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130화
130화. 7층, 혹한의 땅 툰드라 (1)
7층은 보스 몬스터가 없으며, 스타팅 포인트에서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가기만 하면 8층이 개방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완주하기만 하면 클리어가 인정된다는 뜻이다.
물론, 듣기에는 굉장히 간단해 보이나, 환경 자체가 워낙에 열악한 탓에 공략에 많은 시간과 희생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바로 현재.
빙산으로 가득 찬 바다 앞에서 벌써 며칠 째 발이 묶인 ‘단군길드’는…….
꽤나 분위기가 심각했다.
“빌어먹을. 동쪽 바다 쪽도 막혔단 겁니까?”
욕설을 내뱉은 건. 단군 길드의 랭커 장은석이었다.
장은석은 이미 여러 차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 상위 랭커였지만, 지금 눈앞에 닥친 이 난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만 했다.
“예.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후우. 일단 현 상황부터 보고해보세요. 대체 얼마나 상황이 그지 같은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장은석의 말에, 중년 남성이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단군 길드의 현 상황을 실시간으로 기록해주는 마법 스크롤이었다.
플레이어의 건강 상태. 식량과 보급품 등.
관련된 정보들이 일렬로 나열됐다.
“바람이 워낙 거센데다 습하기 까지 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화염 계열 플레이어들이 어떻게든 마력을 쥐어짜고 있습니다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개개인이 보유한 마력은 한정되어 있는 법이었으니까.
“식량 수급도 원활하지 않아요.”
긴 생머리를 한 여자도 한 마디 덧붙였다.
7층은 무기나 방어구 등 전투에 관련된 아이템 외, 다른 층계나 혹은 탑의 외부에서 가져온 보급품을 사용할 수 없는 구조.
때문에 모든 걸 이곳에서 자급자족해야만 했다.
추위 뿐 아니라 그 외의 필수품들도 레이드의 일부로 고려해야 한다는 소리다.
“동상 탓에 움직임도 제한된 상황입니다.”
“감기는 기본이고. 이대로라면 사망자까지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저체온증 의심 환자들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거든요.”
안 좋은 소식들이 이어졌다.
나름대로 7층을 클리어 해 본 적 있는 자들 위주로 구성한 공격대였다.
하지만, 충분히 성장하고 정석대로 공략했던 게임 속 과거와.
아직 성장이 덜 된 상황에서. 지름길을 통해 최초 클리어를 노리는 현 상황과의 간격은 너무나도 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콰앙!
장은석이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인 눈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래서… 다들 불평불만만 쏟아내고 뭐, 어쩌자는 겁니까? 이대로 실패를 인정하고 그냥 돌아가자는 말이에요?”
노기 어린 음성.
장은석이 싸늘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었다. 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움찔했다.
시련의 탑도 어느덧 6층까지 공략이 끝났으나. 정작 단군 길드는 6번의 기회동안 최초 공략을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 했다.
기껏해야 다른 길드의 공략에 숟가락은 얹은 게 고작이랄까?
한국 최고이자 7대 길드 중 하나라는 타이틀을 지닌 것 치곤 너무나 초라한 성적이었다.
헌데, 길드 내부에서도 자정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와중에 포기라니!
더군다나 7층 공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불사조의 깃털’이 바로 저 바다 너머에 있지 않은가?
목표까지 한 걸음만 남겨둔 상황이었기에, 장은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레이드를 속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다를 건널 방법이 없습니다.”
“숲 쪽에 있는 나무들은 아시다시피 벌목이 불가능한 상황이구요. 그렇다고 맨몸으로 건너자니 수온은 둘째 치고 바다 속에 사는 해수에게 잡아먹힐 거예요.”
공격대 참모진들이 객관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물론, 그걸 들어먹을 장은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방법을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못 들었어요? 다들 비싼 연봉에 인센티브까지 받아 처먹으면서, 그 해결책 하나 찾지 못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건 너무 심한 말씀….”
“커흠! 이 사람아 가만히 좀 있어.”
