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67화 : 진유준 커플 VS 뱀파이어 커플.

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4부 – 67화 : 진유준 커플 VS 뱀파이어 커플.


7. 진유준 커플 VS 뱀파이어 커플.

내일 밤 자정.

실제로는 하루가 앞당겨진 것도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왠지 많이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요몽도 다른 때보다 기운차게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주인님! 대교님께 보고 드릴까요? 주인님께서 결투 일정을 멋대로 바꿔버리셨다고요.」

“… 뭔가 좀 거슬린다만, 어쨌든 그래라.”

나는 우리 차 키트 1.5호의 시동을 걸고 기다렸고, 오래지 않아, 요몽이 돌아오며 외치다시피 말했다.

「주인님! 대교님께선 금방 대화 끝낸다고 하셨고요. 원판씨로 부터 긴급 연락이에요! 화상통화구요.」

“긴급 연락은 무슨… 하여간 연결해줘.”

오늘 몽환무라는 결계를 통과할 때 보았던 환각의 기억 때문일까? 며칠 만에 보는 원판의 얼굴이 전에 없이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준 형님.”

“어, 그려. 니도 안녕하냐, 원판.”

“… 왠지 드물게 반기는 기색이신 듯합니다만.”

“별로 그런 건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처음이겠지.”

“훗.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우리 프리메이슨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우리 프리메이슨’이라…! 예상대로 프리메이슨의 대표로서 연락을 했다는 뜻이지?

“왜?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겨?”

짐짓 모른 체하고 묻자, 원판은 피식- 싱겁게 웃었다.

“이미 블랙의 연락을 받으셨겠죠? 저는 우리 측의 요청을 정식으로 전하기 위해 전화 드린 것입니다.”

“뭐. 니들이 우리 쌈하는 거 구경하고 싶다는 얘기?”

“그렇습니다. 조금 전 블랙으로부터는 유준형님께서도 수락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 그리고 요청을 유준 형님보다 블랙에게 먼저 했던 것 은 그가 결투장을 선점하고 있어서 일뿐입니다. 행여 오해가 없으셨기를 바랍니다.”

“오해? 나 그거 벌써했다. 니들이 지금 나 개 무시한 거 맞잖아.”

“… 일견 비효율적인 시비를 거시는 것을 보니, 뭔가 요구 사항이 있으신 것 같군요.”

“눈치 빨라 좋다.”

나는 한손의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보이며 씨익 웃어주었다.

“내가 괜히 니들 관람을 정식으로 허용했겠냐. 관람료? 중계권료..? 하여간 알지?”

“… 벌써 형수님께 경제권을 넘기셨습니까? 용돈이 얼마나 필요하신건지.”

“얌마. 아직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그게 수하들 머릿수가 좀 많아지다 보니 술값이 장난 아니게 되서리………….”

“훗. 알겠습니다. 제가 상부에 최대한의 금액을 협의해 보겠습니다.”

“어~ 잘 부탁해. 이제 가끔 니가 라면 훔쳐가는 거 이해해줄게.”

원판은 또 한 번 피식 웃고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 입을 열었다.

“형님과 에레보스의 싸움을 정식으로 참관하려는 우리 쪽의 의도가 궁금하지는 않으신 겁니까?”

“글쎄? 조금 궁금하긴 한데, 지금 바쁘니까, 천천히 듣자.”

“알겠습니다. 사실, 내일의 싸움에서 유준 형님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는 얘기이긴 합니다. 부디 무사하시기 바랍니다.”

쳇. 까만 놈이나 하얀 놈이나, 재수 없는 소리하면서 전화 끊는 건 마찬가지로군.

통화를 마치고 새삼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 사이 해가 지고 주차장의 가로등들이 일제히 환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주인님. 대교님이 나오고 계세요. 최윤희님만 배웅을 나오네요.」

“그래?”

역시 마신일이 재단에 없을 때는 자기 공간에서 나오지 않는 건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건물 8층의 지부장실 창문에 하나의 인영이 비치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만큼 실내의 불빛이 더 강하게 느껴졌고, 빛 을 등지고 선 오영애 지부장의 얼굴이며 표정은 아무것도 볼 수는 없었다.

-지부장님. 아니, 친절한 영애씨. 오늘 반가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나름 정중하게 포권하며 전음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몸을 바로 했더니 대교가 최윤희와 함께 다가오며 뭔가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후후. 지부장님은 오라버니의 이런 인사, 이 미래를 미리 보셨나 봐요.”

대교가 나에게 건네주는 건 한 장의 메모지였다.

‘저도 무척 반가웠습니다, 재미있는 유준씨.’

「우오~ 주인님! 이 메모 말인데요. 일차 분석결과, 사용된 잉크의 산화정도, 종이 조직 내 침잠 융화 패턴으로 보아 최소한 삼 개월 이상 전에 쓰 인 메모예요.」

하핫. 과연 예지능력자 다운 인사로군.

무심결에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8층의 지부장실은 이미 커튼이 닫히고 불까지 꺼져있었다.

“기밀 사항 하나, 누설해 드릴까요?”

음? 이번에는 텔레파시스트 최윤희 과장 차례인가?

“몇 년 전부터 지부장님은 가끔씩 진유준님과 대교님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저도 지부장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부장님이 두 분을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시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요.”

이 얘긴…, 나중 언제인지 모를 미래에 우리와 친절한 영애씨가 꽤나 특별한 인연으로 엮이는 상황이 있어서 그것을 미리 보았다는 얘기로군. 뭐, 내가 아무리 정해진 미래를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해도, 저 친절한 영애씨와의 인연은 굳이 바꾸려고 애쓸 필요는 없으려나?

“아. 그러고 보니까, 지부장님뿐 아니라 최과장님도 많이 힘든…”

난 이제야 이 최윤희 과장의 텔레파시 능력도 부작용이 장난 아닐 거라는 사실을 떠올린 거였지만, 무심결에 꺼낸 말을 끝까지 이을 수는 없었다. 형식적일 수밖에 없는 위로나 격려 같은 말을 늘어놓기 민망하고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후후.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진유준님의 그런 마음, 감사히 받겠습니다.”

쳇. 이 아가씨, 결국 날 진짜 민망하고 미안해지게 하네.

잠시 후.

우리와 작별인사를 나눈 최윤희는 ‘사원 기숙사쪽으로 가는 거 같았고, 우리는 다시 키트 1.5호에 올랐다.

