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10화
810화. 전후 처리 그리고 마지막 휴식 (1)
우득! 콰드득!
핵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솟구쳤던 검은색 손아귀들 역시 지면으로 녹아들었다.
당연히.
“커억. 컥….”
거점군주의 역할을 맡고 있던 바르어비스 역시 땅거미의 술식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노스・・・이디크 님.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면서도 살고 싶다는 갈망은 포기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안 됐지만, 그 녀석은 널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진혁이 바닥에 꽂힌 퍼스트 블레이드를 회수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째서…지?”
“이미 아까 전에 이 층계에서 자취를 감췄거든. 싸움을 포기하고 놈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도망쳤다고 봐야겠지.”
분명 끝까지 격렬하게 싸울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포기가 빠르다.
복잡한 수읽기 끝에 자신들이 패배하는 경우의 수를 도출했거나.
혹은.
이곳에 온 다른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이겠지.
어느 쪽이 됐든 간에 찜찜한 구석이 남았다.
“뭐, 뭐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분께서 어찌 그런… 결정을….”
바르어비스의 얼굴이 더욱더 절망으로 얼룩졌다.
진혁이 하는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노스이디크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진혁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없다.
믿고 의지하던 단 하나의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
그 절망감이 이성의 끈을 완전히 끊어놨다.
“크아아아…끄아아아아아!”
“많이 원망스럽나 보네.”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셀 수 없이 많은 세월을 믿고 따라온 자가 날 버렸는데!”
이야, 목청 봐라?
아주 감정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있네.
이 정도면 충분히 딜을 해볼 만할 것 같다.
“그럼, 말만 해대지 말고. 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게 도와줘.’
틴달로스의 사냥개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쇠사슬’
보통은 구속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단 하나, 예외적인 게 있다,
‘바르어비스라면 알고 있을 테지.’
노스이디크의 허를 찌를 수 있는 성유물이며, 몇 안 되는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희귀 재료.
어떤 식으로든 손에 넣긴 해야 했는데, 복잡하고 위험한 길을 단 번에 주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파츠츠…….
바르어비스의 하반신이 완전히 사라졌다.
상반신도 어느새 가슴 위쪽 부분밖에 남지 않았다.
“끝까지 미친… 인간이로군.”
아무리 그래도 이 순간에까지 비수를 꽂으라고 강요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어도 보통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이것이 굴종과 노력의 대가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노스이디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봐야겠다.
그래야만 이분이 조금은 풀릴 것만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재밌는 사실 하나도 전해주지.”
바르어비스가 킥킥대며 진혁의 귀에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순간.
“……뭐?”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들은 것마냥 진혁의 표정이 평정심을 잃었다.
“잘 해봐라. 너라면…가능할지도 모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바르어비스의 몸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띠링!
띠링!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시련의 탑 최후의 층계로 가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놀랄 만한 대사건은 내일 하루 ‘명예의 전당’에 등재됩니다!]
워낙에 굵직한 전투에서 승리하고 거점군주까지 쓰러뜨린 터라 막대한 보상과 레벨업이 뒤따랐다.
보상 역시 기존의 올라버린 역치를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굉장한 것들이 쏟아졌다.
[바르어비스로부터 ‘검은파리 담즙’을 획득했습니다!]
[‘땅거미 그림자의 스킬서’를 획득했습니다!]
[보라색 등급 – ‘미확인 보물상자(측정불가)’를 획득했습니다!]
[…………를 획득했습니다!]
풀썩.
다리에 힘이 풀린 진혁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이제야 비로소 참았던 숨이 흘러나왔다.
태산처럼 거대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90일 안에 마지막 층계를 정복하십시오.]
익숙한 문구가 떠올랐다.
이미 수십 번을 봤던 메시지이지만 지금까지와는 글자에 담긴 의미와 무게가 완전히 달랐다.
[실패 시 인류는 멸망합니다!]
드디어 마지막이다.
