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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152화


152화 가면무도회 (2)

시련의 탑 1층은 여러 의미에서 가장 복합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세계 각지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들어오는 입구인 동시에 사냥을 할 수 있는 필드가 펼쳐져 있었고.

지금 진혁과 엘리스가 있는 곳처럼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중립 지대’ 또한 함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야?”

엘리스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높이만 50m. 옆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외벽이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었다.

“맞아. 여기서 가면무도회가 열릴 예정이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에 다시 와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다.

워낙 정신없이 성장을 하고 탑을 오르느라 숨을 고를 여유가 없는 것도 한 몫 했겠지.

[중립 지대 ‘이름 없는 도시’에 입장하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꽤나 재미난 풍경이 펼쳐졌다.

웅성웅성.

전 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플레이어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내부.

그러나 독특한 점은 플레이어들이 아닌 중간 중간 섞여 있는 존재들이었다.

유령처럼, 옷만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녀석들. 사람이 아니네?”

“중간 관리자들의 하수인들이야. 주로 도시 전체의 잡다한 업무들을 도맡아 하고 있지.”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중간 관리자라는 게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기에, 이런 디테일한 설정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탑에 있는 NPC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고작일 거다.

‘물론, 초대장을 받은 플레이어들은 이제 그 존재에 대해 눈치채게 되겠지만.’

진혁이 입꼬리를 올린 채 거리를 거닐었다.

무도회에 참석하려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복장이 필요할 터.

발걸음이 멈춘 곳은 골목 한켠에 있던 옷가게였다.

다른 곳에 비해 그다지 눈에 띄진 않았으나, 이곳은 아는 사람만 아는 장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뭐, 꼭 옷 만드는 솜씨 때문에 이곳을 고른 건 아니었지만.

덜컹!

문이 열리자 초록색 피부에 작은 체구를 가진 고블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남자의 모습 또한 보였다.

“뭐야, 너도 초대장을 받은 거였어? 하긴, 검성……은 검성이니까 당연한 거려나.”

조각처럼 수려한 외모와 그 어떤 사람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

천유성이었다.

원형으로 된 디딤대 위에 선 채 고블린 제단사에게 몸을 맡기던 천유성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바로 얼마 전에 사냥 대결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얼음물 속에 처박아 두고.

그대로 사냥감만 맛있게 요리해서 먹은 뒤 사라져 버린 당사자.

가뜩이나 미운털이 5만 개는 박혀 있는 원흉이 눈앞에 있으니 부아가 치솟을 수밖에.

“자, 잠깐! 화나는 건 알겠는데. 그 전에 좀 들어봐.”

“네놈의 새치 혀에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또 다시 넘어갈 것 같으냐?”

천유성이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탁자 위에 올려 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

잘못하다간 여기서 칼부림이 날 수도 있다.

“흠흠. 두 분 다 여기서 싸움은 곤란합니다만…….”

고블린 재단사도 쓰고 있던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하여간 문명인이라는 놈이 교양이라는 건 옆집 뽀삐 밥그릇에 던져 두고 온 건가.

이런 녀석이 미래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된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뿐이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말려야겠지.

정말로 싸움이라도 났다간 무도회고 나발이고 간에 탑에 있는 감옥부터 가게 될 테니까.

“아니 이번엔 진짜야. 내가 안 그래도 너 주려고 무도회에서 검도 하나 구해 주려고 했어. 물물교환! 그래. 그걸로다가!”

진혁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천유성이 멈칫했다.

“물물교환이라고?”

“그래 인마. 형이 너 격하게 아끼는 거 알잖아? 그런 꼬질꼬질한 거 말고 제대로 된 거 구해 줄게.”

“네가 이 검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적어도 10층 아래에선…….”

“공격을 3번 성공시키면 절삭력이 30%만큼 증가하는 옵션이 나쁘진 않아. 하지만, 그걸로는 당장 8층에 있는 ‘그곳’에서 고전할 텐데?”