“요몽. 오늘 만난 친구들에게 인사 메시지라도 남겨야겠다.”

「옛 썰! 게으른 주인님을 위한 자동 음성 문자 변환 서비스 준비 완료입니당!」

“먼저, 유인호. 음~ 오늘 반가웠네, 다음에 만나면 자네의 불무도 버전 현천기공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군.”

「오케이. 전송했습니다.

주혜양과의 스캔들을(?) 소재로 장난치고도 싶었지만 이번에는 참기로 하자.

“다음, 유소희. 소희양! 오늘은 아쉽게도 이렇게 빠이빠이로군. 담에 만나면 꼭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오빠 애인 주혜양도 함께 보고 싶네. 아참, 난 내일부터 얼마간 쌈박질하러 가야하니까, 끝나고 내가 연락하마. 안녕.”

「오케이. 전송 완료.」

난 차를 출발시켰고, 정문을 통과해서 나갈 때쯤에 요몽이 알려왔다.

「답신이 도착했네요. 먼저 유인호님.」

‘저도 반가웠습니다, 유준 형님. 그런데 주혜와 저의 사이를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훗. 소희에게 보낸 메시지도 같이 봤나보군. 근데 애인이 아니라고 발뺌하면서도 다른 어떤 사이인건지 설명은 못하는구먼.

「다음은 유소희님 답신입니다. 내용이 좀 많네염.」

‘저도 만나서 기뻤어요, 유준 오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무운’을 빌어드릴게요. 파이팅!’

나는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물었다.

“요몽. 방금 내용이 좀 많다고 하지 않았었냐? 별로 길지 않은 거 같은데?”

「아, 중요 내용은 첨부 파일로 추가되었어요. 파일명은 ‘서울 시내 맛집 리스트’입니당.」

윽. 유소희, 이 녀석.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더니, 제대로 날을 잡으려고 하는 건가?

「아. 추가 파일이 전송됩니다. 이번 파일명은 ‘이거 안 먹어보면 평생 후회’. 옴마나? 또 파일이 전송되고 있어요!」

으~ 난 오늘 ‘먹깨비 여동생’이 생긴 거였나? 이거 어쩌면 앞으로 내 수하들 술값보다 유소희 먹거리 댈 걱정을 먼저 해야 될지도.

나의 첫 세계정화재단 방문은 이렇게 ‘용돈 걱정’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에레보스 패거리와의 결전이 25시간 정도 남은 시점.

나와 대교는 나갈 때보다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나의 본부 구중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나오는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생각보다 멀쩡 해 보이는 자룡대주였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천주, 천모.”

“어~ 뭐, 그럭저럭. 근데 다들 우리 없이도 재밌었나봐? 특히 자룡대주는 말이지.”

일견 말끔해보였지만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올까지 숨기지는 못 한 자용대주가 새액-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금 몸을 풀면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으으음. 아직 지하무림에는 결전 시간이 앞당겨졌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한건 나였지만, 이거 어째 조금…, 무서워지는군.

“자룡대주. 난 음주가무 중에서 음주만 즐겨.”

“아. 그러셨던가요?”

자룡대주는 살짝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곧 대교에게 기대에 찬 시선을 보냈다.

“아, 저도 지금은 좀…………….”

대교가 주가혜 모드를 발동하면 그야말로 ‘가무 전문가’ 일텐데, 왜 빼는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군.

“아무래도 우리 대신 분위기를 더 띄워 줄 ‘용병들을 동원해야할 거 같군.”

얼마 후.

나와 대교는 다시 지하 구중천의 ‘도시 구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가 몰래 빠지기 전까지는 비교적 질서를 지키는 거리 축제와 서양식 가든파 티가 섞인 듯한 분위기 정도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기서 가든파티가 빠지고 옛날(?) 대학교 축제 분위기가 더해진 것처럼 보였다.

어찌나 잘들 놀고 있는지, 우리 커플이 돌아왔음에도 주목하는 이는 전혀 없구먼. 전화로는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자룡대주 마저 우리 마중 및 안내가 끝나니까 슬며시 가고 싶은 곳을 힐끔거리는 눈치이고 말이지.

자룡대주는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군중들이 주목하고 있는 장소는 어제 나와 ‘구목’이 한판 떴던 지점이었는데, 거기엔 꽤 큰 야외무대가 설치되 어 있었다.

바깥세상에서는 ‘미스터 퍼니’라고 불리며 중화권 연예계의 실력자로 유명한 ‘유희마군’. 저 사람이 뭔가 화려한 야외 공연을 연출하면서 분위기가 더 달아올랐었던 모양이군. 지금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누군가를 내보내는 타임 같은데, 음? 이 음악은?

너무나 귀에 익은 전자음이 불연 듯 시작되어 무대는 물론이고 도시구역 전체를 강렬하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무대 위로 뛰쳐나와 역시 낯익고 정겨운(?) 어떤 동작을 시작하는 건 천음마군이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한국어 노래 가사도 무지하게 귀에 익었다.

“오빤 강남 스타일!”

오! 역시!

‘싸이’를 흉내 낸 옷과 선글라스까지 갖춘 천음마군의 말춤을 하나 둘 따라하는 이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아름애~워! 사랑스래~워!”

노래도 따라하기 시작하고… 훗.

“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보자!”

이쯤에선 전체 복창이더니 본격적으로 광란의(?) 말춤 열풍이 지하무림을 뒤덮는 분위기…! 에고, 난 잽싸게 빠지자.

난 은신술 모드와 함께 적당한 구석으로 대피했고, 대교도 마찬가지였다.

-대교, 넌 같이 즐기지 그래? 나야 원래 몸치라 춤은 별로지만 말야.

오랜 세월 몸치로 살아오다보니 가무를 증오(?)하게 된 나와 달리 대교는 흥이 오르는 걸 참는 눈치였으나, 결국 고개를 저었다. 지하무림 안주인 으로서의 체통, 품위유지 차원에서의 내숭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천음마군이 잘 놀지는 알았지만 설마 저렇게 아이돌급의 무대 체질인지는 몰랐네. 강남 스타일이 끝나니까 전경하와 흑해마군까지 불러 서 ‘천음마군과 아이들’을 조성해 버리다니 말이야.

서태지가 아닌 ‘천음마군과 아이들’이 열창하는 ‘하여가’도 지하무림의 열광 분위기를 이어가기에 충분한 거 같았고, 무대 뒤로 몇 몇 아마추어 인 재들이 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유희마군.

