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69화 : 마도(刀) VS 요도(妖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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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69화 : 마도(刀) VS 요도(妖刀)


9. 마도(刀) VS 요도(妖刀)

콰우우우우~

대량의 바닷물이 어느 한 점으로 모여드는 광경과 소리는 수 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구경하는 나까지 긴장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아쿠아린 형 제가 대체 얼마나 많은 물을 불러들이고 있는지 몰라도, 녀석들을 중심으로 최소한 4, 50미터정도 반경의 수면자체가 높아지고 있었다. “퍼클님의 워터캐논 일발 장전!”

퍼클 녀석의 장난스런 말에 따르듯, 녀석의 앞쪽에 1미터가 넘는 원형의 물 덩어리가 생성되고 있었다. 퍼클은 한손을 들어 검지를 세우더니 손가 락권총 장난하는 아이처럼 겨울의 여왕을 겨누며 외쳤다.

“화이어!”

콰앗-!

물대포알은(?) 정말 대포가 쏘아지듯 무서운 기세로 겨울의 여왕을 향해 날았다. 그러나 그 기세와 속도는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차자작-!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순식간에 물대포알은 허공에서 얼어붙고 있었다. 하얀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 퍼클의 대포알은 겨울의 여왕 바로 앞의 허공에서 힘을 잃고 풍덩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음. 우리 편 공격이 실패했는데 재밌다긴 좀 그렇지만, 물 덩어리가 날아가면서 얼어붙는 광경은 꽤 신기했어. 나 오늘 별 구경 다하네.

“우와. 저 누나, 진짜, 진짜 쌀쌀맞네.”

퍼클이 짐짓 실망하는 표정을 짓자, 세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핫! 형은 바보! 빨라야 얼지 않지!”

세클 앞에 형성된 물 덩어리는 퍼클의 대포알과 비슷한 크기였지만 약간 납작하면서 한쪽으로 뾰족한 화살촉 같은 형태였다.

파앗!

세클의 대형 물 화살은 큰소리처럼 굉장한 스피드로 겨울의 여왕을 향해 쏘아졌다.

짜작!

순간적으로 얼어붙었지만 멈추지 않고 겨울의 여왕 가슴 한복판에 적중…………? 아니 로군. 거의 닿을 듯 날아가긴 했지만 거기서 멈춘 거야. 겨우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겨울의 여왕이 저렇게 태연한 표정이라는 건, 결코 자신이 당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자신감의 표 현이로군.

“세클! 뭐야, 큰소리치더니!”

퍼클의 타박에, 세클은 머쓱해하며 무어라 구시렁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두 녀석이 한가하게 지들끼리 티격태격할 때가 아니었다. 겨울 의 여왕 몸에 닿을 듯 떠있던 물, 아니 얼음화살이 스윽- 회전하여 뾰족한 쪽이 형제들 쪽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장난감, 돌려줄게.”

겨울의 여왕은 조용히 말하며 발밑의 물속에 잠겨있던 얼음공도 둥실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음공은 가라앉을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뭐야? 얼음공이 물밑에서 언제 저렇게 커진 거야? 이건 거의 빙산이잖아?

파앗! 촤아악!

얼음 화살은 세클이 날렸을 때보다 빠르게 쏘아졌고, 얼음공은 퍼클의 대포보다 무섭게 수면 위를 미끄러지며 퍼클을 엄습했다.

촤얏! 퍽!

세클이 다급하게 자신 앞에 물기둥을 만들었지만 얼음 화살은 가차 없이 그걸 뚫었다.

츄아앗! 쿠콰콰와와~!

퍼클도 커다란 물의 방어벽을 만들었으나 거대한 얼음공은 더 압도적인 규모로 방어벽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이런 제기! 어떻게 된 거야!

폭발적으로 솟구쳐 포연처럼 자욱한 물의 파편들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쿠아린 형제! 퍼클! 세클! 괜찮냐?

아쿠아린 형제를 덮친 거대 얼음덩어리는 이미 돌진을 멈추고 수면 위를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며 작은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쿠아린 형제는 그 주위 바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내 전음에도 응답이 없었다.

젠장! 이렇게 쉽게 당할 녀석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이, 이런. 겨울의 여왕이 수면에 내려서고 있어. 몸을 낮춰 한손을 수면에 대는 저 행동은……….

예상대로 겨울의 여왕이 손댄 곳을 중심으로 몇 미터정도의 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얼어붙어버렸다. 얼음공보다도 작은 크기였으나, 문제는 일렁 이는 물결에도 흔들림이 없다는 점이었다.

저기 수심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바닥까지 얼려버렸다는 거야. 허공에 떠있기 힘들어서 발판을 마련했을 리는 없을 거고, 설마?

“한 녀석은 잡았어. 또 한 녀석은… 달아났네.”

낮게 중얼거린 겨울의 여왕이 여유롭게 몸을 일으키더니 조금 먼 바다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놓친 한명의 기운을 자신만의 초감각으로 추적해 보는 모양이었다.

날아드는 물 덩어리들을 공중에서 얼려 버린 것도 놀라웠는데, 그걸 역으로 더 강하게 날려버렸어. 그러더니 이번에는 물속에선 웬만한 물고기보 다 빠른 아쿠아린 형제 중 하나를 잡아버릴 정도로 빠르게 깊은 수심까지 얼려버렸다 이거지? 게다가 그냥 물도 아닌 짠 바닷물을 대상으로 이런 게 가능해? 이거, 이제 나도 진짜 무서워지려고 하네.

「주인님! 한 명이 저 얼음에 당했나 봐요! 어떡케요!」

요몽이 뒤늦게 호들갑을 떨며 안타까워했고, 겨울의 여왕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추적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귀찮네요.”

“…과연 그럴까? 거기까진 몰라도 넓은 바다로 나가면, 너도 녀석들을 상대하기 더 어려워져서 못 가는 거뿐이잖아.”

“훗. 맘대로 생각하세요.”

여유롭게 대꾸한 겨울의 여왕 얼굴에 다시 차가운 비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다 꼬마들에게 꽤 기대하셨나 봐요? 하지만 실패작은 실패작일 뿐이에요. 자, 이제 어쩌실 거죠? 다른 실패작들을 더 동원해 보실 건가요?”

「으~ 저 여자, 진짜 재수 없어! 주인님! 제발 빨리 저 여자를 혼내주고 바다 꽃돌이들을 구해주세요! 이건 주인님 작전 미스잖아요!」

내 작전 미스? 하긴, 애초에 겨울의 여왕을 상대시키기로 했던 건 ‘불꽃슛 형제’ ‘초이’와 ‘무이’였었지. 그걸 아쿠아린 형제로 바꾼 건 나였고, 현 재까지 상황만으로는 확실히 냉각 능력자와 물 조절 능력자는 궁합이 좋지 않아 보여. 하지만………….