***
49층 정복.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컸다.
했으니까. 태고의 존재들이 마지막 보루로 삼던 최종 방위선이 돌파되었다는 뜻이며, 동시에 인류에게 멸망을 막을 마지막 90일이 주어졌다는 의미기도
당연히 기존에 공략했던 층계들과는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플레이어 ‘언노운.’ 49층 정복!]
[명예의 전당 최다 조회수 갱신!]
[전 세계 대형 길드와 각국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 해. 무능한 집단에 대한 비판이 쇄도하는 중.]
당연히 현대에 있는 이들 역시도 이 대사건에 대해 집중 조명하며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다.
하지만, 일전에 니알라토텝의 계략에 당해 주요 전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길드들로서는, 대중들에게 속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허수아비처럼 그저 명맥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는 고인물 코퍼레이션은 현재 아직까지 49층에 남아 있었다.
마지막 전투 이후 정확히 24시간이 지난 시점.
진혁은 그 시간 동안 전후 처리를 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저기 벌려놓은 게 많은 데다 부상자도 속출했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함께 싸워서 영광이었다. 부디, 우리를 50층으로 인도해주겠다는 약속. 꼭 지키길 바란다.”
아트리사와 갑옷 꿀벌들이 가장 먼저 원래 있던 유적으로 돌아갔다.
앞으로도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 받기로 했으니 적절한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다음은 십이지들 쪽.
“그런 거였다니.”
“노스이디크가 우리를 속였다는 건가.”
“하아. 정말이지. 전혀 예상도 하지 못 했어요.”
아니 이 양반들아. 그러니까 싸우는 내내 계속 말했잖아.
너네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고.
당시에는 바로 옆에서 확성기를 대고 알려줘도 ‘응~ 아니야’를 시전하며 눈과 귀를 가리더니… 쯧.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어쨌든 그 원흉도 물러갔고, 일도 잘 해결됐으니 우리 모두가 승리한 거라고 생각하자고!”
“크하하하!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는 건 우리 ‘왕’들이나 가능한 아량이지.”
“그럼그럼. 괜히 다른 놈들도 아니고 우리 십이지가 49층을 지배하고 있던 거겠어?”
지들끼리 합리화하고 이해하고 으쌰으쌰하는 꼴을 보자니 욕설이 절로 튀어나온다.
그래도 참자.
나름 50층 공략에 필요한 소중한 노예들인데,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게 냅둬야지.
그래그래 결과는 좋으니 다들 한잔해라.
‘무진룡이랑 우마왕・・・ 너희 둘은 특히 아오지탄광이 천국으로 느껴질 정도로 골수까지 뽑아먹을 테니까.’
진혁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곳엔 어느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삼장법사와 제천대성이 있었다.
“스승님!”
“후후. 우리 울보 제자는 또 울고 있구나.”
진실을 알게 된 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마왕은 덤이었다.
“다들 잘 듣거라. 내가 말이야 응? 그때 똬아아! 막 달려가지고 으라챠아아! 해서 이 싸움을 끝내버렸다니까?”
“오오오!”
“우리 대왕님이 드디어 한 건 하신 겁니까?”
“오늘은 근사한 당근으로 연회를 준비해야겠군요!”
무용담을 늘어놓은 청하의 표정도 꽤나 밝았다.
이번 전투에 있어 제천대성과 함께 가장 큰 공을 세웠으니, 앞으로 십이지들 사이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하늘을 나는 지렁이는?”
“걔는 아까 무진룡인지 뭔지 하는 놈하고 같이 가버렸느니라. 흥! 그래도 그 녀석은 어디서 뭘 하는지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었나 보구나. 짐은찾지도 않았으면서.”
진혁의 질문에, 옆에 있던 엘리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잔뜩 심술이 난 걸 보니 다른 애들한테만 신경 쓰느라고 삐진 게 틀림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몇 시간 안에 정리하고 탑 밖으로 나갈 거니까. 그때 네가 하고 싶은 거 같이 해줄게.”