무대 주변을 바지런하게 오가며 공연 연출 지휘를 하고 있던 유희마군이 내 전음을 받고 반색을 했다.

-아, 천주? 오셨습니까? 이 분위기 보이시죠? 곧 지원자들 순서가 끝나면 천모께서 피날레로..”,

-아, 아니. 참아줘, 유희마군. 주가혜는 이제 은퇴했잖아! 대신 다른 용병들을 불러 줄 테니까 분위기 계속 잘 살려 보라구!”

유희마군은 대교의 주가혜 모드가 아쉬운 것 같았으나, 내가 언급한 ‘용병들에 대한 호기심도 커지는 모양이었다.

-요몽. 우리 비장의 아이돌 용병, 준비되었냐?

「호홋~ 제가 주인님 뜻을 전하자마자 연습을 시작하시더니, 조금 전부터는 언제 나가냐고 성화를 하시기 시작했습니다요!」

예상대로군. 고녀석들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얼마 후.

천음마군과 아이들 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전황마군’과 그의 전마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의 일사분란한 군무와 흥겨우면서도 절도 있는 노래 (아마도 외국군가?)는 분명히 훌륭했다. 나, 진유준 하사한테만.

쯔쯔쯧쯧! 의욕은 좋았지만, 공연장을 ‘우정의 무대’로 바꿔버린 대가로 냉정한 야유소리와 술병 투척 사태가 벌어지는구먼.

-요몽!

「네엡! 저런 진짜 용병 말고, 무대 분위기 살리기 용병 출동입니다아!」

화르르~

도시구역 출입구 중 하나에서 화려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둥실 떠오른 불꽃은 놀라는 사람들 머리 위를 빠르게 날아서 단숨에 무대 위로 향했으며, 당연히 불꽃 소녀 미령이와 그 세트 메뉴 소령이었다.

미령이 녀석, 벌써 불꽃을 이용한 비행능력까지 터득했군. 그거야 어쨌든, 저 녀석들은 천년 전부터 가무에 능했으니 지금도 꽤하겠지?

“여러분! 우리들의 천모께서 보내주신~ 너무나 사랑스런 요정들입니다! 이름하여 ‘불꽃 소녀단!”

뭐냐, 저 진유준틱한 네이밍 센스는!

– 요몽! 너냐?

「아, 아뇨. 전 그냥 소령님과 미령님이 나오신다고만 했는데 이름은 유희마군이 즉석에서 붙인 거예요.」

으~ 나는 그동안 내 수하들 센스까지 배려놨단 말인가?

나는 ‘내가 이러려고 마군황이 되었나?’하는 자괴감이 들어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의 분위기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외견상 그 어떤 걸그룹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인 소미령이들은 내 예상 및 기대대로 춤과 노래 실력까지 거의 프로급인거 같 았다.

-처, 천주! 저 아이들! 아, 아니 저분들! 저 분들을 제가 데뷔 시키…………

-유희마군! 참아! 쟤들은 우리 지하무림보다도 더 폐쇄적인 비밀조직의 일원들이야.

-아아~ 너무하십니다! 저렇게 탐나는 보석들을 구경만 시켜주시다니!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유희마군에겐 미안했지만, 대교는 기쁜 표정으로 동생들의 재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미령이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갑갑하게 지낸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마음껏 무대 위를 누볐고, 지하무림인들은 녀석들에게 열광하며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나와 대교는 그런 모 두를 보며 기분 좋게 건배를 했다.

다음 날, 새벽.

나와 대교는 지하도시 외곽 벽 앞에서 함께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가 나란히 바닥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있게 되기는 했는데, 본격적인 운기조식 을 한건 아니었다. 밤새 다들 알아서 잘 노는 분위기여서 우리가 더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도 또 자리를 비우기 뭐해서 함께 밤을 새웠던 것 이다.

으음. 징한 것들. 아직도 부어라 마셔라하는 패거리들이 남아있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쉬러갔는지 보이지 않아서 완전 파장 분위기 인데도 말이지. 가만있자, 소미령이들은 한 시간쯤 전에 지들 거처로 잠자러 갔으니까 됐고, 자룡대주는…, 음. 저기 있군.

자룡대주는 우리로부터 삼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의 야외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어 있다가 불연 듯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하암~ 길게 하품을 하고나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다시 한 번 짧게 하품을 하고 나서야 여유로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룡대주!”

“아, 천주, 거기 계셨습니까?”

자룡대주는 피곤과 졸음이 가득한 얼굴에 그래도 미소를 머금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여기저기서 버티고 술병을 기울이거나 아무 곳이 든 기대어 졸고 있는 동료들을 대수롭지 않게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주. 곧 뒷정리를 하고 내일의 결전을 대비하겠습니다. 다들 하루 푹 쉬고 나면 말짱해져서 천주의 전투 보좌에 아무런 지장 이 없을…………….”

“저기, 자룡대주! 그 전투 일정 말인데, 시간이 좀 바뀌었어. 오늘 밤 자정이니까, 대략 10시간정도 앞당겨진 셈이군.”

자룡대주의 발걸음이 멈추고, 아직 남아있던 졸음이 일거에 날아가 버리는 표정이 되고 있었다.

“미안. 어제 약속이 바뀌었는데, 다들 너무 재밌게 노는 거 같아서 말 못했어.”

자룡대주는 굳어진 고개를 천천히 어렵게 돌려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오늘밤 자정까지 우리를 저 먼 바다위의 무인도로 실어다 줘야 할 해적선의 선장, 흑해마군이 술병을 끌어안고, 빈 술병 더미(?) 속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으으음. 난 내가 수하들을 잘 배려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좀 추워지네?

“회식은 이미 했으니까, 이제 등산할 차례, 하! 하! 이건 농담인거 알지? 하! 핫!”

웃어주는 척도 안하네. 아이 민망해라.

“아~ 하, 핫! 걱정하지 마, 자룡대주. 교통편은(?) 내가 대충 알아서할게. 아참 그런데 그러니까 자룡대주도 가서 좀 쉬어.”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에이. 내가 다 알아서 한대두? 자룡대주는 여기서 그냥・・・ 아, 아참. 역시 자룡대주는 신경 안 써도 될 거 같지만, 그래도 얘기는 해야겠네. 그 뭐냐, 프리메이슨 놈들이 갑자기 우리 싸움을 대놓고 구경하러 오겠다네? 하지만 놈들이 내 주위에 알짱대는 건 늘 있는 일이었으니까, 역시 자룡대주는 신경 쓰지 말고…….”