“다들 실망하긴 아직 일러.”

나도 내심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말을 이었다.

“아쿠아린 형제는 실패작도 아니고, 약하지도 않아. 초능력간의 궁합이고 뭐고, 강한 건 그냥 강한 거야.”

“지금 뭐라고 하는 거죠?”

불쾌감을 드러내던 겨울의 여왕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자신이 서있는 얼음 기둥 주변의 물결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빨라야 얼지 않지!

그렇게 외쳤던 것이 세클이었던가? 그래. 아까의 어설픈 물 화살 공격이 실패 했던 건 단지 스피드 부족일 뿐이었어.

고오오오~

겨울의 여왕과 얼음 기둥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한 물결은 점차 빨라지며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아쿠아린 형제가 만들어낸 소용돌이는 겨울 의 여왕이라도 얼려버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거셌다. 결국 금방이라도 집어 삼켜질 것 같은 얼음 기둥을 포기한 겨울의 여왕이 눈보라 를 일으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먼 바다로 부터도 또 하나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 긴장하는 것 같았다.

-좋아, 아쿠아린 형제! 그 엘리트 금수저 누님에게 우리 흙수저들의 저력을 보여줘라!

한국식(?) 응원 전음을 바다에 날려준 후, 나는 침묵의 유령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요몽. 대교 쪽 상황은?

「여전히 팽팽해요. 아, 방금 팔천 합을 넘겼서욧!」

으으음. 역시 나도 분발 좀 해야겠는 걸?

“이봐! 유령 사사키. 우리도 다른 싸움 구경만하는 성격은 아니잖아?”

난 솔직히 초능력 싸움 관전하는 게 더 재밌을 거 같은데, 여자와 아그들만 싸우게 하고 구경질하는 게 찝찝해서 나서는 거지만, 암튼.

침묵의 유령도 바다 쪽으로 향해있던 몸을 내 쪽으로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아까와 달리 발도 자세를 취하지 않고, 요도인지 뭔지를 그냥 뽑아들더니 도집은 그냥 뒤로 던져 버렸다.

“잠깐! 너 지금 칼집을 버렸지? 훗~! 넌 이미 진거야. 왜냐하면, 칼집을 버린다는 건 다시 칼을 칼집에 넣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즉, 넌 싸우기도 전에 마음부터 진거야!”

몇 수위 위의 고수로서의 거만함을 담아 짐짓 여유 있게 말했더니, 사사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반대로 죽음까지 각오한 자의 비장함을 칭찬해주고…, 내 쪽에서는 기가 죽어야 하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난 다만………….”

“아, 미안. 미안! 내가 이런저런 무협물을 많이 섭렵하다보니, 칼집에 대해서 그렇게 의미부여하는 얘기들이 종종 나오더라구. 넌 그런 거 아님 말 고.”

사사키는 낮게 하아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까지 저었다.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사소한 말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이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딱히 특별한 인간이 못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제부터 내 말을 전부 생깐다거나 그런 식으로 나오면 섭할 거 같다.”

다시 한 번,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이제 유령 사사키는 진짜 내말에 더 신경 쓰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유령 사사키가 두 손으로 칼 을 쥐고 새삼 날 향해 살기를 뿜기 시작하자, 예상대로 칼 손잡이 끝의 눈 모양 장식이(?) 희번덕거리며 기분 나쁜 빛을 발했다.

사사키가 칼집을 버리고 싸우려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저랬지? 그리고 내 말장난에 사사키가 말려들어 애매한 마음이었을 때는 또 그냥 장식처럼 보였었고 말야. 쯧. 왠지 유소희의 요괴 활 묵정과 달리 정이 안가는 요괴칼이로군. 우리 정글이와 친구가 되긴 힘들겠어.

사사키가 이제 제대로 싸울 마음이 조성된 건지 요괴칼의 이상한 기운도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다. 나의 정글이도 묵정을 만났을 때와는 달리, 흥분 을 감추기 어려운 듯 지잉- 기묘한 울림을 전해오고 있었다.

묵정 때와 반응이 너무 틀리니까 오히려 뭔가 찜찜하긴 한데, 뭐가 그렇게 다른 건지는 역시 부딪쳐봐야 확실해지겠지?

난 더 이상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천천히 유령 사사키를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마주 다가서기 시작한 사사키의 살기와 요괴칼의 기분 나쁜 기운이 빠르게 합쳐지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치 섬광탄이 터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폭사되었다.

윽! 온다!

발도에 특화된 패턴보다는 느렸다. 사실상 단순히 칼을 머리위로 치켜든 채 달려들어 온 것뿐이었다. 나와 정글이 역시 스피드에 상관없이 전력을 담아 무겁게 마주 내리쳤다.

콱?!

그런 소리? 아니, 적어도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를 인식할 수 없었다. 사사키의 요도와 나의 정글도가 격돌하는 순간에 터져 나온 것은 너무나 강력하면서도 무색무음이라 더 소름끼치는 기운의 폭사였다.

이, 이건 대체 뭐야?

칼과 칼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는 상태가 된 우리 주위의 모래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외부로 방출되는 에너지 방사 형태는 그랬 지만 정글도를 통해 전해지는 강력한 파장은 달랐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하면서도 전신이 조여지며 빨려드는 듯 한 불쾌감이 압도 적이었다.

강력하지만 강렬하지 않고, 엄청나지만 감탄스럽지 않아. 무색무음인데도 핏빛이 느껴지고 이죽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썅! 뭐야, 이 칼!

‘재밌네’

환청처럼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싶은 순간, 빨아들이는 힘이 늦춰지며 정글도와 요괴칼이 서로를 밀어내듯 뒤로 튕겨졌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전 력을 모아 맞부딪쳤다. 더 큰 기운의 충돌 여파가 우리 주변의 지면을 폭발시키며 포연처럼 자욱한 모래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재밌어. 이렇게 강한 놈들은 몇 백년만인지 모르겠다’

이건 요괴칼의 의식인가?

‘바로 죽이기 아까울 정도야’

-아아, 그러셔?

난 나도 모르게 삐딱하게 웃었고, 요괴칼도 크큭 웃었다. 머릿속으로 희미하게 투영되기 시작하는 놈의 이미지는 일본 사극이나 판타지에서 자주 보던, 옛날 일본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검은 가면을 쓴 듯한 형상이었다.

-근데, 넌 누구냐.