여자 플레이어 한 명이 불만을 토로하려 하자, 중년 남성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공대장님 말씀 따라 저희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허나, 상황에 따라서는 최초 공략을 포기하고 장기전에 돌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고려해 주십시오.”
“……당장은 방법을 찾는 데만 집중하세요. 실패할 경우 플랜B를 하자는 생각 따윈 접어두시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맡은 역할을 하러 떠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고, 공대장님! 좀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다급하게 장은석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매우 익숙한 플레이어 한 명이 공격대의 진영으로 다가왔다.
***
‘여기 추위가 진짜 매섭긴 하지.’
진혁이 얼어붙은 툰드라 지대를 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건 뭐, 바람이 완전 칼바람이다.
마력으로 겹겹이 몸을 감쌌는데도 버티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당연히, 수준이 낮은 플레이어들은 1분 1초가 지옥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지겠지.’
괜히 이 층계에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딴 게 없더라도 이미 이 층 전체가 생존을 위협하는 최강의 장애물이었다.
‘그래도 상위 길드답게, 그럭저럭 구색 정도는 갖춰뒀네.’
몇몇 플레이어들의 수준은 꽤나 높았다.
공격대의 밸런스 또한 잘 잡혀 있었고.
그렇게 진혁이 단군 길드의 진영을 둘러보는 사이.
장은석과 몇몇 플레이어들이 진혁이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안녕하….”
“강진혁 플레이어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죠?”
인사는 가볍게 무시당했다.
장은석이 다짜고짜 이유부터 물었다.
경계심이 뚝뚝 묻어나는 질문이다.
“다른 게 아니고. 7층 공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기에 한 번 와봤습니다. 보니까 정말 고전할 만하긴 하네요. 추위가 어우.”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저희끼리 얼마든지 공략이 가능하니까요.”
장은석이 단칼에 선을 그었다. 좋게 말해서 저거지. 진혁이 아니었으면 대번에 꺼지라고 고함부터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진혁은 순진한 얼굴을 한 채 두 눈을 깜빡였다.
“예? 돕는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그게 무슨…?”
“저도 불사조의 깃털이란 아이템에 흥미가 있다. 뭐, 이런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해봐라.
어느 정신 나간 놈이 다른 사람 돕는다고 이 추운 곳까지 올지? 내가 그 정도 성인군자였으면, 시련의 탑이 아니라 유니세프에 있었을 거다.
본심을 드러내자, 장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저희가 독점한 지역을 침범하겠다는 뜻입니까?”
“재밌네요. 7층이 개방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독점이란 표현을 다 쓰시다니. 누가 보면 세상의 모든 게 단군 길드의 것 인줄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혁이 갑자기 하늘을 가리켰다.
“와! 저기 단군 길드의 새가 날아다니네요. 지금 마신 산소도 단군 길드 거면 사과해야겠죠?”
“이건… 도발입니다.”
“정당한 경쟁이겠죠.”
팽팽한 신경전이 오갔다.
하지만, 장은석은 이 이상으로 세게 나갈 수 없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혁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좋습니다. 불사조의 깃털은 먼저 갖는 쪽이 소유권을 갖는 것으로 하죠.”
결국, 장은석이 한 발 물러섰다.
“단군 길드의 공격대와 함께 있어도 괜찮다는 뜻인가요?”
“저희를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자리 한 켠 정도야 내드릴 수 있습니다. 단, 이를 어길 경우 그때는 이곳에서 나가주셔야 합니다.”
좋아.
이걸로 공대장의 허락도 얻었으니. 이제 마음 놓고 움직일 시간이다.
“그럼, 며칠간 잘 부탁드려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
밖으로 나온 진혁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향한 곳은 바다와 정반대편에 있는 곳. 침엽수들이 울창하게 자라있는 숲이었다.
‘역시 지키는 사람들이 있군.’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의 숲의 초입 부분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사실, 말이 출입을 통제하는 보초지. 진혁의 눈엔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지친 산토끼들일 뿐이었지만.
조금도 다가가자, 상대 쪽에서도 진혁의 존재를 눈치 챘다.
덩치 큰 남자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여기는 출입이….”
그러나, 남자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 했다.
