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326화
326화. 게이트 개방 Before 11시간 (1)
“왜?”라는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한시간을 1초 남긴 상황에서, 엘리스는 분명 영원의 장미를 손에 넣었으니까.
“뭐지? 대체 어째서…….”
엘리스가 말을 더듬으며 손에 쥔 영원의 장미를 바라봤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장미는 아직까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른쪽 가슴에 있는 꽃은 가짜거든.”
“가짜……라고?”
“응. 가짜. 그리고 이게 진짜야.”
진혁의 왼쪽 가슴에 새로운 장미가 나타났다.
[3성급 ‘시야 왜곡’ 결계가 해제됩니다.]
결계를 이용해 왼쪽에 달아 둔 진짜 영원의 장미를 숨기고. 빙하 조형으로 만든 가짜를 오른쪽에 달아 뒀다.
모두가 장미를 얻는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처음 장미가 있던 위치까지 신경 쓰지 못했고.
결국, 어설프게 승리를 확신한 게 패착이 된 셈이다.
말랑흑두루미한테서 뜯어낸 아이템을 제물로 쓴 덕에, 빙하 조형의 완성도가 완벽에 가까운 것도 페이크를 연출하는 데 똑똑히 한 몫을 했다.
“나는. 내가…… 내가 이긴 줄 알았는데. 내가 다 제치고 장미를…… 흑. 얻는 줄 알았는데……. 호수랑 식당이랑…… 가려고 다 계획했는데…….”
엘리스가 울먹였다.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음.
이렇게 진심으로 슬퍼하니까 왠지 모르게 양심의 가책이 0.1mg 정도 느껴지려고 한다.
아주 희미하게 바늘로 양심이 있을지도 모르는 부위를 긁는 느낌이랄까.
“너무 그렇게 슬퍼하진 마.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네가 원하는 장소에 함께 놀러가 줄 테니까.”
함께 하는 게 싫은 게 아니야.
그저, 지금 당장은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을 뿐이지.
“……정……말?”
엘리스가 토끼눈을 떴다.
“그래, 그러니 그만 좀 울어. 명색이 진조라는 애가 다 보는 앞에서 이게 뭐냐?”
“……응. 알겠어. 그럼 대신 오랜만에 피도 줘!”
“피, 피라고?”
“요즘 많이 움직였더니 기가 허해. 원래 결계도 간파할 수 있던 건데, 마력이 부족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거야.”
“……후우. 알았어. 헌혈한다고 생각하지 뭐.”
진혁이 한숨을 내쉬자, 엘리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졌다.
다사다난한 일들이 있었지만, 무림에서의 일이 모두 마무리됐다.
이제…….
진혁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그래, 지금부터는 탑 밖에서 닥칠 거대한 전쟁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
한국 각성자 협회.
진혁은 곧 있을 최악의 아웃 브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협회장을 맡고 있는 한상진이 무거운 얼굴로 진혁을 마중했다.
“아…….”
그러다 문득 손님을 맞이하고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커피나 녹차…… 그 외 다른 음료수도 있습니다. 어떤 걸 드시겠습니까?”
“마실 건 괜찮습니다. 그보다 게이트에 관한 정보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부터 듣고 싶네요.”
진혁이 소파에 앉았다.
한상진 역시 더욱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반대쪽 소파에 몸을 뉘었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웃브레이크가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마력 분석을 전부 끝냈다는 뜻인가요?”
“예. 저희 쪽에 소속된 전문 팀이 측정한 결과 약 11시간 뒤에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최근 상급 마정석과 측정 계열 각성자를 통해 게이트의 마력을 분석하는 일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오차 범위는 있겠지만, 11시간을 한계선으로 두는 게 맞겠지.
‘내가 예상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네.’
새삼 ‘협회 쪽도 많이 발전하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로 기술력이 올라온 걸 보면 말이다.
“얼마 남지 않았군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 와서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것 따위는 의미가 없다.
어디로 가든 모든 것이 무(無)로 화할 테니까.
한상진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진혁을 이곳으로 부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방법은 있습니다.”
한상진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혹시 게이트의 마력 허용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각 생명체가 게이트를 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경우, 그에 등가되는 마력이 필요하다. 라는 것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A급에 해당하는 몬스터는 A급 게이트가 필요하고 S급에 해당하는 몬스터는 적어도 S급에 해당하는 허용치를 지닌 게이트가 필요하죠. 한데, 지금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나려고 하는 게이트는 게이트를 통해 넘어오려는 몬스터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용량이 크지 않습니다.”
진혁이 대번에 한상진이 하는 말의 저의를 깨달았다.
“게이트의 마력을 보조하는 동력원이 어딘가에 따로 있다는 뜻이군요.”
“저희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슈브 니구라스 정도 되는 녀석이 본체로 현현하려는 건 그만큼 상식을 초월한 마력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당연히 게이트 그 자체만으로는 감당이 쉽지 않겠지.
특히나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현현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그 요구량은 더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해 둔 대비책도 있긴 하지만, 그건 성공 확률이 더욱 떨어진다.’
그보단 차라리 슈브니구라스의 현현 자체를 막을 수 있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 터.
“그 위치가 어딥니까?”
“몇 시간 전. 진도 2 지진과 함께 독도 인근 3km 떨어진 해상 위에 작은 섬 하나가 새로 생겨난 걸 확인했습니다.”