‘크흐흣. 천한 것들치곤 제법 강하니 내 이름정도는 알려주마. 이 몸은……………

-됐다. 잘못 물어봤네. 누구냐가 아니라, 뭐냐? 넌.

‘오랜 세월 너 같은 자들의 피를 먹고, 너의 칼 같은 병기의 정기를 먹고 살아온 불멸의 나를 감히…?

-못 들어 주겠네. 아갈 닥치고 서로 좋아하는 짓이나 해보자.

계속 말이 씹힌 요괴칼의 분노가 뚜렷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급격하게 빡이 돌기 시작하는 건 나와 정글이도 마찬가지였다. 요괴칼 놈의 의 식과 함께 전달된 놈의 과거 살육의 기억들 때문이었다.

이 개쉑! 무사도, 전사도 아닌 살인귀였어!

두 칼의 기운이 동시에 치솟으며 뭔가 비틀리며 깨지는 감각과 함께 정글도가 앞으로 내달렸다.

썅! 이건 아냐!

난 두 손에 힘을 주고 정글도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정글도는 퍼억- 유령 사사키의 어깨에 박히고 있었다.

“으흑!”

비명을 억누르며 물러나는 사사키의 얼굴에 고통이 번지고 있었다. 나 역시 신형을 조금 뒤로 빼며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저 요괴칼 쉐씨! 나와 정글이를 도발해서 사사키를 다치게 했어.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사사키의 얼굴이 빠르게 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사사키 특유의 무표정이 아니었다. 입이 좌우로 길게 늘어나며 약간 올라붙은 형태가 되었고,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 같은 것이 인위적으로 펴진 듯한 모습이었다.

가면을 쓴 듯한, 아니 얼굴이 가면이 된 것같이 되어 버렸어. 그리고 무엇보다 저 눈! 두 눈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

“사사키! 정신차려!”

내 고함소리에 사사키의 몸이 움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요괴칼이 사사키의 정신을 지배하는 흐름이 멈춰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크흐ᄋ~”

사사키의 입에서 가래가 끓는 듯이 거슬리는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불러도 소용없다. 이 자는 오늘 날 받아들었을 때부터 이미 내게 육체를 맡기기로 결정했던 거다. 어설픈 자존심으로 인한 망설임은 내가 고통으 로 씻어내 주었지.”

쳇! 이렇게 되면 유령이 요괴에게 먹힌 셈인가? 요괴유령이라는 말이, 말이 되는 건지…를,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정신 차리자, 진유준! 적에 대한 영점조절이 필요해!

“이상한 인간. 너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 난 십년 전부터 이 사사키라는 인간의 육체를 원했다. 이 육체야말로 그동안 내가 차지했던 그 어떤 육체보다 살인을 즐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지. 크크큭.”

재수 없는 웃음과 함께 요괴 유령의 몸이 스르르- 땅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정당한 승부를 위해 자신의 특수능력을 제한할 정도로 고지식한 사사키와 달리 저 요괴칼 놈은, 정당함이고 나발이고 그런 개념조차 없어. 그러니까… 웃!

파앗!

발밑의 모래 속에서 튀어나오는 칼을 피하기 위해 도약하며 삼시전결을 날려주었다.

삼시전결이 땅속까지 미치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제기. 또!

내가 착지하려는 지점의 땅에서 다시 요괴칼이 솟구쳤고, 난 그걸 폭호결(暴虎訣)로 찍어버렸다.

콰아앙~!

폭호결이 작렬한 여파로 허공에 잠시 멈칫했던 신형을 바로 하여 다시 정글도를 치켜들었다.

그냥 정면으로 맞짱 떠도 될 만큼 강한 놈이 치졸하게 나오는 건, 내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바로 이런 거! 지소파천결(地笑破天訣), 지파랑(地波狼)!

정글도가 모래땅에 찍히는 순간, 지파랑의 강력한 충격파가 땅속으로 퍼져나갔다. 보통은 지면을 기반으로 대기를 흔드는 초식이라 땅속으로는 어 느 정도까지 공진이 미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 어떤 수법보다 땅속 공격에 적합해. 그런 만큼 지소파천결의 초식들은 결정적인 순간의 반격을 위해서 아껴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 데…, 에이, 몰라. 그보다 이 요괴유령놈이 이번에는 금방 안 나오고 뜸을 들이네?

설마 지파랑 한방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 경계심을 유지한 채 기다리고 있자니까, 전방 오륙 미터 정도 지점의 땅속에서 수상한 기운 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쉑! 썰렁하게 대가리만 내밀고 난리네. 근데… 두 눈이 더 어두워지다 못해 아예 새까맣게 변해버렸어? 이거 설마…, 조금 전의 상황도 내 추가 공격을 유도해서 사사키의 육체에 더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나? 그래서 사사키의 육체를 더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내 생각을 읽고 대답을 하기라도 하듯 모래 위의 요괴유령 얼굴이 음산하고 사악하게 웃었다.

기껏 손에 넣은 유령 능력으로 장난수준의 땅속 공격을 이어갔던 점. 저 만족스러워하는 기색…! 역시 내가 또 한 번 녀석의 뜻대로 움직여 준 건 가?

결론이 그렇게 내려졌음에도 나는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요괴유령이 웃음기를 거두었다.

“뭐 하냐? 머리만 내밀고. 이제 모두 네가 원하던 대로 된 거 아냐?”

요괴유령 녀석은 뭐라 대꾸하지 않고 잠시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스으윽- 요괴유령의 몸이 떠오르더니 완전히 전신을 드러냈다. 보이 지 않던, 목 아래의 몸에 아까 어렴풋이 이미지화되었던 옛날 일본 갑옷이 입혀져(?) 있었다.

“땅 속에는 옷 갈아입으러 간 거였냐?”

이게 계속 내 말을 씹는군. 아, 혹시?

“아직도 부족한 거냐? 나한테 한방 더 먹고, 그러면 머리에 투구 같은 것도 쓰고… 그래야 싸울 준비가 되는 거야? 그럼 일루와 살살 한방 더 먹여 줄게.”

내가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다른 손의 손가락을 들어 내 쪽으로 까닥까닥 해보이자, 요괴유령 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은 필요 없다. 이제 내 쪽에서 궁금해졌다. 네가 누군지. 너의 선혈이 어떤 색인지!”

요괴유령 놈은 자신의 본체인 칼을 옆으로 비스듬히 내려 들며 몸을 낮추었다. 전형적인 ‘돌격 앞으로’ 자세였다.

“요오오오잇!”

