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04화
804화. 심연에 갇힌 옛 동료들
이질적인 광경.
진혁이 도착한 곳은 생소하게 생긴 철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페르무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곳이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적..은 아닌 것 같은데….”
적호를 비롯한 십이지의 장로들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유적’이라는 특수 공간은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다. 그런데 그런 필수 과정을 완전히 건너뛰어버릴 줄이야.
게다가 유적의 보스 몬스터를 비롯해 이 일대에 있는 인원 전체를 옮겨버리는 건 듣도보도 못한 일이었다.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온 것이냐!?”
아트리사 역시 진혁에게 따져물었다.
아무리 2차 산업 혁명인지 뭔지를 위해 잠자코 따르기로 한 상태라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었다.
“폐하의 질문에 답해라!”
“무슨 생각이길래…”
친위대에 속하는 놈들 역시 이미 ‘블레이드 어머’를 발현시켜 전투준비를 끝내두었다.
명령이 떨어진다면 그 즉시 움직일 기세로.
하지만.
“에이. 우리가 동고동락한 세월이 얼만데 또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무렴, 제가 이상한 함정을 파서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라도 할까 봐요?” 진혁은 제대로 된 목적지에 왔다는 듯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계속해서 찾았던 장소.
49층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업 중 하나를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감옥…인가?”
진혁의 대답을 대신해서 페르무트가 중얼거렸다.
얽히고설킨 철과 룬어가 새겨진 장벽들은 안에 있는 무언가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둔 게 틀림없었다.
이야. 그래도 대마도사라고 보는 눈이 조금 다르긴 다르네.
“맞아. 여긴 감옥이야. 그것도 굉장히 꽁꽁 숨겨진..
정확히는 일전에 남자에게 패해 붙잡힌 상위 신격들이 감금되어 있는 곳이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시야와 후각을 마비시키는 끔찍한 냄새.
끔찍한 악몽이 영겁도록 이어진다.
매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해서.
“쿨럭.”
“끄으으… 으아아아악! 죽여줘. 차라리 죽여달라구!”
“정신 차려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동생아!”
아폴론이 흰자를 드러내 보이는 아르테미스를 향해 고함쳤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붙잡아주려고 해도 이 끝없는 절망으로부터 도망칠 순 없었다. 격려나 응원 따위 역시 당연히 아무 의미가 없었고. 이 감옥 에서는 꺾이지 않는 신념을 가진 자라도 결국엔 무너지게 되어 있었으니까.
“끝・・・이다. 우리는.”
크로노스 역시 모든 걸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모든 능력이 봉인당하고 육체마저 쇠약하진 지금. 자력으로 탈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혹시 누군가 구해주려 와준다면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도와주러 온다고! 대체 누가 말이냐!”
가브리엘의 말을, 단박에 로키가 잘라내었다.
이질적인 공간.
이질적인 냄새.
이질적인 마력.
이런 곳은 탑의 어디에서도 듣도보도 못 했다.
평범한 층계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감옥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외부인이 이곳에 올 수 있다는 말인가?
글쎄. 이건 내 직감이긴 한데, 한 명 정도는 그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희망고문이라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의견이니 참고만 하도록.”
가장 안쪽에 묶여 있는 이가 입을 열었다.
마계의 마왕 ‘베리엘’이었다.
“지옥의 박쥐 주제에 예언까지 하는군. 이런 곳에 오래 처박혀 있다보니 노망이라도 들은 게냐? 네 녀석의 개인적인 의견 따위는 궁금하지 않으니 혼잣말이라면 벽이나 보고 하려무나.”
“호오. 사막의 귀여운 댕댕이야 말로 개껌이 없으니 똥이라도 쑤셔넣었나, 입이 아주 거칠어졌네. 어디, 간만에 몽둥이 맛이라도 좀 보겠느냐?”
“크하하하! 당장 오거라. 그 골통째로 씹어 삼켜줄 테니.”
베리엘과 아누비스는 이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그나마 아직까지 기가 살아 있는 건 이곳에서 이 둘 뿐이었다.
그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제 아무리 정신적으로 초월자의 경지에 이른 신들이라도. 희망을 박탈당했다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은 견디기 어려웠으니까.
시끄러운 잠깐이 지나가고 다시 한 번 지독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콰아앙!
굉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바깥 세계의 광휘였다.
동시에.
“다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샤워부터 좀 하셔야겠어요. 아주 냄새가 어우.
모두가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음성이 울려퍼졌다.
진혁이었다.
“하하하! 그래서 말했잖느냐! 저 인간이라면 반드시 구하러 올 거라고! 이곳이 어디든 간에 어떻게든 찾아낼 거라고!”
베리엘이 가장 크게 고함을 질렀다.
내 말이 맞지? 내 말이 맞지? 라고 잔뜩 신이난 어린아이처럼 까르륵 대면서.
“시끄럽다! 애송이 마왕아. 나 역시 그럴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느니라.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리 시끄럽게 앵앵대는지 쯧. 그나저나 반갑다!”
젠장할. 네놈이 이토록 보고 싶을 줄이야.” 아누비스 역시 반색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으음. 뭔가 아누비스의 뒤에 있는 꼬리가 고속으로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베리엘도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긴 한데.
저건 못 본 척 해주도록 하자.
녀석들에게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고대 결계’가 발동됩니다!]
[‘시스템 조작’이 발동됩니다!]
결계와 조작을 통해 감옥에 걸려 있는 저주와 제약을 거둬낸다.
그리고.
[‘빙하천결’이 발동됩니다!]
쩌저적…!
혹한의 냉기와.
[‘태초의 불꽃’이 발동됩니다!]
화르륵!