“치킨.”
“응?”
“상위 5개 브랜드 치킨 종류별로 다 갖다 바쳐야 한다. 생맥주도 무제한으로 해서.”
“치킨에 맥주 받고 피자랑 스테이크까지 얹어줄게.”
“약속한 것이니라?”
“물론.”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입가에 침이 잔뜩 고이는 걸 보니, 이 녀석은 언제나 단순해서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때.
“잡아 왔다.”
“소금 호수의 웅덩이 가장 밑바닥에 숨어 있어서 찾기가 좀 힘들었지. 마력은 다 바닥난 주제에 숨바꼭질 하나는 일품이더군.”
진혁과 엘리스 앞에 베리엘과 아누비스가 나타났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발악하고 있는 것은 페르무트.
남자라는 놈을 따르는 충실한 수하이자, 전대 ‘절망의 왕관’의 소유자였다.
왕관에서 흘러나오는 저주의 기운으로 인해 난이도가 못해도 2배는 올랐을 터.
이 저주를 해소하는 것에 여러 방법이 있긴 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전대 주인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티본.”
“달그락! 알겠다. 마스터!”
티본이 즉시 거대한 솥을 끌고 왔다.
솥 안에는 하얀 액체가 보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오룬이 직접 만든 솥으로, 심신을 안정시키고 노곤노곤하게 만들어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뽑아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풍덩!
솥 안에 들어간 페르무트가 더욱 거칠게 반항했다.
“빌어먹을! 이 쓰레기 같은 인간 놈이. 이런 수치를 받으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차라리 그냥 죽여라!”
“응? 누가 그래? 너를 죽인다고?”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중한 저주 치료제를 죽이다니.
안 됐지만, 이 몸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없다.
푹 고아져라.
사골로 만들어서 두고두고 흡수해야 하니까.
“개 같은 놈아. 저주 따위는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풀 수 있으니까. 그만 나에게 안식을 달란 말이다!”
“흐음.”
페르무트의 애처로운 절규에 진혁이 턱을 쓰다듬었다.
뭐, 협박을 하는 건 이쯤이면 될까?
사실, 기를 쓰며 이 녀석을 잡은 데에는 저주 치료제뿐 아니라,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네가 가지고 있는 ‘등불’을 넘겨.”
진혁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
50층의 생명체들을 조종할 수 있는 무려 아자토스가 가지고 있던 성유물.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필수 성유물이었다. 이곳에서 존재하는 보상 중에서 가장 먹음직스러운 걸 고르자면, 단언코 페르무트가 가지고 있는 등불이 맨 꼭대기에 위치할 것이다.
문제는.
‘저기에 걸려 있는 제약이지.’
특수 귀속 형태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기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습득이 불가능하다.
-오롯이 기존 주인의 자의적인 ‘양도’에 의해서만 소유권이 이전됩니다.
만에 하나 이 녀석을 소멸시켰더라면 등불은 원래 주인인 아자토스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일종의 안전장치인 셈이지.’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모르고 있었더라면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게 분명했다.
페르무트의 안광이 붉게 타올랐다.
이미 중요한 임무에 실패한 이상 자신에게 미래는 없을 터.
계속 버틴다고 해봤자 영원히 저 솥에 갇혀 끓는 뼈다귀 신세가 될 게 뻔했다.
・・・・・・ 고민은 길지 않았다.
희망 따위는 49층이 공략된 시점에서 전부 사라졌으니까.
“그것만 넘겨주면… 되는 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진 않겠지?”
“누구와는 달리 난 한 번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성격이라서.”
“알겠다. 그만 내게 안식을 다오.”
[특수 성유물 ‘죽음을 불러 모으는 등불’이 새로운 주인에게 귀속됩니다!]
좋아.
이걸로 49층에서 얻어야 할 마지막 퍼즐까지 손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