상대의 얼굴을 본 순간,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으니까.
“어, 어라?”
“강진혁 플레이어님?”
“지, 진짜야? 아니, 여긴 어쩐 일로….”
모두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이런 곳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만날 줄은 몰랐던 탓이다.
“숲 안쪽에 볼일이 좀 있어서요. 물론, 장은석 공대장님한테도 허락을 받아뒀습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딜 가지 말라고는 안 했다.
한국말은 이래서 정확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숲에 들어가겠다는 말에, 의외로 큰 반향이 일어났다.
“아. 안 됩니다! 이 숲만큼은….”
“맞아요. 여긴 너무 위험해요. 괜히 저희가 이곳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식량이라면 차라리 바닷가 쪽에서 구하는 게 나을 거요. 이건 진심으로 강 플레이어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가볍게 듣지 말아주쇼.”
떨리는 목소리.
차가 식어버린 눈빛.
뼛속까지 공포심에 찌들어 있는 얼굴들이다.
명색이 7개 길드 중 하나인, 단군에 소속되어 있는 걸 고려한다면, 이런 반응은 지나치게 과하다.
‘6층까지 오면서 나름대로 경험을 쌓아왔을 텐데도 이 정도로 겁에 질려 있다는 건가.’
진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긴, 이해는 한다.
숲속에 있는 녀석들은 어지간한 A급 플레이어들도 진절머리를 칠 만큼 성가셨으니까.
하지만, 불사조의 깃털을 얻으려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몇 가지 석연찮은 점들 또한 저 안에 들어가야 해소할 수 있었고.
“걱정 마세요.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곧바로, 숲 안쪽으로 움직였다.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지만, 진혁은 눈 위를 가볍게 밟고 걸어갔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이다.
통상적으로 사람이 눈 위를 걷는 건 불가능했으나…….
허나, ‘검마제왕보’가 일정 경지에 오른 진혁으로선, 이 정도쯤은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사박.
그렇게. 진혁이 숲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아, 안 되는데….”
“젠장. 이거 어떻게 하냐?”
“일단은 보고해야지. 우리 실력으로 랭커를 말릴 수도 없고. 위에서도 이해해 줄 거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저 숲은 아무리 S급이어도 단독으론 힘들 텐데…….”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그런 거겠지. 특히나 S급이면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으니까.”
모두의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온 후 이미 몇 차례나 저 숲속에서 먹을 것과 땔감. 그리고 배를 만들 나무를 구하기 위해 별동대를 보냈었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A급이든 B급이든. 숫자가 얼마나 많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들어가는 족족 함흥차사가 되어버렸으니까.
결국, 장은석은 숲에 대한 접근 자체를 금지해 버렸고. 바다를 건너기 위한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저 숲으로 들어가 버리다니.
만약, 자신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말렸을 것이다.
물론,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부디, 무사하셔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옆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대체 거길 들여보내면 어쩌자는 거냔 말입니다!”
덩치 큰 남자의 보고를 들은 장은석이 고함을 질렀다.
얼굴이 시뻘게진 걸 보아하니 아주 단단히 열이 받은 모양이다.
“그, 그게….”
“당장 뒤따라가세요.”
“예?”
“강진혁 플레이어는 조금 전에 깃털을 얻으려고 이곳에 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저 숲속에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겠죠.”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그 해법이 바로 저 안에 있다는 거다.
그러니.
“지금 당장 추격하세요. 저희도 곧 팀을 꾸려 합류하겠습니다.”
장은석은 할 말만 한 뒤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만 덩그러니 남은 상황.
모두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들어가라고?
저 안으로?
휘이이잉!
숲속에서 거센 눈보라가 일어났다.
어느새 진혁이 걸어갔던 눈 위의 발자국은 거의 다 지워졌다.
가려면 지금 당장 따라 붙어야 한다.
***
숲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을까?
스윽….
거대한 바위를 살피던 진혁의 눈빛이 이채가 맴돌았다.
‘설마 했는데, 이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였군.’
이제야 단군 길드가 맥을 못 췄던 게 이해가 됐다.
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진혁의 시선이 바위의 위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