뜨거운 겁화를 통한 온도차로 철의 결속을 박살낸다.
파카아앙!
신격들을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좋아.’
진혁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신격들을 보며 입술을 살포시 깨물었다.
이 층계에 와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을 처리한 순간이다.
‘나도 여기 찾는데 애를 좀 먹긴 했지.’
49.5층.
49층과 50층 사이에 위치한 히든 플레이스는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가장 비밀스러운 이스터 에그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운영자들도 쉽게 찾지 못 했던 것이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하하. 신화를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마.”
모든 신격들이 진혁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상층부에 소속된 거대 세력이 당신에게 강한 호감을 느낍니다.]
[호감도 수치가 최대치로 상승합니다.]
[이제 어지간한 이들은 당신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게 될 겁니다.]
뭐랄까, 자발적으로 머리를 숙이게 된 것까지는 좋긴 한데.
당장 전력으로 써먹기엔 여러 가지로 아쉽다.
워낙에 혹독한 수감생활을 한 탓에 몸들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아.
그걸 위해 준비해둔 게 있었으니까.
“크흠! 큼! 자자. 다들 들어보세요. 쇠약해진 여러분을 위해 제가 가지고 온 게 있습니다! 둘이 먹다가 옆에 있는 친구의 뚝배기를 깨고 빼앗아버릴 지도 모르는 효능! 지금 가장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이 강진혁이가 왔습니다!”
넥타르나 암브로시아 보다도 더 좋은.
영양좋고 맛도 좋은 최고의 음료!
천도복숭아 과즙!
최고의 재료를 완벽한 공정을 통해 만들어낸 완성품이 바로 그 주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공짜는 아니다.
[노예 계약권.]
반발이 심할 것을 염두해 1회짜리라는 조항을 덧붙여 두긴 했다.
그래도 노예 계약권은 엄연한 노예 계약권.
‘호감도가 최대로 도달해봤자 어지간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아.’
불구덩이로 뛰어들라든가.
대대로 내려오는 성유물을 내놓으라든가.
기타 등등.
무리한 요구는 웃는 얼굴로 거절할 게 뻔히 보이는데, 그렇다면 호감도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이 세상은 원래 피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
“싫으시면 강매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고블린이랑 1:1을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그 몸으로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다면….”
글쎄.
신실한 친구로서 조언하건데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악마… 같은 놈.”
“이런 상황을 이용해 약점을 쥐고 협박하다니.”
예예. 마음껏 욕을 하십쇼.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결국.
모두가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놔라. 내놓으란 말이다!”
“크하하하! 역시 이래야 내가 고른 사도답… 응? 이 계약서는 뭐냐? 나도 쓰라는 건 아니겠지?”
“멍청한 악마놈 뒤통수를 맞는 꼴이 아주 속이 다 시원하구나. 그러기에 나처럼 고대종의 알이라도 주면서 끈끈한 신뢰를 쌓아・・・ 응? 나도? 진심이냐? 어이, 인간!”
베리엘과 아누비스까지 사인을 하고 나서야 일이 일단락됐다.
꿀꺽.
벌컥벌컥!
농밀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러자.
[격(格)이 회복됩니다!]
쿠쿠쿠쿠쿠!
일전에 가지고 있던.
아니.
그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최상의 에너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릇을 확장시켜버린 결과였다.
반면.
“이럴 수가….”
“빌・・・어먹을.”
이걸 지켜보고 있던 페르무트와 적호의 입에선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 중에서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기 때문.
갑옷 꿀벌들만으로도 목숨을 걸고 덤벼야 하는 괴물들인데.
거기에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신격들까지 모조리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진혁이 손가락 관절을 우드득 꺾었다.
***
같은 시각.
화과산에 있는 이들은 쏟아지는 과타노차의 폭격을 정면으로 견뎌야만 했다.
분신들을 통해 산 전체를 방어하고 있었지만,
[남은 시간 OH: 1M: 33S]
줄어드는 시간.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견디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적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일격필살의 한 방을 날려야만 비로소 의미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남은 시간 OH: OM: 58S]
콰콰콰콰콰콰콰!
날아오는 빛줄기를 8조각으로 쪼갠 제천대성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건 쉽지 않다.
상대는 평범한 적이 아닌, 태고의 상위 신격.
그것도 자신의 모든 걸로 덤벼오는 중이었다.
결코 허술하게 틈을 내어줄 리가 만무하다는 소리다.
“이 싸움도 끝이 보이는군. 지긋지긋한 원숭이 놈아.”
과타노차가 승리를 확신한 듯 말을 내뱉었다.
제천대성의 마력은 그 누가 보더라도 절정을지나 마지막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래.
그 말대로다.
이제 1분 남짓한 시간이면 싸움의 승패가 가려지게 될 것이다.
거대한 이변이라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사박.
제천대성의 옆에 누군가 다가왔다.
[절대주 ‘천축(天竺)의 끝’이 발동됩니다!]
바닥에 새겨진 고대 언어들로부터 은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스승…님?”
제천대성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순수한 백색의 빛.
“미안하구나.”
삼장법사가 생긋 웃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서유기.
수없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회자되어 오는 서사시.
고작해야 1초 남짓한 순간이다. 그 세계에 기록되어 있던 글자들이 떠오르고 부서지며, 소중한 제자를 위한 삼장법사의 진언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폭격들 사이로 하나뿐인 길이 만들어졌다.
슬퍼할 시간도.
이유를 물을 여유도 없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그저 이 기회를 살려야만 한다.
“우와아아악!”
제천대성의 여의봉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뻗어나갔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일격.
일점을 향해
투콰아아앙!
과타노차의 영혼석이 있는 부분과 그대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