“그, 그걸 어떻게…….”

깜짝 놀란 천유성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이 빌어먹을 고인물이라면 검의 생김새만 보고도 어떤 종류의 검인지 모조리 꿰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다음에 어디로 움직일지까지 예측하고 있던 건가.’

무슨 예지 능력자도 아니고.

모든 생각과 행보가 읽히고 있다는 생각에, 천유성의 자존심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실제로 8층에 있는 미궁은 현재로선 돌파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만약 더 좋은 무기를 구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저 말에 낚여 주는 수밖에.

‘후우. 침착하자.’

그리고 조심하자.

천유성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수없이 당해 온 기억들을 답습하며, 완벽하게 허점을 보완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저 끔찍한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좋다.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믿어 보도록 하지.”

“걱정하지 마. 애국가도 4절까지 있는데, 설마 내가 또 다시 널 속여먹겠어?”

이번에는 정말로 쓸 만한 검 하나를 구해 넘겨줄 생각이다.

원래 10번을 못 해 주다가도 1번만 잘해 주면 사르르 녹는 게 사람의 심리인 법.

나쁜 남자가 괜히 인기 많은 게 아니다.

게다가.

‘이 정도 표면적인 이유로 둘러댔으면 의심하지 않겠지.’

사실 검을 거저 주겠다고 하는 데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바로, 8층에 있는 성가신 미궁을 통과해야 15층에서 천유성이 오롯이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고.

수련에 매진해서 수련광만이 얻을 수 있는 스킬을 얻어야 그 스킬까지 날름 복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일 대상에 대해선 90일 간의 복사 유예 조건이 있으나 그쯤 되면 쿨타임은 충분히 돌 것이다.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 반드시 검을 손에 넣어 주마.’

‘후후. 어서 쑥쑥 성장하렴. 내 상태창을 장식할 스킬 셔틀아.’

서로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채.

냉각되었던 공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

“그나저나 저분도 초대장을 받고 온 거냐?”

천유성이 힐끗 진혁의 뒤에 있던 엘리스를 바라봤다.

엘리스는 조금 전부터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신경전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그렇다. 짐 또한…….”

“아. 얘도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왔지.”

진혁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중2병 걸린 대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을 거다.

“……그렇군. 7층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플레이어라고 생각은 했다만, 정확히 어느 국가에 소속된 거냐?”

음, 저 질문은 꽤나 난처한데.

당연히 사실대로 말할 순 없다.

“루, 루……마니아?”

“루마니아라고?”

“뭐!? 짐은 루마니아닌지 뭔지가 아니라 위대한…… 읍읍!”

다시 한번 진혁이 엘리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충 그 어디쯤이야. 예전 몰락한 귀족의 후손이라 그런지 자존심만 무지하게 센 데다 충격을 크게 받은 일이 있어서 헛소리도 좀 하니까 네가 좀 이해해 줘라.”

“뭐, 알겠다. 나는 다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다. 무도회 때 다시 보도록 하지.”

천유성은 더 이상 캐묻지 않은 채 엘리스에 대한 관심을 꺼 버렸다.

그리고 고블린 재단사에게 정장에 대한 값을 치렀다.

“2,500코인 확인했습니다. 그럼, 완성된 정장은 천유성 님의 개인 소유의 아공간 인벤토리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블린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잠시 뒤, 천유성이 가게 밖으로 나가자.

“두 분께서도 무도회에 입고 가실 정장을 맞춰 드리면 될까요? 사견으로는 옷과 구두까지 전부 검은색 계열로 통일하는 게 좋아 보이는군요.”

고블린 재단사가 이쪽을 향해 물었다.

“정장…… 아. 정장 맞춰야죠. 두 벌을 맞추긴 해야 하는데…….”

글쎄.

“그것보다는 다른 쪽에 흥미가 좀 있어서요.”

“흐음. 물론, 정장 외에도 가방이나 액세서리 같은 것도 취급하고 있습니다만, 그쪽은 전문이 아닙니다.”