그리 멀지 않는 거리.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간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달할 수 있다.
“단군과 싸울아비를 비롯해 대형 길드의 공격대들이 투입될 예정이니,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그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레이드에 있어 전권은 강진혁 플레이어님에게 주어지며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보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남은 11시간 안에.
마력의 근원이 되는 것을 찾아 파괴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진혁이 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락방에 있던 하스팅이 말없이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봤다.
화면에는 몇 시간 전 낙양에서 있던 이벤트에 관한 녹음 영상이 반복되어 송출되는 중이었다.
“…….”
한참이나 영상을 보고 또 보던 하스팅이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박살냈다.
콰드득!
부서진 유리가 산산이 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그때.
“무림 측에서도 결국 실패했군요. 사마자. 그 녀석은 그래도 좀 쓸 만한 놈인 줄 알았더니. 청룡을 그토록 허무하게 낭비할 줄은 몰랐어요.”
하스팅의 맞은편에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보라색 빛이 나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고혹적인 눈빛에서 묻어나오는 묘한 기운이 인상적이었다.
위대한 뱀파이어 가문의 가주이며, 셰필티노 가문을 이끄는 ‘하이신스 드 셰필티노’다.
“기껏 사방신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줬는데, 이래서야 강진혁이란 플레이어는 인간이 아니라 신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어쩌면 관리자분들보다도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네요.”
“……적당히 비꼬시죠. 그런 말을 웃어넘길 정도로 제 기분이 그리 편치 않습니다.”
“어머나,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위대하신 상급 관리자 앞에서 실언을 했군요.”
하스팅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지는 걸 본 하이신스가 두 손을 살짝 위로 들어올렸다.
“가주도 벌써 둘이나 잃었습니다. 나머지 가주들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하이신스 가주 빼곤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죠. 이대로라면 저희 동맹 자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함께 있던 엑센시온 역시 한 마디 거들었다.
아타락시아의 새로운 가주로서, 전대 가주인 엘리스가 점점 더 세를 키우는 걸 보고 있자니. 마치, 가시방석에라도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가주분들께서 불안해하시는 건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십쇼. 그렇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섭외해 뒀습니다.”
“사마자보다도 더 유능한 장기 말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아! 마침 지금 막 도착했군요.”
하스팅이 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 순간.
끼이익…….
나무로 된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두 명.
마인 협회에 소속된 적발의 여성 멜레나와 일흔을 바라보는 늙수그레한 노인이었다.
“도, 도착했습니다.”
멜레나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진혁이라는 악마에게 낙인으로 종속된 몸이었으나 눈앞에 있는 자들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닌, 정말로 탑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자들이었다.
쭈뼛쭈뼛 솜털이 곤두서고 목이 타는 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리라.
“인간 아닌가요? 설마, 저들이 하스팅 님께서 말한 그 유능한 인재라고요?”
하이신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대했던 카드가 고작해야 플레이어라니.
그것도 둘 다 마력이 한 줌밖에 느껴지지 않는 버러지들 아닌가?
고작 이 정도 멤버로는 사마자는커녕 하급 혈족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후후후. 그래 보이십니까? 허면, 하이신스 가주께서 직접 실력을 한 번 시험해 보시죠.”
“진심은 아니겠죠? 가볍게 손짓만 해도 죽을 것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힘을 써 보라고요? 일격도 견디지 못할 텐데요.”
“흐음. 역시, 못 미더우신가 보군요. 만약 말씀하신 대로 한 번에 저자를 제압할 수 있다면, 이 하스팅의 개인 창고에서 원하는 걸 뭐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상급 관리자의 개인 창고라면…… 어지간한 상층의 보스들보다도 굉장한 보물들이 넘쳐난다.
“좋아요. 그 말. 꼭 책임지세요.”
하이신스가 핏빛을 머금은 레이피어를 뽑았다.
파츠측!
마력이 응집되며, 셰필티노 가문 특유의 전격 스킬이 점멸했다.
그런데.
“응?”
스킬을 발동하려던 하이신스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Lv?? ‘전뇌창(電雷槍)’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츠측! 츠……. 치칙!
눈부시게 빛나던 번개가 점점 잦아들었다.
마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다른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에게 막힌 것처럼.
하이신스의 능력이 봉인 당했다.
“너…… 방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능력이 존재하다니.
“그래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빌어먹을 인간 놈에게도 반드시 통할 거라고.”
하스팅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탑의 위대한 절대자들이시여. 마인 협회를 이끄는 원탁의 시작이자 마지막. ‘니체’라고 합니다.”
노인이 처음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코드네임 아서.
하지만, 그는 원탁을 상징하는 간부들 중 유일하게 코드 네임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니힐리즘’.
허무의 능력을 쓰는 자.
그의 주위에선 그 어떤 고유 능력과 스킬이라도 그 빛을 잃게 된다.
한 마디로.
모든 변수를 원천 봉쇄할 수 있는 능력자란 뜻이다.
“인간들이 지금쯤 제가 준비한 미끼를 물기 위해 섬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두 가주께선 이 자의 호위를 맡아 주시면 됩니다. 강진혁이든 엘리스든 능력이 봉인당한 채 순수 육신의 힘만을 사용하게 된다면, 닭 모가지 비트는 것보다 더 손쉽게 죽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가능……하겠죠.”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군요.”
하이신스와 엑센시온의 얼굴에도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