“천주!”

에고, 놀래라.

“제가 알아야 할, 다른 변동 사항이 있습니까?”

“… 아니. 이젠 딱히 없어.”

자룡대주는 이미 꺼내들고 있던 자신의 호출기를 입에 대고 짧게 몇 마디를 외쳤다.

“파티 종료! 비상!”


즐겁고 화끈한 파티를 끝낸 지하무림은 갑자기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대교 역시 결전 전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지만 결국 얌전히 우리들 처소에 들어가, 대기 모드가 되기로 했다. 대교는 결전을 대비해 정신 무장을 더한다며 중앙 연못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옆 돌 평 판 위에 자리를 잡고앉아 결가부좌를 틀게 되었다.

얼추 모양새는 괜찮은 것도 같지만… 이게 약간(?) 타발적이라는 점이 다소 껄적지근 하군. 원래 일정대로라면 다시 한국으로 날아가서 여행을 마 치고 돌아오시는 부모님 마중을 해야 했었지. 효자(?) 효부 커플인 우리에겐 필수코스였었는데, 이번에는 자룡대주 때문에 일정이 변경 될 수밖에 없었네 그려. 아무리 내가 짱이라고 해도 피로회복제며 숙취해소 음료 등을 마구 퍼먹으며 핏발선 눈으로 간곡하게(?) 자기 말을 따라달라는 수하 의 부탁을 무시하기도 좀 그래서리, 음. 암튼 어차피 모든 일정이 확정되니까 확실히 맘은 편해지는구먼.

-몽몽.

「예, 주인님.」

이번 전투에 한해서 완전 복귀를 선언한 몽몽이 예의 도통한(?) 모드로 여유있게 대답해서 더욱 마음이 든든해진다. -그냥 불러봤다. 넌 네가 다 알아서 잘 할테니 지금은 더 묻지 않으마. 모든 진행 사항은 출발하고 나서 듣기로 하자. 「알겠습니다. 편안히 결전대비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주인님.」

난 몽몽 말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 어떤 싸움을 앞두었을 때보다 안정된 운기조식이 될 거 같았다.

대략 12시간 후,

나와 대교는 안정된 심신으로 흑해마군의 해적선 흑해 1호에 오를 수 있었다. 흑해마군은 어찌어찌 술에서 깨어 나름 준비를 잘해줬는지, 배는 매 우 기분 좋게 오가사와라 제도를 향해 나아갔고, 나와 대교는 뱃전에 나란히 앉아서 쌍(?)결가부좌를 튼 채 결전대비를 계속 했다. 배에 오를 때 이 미 해가 수평선에 걸쳐져 있었는데, 얼마간 운기조식을 하다가 눈을 뜨니 완전히 어두운 밤바다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대교. 내가 시간을 애매하게 앞당겨서 자정에 싸움을 시작하려는 뜻…, 알겠어?

내가 뜬금없이 묻자 대교도 눈을 뜨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몽몽. 이제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겠지? 전반적인 상황 좀 보고해봐.

「알겠습니다, 주인님.」

몽몽은 먼저 CR들의 각성 진행 사항부터 도표와 함께 친절하게 알려주었는데, 아직 100프로 완벽하게 준비가 끝난 아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처음엔 기본 보조만 해줄 녀석들이 필요할 뿐인 거고, 나와 대교가 첫 싸움을 치르는 동안 정예 전투원에 해당되는 녀석 들도 완성돼서 합류할 수 있을 테니 말야.

「당근입죠! 다만 주인님께서 간만의 싸움이라고 흥분해서 오버하시다가 초기에 털리지 않으시도록 조심을………….」

「요!」

-아아- 괜찮아, 몽몽. 표현은 거슬린다만, 그래도 나름 적절한 조언이었어.

「와우~! 주인님 짱! 거 봐, 몽몽 오빠. 나도 이제 제법 한 서포트 한다구!」

요몽은 기쁨의 비행을 하느라 잠시 본분을 잊는 것 같았지만, 몽몽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성실하게 보고를 계속했다. CR들 관련은 대부분 미리 알고 있던 사항을 확인한 정도였지만, 내가 모르던 새로운 팀의 소식도 보고되고 있었다.

-‘소승룡대’?

「가칭입니다. 전부터 ‘인적 자원을 이용한 전산망 관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고 드린바 있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돈으로 고용된 자들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어서, 결국 중요한 일은 니들이 다해왔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이제 승룡대의 두뇌 파들로 대체 하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주인님. 본래 승룡대주가 평균 나이 십대 후반의 어린 인재들을 양성 중임을 알게 되어, 최근 그들에게 저희들의 해킹 기법을 교육 중이었습니다. 실전 테스트를 거치지 못하여 조만간 보고 후 정식 팀 구성을 건의드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렇군. 승룡대 후기지수들로 이루어진 신생 해커팀이라 이거지? 후후 좋아. 이번 기회에 그 친구들도 아주 확실한 실전 훈련을 하게 되었 군.

「와우~ 만쇄이! 드디어 내 정식 쫄따구들이 왕창 생겼어!」

몽몽. 설마 요몽이 소승룡대의 지휘관은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요몽과 패티가 그들의 교육에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으음. 요몽도 해킹 실력이야 믿을만 하니까, 상관없으려나?

-좋아. 이번 기회에 철저히 짱 박힌 사도놈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전쟁의 조기 종결도 가능해질지 모르지. 잘 부탁해.

「그렇기는 한데요, 역시 주인님께서 먼저 당하시면 우리가 본진을 털리는 격인지라, 저는 그게 좀 걱정이……………」

-얌마. 요몽. 너 조언 차원이 아니라, 진짜 걱정하는 거냐? 이 주인님의 쌈박질 능력을 그렇게 못 믿냐?

「그야 믿기야하지만, 솔직히 이번에는 상대도 장난 아니게 강한 자들이잖아요. 특히 대빵인 코드명 ‘블랙’, 그 남자는 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싸 우려는 건지 저도 감이 안와서, 그게 가장 불안해요.」

호오~ 요몽이 어느 사이 이렇게 성장… 했다기보다, 요몽의 꽃돌 계열 남자 탐지 및 분석력은 원래 쓸만했지? 그냥 흘려듣지는 않아야겠군. -네가 얘기 안 해도 블랙 녀석이 가장 요주의 대상인건 당연하지만, 어쨌든 알았다. 우리 요몽양의 충언을 되새기며 방심하지 않도록 노력하마. 내 말에 기뻐하는 요몽을 보며 조용히 흐뭇해하던 몽몽이 문득 정색을 했다.

