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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55화


55화. 3층의 끝, 심장 없는 군대 (1)

“아, 안…… 돼. 제발, 제발……!”

진혁은 절규하는 알렉스를 뒤로한 채 원형 극장의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굳이 최후까지 지켜볼 이유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후두둑!

쿠쿵!

마력 용해로의 여파로 인해 잔해들이 불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위협적이진 않지만,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싶진 않았다.

[Lv2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파츠츠츠!

진혁의 몸 주위로 둥그렇게 펼쳐진 얼음막.

눈꽃 문양이 그려진 얼음 방패가 낙석들을 튕겨냈다.

진혁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로 향했다.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워낙 육체‧정신적으로 큰 데미지를 입은 탓이다.

‘덕분에 추가 소득은 쏠쏠하게 올릴 수 있겠어.’

재난에 가까운 상황 속에 낙찰된 경매품을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바위 파편 아래 깔려 있는 175회차의 보물들. 이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진혁은 그 사이를 거닐며 느긋하게 파밍을 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구해 줬으니 당연히 이 정도 대가는 받아야지.’

오히려 너무 싸게 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목숨값을 겨우 몇 백 억 정도로 퉁쳐 줬으니까.

물론, 물에 빠진 걸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도 나올 순 있겠지만.

상관없다.

‘정신이 들었을 땐 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을 테니.’

무엇보다 기절해 있는데, 어느 놈이 범인인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기껏해야 이번 참사를 만든 마인 놈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일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룰루랄라.

진혁이 콧노래를 부르며 잔해를 뒤적였다.

꽤나 많은 보물들이 파손됐지만, 다행히 가장 좋은 것들은 무사했다.

‘완전히 보물 던전 안에 들어온 기분이군.’

이번 경매의 최고 인기품이었던 ‘어룡의 심장’과 ‘알 수 없는 철광석’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만든 금고’ 또한 손에 넣었다.

겸사겸사 엘리스가 출품했던 왕관도 다시 회수했고.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진혁은 품 안에 넣어 놨던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회랑에서 얻은 ‘아공간 인벤토리 조합서’였다.

레플리카나 탑 외에 존재하는 재료들로는 몇 십 톤 이상이 저장되는 플래티넘이나 다이아 등급까진 나오지 않겠지만,

‘당장 몸에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막아 줄 수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다.

[‘어룡의 심장(A)’, ‘알 수 없는 철광석(B)’, ‘미켈란젤로가 만든 금고(C)’가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용량 아공간 인벤토리(골드 등급 +5000kg) 조합에 성공하셨습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노란색을 띤 아공간 인벤토리가 나타났다.

드디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쑤셔 넣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스럭.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진혁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벌써 정신이든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잔해 더미에서 동그랗게 뜬 토끼눈과 마주쳤다.

어린 남자아이였다.

잔뜩 겁먹은, 그러면서 어딘지 모르게 동경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눈빛을 가진.

‘……애였나.’

진혁이 경계심을 풀었다.

“꺼내 줄 테니까 잠시만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네? 네.”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서걱!

푸른빛을 머금은 단검이 단숨에 잔해더미를 잘라 버렸다.

잘린 파편이 무너지는 각도까지 계산한 터라 남자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고, 고마워요. 형.”

“뭘, 이 정도 갖고.”

진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형이 그 괴물들이랑 나쁜 놈 해치워 준 거 맞죠?”

“응?”

“아까 정신을 잃기 전에 봤어요. 마치, 마블 영화에서처럼. 진짜로…… 진짜로 너무 멋있어요.”

마블 영화라.

타노스랑 싸우는 어벤저스 정도로 생각한 건가.

뭐, 애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수십 마리의 언데드를 쓸어버리는 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보였을 테니까.

“저도 언젠간 형 같은 강한 플레이어가 돼서 탑에 오르고 싶어요. 그래서 막, 나쁜 놈들이 사람들 죽일 때 히어로처럼 나타서 구해 주고…… 그렇고 싶고.”

