던 여인이었다고 했지만, 저 사진을 보면 한쪽의 짝사랑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난한 대학 시절 이 사진을 찍고 오랜 세월 간 직해왔던 초로의 남자의 첫사랑, 그리고 최강의 불꽃 바보 자니의 그녀, ‘아니타 그레이엄’이었다.
“봐요, 오빠. 이 사람. 나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요!”
“솔직히 엄청 닮았………….”
“뭐라고요?”
“아, 아니, 별말 안했다. 하핫. 누가 봐도 우리 미령공주가 더 몇 백배 이쁘고 귀엽네, 암! 그렇고말고!”
내 비굴모드가 마음에 든다는 듯 씨익- 웃은 미령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녀석의 한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미령이 너, 벌써 그런 것도 만들 수 있게 된 거냐?”
미령이는 마치 쟁반을 받쳐 들고 있기라도 한 듯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불꽃의 공이 떠있었다.
“음~ 동영상보고 연습 좀 했더니 되더라고요?”
내가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고 있자니까, 미령이는 아직 앉아있는 소령이를 돌아보았다. 미령이는 이미 조금 전까지의 사춘기 소녀적 감성모드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야무지게 웃고 있었지만, 소령이는 뒤늦게 초돌의 과거 사연에 감동 먹고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중이었다.
“언니! 우리 아까 했던 거 좀 더 하자!”
“어, 그, 그래 알았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던 소령이의 큰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어? 너 벌써 두 개나 만들 수 있어?”
소령이 말대로 미령이는 다른 손까지 들어서 양 손에 불꽃의 공을 들고(?) 있었다. 소령이도 그제야 얼굴이 밝아지더니 신나하며 뭔가를 챙기기 시 작했다.
방열복..? 이 녀석들 혹시………….
이 연무실은 말이 연무실이지, 웬만한 부대 연병장 두 배가 넘는 그야말로 광활한 곳이었다. 소미령이들은 안전 문제로 얼마간 여기서 지내야할 형 편이었고, 녀석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적당한 넓이의 공간에 병풍처럼 임시 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소미령이들은 그 임시 벽을 돌아서 본래의 넓디넓은 공간으로 가고 있었다.
으음. 역시나… 미령이가 불꽃슛을 던지고 소령이가 피하는 놀이를 시작하는 것 같군.
초돌, 아니 미령이의 작은 불꽃공이 터지며 귀엽게(?) 펑펑 소리를 내고 소령이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을 들으며 쓴웃음을 짓고 있자 니까 대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본래 오라버니의 연무실로 만들어진 곳이거늘, 저 아이들이 먼저 사용하게 되었네요.”
“…우리 대교 마님께서 허락한 모양이군. 나야 자타공인 공처가… 음. 크흠! 큼!”
돌아보니 대교는 뺨을 살짝 물들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쨌거나, 미령이가 봤다는 동영상은 혹시……….”
“아, 예. 그것도 제가 허락해서 요몽이… 자니의 전투 영상을 보여줬어요. 오라버니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해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 아니, 그게 뭐가 죄송해. 그런 결정까지 일일이 나에게 묻는 게 더 이상하지. …음. 거, 우리 대교가 나보다 쎄다는 건 이미 사방팔방 다 뽀록 났을 텐데, 뭐.”
“아이 차암. 자꾸 놀리심 싫어요.”
우으~ 이 내숭고수 여우 아가씨 같으니! 이렇게 새초롬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배시시 쪼개면서 뭐가 싫다는 거냐? 요, 요 이쁜 걸 그냥………….
「네, 네! 사랑합니다, 고객님!」
윽. 요몽 이 녀석!
「고객니임. 원하시는 서비스를 말씀하시면… 아, 우리 주인님 연결 서비스 말씀이십니까아?」
“야, 야. 그만해 임마. 염장 커플모드 안 할 테니까, 너도 이제 그거 그만해. 왠지 닭살이다.”
「헤헤 실은요, 때마침, 진짜 GM의 ‘챈’씨가 전화 한 거예요.」
“뭐? 챈이?”
자니의 연적(?) 챈의 전화라고? 타이밍과 핀트가 약간 애매하지만, 겸사겸사(?) ‘때마침’이 맞는 거 같네, 그려.
“큼. 챈? 자넨가?”
“예. 접니다. 진유준님의 해커 소녀, 요몽양은 역시 항상 쾌활하군요.”
“하, ‘쾌활’은 무슨, 그냥 철없어서 그렇지, 뭐.”