「주인님!」

정면에 서있던 몽몽이 옆으로 물러서며 한손을 들었다. 몽몽의 손끝이 가리키는 밤하늘에는 지금까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보름달이 거짓말 처럼 커다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연옥도 이후 오랜만에 보는 크고 눈부실 정도로 밝은 달빛이었다.

이 반가운 달빛 속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녀석이 오고 있군. 달빛을 등진 검은 날개의 검은 악마 블랙 크라우드…………!

난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고, 대교 역시 조용히 일어서서 내 옆에 섰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셨군요, 진유준님.”

전방 삼십여 미터 정도 거리의 허공에 멈추며 말을 걸어온 블랙의 음성은 지극히 차분했다.

“뭐, 수하들이 워낙 유능해서 말야. 근데, 너 혼자냐?”

“전 단지 인사차 마중 나왔을 뿐입니다. 무대 소개도 할 겸 해서요.”

블랙은 두 팔을 좌우로 크게 벌렸고, 그러자 놈의 등 뒤로 화악- 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아직은 먼 거리임에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강 한 불빛이 몇 개인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숫자가 밝혀져 있었다.

이건 마치, 밤바다 위에 거대한 생일 케이크가 숨겨져 있다가 갑자기 촛불을 일제히 밝히면서 나타난 듯 한 느낌이랄까? 어두워서 지금까지 직 접 보이지 않았어도 우리나라 여의도 정도 크기의 섬이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었지만, 설마 저 정도로 많은 조명 장치를 해놓았을 줄은 몰랐네. 저기 가 메인 결투장… 아, 아닌가?

정면의 섬은 시작일 뿐이었다. 양쪽으로 거의 동시에 두 개의 빛 무리가 떠오르더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좌우로 새로운 빛의 무리가 환한 조명을 발하고 있었다.

몇 킬로 정도 간격으로 늘어선 섬이 여덟 개…? 젠장. 우리끼리만 왔으면 경기장(?) 순례하다가 날 샐 뻔했군.

“훗! 싸움판 스케일 한 번 커서 좋다.”

“마음에 들어 하셔서 다행입니다.”

“넌 이게 맘에 들어 하는 표정으로 보이냐? 지금 니들은 각각의 섬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일일이 찾아다니라고 하는 거잖아! 귀찮게?”

“그렇게 정해진 규칙은 없습니다. 그냥 무대가 이렇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저희 멤버들 각각의 프라이드를 생각하면 다들 힘을 합쳐 두 분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군요.”

“뭐야. 네가 지휘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린 본래 다 함께 연합을 해 본 전례도 없습니다. 전 인사를 마치면 후위로 빠져서 기회를 노리게 될 겁니다. 우린 본래………….”

“암살단이다 이거지?”

“… 더 이상 말이 필요할까요?”

“훗. 그래도 한 가지는 묻자. 시그마와 산드라 커플은 어디냐?”

“역시, 약속 시간을 현재의 시간대로 바꾸신 것은 그들이 풀파워일 때 상대하기 위해서였군요.”

“눈치 빨라 좋다. 뭐. 뱀파이어들과는 역시 밤에 싸워야 제 맛일 거 같아서 말이야.”

“그들, 특히 시그마가 기뻐하겠군요. 그들은 왼쪽에서 세 번째 섬에… 웃.”

친절하게 손을 들어 세 번째 섬을 가리키던 블랙이 재빨리 물러나며 회피 비행을 하게 된 것은 당연히 나 진유준의 삼시전결 기습 때문이었다. “이 정도 장난은 예상… 아?”

내 기습은 비교적 태연히 피한 블랙의 안색이 진짜 굳어진 것은 내 옆에 서있던 대교의 신형이 어느 틈에 자신의 후위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광가검식2.”

짧은 초식 예고와 함께 대교의 청명검이 무수한 검광을 발하기 시작했다.

차라랄락! 검광의 소나기가 블랙을 포함한 공간에 퍼부어지며 밤바다 위로 거친 물보라가 일었다.

와우! 저 정도면 분광가검식이 아니라, 분광진검식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과연 대교. 구목이 펼치는 걸 한번 봤을 뿐인 분광가검식 업그레 이드판을 저렇게 쉽게 재현하다니!

대교의 검기로 인해 발생한 물보라와 물안개가 가라앉기도 전에 대교는 허공을 밟고 오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날아와 내 옆에 착지했다.

‘실례했어요, 블랙씨. 원래 여자의 인사는 좀 더 화려한 법이랍니다.”

대교의 태연한 말에 블랙의 대꾸는 텔레파시로 보내져왔다.

‘저야말로 대교님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대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마중제일녀 모드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흐흠. 대교가 웬일로 내 기습장난(?) 패턴을 따라하나 했더니, 이번 싸움에서는 나의 보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리려 했던거군. 대교 나름 의 선전포고였다고 할까?

그런 대교의 공격을 받았던 블랙은 이미 우리의 인식 가능 영역에서 사라져있었고, 텔레파시만 들어서는 놈이 조금이라도 부상을 당했는지 어떤지 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말 그대로 인사였을 뿐이어서 더 이상 신경을 쓸 마음은 없었다.

-몽몽. 준비된 배 한척 내려주고, 다들 적당한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해. 아참. ‘아쿠아린’ 형제만 우리 보조.

「알겠습니다, 주인님.」

우리가 타고 온 배 흑해1호는 블랙이 나타난 시점에서 이미 속도를 거의 멈추다시피 줄이고 있었다. 내 명령에 따라 뱃전에 있던 작은 고무보트 하 나가 바다위로 떨구어졌고, 우린 곧바로 그 위에 뛰어내렸다.

-아쿠아린 형제! 부탁한다.

수면 아래로 대충(?) 전음을 보내자, 중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흑해 1호를 따라왔던 수중형 돌연변이체 아쿠아린 형제로부터 거의 즉각 답신이 왔 다.

“옙! 목적지까지 모실게요오.”」

세계정화재단 유소희와의 만남에서 개발된(?) 소위 ‘전자전음’…! 이 방식을 사용하면서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CR들과도 좀 더 원활한 소통이 가 능해졌다. 아쿠아린 녀석들, 물속에서 스마트폰을 쓸 수 있는 건 물론이고 타자도 소희보다도 빠르네.