“그런 거 말고. 만갑산의 비늘이라든가. 레드 드레이크의 발톱이라든가. 요화초(瑤化草)의 뿌리라든가 하는 것들 있으면 좀 구매하고 싶었거든요.”

“하하. 전부 다 1층에서는 구할 수 없는 종류로군요. 안타깝지만,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블린 재단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마치, 산 속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사람을 보듯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짓는 건 덤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바로…….

“그럴 리가요. 위대하신 중간 관리자께서 고작 그 정도 물건을 구하지 못한다고요?”

이걸 터뜨려야 했으니까.

길지 않은 대사였지만,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고블린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주 찰나였으나, 진혁은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분과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중간 관리자가 아니라 이 가게를 운영하는 일개 주인일 뿐입니다.”

역시.

이렇게 나오시는군.

그렇게 발뺌을 하겠다면야 하는 수 없지.

“셋.”

진혁이 손가락을 폈다.

“제가 이상하다고 느낀 점이 정확히 세 가지가 있습니다.”

고블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진혁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좋아.

이걸로 1단계는 통과다.

“첫 번째로 이 가게. 들어왔을 때부터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향이 풍기더군요. 탑의 16층에서만 자란다는 ‘눈송이 유채꽃’의 향이죠. 피로 회복과 심신 안정에 탁월한 효과를 지닌 데다…… 흠. 몇 가지 다른 꽃의 향도 섞어 두셨네요?”

우림 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늪지 야생화’.

만년 설산에서만 자란다는 ‘마지막 이슬’까지.

꽤나 여러 종류의 향들이 배합되어 있었다.

모두, 서로의 시너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조합으로 말이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탑의 1층에 있는 조그만 가게의 주인이. 탑의 중층 이상에서만 구할 수 있는 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것도 고작 방향제 따위로 쓰기 위해서 말이죠.”

“…….”

고블린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과는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흥미로움이 담긴 표정에선 이어질 말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나왔다.

“두 번째로 천유성이 마력을 해방했을 때 당신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탑의 최약체라 평가받는 고블린.

그런 나약한 몬스터가 감히, 평균 레벨이 50에 가까운 플레이어들이 내뿜는 기세를 버틴다?

말이 되질 않는 이야기다.

둘 사이의 격차는 호랑이와 햄스터만큼이나 벌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다시 말해.

지금 눈앞에 있는 고블린은 단순히 작은 체구와 연약한 마력을 가진 통상적인 개체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두 분들께서도’ 정장을 맞출 거냐고 물었습니다.”

진혁의 말에, 처음으로 고블린이 반문했다.

“두 분이서 오셨으면 당연히 두 벌의 정장을 맞추는 게 상식 아닙니까? 그게 단서가 된다는 건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아뇨.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가면무도회의 이벤트가 발생한 이상, 이 도시에 있는 존재들은 플레이어의 초대장 소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가 일반적인 방문자인지.

누가 이번 이벤트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인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쪽 친구는 초대장이 없습니다.”

진혁이 엘리스를 어깨 너머로 가리켰다.

플레이어가 아닌 진조.

때문에 초대장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또한 그걸 훤히 알고 있는 자가 엘리스까지 무도회에 갈 거라고 확신하다는 건…….

“이미 저에 관한 정보를 릭 님에게 전해 들었다는 거겠죠. 당연히 대상단의 주인이 알고 지낼 정도라면 당신 역시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상단을 이끌고 있을 테고요.”

아마도 릭이 부리는 간부급 중 하나에 해당되는 자이겠지.

‘나도 처음 보는 놈이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무튼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말을 다 했다.

양심이 있다면 여기서 발뺌하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그 생각을 증명하듯.

“푸하하! 이거 참. 할 말을 잃게 만드는군요. 릭이 최근에 재밌는 플레이어가 있다고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흥미로운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고블린이 광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하지만 강진혁 씨가 틀린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고블린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한편, 이어지는 말에 진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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