왠지 듣기 싫은 기합성과 함께 달려든 놈의 칼이 무섭게 날아들기 시작했고, 내 정글도 역시 반사적으로 마주 휘둘러졌다.

깡!까강! 캉!

모처럼 경쾌한 타격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놈은 여전히 소위 요력을 담은 공격을 해오고 있었지만 어쩐지 좀 더 실체화 된 느낌이었고, 내 정글도 도 기를 최대한 안으로 갈무리한 상태였다.

깡! 까강! 캉!

소리 좋고! 양쪽 다 힘을 각자의 병기 안에 응축시켜 내구력만 높인 상태랄까? 그래서 무형의 기운을 발산하여 힘겨루기 하던 때에 비하면 그야말 로 칼싸움의 손맛이 느껴지는 싸움이 되었어. 하지만…………….

“요잇! 이여엇!”

여전히 듣기 거북한 기합성과 함께 맹렬하게 찌르고 베기를 계속하는 요괴유령 놈의 움직임은 내가 무심결에 떠올리는 일본 무사의 전형적인 모습 이었다.

좋게 말하면, 강하고 절도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딱딱하고 뻣뻣해. 여하간 기본적으로는 엄청나게 빠르고 파괴적이어서 섣불리 허점을 노리 기는 어려워. 게다가 이 자식, 이번에도 뭔가 또 꼼수를 노리고 있어. 뭐,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말이야.

놈은 계속 지치지도 않고 맹렬하게 치고 들어왔으나, 내 쪽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오행미종보(五行迷踪步)를 밟으며 방어적인 쳐내기 위주로 나가고 있었다.

거리. 거리 유지가 중요해. 어차피 내 정글도는 유령 몸을 그냥 통과해 버릴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놈의 칼은 내 정글도를 통과해서 내 몸을 노릴 수 있어. 그러니 이렇게 계속 상대의 칼과 부딪치는 감각에 익숙해지면 안… 웃?! 생각하자마자?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일도를 쳐내려던 내 정글도가 허전하게 휘둘러지며 보법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다음순간, 요괴칼의 끝이 내 눈앞으로 엄습 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익!”

본능적으로 숙여진 머리 위를 요괴칼이 스치며 정수리 부근에 섬뜩함이 새겨졌다.

당했어! 얕아! 반격은? 내 팔은? 내 정글도는?

당했다는 불쾌감보다, 선빵 맞는 순간에 시작된 예의 초감각 모드가, 일초를 몇 개로 나눈 시간 속에서 반격책을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손목을 틀 어 바깥쪽으로 휘둘러졌던 정글도를, 반격 각도로 바꾸며 몸을 틀었다.

놈은? 피하지 않아? 웃고 있다? 유령 능력? 웃기. 지. 마!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려던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며 전력을 다해 내리쳤다.

콰앗!

내 정글도는 요괴유령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여 모래땅에 박혔다. 놈은 여유로운 태도로, 어디 더 해보라는 듯 자신의 칼을 내려뜨리고 있었고, 나 는 다시 정글도를 들어 올려 역으로 쳐올렸다.

아니. 그러는 척, 하다가아~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요괴유령 놈의 턱이 돌아갔다. 난 오른팔로 대충 정글도를 휘두르며 왼손으로 놈의 턱에 어퍼컷을 먹여버렸던 것이다. 

“크흐-.”

가면 얼굴이 된 후 처음으로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휘청거리는 놈의 앞에서 나는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역시 통과 시킬 수 있는 건 무생물, 혹은 단단한 물체뿐인 모양이군.”

내가 펀치를 날렸던 왼손을 들어 보이며 한걸음 내딛자 요괴유령이 움찔했다.

“아. 그리고 말인데.”

난 태연히 말하며 가볍게 도기 한방을 날려 보냈고, 요괴유령 놈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틀어 피했다. 삼시전결급은 고사하고 놈의 요력 갑옷에 별 충격을 주지 못 할 정도였는데도 놈은 일단 피한 것이다.

흐흠. 역시 그랬군. 놈의 반응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가 되겠지만 나는 일단 그중 하나만 언급해 볼거나?

“이런 공격은 통과 못시키지? 그래서 흐름을 교묘하게 칼과 칼이 직접 부딪치는 싸움으로 유도한 거고 말야.”

말하면서 도기를 날릴 것처럼 살짝 ‘페인트 모션’을 취해봤지만, 이번에는 놈도 쉽게 넘어오지는 않았다. 그 대신 놈의 본체인 칼이 수상한 도광을 발하기 시작했다.

끼야아악~!

찢어지는 괴음과 함께 어두운 기운이 화살처럼 날아들었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마주 삼시전결을 날렸다.

칵! 끼엣!

삼시전결에 요격된 무언가가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갔다. 막기는 막았지만 상당히 거슬리는 원거리 공격 수법이 저쪽에서도 나온 셈이었다.

“어떤가, 이상한 인간. 나에게도 이런 기술이 있다. 나의 병법을 모두 간파한 너의 안목은 놀라우나,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이다.” “과여언~ 그럴까?”

나는 비죽이 웃으며 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요괴칼의 요력탄(?) 발사가 이어졌으나, 내 신형은 순식간에 놈의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잠종보(潛踪)! 이런 거 첨보지?”

간단히 놈의 후위를 점했으니, 화들짝 놀라 땅속으로 꺼져버리는 놈의 등에 스윽- 가볍게 정글도 부림을 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크흑!’

사사키의 목소리를 빌린 음성이 아니라 요괴칼의 의식이 내는 신음성이었다.

역시 갑옷에 포인트를 둔 것이 정답이었나?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놈의 갑옷, 아니 갑옷이 곧 놈이라는 이미지로 간다. 지소파천결, 지독아(地毒)! 놈이 달아난 모래땅을 찍으며 지독아를 펼치자, 시이이~ 몇 줄기의 도기가 독사처럼 놈의 기척을 쫓아 땅속을 파고들었다.

‘끼에에!’

놈의 비명이 맞는 거 같긴 한데, 완전 메롱 되는 단발마 같지는 않지? 하긴, 명색이 수백 년 묵은 칼 요괴라는데,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겠지.

「주인・・・님?」

-왜, 요몽.

「끝난・・・ 건가요?」

-아니. 아직 몰라. 하지만 꽤 타격이 컸을 테니 금방 반격을 해오긴 어려울걸?

「그, 그렇겠죠?」

-야. 넌 왜 그렇게 겁먹은 표정이냐? 패티도 아니고 천하의 요몽 양께서 왜 그래?