으음.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살짝 낯 뜨겁긴 하네.

순수해서 그런지 감정 표현에 필터링이 없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덴 그 어떤 이해타산이나 가식이 섞여 있지 않았으니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피식 웃은 진혁이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깨어날 경우를 대비해 이제 그만 가 봐야 했다.

그전에 한 가지.

“음, 나중에 사람들이 누가 그랬는지 물으면, 비밀 지켜 줄 수 있어?”

진혁이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폈다.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히어로는 정체가 들통 나면 안 되니까!”

소년도 생긋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마주 댔다.

***

시련의 탑 3층엔 아직까지 플레이어들이 그 끝을 가보지 못한 장소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4층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3층의 보스 방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곳.

‘증오의 성당’이라 불리며, 수없이 많은 공격대들을 절망시킨 미궁이다.

하지만.

그 악명과 다르게 사실 이 미궁은 오래 전에 공략이 끝났었다.

바로 마인들에 의해서 말이다.

“젠장, 여기 보안 장치는 왜 이렇게 까다롭게 설치해 놓은 거야? 이러다가 우리까지 당하겠네.”

적발에 늘씬한 체구의 여자가 툴툴댔다.

말투에서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그야 그럴 수밖에.

플레이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겹겹이 설치해 둔 결계와 함정들.

거기에 수많은 고위 언데드 몬스터들은 이곳 지리에 익숙한 마인들조차 긴장을 놓을 수 없게 했다.

“쫑알쫑알 불평은 그만해라, 멜레나. 가뜩이나 그 멍청한 의사 놈 때문에 심기가 좋지 않으니까.”

멜레나의 옆에서 걷고 있던 동양계 남자가 혀를 찼다.

덩치가 크진 않지만, 몸에 풍기는 차가운 기운만큼은 대형 몬스터 못지않았다.

“리챠오. 내가 네 녀석 심기가 편한지 불편한지까지 신경 써 줘야 해?”

“그러는 게 좋을 거다. 죽고 싶지 않다면.”

“재밌네, 그 말. 마치 네놈이 나보다 강한 것처럼 보이잖아?”

멜레나 역시 리챠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당장 무기를 꺼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두 사람 다 거기까지만 해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검은 두건을 쓴 남자다.

멜리나와 리챠오와는 달리, 오른쪽 어깨에 붉은색 역십자 문양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로마 숫자 Ⅶ이 덧그려져 있었고.

“……알겠습니다.”

“쳇!”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두 사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멜레나와 리챠오는 탑 밖에서 벌써 10년 동안이나 함께 임무를 수행해 온 사이였지만, 언제나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하긴, 마인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는 것부터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종말론자들, 살인하기 위해 용병이 된 쾌락 살인마, 돈을 위해서라면 인간성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괴물 등.

법과 질서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었으니까.

“헌데, 아무리 알렉스의 실력이 떨어진다 해도 재물이 그렇게 많은 상황에서도 졌다는 게 이해되질 않습니다.”

리챠오가 입을 열었다.

“뭐, 강진혁이란 놈도 고인물 중 하나겠지. 그래 봤자 널려 있는 랭커들이랑 비슷비슷한 수준일 테지만.”

“방심하지 마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높은 곳까지 갔던 놈일 수도 있으니까.”

두건을 쓴 남자의 말에 두 사람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에이 설마. 간부들이 탑의 20층까지 간 것도 미친놈 취급 받았는데. 그것보다 높이 갔다고?”

“저도 조금 과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야 인터폴이나 CIA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일환으로 가상현실 세계인 [시련의 탑]을 골랐으니, 그나마 남들보다 탑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지만…….”

“맞아. 다른 놈들은 그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잖아? 짭새들 눈을 피해 가상현실 속으로 숨어들어갈 일 자체가 없을 테니까.”

