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96화
696화. 엘리스의 안식처 (2)
쏟아지는 달빛이 창을 통해 방 안을 비췄다.
순백의 침대에선 두 남녀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계약자….”
작은 목을 따라 넘어가는 침.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다.
소중한 이와 밀폐된 장소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건 엘리스가 바라고 바라던 로망 중 하나였다.
콩닥콩닥!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달콤하고 간질간질한 감정이 전신을 감쌌다.
오롯이 아타락시아의 부흥과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삶.
연애라는 것은 엘리스와는 인연이 없던 일이었다.
낯설고 생소하다 못해 어색해 죽을 것 같았지만, 이런 느낌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마, 말해보거라.”
이미 손자의 이름까지 정해둔 엘리스가 침대보를 작은 손으로 꼭 쥐었다.
영원 같은 1초가 흐르고.
진혁이 기다리던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이곳에 손님들을 좀 초대했거든. 이제와서 말하긴 살짝 미안한데, 그래도 이해해줄 거지?”
아!
때마침. 도착한 것 같다.
나름 음지에 숨어 있는 곳이라 좌표 전달이 어려웠는데, 북유럽의 헤임달이 유연하게 도와줘서 다행이다.
[새로운 세력이 아타락시아의 영지에 입성합니다.]
“이건 나중에 꼭 따로 챙겨주셔야 합니다. 이 만한 숫자를 옮기느라 나름대로 고생 많이 했거든요.”
다수의 마력이 성의 안 쪽에 나타났다.
요틀레암 협곡에 있던 정령왕과 정령수들이었다.
요마간토가 물러남에 따라 협곡 전체를 잠식했던 어둠은 사라졌지만, 구석구석 스며든 묘목의 마력은 단시간에 제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미안하군.”
“신세를 좀 질까 해서요.”
“하하하. 그 유명한 아타락시아의 성채라니 영광이오.”
탑의 난민(?)들이 머물만 한 장소가 필요했다.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순수한 탑의 마력이 가득한 장소로.
“이이이…이이이….”
엘리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전기뱀장어가 잔뜩 풀어져 있는 곳에 들어가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다.
“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데이트를 기다려 왔는데….”
[마력이 구현화됩니다.]
[성 전체에 펼쳐져 있던 결계가 무너집니다.]
서서히 생겨나는 붉은 고리.
콰차차창!
성 안에 있는 창문이 모조리 박살났다.
“히이익!”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레미아가 최대한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주일 간 단 둘이서만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잤었는데….”
쿠쿠쿠쿠쿠쿠!
무시무시한 살기다.
피로 이루어진 권역은 설령 아자토스라 해도 경계심을 갖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결계가 버틸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이 빛을 잃습니다.]
‘마 말도 안 돼.’
진혁이 박살나는 별자리를 바라봤다. 만약을 대비해 성 전체에 겹겹이 쳐둔 방어벽들이 유리성마냥 무너지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아, 아스가르드. 아니, 아무데나 괜찮으니까 빨리 날 보내줘!”
헤임달이 닥치는 대로 ‘비프로스트’로 가기 위한 게이트를 개방하려했다.
[북유럽의 안전을 위해 공간 이동이 거부되었습니다.]
단호한 붉은색 상태창과 함께 마지막으로 탈출할 수 있는 루트가 사라져버렸다.
“에, 엘리스?”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진심으로. 가진 고유성창과 능력들을 모조리 동원한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분노한 소녀를 이길 수 있다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개벽의 계시록 ‘로드 오브 엠페러’가 발동됩니다.]
완벽하게 개화한 선혈의 파도.
“죽어라. 그 사라져버린 눈치와 함께.”
쿠콰콰콰콰콰쾅!
개벽의 계시록이 성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
한 번의 폭풍이 지나갔다.
블랙 캐슬 전체에 진조의 분노가 몰아쳤지만, 다행히도 상상했던 최악의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 걸맞는 공물과 보상을 약속했던 덕분이었지.
“절대 이걸로 전부 용서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 으응. 이건 참 맛있구나.”
엘리스가 햄스터처럼 볼 안에 든 음식을 오물거렸다.
‘이세계 식당’으로 내놓은 각종 진미들.
그걸 진혁이 옆에서 한 입씩 떠먹여주는 게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 이후에는 피로 만든 강에서 박쥐 모양의 나룻배를 타고. 비명을 지르는 숲에서 산책을 하며, 마지막으로 초승달 아래에서 피를 빨리는 스파르타식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꽤나 험난한 하루를 보내긴 했으나 그래도 목숨 값에 비해서는 싸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정령왕들과 정령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마냥 나쁜 건 아니야.’
고생한 보람은 있다.
무엇보다 엘리스가 살던 곳에 왔다는 게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여기를 이렇게 편안하게 둘러보는 건 처음이지.’
블랙 캐슬은 30층대에서 가장 접근이 어려운 장소 중 하나. 엘리스의 허락이 없는 한 그 누구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는다.
난이도만 친다면 최상급 유적에 버금간다는 소리다.
당연히 접점이 없던 과거에는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굳이 그 커다란 리스크를 감수하고 진조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 엘리스와의 친분을 쌓게 되었고. 덕분에 예전에는 하지 못 했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시련의 탑이 재밌다.
아직까지 하지 못한 컨텐츠가 널려 있었으니.
‘짬이 난 김에 밀렸던 결산이나 한 번 해볼까.’
잘먹고 잘 논 엘리스는 지금 침실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고. 협곡에서 온 난민들 역시 기나긴 여정의 여독을 풀고 있느라 바빴다.