「“꽉 잡으세요오!”」

우리가 탄 고무보트가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스윽-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으며, 아주 빠르게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보트 아래의 물이 움직이 는 것이었으나 마치 고무보트 자체가 엄청나게 강력한 모터로 구동되는 고속정이 된 것만 같았다.

으음. 역시 우리 대교. 이런 상황에서도 머릿결 날리며 모터보트의 스피드를 즐기는 미녀 CF광고 찍는 분위기가나네. 나야 뭐, 언제나 어디 털러가 는 해적 두목이겠지만…, 어? 근데 이거 뭐야? 섬이, 사라져 버렸어?

대교의 자태 감상하다가 전방 주시가 조금 소홀했었는지, 빠르게 커지고 있던 섬이 어느 순간 씻은 듯 사라져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쿠아린 형제. 너희들은…, 음. 너희들도 놓친 모양이구나.

아쿠아린 형제들도 당황했는지 금방 답신이 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우리 보트를 밀어주던 물의 움직임도 현격하게 느려져있었다. -아쿠아린 형제! 당황하지 마. 그냥 천천히 계속 직진해.

배를 밀어주는 물결이 다시 약간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역시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하고 다른 곳을 돌아보니 다른 섬들의 불빛은 조금 전과 같은 거리감으로 존재를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역시 세 번째, 뱀파이어 커플의 섬만 사라진 거야. 이거, 고위 뱀파이어가 공간을 왜곡하여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 어. 게다가 시그마는 별칭 자체가 공간의 지배자이고 말이지. 하지만 설마 우리나라 마라도 정도는 될 섬과 그 주변바다까지 삼켜버릴 정도로 큰 영 역을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젠장. 시작부터 후달리네. 괜히 밤에 붙자고 했나? …아. 그리고 이러면 곤란한 일이 또 하나있었군.

“시그마! 산드라! 어떻게 된 거야? 문 걸어 잠그고, 싸우기 싫다는 거야?”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더니 곧 머릿속으로 산드라의 목소리가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 마계 늑대를 사용하시면 될 텐데 왜 그러시죠?”

“아, 라프? 난 그 녀석을 오늘은 쓰지 않을 거야. 게다가 이런 영역 속에서 싸우면 프리메이슨 놈들도 아무것도 못 볼 거 아냐. 난 싸움 동영상 수수 료 챙겨야 한단 말야!”

에고. 이런 얘기는 전음으로 할 걸 그랬나? 쪼까 민망하네. 산드라도 어이가 없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 아,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라졌던 섬 이… 윽! 뭐, 뭐야?

-멈춰!

수중의 아쿠아린 형제에게 다급하게 명령을 내려 전진을 멈춰야했다. 불과 십 여 미터밖에 안 되는 전방에 커다란 암초가 솟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뒤로 섬 자체가 바로 코앞…?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우리는 물론이고 아쿠아린 형제까지 몰랐 다기보다, 영역 안에 들어서는 순간 부터 우리의 거리감은 의미가 없었다는 거로군.

“진유준님. 당신은 아직까지도 우리를 얕보고 있었군요.”

암초 너머의 해안가 모래사장에 서있는 산드라로부터 노기 띤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같은 만월의 밤에 ‘밤의 귀족과 싸우겠다고 나선 자가 그토록 한심한 마음가짐이라니…….”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중세 수도승같은 어두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그 아래의 공간에서 두 개의 붉은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쿠아린 형제! 니들은 뒤로 멀리 빠져!

나와 대교는 동시에 도약하여 가장 가까운 바위 암초를 딛고 산드라 쪽으로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산드라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을 때, 불연 듯 그녀가 사라졌다.

역시 순간이동? 그런데 어디로? 웃!

-대교!

우리가 착지하는 순간을 노려 대교 바로 옆의 공간에 산드라의 망토가 펄럭였다.

쨍! 깎!

순간적인 검광에 비하면 칼날의 격돌 소리가 늦을 정도였다. 대교가 정확히 상대의 공격에 반응하는 것을 확인하며 나 자신은 재빨리 신형을 물려 두 여자들로부터 멀어졌다.

시그마는? 놈은 대체 어디에… 응?

대교의 주위로 산드라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나타났다 사라지며 하얀 빛줄기를 그어대고 있었다. 대교의 외문강기에 밀려 근접 공간까지 워프하지 못했던 지난번과 달리,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워프 패턴과 거침없는 공격 때문에 대교의 얼굴에서 빠르게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런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 다른 곳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시그마. 너도 이런 시간대에는 좀 다른 거 같군.”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난 시그마는 지난번과 달리 수도승 복장이 아니라 목깃이 크게 세워진 망토차림이어서 드라큐라 영화의 전형적인 복장이었다. 그러나 창백하면서도 섬뜩하게 아름다운 백인남자의 얼굴과 파란 가스불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는 그 어떤 영화감독도 재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그건?”

내가 당혹감을 느낀 건 한층 강력해진 마력 발산의 기운 때문만이 아니었다. 시그마의 한쪽 허리춤에 뭔가 처음 보면서도 왠지 낯익은 손잡이 같은 것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거, 실제로는 처음 보는 그 뭐냐, 펜싱 검?

내 생각은 곧 시그마가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듬으로서 확인되고 있었다.

“저기, 프랑스 출신인거 알고, 나름 어울려 보이기는 하는데 말이지. 그래도 뱀파이어 검객은 왠지 예상 밖이라 내가 적응이 좀……………”

난감해하며 어색하게 웃어보였지만 시그마는 내 반응은 개무시한 채 긴 꼬챙이 같은 자신의 검을 들고 살짝 상체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달타냥 나 오는 삼총사 영화에서 본적 있는 서양식 예절 같아서 나는 포권으로 답례를 했다.

피! 윽! 

제기!

낯선 파공음과 함께 낯선 괘적의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틀었지만 왼쪽 뺨에 서늘한 감각이 달린 후였다.

피윳! 팩! 슛!

썅! 뭐 이리 빨라! 마치 근거리에서 화살 공격을 받는 듯한 느낌! 우씨!

시험삼아 공격을 받아본 것이 실수였을까? 너무나 낯선 칼끝의 움직임에 적응하기도 전에 정신없이 뒤로 밀리며 몇 군데를 찔렸는지 알 수도 없게 되어버리고 있었다.