「아하핫. 제가 겁을 먹긴요. 그 무슨 말씀을… 으~ 음. 솔직히 조금 무섭긴 했어요. 그 칼의 요괴가 발산하는 에너지 파장에는 뭐랄까, 인간의 끔 찍한 비명 같은 것이 잔뜩 섞여있어서 공연히 소름이 끼쳤다고요.」

-흠. 너희들 방식으로도 그게 분석되는구나.

난 요몽 때문에 요괴칼 놈의 정체를 처음 깨달았을 때의 감정이 상기되어, 새삼 놈이 사라진 땅속에 신경을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당장 위기 감이 들지는 않았다.

-놈이 처음 힘을 발산했을 때, 난 놈의 기운을 ‘무색무음… 뭐 그런 식으로 느꼈지. 자신만의 감정이 없는. 그럼에도 무수한 살육의 기억만은 생 생하게 간직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와 정글이가 열 받았던 거야. 기껏 만난 칼요괴가, 정글이 친구감은 고사하고, 싸울 의욕도 안 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같은 놈이었으니 말야.

「어? 그래도 주인님과 정글이도 꽤 신나게 싸우셨잖아요.」

-넌 그게 신난 것처럼 보이디? 정글이는 놈의 실체를 알게 되니까 금방 뚱해져서 시큰둥해졌고, 나도 다른 의미에서 열심히 싸웠을 뿐이었어.

「다른 의미요? 아! 혹시 ‘화이트 판타지아’에서 ‘MB좀비’들 없애실 때의 마음?」

-그래, 여기서 원판의 말을 인용하긴 싫지만, ‘쓰레기 분리수거는 문화인의 기본 소양’이랄까?

「아하핫! 맞아요. 그때 원판 씨가 그랬었죠!

요몽은 내가 원판 얘기를 꺼낸 것이 좋아서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지만, 곧 뭔가 깨달았는지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 근데 그 분리수거 말인데요. 지금 그 못된 칼 요괴는 침묵의 유령 씨와 합체되어버린 상태잖아요. 물론 침묵의 유령씨도 주인님의 적이긴 하 지만, 그 사람은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떼어내죠?」

-글쎄? 그게 문제이긴 하다. 요괴칼 놈은 자신의 사용자를 지키려는 마음 따위는 전혀 없는 모양이고, 꽤나 교활해서 내가 침묵의 유령을 해치고 싶지 않아하는 것 정도는 벌써 눈치깠을 거야.

「맞아요. 저희들 분석 시스템으로도 상당히 지능이 높고 교활한 것으로 나와요. 물론 울 멋진 주인님의 초사악 잔머리 스킬에는 무릎을 꿇겠지만 요.

요몽!

「예? 아, 죄송! 그래도 이번에는 칭찬이었는데……………」

요몽은 내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옆으로 찌그러(?)졌지만, 나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요몽의 말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놈은 지능이 높고 교활해. 사사키의 육체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나와 정글이를 이용한 잔머리도 그랬고, 사사키의 유령 능력을 최대한 활 용하던 싸움 패턴도 상당한 수준이었어. 놈이 허무하게 패한 것은 어디까지나 ‘경험부족’ 때문이었고 말야.

그랬다. 놈과 싸우면서 차츰 느낄 수 있었던 건, 몇 백 년을 살아온 놈 치고는 싸움 경험이 생각보다 폭넓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일본 내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쯤 되는 한중합작(?) 고수는 놈에게도 너무 낯선 존재였던 거지. 그래서 더 애써 잔머리를 굴리다가 그게 뽀록 난 시점에서 역공을 당했던 거지. 기본 파워는 막강한 놈이니까 차라리 정공법으로 싸웠다면 내가 더 곤란했을 요인이 많았었는데 놈의 교활함이 오히려… 음. 지난 싸움이야 어쨌든, 마무리도 놈이 머리가 좋고 교활하다는 걸 역이용하면 어떻게 잘 풀릴지도 몰라.

결론은 그렇게 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또 있었다.

제엔장! 계속 안 나오네? 내 지독아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고 해도 간단히 죽을 정도로 약골은 또 아닌 거 같았는데, 이대로 어디 멀리 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혹시, 내가 기다리다 지쳐 허점이 생길 때를 노리는 작전? 쯧. 만약 그런 거면 곤란한데, 난 지루한건 질색이니 말야.

-에이, 모르겠다! 요몽! 대교는?

물으면서 숲 쪽을 돌아보니, 지금은 어쩐지 별다른 싸움의 소리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그게. 5분쯤 전부터 상호 합의하에 휴전에 들어갔어요. 정확히 일만 이천육백삼십 사합을 겨룬 후의 일이지요.」

요몽이 띄워주는 모니터의 영상에 깊은 숲속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는 그리 크지 않은 공터가 두 무서운 아가씨의 싸움으로 벌목(?)이 되 어서 이젠 폭이 사오십 미터는 됨직한 공터로 변해버린 모습이었다.

아작 난 나무들과 여기저기 패인 지표면, 조각이 난 바위들, 아주 난리도 아니구먼. 누구라도 저 요정틱한 두 아가씨의 겉모습만 봐서는 저렇게 살벌한 자연파괴현장의 범인들임을 짐작할 수 없겠지만 말이지.

공터의 양쪽으로 삼십여 미터정도 떨어진 지점에 각각 대교와 프리제타가 앉아 있었다. 대교는 결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프리제타는 무릎을 모아 안은 자세로 앉아서 한손에 작은 천 가방 같은 걸 들고 있었다. 프리제타는 다른 손으로 가방안의 뭔가를 계속 꺼내 입에 넣 고 오물거리고 있지만 대교는 눈을 감고 조용히 미동도하지 않고 있었다.

프리제타, 저 기집애. 지만 입인가? 울 대교는.. 응? 설마 들었나?

내 생각이 프리제타에게 들렸을 리가 있겠냐마는, 마침 프리제타는 가방을 뒤적뒤적하더니 조금 크게 포장된 봉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윽고, 그 봉지는 둥실 허공에 떠올라 대교를 향해 풍선처럼 떠가기 시작했다.