일단 딱히 나쁘지 않은 시작이긴 한데………
챈은 이어서 어제 큰일 (미령이 납치 및 범인의 메롱 사건)이 있었는데 다들 괜찮냐는 둥, 예의바른 안부전화를 계속했다. 나 역시 얼마간은 ‘어, 이 젠 괜찮아’ ‘그냥 그렇지 뭐’ 정도로 건성건성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좀 많이 불편했다.
“…저기, 챈! 그냥 진짜 묻고 싶은 걸 물어도 돼.”
“…실례했습니다. 저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이럴 때면 무조건 ‘너다운 게 뭔데?’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 건 한국 드라마의 병폐 음. 그거야 어쨌든.
“…진유준님. 현재 미령 아가씨께 발생한 일은 어제의 그 발화 능력자 때문입니까?”
과연 GM이라기보다, 아까 미령이가 타고 온 헬기가 GM거라고 했었지? 비행장에서의 일까지는 전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한 거였어.
“그래, 맞아. 정확히 말하면 그 자니 녀석의 유품이 문제가 된 거야. 비행장에서의 상황을 들었다면 짐작하겠지만… 어쩌면 미령이가 그 자니 녀석 처럼 발화 능력자가 될지도 모르겠어.
구체적인 설명을 하려면 길어지니까, 곧 요몽을 통해서 관련 데이터를 보내주지.”
믿고 싶지 않았을 사실을 확인시켜줬기 때문인지 챈의 침묵은 꽤 길었다.
“…진유준님. 저도 더 이상 두 아가씨의, 특히 미령아가씨의 일탈 행동을 묵과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챈의 입장은 나도 이해해. 하지만 우리에게 시간을 좀 줄 수 없을까? 미령이에게서 그걸 분리해낼 방법을 찾던가, 그 힘을 미령이가 안전하게 이 용할 수 있도록… 아, 아니지. 내가 가장 중요한 점을 깜박했군.”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남들 연애사에 참견하고 싶은 아줌마군황 모드를 살짝(?) 끼워 넣기로 했다.
“미령이 본인이 자니의 유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그건 오늘 미령이가 먼저 이곳으로 쳐들어오다시피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
난 거짓말 절대 안했음! 단지 ‘자니의 유품’을 강조했을 뿐!
“……대교님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오호~ 역시 대단한 챈 자신의 속마음은 최대한 절제하면서도 핵심 포인트를 공략해 오는군.
“대교는 글쎄? 대교는 본래 자니 녀석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 하지만 역시 미령이 본인이 저렇게… 음. 저렇게 자니의 선물에 기뻐하고 있으 니, 대교도 차츰 마음이 풀리고 있는 것 같아.”
슬쩍 대교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녀는 다소 난처해하는 기색은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긴, 챈을 마음에 들어 하는 대교도 챈이 자신의 태도를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있는 건 불쾌해 했었지. 음.. 그렇다고는 해도 명색이 정보전 전문 가인 챈을 상대로 이 이상 밑밥을 까는 건 오히려 역효과 위험이 있겠어. 그래, 이제 아줌마군황 모드는 접고 마무리하자.
“챈….이봐 챈!”
“아! 듣고 있습니다, 진유준님. 계속, 하시지요.”
뭐시라? 난 지금 어느 정도 반응을 기다리다가 계속 조용해서 불렀던 거야. 근데 지금 내 얘길 듣고 있었다고? 하핫! 이거, 마지막에 귀여운(?) 입 질을 하네?
난 잽싸게 낚싯대를 잡아채는 수준의 말장난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초인적인(?) 절제력으로 참아야 했다. 더 이상 섣불리 챈을 찔러보다가 챈이 눈 치 까고 더 몸과 마음을 사리게 되면 자칫 내가 미령이에게 칼침, 아니 불침(?) 맞을 위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 아냐! 내가 할 수 있는 얘긴 다했어. 더 알고 싶은 사항 있으면 ・・・ 아차차! 내가 지금까지 뭘 한 거지? 미령이 연결해 줄 테니까 그냥 걔하고 직 접 통화………….”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가씨께서 저와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 왜? 언제 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저도 요즘은 아가씨의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뭐냐, 이 급격히 힘 빠진 목소리는?
“부친이신 천장로님께 두 분 아가씨의 보호를 명받고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챈은 혼란스러운지 말을 잘 잇지 못하고 있었다.
허어~ 이건 거의 항복 수준일세? 정보전 전문가가 이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연애질에는 약한 천년 전통의 천우신 후예라고 해도… 응? 나 지금 혹시 정답을 떠올린 건가?
물론, 지금 챈은 나에게 고도의 심리전을 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소미령이들의 양부에게 깨지기 전에 소미령이들을 빨리 데려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현재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 역시 이쯤에서 아줌마군황 모드 끝내고 발 빼는 것이 상책!