저, 전부 얕아. 하지만 이대로는…, 으익!

물러나던 패턴을 버리고 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으며 상체를 비틀어 목줄기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던 칼끝을 목옆으로 흘려내는데 성공했다. 다음 순간, 어깨에 걸치고 있던 정글도에 전력을 실어 발도!

콰직!

초식이고 뭐고 내리쳐버린 정글도가 시그마의 바로 어깨위에 멈춰있었다. 놈도 빠르게 검을 끌어당겨 막아냈던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 시에 떨어져 나온 우리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잠시 서로를 마주 노려보게 되었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내가 꽤 많은 곳을 베인 대신 가볍게 스친 수준인데 비해 저쪽은 어깨 한방이라고는 해도 꽤 깊이 찍혔어. 물론 저쪽은 뱀파이 어니까 웬만한 부상은 의미가 없겠지만 말이지.

뱀파이어 시그마는 목이 잘려도 죽지 않았던 괴물이었다. 그래서 어깨가 조금 찍힌 거 정도는 개의치 않고 다시 공격해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시그마는 자신의 검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그걸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서 검 끝을 핥았다.

“우쒸!”

나도 모르게 발동한 심도가 스걱정확하게 시그마의 가슴에 적중했다. 약간의 신음성과 함께 주춤 물러나는 시그마를 향해 정글도를 치켜드는 순 간, 뒤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산드라?

산드라의 기습을 감지함과 동시에 목표를 바꾼 심도가 뒤쪽의 허공을 갈랐다.

“으흑!”

한 박자 늦게 뒤로 돌린 시선 속으로 산드라의 망토가 팟- 하고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맞긴 한 거 같은데, 그보다 대교와 싸우다 말고 이 쪽으로 날아와?

산드라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건 예상대로 시그마의 바로 옆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줄기에 심도가 그어진 상처에는 아랑곳없이 시그마의 상처를 살피고 나서야 나를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기술을 믿고 기고만장하신 거였군요, 진유준님.”

“심도를 단순 기술이라고 하면 섭하지. 무협지 공부 좀 하랬더니, 아직 안한 모양이군.”

“심도? 당신이 추천한 책에는 그런 거 나오지 않았어요.”

“어? 그래? 나도 그 책들 본지가 좀 오래돼서⋯ 암튼 심도나 심검이 모든 무협지에 나오는 건 아니겠지. 음. 근데, 자신의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 데 애인을 구하러 날아오다니, 이거 대교가 기분 나빴겠는걸?”

“아니에요, 오라버니.”

산드라 못지않게 신출귀몰한 신법으로 내 곁으로 온 대교가 고개를 저었다.

“산드라씨가 정말 많이 강해져서 저도 난처했어요. 한숨 돌리게 되어 다행이에요.”

얼마간의 격전에도 땀조차 거의 흘리지 않은 상태면서 참 겸손도하지, 우리 대교.

“…좋아요. 인정하죠. 진유준님과 대교님. 두 사람은 밤의 귀족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을 만큼 강해요. 하지만………….”

한손을 들어 산드라의 말을 끊은 것은 시그마였다.

“마스터? 아, 알겠습니다.”

텔레파시로 뭔가 명령을 받은 산드라가 슬며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대교와 재대결할 기색도 아니어서 대교 역시 얌전히 뒤로 물 러서기만 하고 있었다.

시그마는 다시 정중하게 결투 시작 전의 예를 표했지만 나는 포권으로 답례하지 않고 인상을 구기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뭔가 기분 나빠. 조금 전 나는 내 앞에서 내 피를 맛나게(?) 핥는 비주얼이 짱나서 무심결에 심도를 쓴 거였지만, 꼭 심도가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반응했을 거야. 시그마가 그런 눈치도 없는 하수는 아닐테니, 저 시그마는 한칼 먹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내 피를 먹은 거라고 봐야해. 하지만 어디 제대로 물린 것도 아니고, 칼끝으로 피 좀 찍어먹었다고 어떻게 될 리는 없을 텐데…, 웃!

피슉!

다시 섬세하면서도 강력한 파공성의 공격이 소름끼치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만만치는 않았다. 정글도를 가볍게 끊어 날리며 검끝을 쳐내다가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즉각 도기를 쏘아줬다.

팟!

어느 순간 내 도기가 역으로 펜싱 칼처럼 날카롭게 시그마의 목줄기로 날았다. 그러나 그 순간 시그마의 신형이 살짝 흔들리며 도기를 통과시켜버 렸다.

쳇. 역시 뱀파이어다운 초고속 움직임. 어디, 나도 한번!

순간적으로 이형환위를 펼치면서 다리 쪽으로 한칼 날리는 순간, 시그마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퍽!

무릎에 적중! 이어서 한방 더… 이런, 실패!

짧게라도 움직임을 봉쇄했다고 생각하여 삼시전결을 쓴 것이 실수였다. 무릅의 부상따위 상관없다는 듯 초고속으로 삼시전결을 피함과 동시에 반 격을 해왔던 것이다. 난 반격의 베기를 뒤로 물러나며 피한다음 내친김에 좀 더 신형을 빠르게 물러서며 내공을 정글도에 끌어 모았다.

하지만… 관두자.

난 결국 어떤 초식도 펼치지 못한 채 어물쩍 애매한 보법을 밟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즉각적이고 빠른 삼시전결을 피할 정도인데 다른 초식이 먹힐 리가 없지. 역시 이형환위에 허점을 보인 건 내 쪽에서 오히려 스피드로 승부한 거라 심리적 허점이 생겼던 건데, 그것도 한번 써먹었으니 재탕은 의미없고, 역시 월광절화결의 기운을 미리 맺히게 한 다음 특정 초식없이 최단거 리의 칼질로 승부를 노리는 것이 정답이거 같지? 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아. 뱀파이어가 된 후에는 모르겠지만, 인간이었을 때부터 상당히 많은 칼 싸움 경력이 있는거 같아. 다시 말해, 나와 같은 맞짱 전문이라 단순 치고받기로도 빈틈 찾기가… 음?

무릎에 당한 일격이 회복되었는지, 약간 도사리는 기색이었던 시그마가 다시 공세적인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난 망설일 여유가 없어져서 그 냥 정글도를 걸치며 시그마를 향해 무턱대고 나아갔다.

그래. 답이 없으면 그냥 가는 거다. 뭐, 어찌 되겠.. 어? 어랏?