프리제타의 머리카락 한 올이 간식 배달로 쓰이는군. 알아채고 눈을 뜬 대교는 피식 웃고는 주저 없이 간식 봉투를 받아들어 먹기 시작하고, 심지 어 프리제타와 눈인사까지 나누는 듯 하네. 저러다가 얼렁뚱땅 티타임 같은 걸로 이어져서 잘 화해하는 분위기로가면 좋겠지만, 대교는 청명검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있으며, 프리제타의 금빛 슈트와 창도 그대로야. 아, 가만? 프리제타 녀석, 간식 봉지를 배달한 머리카락을 회수하지 않고 있 는 것 같은데? 대교도 저걸 눈치 채고 있는지……

쿵!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 때문에 흠칫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내 뒤는 당연히 바다 쪽이었고, 내가 들은 소리는 파도에 밀려온 거대 빙산의 조각 같은 얼음덩어리가 해안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문득 좀 더 넓은 바다 위를 살펴보니, 하얀 바위 같은 얼음덩어리들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맙소사. 나 자신의 싸움 때문에 돌아보지 못한 사이에 이게 뭔 일이다냐? 좀 과장하면, 바다가 통째로 거대한 김치통 안의 동치미가 된 거 같네. 난 한국 사람다운 연상을 하면서 어이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건 아무래도 웃고 넘길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요몽! 쟤들 있는 데까진 카메라가 없는 거냐?

난 까마득히 먼 바다위의 눈보라와 물기둥을 가리키며 물었고, 요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패티와 프리메이슨의 위성 카메라로도 대충 상황을 알 수 있긴 해요. 우선 못 보신 영상을 조금 빨리 보여드릴게요.」

새로 뜬 모니터로 보여지는 영상으로 좀 더 확실히 싸움 진행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기본 패턴은 단순했군. 소용돌이의 빠른 물살로 자신들의 몸을 보호하기 시작한 아쿠아린 형제는 소용돌이를 공격수단으로도 이용했어. 겨울의 여 왕은 눈보라를 이용하여 하늘을 날 수 있긴 하지만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못한 거 같았는데, 그걸 눈치깐 아쿠아린 형제는 기회를 노리다가 물 소용 돌이를 허공으로 솟구치게 해서 겨울의 여왕을 덮쳐잡으려고 했었네. 하지만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입장의 적은 시야도 넓지. 그래서 겨울의 여왕이 소용돌이 포격을 피해낸 거야.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소용돌이를 컨트롤하는 건 아쿠아린 형제들도 쉽지 않은지 연속으로 공격하진 못했던 모양 인데…, 겨울의 여왕도 자신의 방식으로 반격했군.

겨울의 여왕은 얼음덩어리를 만들어서 형제들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 넣는 식의 반격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적중해서, 소용돌이 중심 부에 있던 형제들은 얼음을 피해 소용돌이를 포기하고 튀었다가 다시 새로운 소용돌이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녀석들, 소용돌이 방어와 공격, 얼음 덩어리 투척 반격…, 이 패턴의 무한 반복 중인건가? 하아~ 이건 완전 오기와 체력전일세.

양측 다 워낙 비주얼이 좋은 초능력자들이라 관전하는 어른들은 쉽게 질리지 않고 감상할 수도 있겠지만, 싸우는 아그들에게는 못할 짓 시키는 기 분이 들었다.

-요몽. 안되겠다. 대기 시켰던 애들 오라고해서 좀 말려야겠다.

「넵! 제가 보기에도 그래야 할 거 같았어요.」

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숲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교와 프리제타 쪽은 내가 직접 중재를 하던가 해야겠네. 다들 이제 싸울 만큼 싸웠을 테니 생각보다 쉽게 설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 는 건, 모르는 건데, 나 지금 뭔가 잊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아참! 요괴유령!

나무숲으로 들어선지 얼마 가지도 않았을 때, 마악 지나치려던 나무의 껍질위로 섬뜩한 요괴가면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칫! 이 자식!

소리 없는 벼락처럼 내리 꽂히는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함과 동시에 내 정글도 역시 나무를 그었다.

스륵- 쿠쿵!

애꿎은 나무만 잘려져 쓰러지고 놈을 벤 느낌은 없어. 놈은 어디? 다른 나무? 아님 다시 땅속…? 이런!

파앗!

검은 요력이 쏘아진 것은 쓰러진 나무에서였다. 피할 틈도, 이유도 없었기에 정글도로 직접 받아쳐 버렸다. 끼에에엑!

또 그 비명소리! 듣기 싫어 죽겠네.

검은 요력은 정글도에 의해 간단히 흩어져 사라져 버렸지만, 비명소리에 의한 불쾌감은 좀 더 길었다. 기습에 실패한 요괴유령은 다시 사라져 있었 고, 나는 지소파천결 사용을 망설이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땅속이 아닌 나무속에 숨어 있으면 아까처럼 지파랑을 써봐야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겠어. 바로 지척의 나무속에 숨어있는 걸 내가 늦게 알아챌 정 도로 기척을 숨길 수 있다면 지독아로 잡기도 어렵겠어. 으음. 근데 조금 전 나무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녀석 분명 사사키의 본래 옷차림이었지? 칼에서 빠져나와 사사키의 전신에 갑옷형태로 달라붙어있던 요괴가 다시 칼로 돌아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기척을 잡아내기가 어려웠지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사사키의 두 눈은 흰자가 없는 검은색 그대로였어. 먼저 사사키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 순서이긴 한데, 어쩐다?

나는 사사키의 짝사랑(아마도) 대상, 프리제타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상당히 빽빽한 숲이어서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아가씨가 휴식을 끝내고 2차전을 시작한 기색이 희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프리제타라면 사사키를 깨울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프리제타가 사사키의 현재 상태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가 없는 거지만, 그 래도 일단 놈을 저쪽으로 유인을 해 볼까? 그러려면… 웃!

다시 어디선가 화살처럼 요력 줄기가 쏘아져왔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기에 상체를 비틀어 피하며 삼시전결을 날렸다.

반격이 허탕… 일 수밖에 없지. 이 자식, 대체 얼마나 먼 거리에 숨어서 저격 흉내를 냈던 거야? 이정도 어설픈 공격으로 뭘 어쩌겠다고…, 어? 혹 시?

그러고 보니 공격이 날아든 방향은 프리제타가 대교와 치열한 2차전을 벌이고 있는 장소 쪽이었다. 놈도 나처럼 프리제타를 이용할 생각으로, 자 기가 먼저 날 프리제타 쪽으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요괴칼 놈과 나의 목적과 방식은 전혀 다르겠지만, 흠. 좋아. 몇 백 년 묵은 요괴와 나의 판단, 어느 쪽이 맞을지 한번 보기로 할까?

나는 즉각 공공보법을 발동해서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요괴칼 놈의 적당한(?) 공격이 정면에서 쏘아져왔다. 나 역시 적당히 피하며 반격 도 귀찮아서 그냥 달렸더니, 오래지않아 대교와 프리제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괴유령 놈. 예상대로 공터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군. 갑옷은 당연히 없고, 두 눈의 흰자위도 돌아와 있어. 일견 사사키가 제정신 으로 돌아 온 듯한………….