“알겠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사실 우리 미령이가 좀 다루기 어려운 스타일이긴 해. 으으음~ 어쨌든, 우리에게 시간을 좀 더 주게. 상황봐서 내가 직접 GM으로 미령이를 데리고 갈수도 있는 거고 말야.”
“…알겠습니다. 진유준님의 뜻을 천장로님께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음. 그래. 담에 보세.”
챈과 통화를 끝내고나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우린 지금 계속 미령이가 긴 시간 일탈행동을 했다는 분위기로 대화를 했어. 하지만, 미령이가 여기 온 건 오늘 오전. 이제 겨우 한나 절도 채 지나지 않았어. 나야 어쩌다보니 엄청 많은 일들을 연속으로 겪은 하루였지만, 챈은 미령이 걱정 한가지로 한나절이 며칠처럼 느껴질 정도 였던 건가?
나는 결국 챈을 나 못지않게(?) 연애질 쑥맥 천우신의 정통(?) 후예라는 것으로 최종 판정하기로 했다.
“…응? 왜?”
내가 대교에게 물은 건, 언제부터인가 대교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후 오라버니께선 본래 다른 이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알고 그것을 이용하는데 능한 분이에요. 하지만 지금처럼 별다른 부담 없이 즐기듯 행 하는 모습은 꽤 오랜만인거 같아서요.”
에…? 내가 방금 그랬었나…? 잘은 모르겠지만 듣고 보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내 마음 속에 슬그머니 위기의식과 불쾌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일고 이용하여 꼭두각시처럼 조정하는 것이 특기인 인간, 원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대교의 말은 얼핏 날 칭찬한 거 같지만 결국 내가 ‘음모의 생활화, 삶이 곧 음모’인 녀석과 닮아간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대교가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것도 거슬렸다. …하.지.만.
에이~ 관두자, 이런 생각! 내가 혹시라도 진짜 원판 놈과 조금 닮은 점이 생긴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어차피 원판이 아니야. 나의 생 사금마도결과 조담놈의 생사금마도결이 다른 것처럼 말이지!
“저어 유준 오라버니. 제가 무언가 불편하게 해드렸나요?”
대교가 약간의 걱정기를 담아 말하며 바싹 다가와 있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공연히 한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대교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요 이쁜 입술에선 항상 달콤한 말만 꿀처럼 흘러나오거늘.”
“아이 참. 오늘따라 유난히 짓궂으세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예?”
“대교, 너와 지하무림…! 다들 너무 지나칠 정도로 나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
대교는 ‘궁합’이란 말에 주목하여 얼굴을 붉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말야. 언제인가부터 소위 ‘왕유치, 느글 닭살 멘트’라고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남발하게 된 거 같아. 예전에는 그걸 스스로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별로 그렇지가 않네? 그건 내가 뻔뻔해져서 그렇다기보다, 다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잘 받아줘서 그런 거 같아.”
“우음~ 그건・・・ 유준 오라버니께서 그만큼 자연스럽게 더 멋진 분이되셨다는 뜻 같아요.”
“…아이 참. 오늘따라 유난히 대교 마님이 짓궂으시네?”
대교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찌르며 웃었고, 나도 큭큭 소리를 냈다. 우리의 닭살 염장 지수가 급격히 상승하자 당연히(?) 어떤 녀석을 출동시켰 다.
「사랑합니다, 닭살 고객님드을! 눈꼴신 닭살 염장 서비스는 두 분의 성지 러브하우스에서 지원됩니다! 언능 그쪽으로 가 주시기 바랍니다, 고객님 들!」
“후후. 요몽. 나도 사실 다시 거길 가고 싶긴 해.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어.”
흐음. 보자, 보자⋯ 예상을 초월하여 엄청 빠른 진도를 보이고 있는 미령이는 일단 안심해도 되겠지?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대교. 난 지금부터 닥터 제이와 구양대주 등을 면담・・・ 아니, 솔직히 그냥 술 먹으러 갈 거야.”
“이젠 더 걱정 마시고 편히 주흥을 즐기세요.”
“고마워. 그런데 한 가지, 미령이는 음식을 좀 자주 챙겨줘야 할거야. 왜냐하면………….”
나는 대교에게 미령이가 아까 살짝 정신줄 놓고 음식을 탐닉했던 이유, 음식물 섭취가 막대한 에너지 사용의 기반이 되는 CR아이들의 경우를 설 명해 주었다. 그러자 대교는 아~ 하고 작은 깨달음의 탄성을 울렸다.
“그랬었군요! 미령이가 식사 예절을 잊은 것이 아니었어요! …소령이는, 음~ 역시 따로 교육해야 할 거 같지만요.”