시그마의 등 뒤로 산드라의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시그마와 그녀가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산드라가 시그마를 데리고 함께 어딘가로 워프해 버린 것이다.

「주인님! 저기예요, 저기!」

싸움 중에는 나서지 말라고 해두어서 계속 조용했던 요몽이 등장하여 섬 위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의 백 미터는 됨직한 높이의 산등성 이 바위위에 뱀파이어 커플이 있었다.

젠장. 멀리도 튀었다. 그리고 대체 왜 갑자기 저런 거지?

“현명한 여자네요, 산드라씨는.”

“뭐?”

대교도 산드라 커플 쪽을 올려다보며 살포시 웃고 있었다.

“조금 전 그대로 격돌했으면, 십중팔구 시그마씨가 위험해졌을 거예요. 조금 전과 같은 분위기의 오라버니는 정말 강하니까요.”

이거 어째, 난 암 생각없이 싸울 때가 가장 강하다는 얘기 같은데..? 칭찬은 칭찬이지 싶으면서도 기분은 좀 거시기하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튀면 또 어쩌겠다는 거지? 설마 이대로 허무하게 항복을 에? 뜬금없이 지들끼리 싸운다? 아, 아닌가? 더 뜬금없이 애정행각을, 에고, 그것도 아니구 나.

“아. 산드라씨가 시그마씨의 피를 빠는 것 같네요.”

뜬금없고 괴기스런 장면을 보면서 대교가 왜 얼굴을 붉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혹시 산드라가 큰소리쳤던 이유가 이건지도 모르겠는데? 난 아무래도 불길해져서 정글도를 고쳐 잡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저 먼 절벽위의 커플들 중 산드라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교!”

번득!!

내 경고보다도 빠른 대교의 발검과 산드라의 단검이 부딪치며 울린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대교도, 산드라도 내 눈앞에 없었다. 맙소사! 대교를 데리고 워프해 버린거야? 대교의 어딘가에 손을 대서? 아니면 칼과 칼이 부딪치는 그 찰나의 접촉을 이용해서? -몽몽!

「죄송합니다, 주인님. 단시간에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제기. 대체 어디로 대교를…, 왓!

등 뒤로 한기가 스치는 순간 급속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눈앞에는 온통 희뿌연 공간이 나타났고, 무심결에 삼켜지는 호흡을 따라 공기가 아닌 것이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우움! 썅! 물속? 나, 물속으로 워프된거야?

주인님! 침착하십시오! 귀식대법이나, 만와침수법을……………」

몽몽이 다급하게 외쳤고, 내 몸도 다행히 빠르게 그런 수법들을 운용해 주고 있었다.

「침착하십시오. 깊은 수심은 아닙니다.

-나, 난 괜찮아. 대교는? 대교는 어딨는 거지?

「아직 탐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교님이라면 어떤 장소에서도 무사하실 것으로 판단됩니다! 침착하게 현 상황을 벗어난 후……………..」

-침착 침차악?

산전수전 다 겪은 내 몸은 이런 상황에서도 진짜 침착하게 움직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달랐다. 몸이 수면을 향해 빠르게 헤엄을 쳐가 는 동안 나의 빡도 빠르게 돌고 있었다.

산드라! 이 빌어먹을 여자! 뭐 이따위 짜증나는 공격을! 썅! 가만 안두겠어!

“푸왓!”

수면에 도착하자마자 코와 입으로 짠물을 토하고 흘려내면서도 섬 쪽을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대교가 보이지도 감지되지도 않았다.

까마득한 하늘 위, 깊은 땅속, 이런 곳에 대교가 워프되어 버렸다면. 젠장! 순간이동 능력의 이런 위험성을 왜 진작 생각 못했지? 어쨌든 대교라 면, 주가혜 시절이 아닌 지금의 대교라면 그 어떤 위험에서도 무사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까 시그마와 싸우고 대교가 납치되었던 해변 모래위로 막 올라 설 때였다.

「주인님!」

몽몽의 경고보다 빠르게 내 심도가 산드라의 기척과 공간을 함께 베어버렸다. 낮은 비명이 터져 나온 곳을 돌아보니 몸이 반쯤 잘린 산드라가 다급 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몽몽! 추적은?

「… 발견했습니다.」

즉시 공공보법으로 몽몽이 알려주는 숲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에 기대앉은 산드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 당한 부상 때 문에 워프 거리가 짧았고 아직 회복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앞에는 시그마가 버티고 서있었다.

“아, 안됩니다, 마스터. 지금의 저 사람과 싸워서는…………….”

힘없는 산드라의 만류에도 시그마는 굳건히 그녀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봐들. 나 지금 이런 장면에 감동 먹어줄 기분 아니거든?”

나는 성큼성큼 뱀파이어 커플을 항해 걸었다. 하지만 시그마는 자신의 칼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진유준님. 그만 멈춰주시오.’

지금 이거 뭐야.

“당신, 시그마. 말을… 아니 텔레파시인가? 이런 거 못하는 거 아니었어?”

그랬다. 세계정화재단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텔레파시와 순간 이동 능력은 마녀 가문의 산드라에게만 유전된 능력이라고 했다.

“아까 내 피를 맛본 건 혹시 이것 때문?”

‘그렇소. 그건 당신과 이렇게 약한 ‘피의 고리’를 만들기 위함이었소.’

“더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겠어. 그런데, 대교는?”

‘그녀는 산드라만이 데려올 수 있소. 하지만 산드라는 부상이 깊어 지금 능력을 쓸 수가 없을 정도요.’

“훗. 내 여자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기 여자를 치료해 달라는 건가? 나도 굳이 누굴 해칠 생각은 없었지만…………

‘난, 진유준. 당신을 존경하오. 진심으로.’

이건 또 웬 뜬금없이 개풀 뜯는 소리?

99

‘당신은 나와 싸우면서 자신 영혼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소.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안위가 걸린 상황이 되자, 이렇게 산드라가 회복하 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인 영혼의 힘을 보여주었소.’

아. 라후혈족 삼형제와 싸울 때 배웠던 소위 ‘영력이 담긴 공격’ 그 얘기였군.

‘나도 당신처럼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내 영혼을 불태울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오랜 세월 구차한 삶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을.’

젠장. 갈수록 분위기 왜이래? 이거 어째 이 인간, 아니 이 뱀파이어도 자기 여자를 살릴 방법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잖아? 그럼 행방불명된 우 리 대교는 어쩌라고?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