“진유준! 와랏! 난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

아니군. 제 정신 아니야.

사사키 목소리로 비장하게 외친 요괴유령 놈은 본래 사사키의 발도술 자세로 필사의 일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장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놈은 지금 진짜 전력을 다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정글아! 정신 챙겨! 이제 진짜로 간닷!

요괴칼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점차 흥을 잃어가는 기색이 역력했던 정글이가 퍼뜩 깨어나고 있었다. 똑같이 이를 악문 나와 정글이의 격렬한 마음 이 정글도로 하나가 되어 가차 없이 내리쳐졌다.

꽈꽝!

거대 돌산이 깨지는 듯 한 굉음과 함께 요괴유령 놈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있었다. 난 사사키의 몸이 수 십 미터를 날아가 뒹구는 것을 보고서 야 아차 싶었다.

이, 이런! 내가 너무 심했나? 그…래도, 요괴칼이 멀쩡해 보이니까, 사사키도 괜찮으려나?

대교와 프리제타의 대결은 요괴칼 놈이 사사키의 목소리로 외쳤을 때 이미 멈춰졌었다. 그리고 나와 정글이의 일격에 날아가 버린 사사키의 몸은 프리제타로부터 2, 3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라, 버니?

난 대교와 모두를 향해 걸음을 떼며 두 손 모아 비는 자세를 취해야했다.

-아, 미안, 미안. 대교의 멋진 싸움을 이렇게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미안!

오~ 역시 너그러우신 우리 대교마님. 상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사과할 필요 없다고 해주는군.

대교는 프리제타 쪽을 잠시 살피더니 결국 어중간하게 들고 있던 청명검을 완전히 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프리제타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었고, 아직 사사키 쪽으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끄으으~”

사사키의 입에서 힘겨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일단 다소 안심하며 걸음을 조금 빨리하기 시작했다.

“프, 프리제, 타! 이, 이 칼을…….”

사사키는(?) 피가 흘러나오는 입으로 간신히 말을 이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프, 리, 제, 타. 이 칼을 가지고.., 달아나. 어, 언젠가 바, 반드시… 오늘의 일을……”

사랑하는 애인 앞에서 처절하게 죽어가며 복수를 부탁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요괴칼 놈의 의도는 뻔했다. 사사키의 초능력을 이용해도 날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음번 사용자로 프리제타를 선택한 것이다.

“잠깐! 프리제타!”

내가 다급하게 외친 것은 프리제타가 사사키로 생각하고 있는 요괴유령에게 다가가 몸을 굽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칼! 그건…….”

“프리제타! 저자 말 듣지 마! 으흑!”

내말을 끊은 사사키가(?) 울컥 선혈을 토해냈다. 그리고 난 프리제타에게 내밀던 손을 힘없이 내릴 수밖에 없었다. 프리제타는 이미 사사키의(?)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았고 한손을 칼쪽에 뻗고 있었다.

“그, 그래, 프리제타. 저자는 지금 누구도 이길 수 없지만, 이 칼만 있으면 언젠가는………….”

나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눈뜨고 봐주기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시 눈을 떠보니 프리제타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그걸로 요괴칼 을 쿡쿡 찔러보고 있었다.

“프, 프리제타?”

요괴유령이 진짜 죽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프리제타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어 날 보았 다.

“이 사람. 누구예요?”

내가 요괴칼이었다면, X팔려서 진짜 죽고 싶은 기분이지 싶었으나, 프리제타는 다시 내게 물었다.

“이 사람, 누군데 저에게 이런 걸 주려고하는 걸까요?”

“어 그게, 음. 바로 알겠디? 그게 사사키가 아니라는 걸?”

“예. 그리고 사사키는 이렇게 말이 많지 않아요. 저는 조용히 저의 말을 들어줄 때의 사사키 얼굴이 너무 좋구요.”

문득, 사사키가 침묵의 유령이 된 건 이 프리제타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 만약 사사키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야말로 좋아 죽겠군. 으으음. 요괴는 X팔려 죽게 하고, 유령은 좋아 죽게 하고, 결국 프리제타가 최강인 건가?

난 그런 결론을 내리며 몸을 굽혀 사사키의 손에서 요괴칼을 빼내어 내가 들었다. 혹시라도 내 의식을 차지해보겠다고 시도할까 싶어서 약간 마음 의 대비를 했지만, 요괴칼은 그냥 보통 칼처럼 조용할 뿐이었다.

-이봐. 요괴칼. 너 평소에 어떻게 보관되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사사키와 프리제타의 관계와, 프리제타가 어떤 아이인지, 그런 거 잘 모르고 있었 지? 사사키가 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만 읽고 섣불리 상황극을 펼쳐봤던 모양인데.. 쯧쯔. 너 이제 어쩌냐? 프리제타는 물론이고, 사사키 남매도 다신 널 거들떠도 안 볼 거 같은데 말야.

요괴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고, 난 이번에는 프리제타에게 말했다.

“프리제타. 너도 이제 감 잡았겠지만, 사사키는 조금 전까지 이 칼의 요괴에게 홀려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다시 본래 사사키로 돌아온 거 “지.”

프리제타는 아까 간식 먹을 때처럼 무릎을 모아 안은 자세로 앉아있었는데, 내말을 듣고 새삼 사사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또 그냥 물끄러 미 들여다 볼뿐, 사사키를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녀석, 괜찮겠냐?”

가해자인 내가 묻기는 좀 그랬지만, 그냥 두고 보기도 불편해서 물었더니, 프리제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거예요. 사사키는 다치면 항상 이렇게 깊이 오래 잠들곤 했어요.”

이 녀석, 이제 보니 무릎을 안고 있는 팔이, 보일 듯 말 듯 떨고 있군. 엄청 걱정되고 뭐든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건가? 이 녀석과 사사키 사이에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으으음. 안되겠다. 왠지 더 알게 되면 내 기분이 엄청 꿀꿀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은 이 요괴칼 놈의 처리나 마 무리하자.

-대교. 난 이 칼 좀 처리해야하는데, 대교는 어때? 프리제타와의 3차전, 시작할거야?

내 전음에 대교는 고개부터 저었다.

-쓰러진 동료 때문에 슬퍼하는 아이를 더 괴롭히고 싶지는 않아요.

과연 우리 대교. 내가 조금 늦게 깨달은 프리제타의 속마음을 잘 알아채고 있었군.

-요몽. 겨울의 여왕과 아쿠아린 형제는 어떻게 됐냐? 다른 애들 도착했어?