[시련의 탑]이 출시된 지 11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3년도 안 돼 게임을 접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아무리 극악의 난이도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도 정도를 넘어선 것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나아지는 맛이라도 있어야 지겨움을 견디지.

목적도 없이 반복되는 따분함에 인생을 던져 버릴 멍청이가 있을 리가.

하지만 왜일까.

남자의 얼굴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자신을 마인 협회의 간부 자리까지 올라오게 만들어 준 직감이자 본능.

그리고 그걸 넘어선 두려움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냈다.

강진혁이란 놈을 결코 낮잡아봐선 안 된다고.

방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거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너희 둘이 캐드릭과 함께 가라.”

만에 하나 있을 가능성마저 짓밟으면 된다.

***

시련의 탑 3층의 마지막 관문.

4층으로 가는 유일한 길 앞에 진혁이 섰다.

“후우…….”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준비는 전부 끝났다.’

이유리에게 부탁했던 아이템들은 아공간 인벤토리에 전부 넣어 뒀고 몸의 컨디션과 마력도 최상의 상태로 만들었다.

남은 건, 보스전에 앞서 자신만의 방송 채널을 개설하는 것뿐.

‘미래를 생각하면 코인을 최대한 많이 모아 놔야 해.’

24시간 동안 가장 먼저 본 영상만 조회수가 카운팅된다는 조건 때문에 이 바닥은 곧 심각한 레드오션이 될 것이다.

잘 나가는 놈들은 코인을 쓸어 담을 수 있지만, 네임드가 아닌 플레이어는 백날 해도 조회수 10을 가져가기도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전에 자리를 잡아 놔야만 한다.

그리고 사다리를 걷어차야 한다.

경쟁자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오늘 하루만 좀 고생하자.’

이번 보스 레이드에서야 사람들의 어그로를 끌기 위해 방송을 켰지만, 진혁은 앞으로 가능한 한 생방송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를 내보내는 것은 여러 의미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첫 방송에서 모두에게 똑똑히 각인시킬 수만 있다면, 이후에는 동영상을 올리는 것으로 대체해도 충분해.’

그만큼 첫 번째를 잘 닦아 놓으면 이후가 편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채널명을 생각하던 진혁에게 갑자기 아프고 쓰린 기억이 떠올랐다.

‘티모 대령은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된다.

그 악몽에선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진혁이 손가락을 잘근 깨물었다.

시련의 탑에 관해서 그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딱 하나.

작명 센스만큼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질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고민하던 진혁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언노운(Unknown).”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

그러자.

[채널 이름을 ‘언노운(Unknown)’으로 하시겠습니까?]

확인을 묻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그래. 그걸로 할게.”

리바린토스 미궁을 클리어했을 때, 신상 보호를 위해 시스템은 언노운이라는 코드네임을 권했었다.

‘알려지지 않은 자’라는 뜻을 지닌 단어.

당시에는 아무래도 좋아서 그러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꽤나 마음에 드는 이름 같다.

‘실제로 가면 뒤에 정체를 숨긴다는 게 주요 콘셉트니까.’

[개인 채널이 만들어졌습니다!]

[채널명 ‘언노운(Unknown)’!]

[방송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실시간 스트리밍은 각 층의 보스몬스터와 싸울 경우에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BJ 등급: 일반 (수수료 90% 적용)

시청자 수: 0/1,000

구독자 수: 0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다 되네.”

과거에는 실시간 스트리밍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했다.

워낙에 [시련의 탑]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탓이었다.

사실상 인생에 있어 첫 생방송.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시련의 탑 3층 보스전: 오늘 방송 처음 킨 고인물이 어떻게 공략하는지 보여 드립니다.>

제목은 이렇게 걸어 두면 어그로는 충분히 끌 것 같고.

‘그럼, 이제 슬슬 가 볼까.’

진혁이 기하학 무늬가 새겨진 가면이 제대로 씌어졌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벅.

그리고 일렁이는 게이트 너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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