훗. 아무리 재 각성을 했어도 동생들에 대한 엄마모드는 버리기 어려운 모양이군. 뭐, 그거야 내가 더 신경써야할 일은 아니고, 난 이제 슬슬 오늘 의 마무리 술자리를 향해 가볼거나?
잠시 후.
나는 연무실을 나오자마자 닥터 제이부터 찾아갔다.
“저 또 왔습니다아!”
그렇게 외치며 거미 격납고를 습격한(?) 나는 다짜고짜 닥터 제이에게 술잔부터 내밀었다. 모니터에 뭔가 복잡하고 난해무쌍한 데이터 화면을 잔 뜩 띄우고 앉아있던 닥터 제이는 드물게 당황해하며 손을 저었다.
“아, 아니, 난 이미 도객 아가씨와 꽤 많이………….”
“그러니까 더 드시라는 겁니다. 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노골적으로 ‘술 퍼 먹여서 당신의 가면을 벗겨주겠쓰으~’라는 의미의 광기를(?) 발산하자, 닥터 제이는 어이없어하면서 도 결국 술잔을 받기 시작했다.
대략 한 시간 정도 후.
닥터 제이의 주량은 생각보다 대단해서 나는 꽤 기대했었던 닥터 제이의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뭐… 그래도 왠지 다른 어떤 때보다 진솔한 대화가 오간 기분은 드니까… 흠.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흐후~ 오늘 밤은 어쩐지 정글도가 아닌 술로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 같군, 그래.”
“네, 뭐. 비슷한 기분이긴 합니다. 첫 전투부터 적장이 너무 강해서 김이 좀 새긴 했지만. 자, 그럼 전 다음 적진으로 갑니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나에게 한 손을 흔들던 닥터 제이가 몇 마디를 흘렸다.
“내 계산보다 조금, 부럽군.”
과연 닥터 제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애매미묘한 대사로 마무리해 주시는군.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래. 역시 신경 끄고 다음 적들(?) 상대하는데 집중하자.
내가 다음으로 향한 건 당연히 지하무림 도시 구역이었다. 생사령으로 오버해서 이벤트하면서 함께 예약했던 구양대주와의 ‘독대 술자리’는 이제 사실상 무산된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는 동안에 다른 이들과 계속 마시던 구양대주가 한계를 느끼고 자기 숙소로 대피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구양대주 한사람이 빠졌다고 방심할 수 있는 전황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오~! 천주! 이제야 시작하시려는 겁니까?”
내가 은신술 모드를 풀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순간, 누군가가 외친 소리였다. 그 직후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 술병과 술잔을 든 적병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주! 장가계에서의 설욕을 하겠습니다!”
내심 아차 싶었다. 난 나와 최소한 몇 번 정도는 안면을 익힌 이들과의 술자리 정도만 생각했던 거였다. 하지만 장가계 이후 벼르고 있었던 자들의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에구구! X됐다! 오늘은 정말 먹고 죽을지도………!
알 수 없는 시점의 새벽.
나는 이번에도 마군황답게 술병의 천라지망을 뚫고 살아남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내상이 너무 심해서 어느 순간 깜박 필름이 끊겼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와 대교의 거처로 돌아와 있었다.
얼핏 세이버 등에 실려서 수송(?)됐지 싶은데. 으음. 대교는 없군. 날 부축해서 이 침상에 눕혀 줬던 사람이 자룡대주였는지, 은사마군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지금은 그녀들도 없는 거 같고…………….
몽몽의 알콜 분해 도우미 기능이 작동중인지 차츰 술기운이 잦아드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른하면서도 평온한 기분 때문에 다시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 결산…해야 하는데… 으음. 귀찮군. 만사가……………
오늘은 근래 드물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친 하루였다. 그래서 다시 하나하나 점검해보고 앞으로의 계획에 반영해야 할 일도 많았다.
정리를 좀… 하긴 해야 하는데…………
나는 프리메이슨이라는 초거대 조직과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불과 삼일 정도 후에는 그 프리메이슨의 최고 정예 암 살단, 에레보스들과 생사결을 약속해놓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뭘까, 이 기분. 이 이상한 기분은… 대체 뭘까…………?
나는 흐려지는 의식을 조금 더 잡아보며 그 느낌이 뭔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안도. 안도감…? 이거 맞는 거 같지? 근데・・・ 현재 시점에서 웬… 안도감?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구중천은 물론이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하고 고마웠으며 실질적으로도 프리메이슨과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요소들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그 모든 것들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안 도감에 취해있는 것이다.
마치, 마치 필승의 전략에 따라… 모든 준비가 끝난・・・ 그런 느낌…? 으으음.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겠으니까. 그냥 자자.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우씨, 이런 식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