「아직이요. 그런데 조금 전 흑해1호에 코드명 ‘비에이’가 합류했어요. 비에이도 함께 오라고 할까요?」

-오. 그래? 잘됐네. 그 녀석도 같이 오라고 해.

‘비에이’라면 내가 ‘비오소’라는 별명을 붙였었던 흑인 소년이다. 녀석은 비록 아쿠아린 형제보다도 어리지만, ‘레인’ 녀석처럼 지휘관으로 특화된 녀석이라 형제들을 말리고 분위기 수습하는데 적격일 터였다.

-좋아. 이제 우리 싸움도 마무리를 해야겠지?

나는 왼손에 쥐고 있는 요괴칼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어주었다.

-야, 요괴칼! 너 계속 내말 씹지?

난 땅바닥에 적당한 돌을 두 개 주워서 놓고, 그 위에 요괴칼을 걸쳐 놓았다.

-오늘 두 개째네. 정글아, 오늘은 장작 대신 칼 뽀개는 날인가 보다.

내가 정글도를 도끼처럼 치켜들고 이를 악물자, 비로소 다급한 마음의 소리가 전해져왔다.

‘자, 잠깐! 그만 둬!’

-왜?

‘넌 분명 훌륭한 무사이다! 무사가 저항도 하지 않는 상대를 칠 셈인가?’

-무사? 그것도 훌륭한? 내가? 잘 못 봤어.

난 있는 힘껏 인척 하면서 적당한 힘과 내공만 써서 요괴칼의 중간쯤을 내리쳤다. 캉! 경쾌한 쇠소리와 함께, 요괴칼의 도신이 부러질 듯 내려앉 았다가 위로 튀어 올랐다.

-아, 이런 이런 생각보다 질기네?

난 놈을 다시 주워서 돌들 위로 위치 시켰다.

‘그만! 제발 그만둬! 난 죽고 싶지 않다!’

-핫. 이거 뜻밖일세. 수 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해쳤다고 자랑하던 놈이, 살고 싶다고 비굴하게 나오는 거냐?

‘그, 그럴 수 있다. 나도 본래 인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도 살고 싶어서 자꾸 죽이다보니, 내 칼에 내가 먹혀서 이런 꼴이 되고 말았지 만…, 나도 한때는 분명 사람이었단 말이다.’

-사람이었다고? 니가?

‘이 칼에 먹히기 전까지의 나는 전국시대의 장수였다. 이름은 ‘아베 히로부미”

이거 어째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이름일세.

‘난 본래 신분이 좋지 못해 어린 시절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전국을 떠돌며 바늘 장사를 한일도 있었어.’

이것도 어디서 들어본 듯한 얘기 같은 얘기로군.

‘난, 운 좋게 모시게 된 주군을 위해, 겨울날 그의 신발을 품에 품어서 따뜻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신임을 얻어……. -이봐! 잠깐!

‘나도 더 이상 과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난 단지 내가 왜 사람들을 미워하고 출세를 위해 칼을 잡았는지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자식. 좀 더 들어주기 힘들었는데 그만둔다니 다행이긴 한데, 이거 참. 교활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좀 많이 황당하 네. 기분 같아서는 그냥 확 박살내버리고 끝내고 싶은데………….

‘이, 이번엔 내가 묻고 싶다’

-너! 계속 말이 짧다?

… 내가 너를 존대하기 바라는가?’

흠. 소위 마음의 대화라 그런가? 내 평소말투로 해도 대충 다 알아 듣는 거 같네.

‘그렇다면 너도, 너와 너의 그 마도에 대해서 말해보라. 이상한 인간

-너, 꽤 오래 산거처럼 구는데 말야. 여기 이 정글도는 제작년도가… 음. 하여간 대략 천삼백 년 정도 전이야. 난 뭐… 이 친구가 만들어지고 삼백 년 정도 지난 후에 이 친구의 두 번째 주인이 되었지.

난 녀석과 달리 거짓말은 절대 안했음. 그러니까 당당하게 계속하자.

-그리고 참고로, 저기 저 아리따운 나의 예비 신부와 그녀의 청명검도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 애. 송. 이. 요괴 야.

‘그, 그런, 그럴 리가… 아, 자, 잠깐! 청명검? 설마 저 여자가 천 년 전 다카쿠마 가문을 멸족시켰다는 그 대륙 최강의 마녀…………

-야, 야! 누구더러 마녀래. 죽을래?

난 신경질적으로 놈의 말을 끊으며 정글도로 놈의 손잡이 부분을 툭툭 쳤다. 많이 들어봤던 사무라이 가문 이름이 나와서 대교 얘기가 맞다 싶었 던 것이다.

“대교! 여기 이 녀석이 아무래도 널 아는 거 같은데? 대교 네가 낙룡파에서 해치웠었던 사무라이 가문 말인데, 걔들이 다카쿠마인가 그랬지?”

내가 일부로 목소리를 높여 대교에게 묻자, 그녀는 잠깐 기억을 더듬어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라버니. 헌데 그 일본 칼도 당시에 만들어진 거래요?”

대교가 조금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이쪽에 다가오려는 기색까지 보여서, 나는 손을 저어보였다.

“아니. 이 녀석은 몇 백 년 안 된 놈이래. 그냥 소문을 들었나봐.”

‘맙, 소, 사! 저 여자가 그 전설속의 대륙 최강 마녀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은 대체…………

으음. 그러고 보니 내 입장이 좀 애매하네? 대교가 일본에까지 알려진 건 그 사무라이 가문을 손봐줘서 그런 모양인데. 그때는 내가 원판이었을 때 였지. 물론 나중에 이 몸으로 돌아와서 사무라이들과 닌자들까지 해치운 적이 있지만, 그때도 생사금마도결을 익히기 전이어서 지금의 나와 연결해 서 설명하기가 좀……………

‘아, 알겠어.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를 알겠어!’

응? 당시의 나도 일본에 알려지긴 한 건가? 그럼 어떤 이미지이려나? 당시 내가 놈들을 상대할 때 사용했던 무기들은 K2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화 끈한 ‘네이팜탄’이었어. 그러니 천년 전 사람들에게는 내가 무슨 사악한 주술을 쓰는 주술사쯤으로 보였으려나?

‘당신, 당신이란 남자는 천 년 전, 일본의 모든 요마들을 단신으로 멸종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는 그 전설의 마인…..’

에? 얘 지금 뭐라카노? 난 천 년 전에는 일본에 가본적도 없는데 뭔 소리야?

난 아무래도 요괴칼이 졸다가 남의 다리 긁는다 싶었지만, 놈은 끝내 떨리는 기색으로 외쳤다.

‘풍지도심(風之心), 마도제(魔刀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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