이제야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진혁이 개인 상태창과 아공간 인벤토리를 동시에 오픈했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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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혁
성별: 남
레벨: 356
힘 125 민첩 140 체력 198 마력 809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78 정기 510.22
보유한 스탯 포인트: 33
보유한 코인: 112,557,189
직업: 룬의 지배자
고유 성창: 고유성창의 내용이 너무 많아 ‘접어두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고유 능력: 고유능력의 내용이 너무 많아 ‘접어두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스킬: 스킬의 내용이 너무 많아 ‘접어두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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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투를 치르며 올린 레벨은 무려 11.
현재 레벨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많은 경험치를 획득한 셈이었다.
‘그래도 요마간토의 숨통을 끊지 못한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네.’
태고의 존재 중 하나를 사냥하는데 성공했으면 훨씬 더 많은 경험치와 보상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을 달랠 정도로 차고 넘치는 다양한 보상들을 획득했다.
‘일단 스탯부터 배분해볼까.’
어떤 거에 투자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력 809 → 829로 상승합니다.]
[힘이 125 → 138로 상승합니다.]
우우웅!
따스한 힘이 전신을 타고 퍼져나갔다.
몸에 있는 근육이 더욱 선명해지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도 한 층 더 안정화되었다.
이후에 있을 에덴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거점의 완성도.
‘미궁창조’를 자유자재로 이용하고 거기에 메드레이로부터 복사한 ‘레인보우 브릿지’까지 사용하려면 아무래도 마력 스탯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힘 역시 이번에 보충해줌으로써 전체적인 밸런스에도 신경을 썼다.
다음은….
기대하고 기대하던 아이템들을 확인할 시간!
스탯을 올리는 것도 심장이 뛰긴 했으나 역시나 가장 짜릿한 건 손에 남는 물건이었다.
[회색 원념의 지팡이]
입수난이도: SSS
마법 공격력: 88,000
내용: 클레망스가 사용했던 다른 차원의 마도구로 모든 흑마법 스킬의 숙련도를 +20% 만큼 상승시켜줍니다. 또한 이 흑마법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할 경우 클레망스가 있던 차원의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의 뿌리 100g]
입수난이도: 측정불가
내용: 아자토스의 궁전에서 자라는 식물. 보라색 산소를 뿜어내는 묘목은 대상을 오염시키거나 혹은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요마간토의 불꽃 조각(재료형)]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아우터 갓 중 하나인 요마간토의 겁화. 꺼지지 않는 불꽃은 노린 대상을 완전히 불태워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스윙뱃의 리더인 잭 이든이 사용했던 방어구와 다양한 종류의 마정석과 부산물 등을 손에 넣었다.
개별적으로만 놓고 봐도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아이템들이다.
하지만 진혁이 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퍼스트 블레이드를 한 번 업그레이드 해줄 필요가 있어.’
특수 강화.
태고의 힘과 다른 차원의 아이템을 재료삼아 지금의 성능을 대폭 올릴 것이다. 이후에 있을 더욱 거대한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진혁의 머릿속에 차근차근 계획들이 정리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자 대략적인 청사진이 그려졌다.
진혁의 눈빛이 한 단계 더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가장 중요하고 신중해야 했기 때문.
진혁이 ‘패도의 왕관’과 ‘신속의 왕관’과 함께 아공간 가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금서를 꺼냈다.
파츠츠…!
녹색과 보라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곤충이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네크로노미콘.
입수난이도: 문자로 표현할 수 없음.
내용: 이 안에는 50층에 관한 온갖 종류의 정보와 그에 대한 해석, 마지막으로 추측과 가정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단, 특별한 언어와 암호들로 씌어졌기에 해석에 매우 정교한 접근이 요구됩니다.
50층을 공략할 수 있는 온갖 정보가 적힌 책.
아직까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베일에 쌓여 있는 비밀 덩어리다.
‘험난한 여정이 되겠네. 내가 습득한 경험도 전체에 비하면 30%도 채 되지 않을 테니까.’
진혁 역시 50층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극한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50층의 특성상 기존의 정보가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거라는 보장 역시 없었다.
따라서.
이걸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상 정복의 성패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
‘별들의 전쟁’이란 세기의 이벤트가 개최되기 하루 전.
전 세계 모든 언론과 메스컴이 미국으로 쏠렸다.
-동시 시청자 수 약 10억 8560만 이상이 예상되는 가운데, 대형 길드와 솔로 랭커들이 전부 미국에 모이고 있습니다.
– G20을 대표하는 외교관과 수행원들은 현재….
– 역대 최대 규모로 지어진 종합 경기장에선 모든 준비를 끝마친 채 선수들이 입장하길….
이미 일주일 전부터 TV와 인터넷에선 하루종일 이 일만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 이벤트는 탑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한 옥석을 가려내는 자리.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일에 반응이 뜨거운 건 당연한 순리리라.
그리고.
그 최고의 무대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각 나라와 길드들은 그야말로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아주 유명한 면면들이 죄다 모였군.”
“그러게 말입니다. 일전에 유적 공략 때도 이 정도 멤버가 전부 모이진 않았는데 말이죠.”
러시아의 랭커 이반코비치와 유럽 연합에 소속된 랭커 키요프였다.
갈수록 상향화되는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더욱 정밀하게 구분짓기 위해 S급 위로 SS급과 SSS급. 그 위에 전 세계에 5명 뿐인 EX급이 추가되었다.
주신급과 직속 계약을 맺은 규격 외 강자.
홀로 유적과 미궁 공략이 가능한 괴물들이 EX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반코비치와 키요프는 최근에 S급에서 SS급으로 승급한 강자들이었다.
한창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싶을 시기.
그렇기에 적당한 먹잇감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기회만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저벅.
익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유천영.
다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기둥인 늙은 호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