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25화
825화. 모멸의 사원 (6)
거울을 보듯 마주한 적들.
똑같은 외모와 마력을 가진 존재들이 주는 이질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계, 계약자!”
“진혁 씨.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혼돈! 파괴! 가 아니라… 아악! 자꾸 저 멍청한 분신의 말투에 중독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저도.”
엘리스와 테레사, 페시스가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절규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젠장.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분신은 없다는 점이네.’
이레귤러라는 특성 탓에, 그것까지 복제해내는 덴 실패한 모양.
만약 이쪽의 분신 역시 똑같은 스펙으로 나왔더라면 그건 정말로 최악의 상황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흐음. 의외로군. 그분들 외에도 내 능력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자가 존재할 줄이야.”
매버릭도 뜻밖이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미 주력급에 해당하는 이들을 모두 복제한 상태. 거기에 ‘태고의 등가교환’으로 인해 지금까지 불리한 상황을 완전히 메꿀 수 있는 이점들을 손에 넣었다.
예를 들어.
“그라라라라라!”
“췌에에엑!”
삼두사(三頭蛇).
16성급에 이르는 생태계 상위종으로, 세 개의 머리에선 독과 불 그리고 냉기를 각각 뿜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태고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백사족’이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집어삼켜라.”
매버릭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걸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화르륵!
콰콰콰콰콰콰!
불과 얼음이 시작을 알렸다.
[테레사가 ‘천상의 성호’를 발동합니다!]
“어림없습니다!”
테레사의 호령과 함께 지면에서 황금빛 십자가가 솟구쳤다.
“글쎄. 아닐걸?”
거울로 투영된 테레사가 즉시 양손에 마력을 배열했다.
[적그리스도 ‘역십자의 증표’가 발동됩니다!]
황금빛 십자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군데군데 균열이 일어났다.
파츠측!
그리고 그대로 가루가 되어 박살 나 버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 간단하게…”
배시시 웃는 미소.
“너처럼 순진해 빠진 애의 패턴을 분석하는 건 식은 죽 먹기거든. 나랑 제대로 놀려면 너 말고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인격을 끄집어내야 할 거야.”
분명, 테레사인데 테레사가 아니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고 원초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마치, 기존의 인격과 타락한 인격이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바보 성녀를 건들지 말거라. 오직 짐만이 구박할 수 있는 법이니까.”
엘리스의 주위로 붉은 꼬챙이와 날카로운 작살들이 만들어졌다.
블러드 스피어즈와 블라디미르의 작살이다.
“그놈의 짐이라는 호칭은 좀 집어치우면 안 될까? 내가 하는 말이지만, 꽤나 오글거려서 말이야. 게다가 자기 남자 하나 못 채가는 겁쟁이 꼬맹이가 누굴 지키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완전 코미디네.”
“누, 누가 자기 남자 하나 못 채간다는 거냐!”
“너. 아니 나라고 해야 하나? 아니, 아니지. 지금의 나라면 강진혁쯤이야 그냥 대놓고 한입에 먹어치웠을 거야.”
투영된 엘리스가 진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죽어!”
엘리스의 고함과 함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구들이 일제히 폭사되었다.
콰콰콰콰콰콰쾅!
무수히 많은 흉기들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작살이 부서지고 꼬챙이들이 반토막이 난다.
붉은 파편과 피어오르는 불꽃들이 온 시야를 물들였다.
[‘블러드 익스플로젼’이 발동됩니다!]
[‘만월의 주인’ – ‘적색 성채’가 발동됩니다!]
온갖 종류의 광역기와 대규모 섬멸기가 뒤섞였다.
아주 둘이서 전쟁이라도 치르는 수준.
말려들었다간 그야말로 뼈도 제대로 추리지 못할 것이다.
“일단, 안전한 곳을 확보해 두겠습니다.”
“하하! 안전! 어림! 없지! 방해! 훼방! 그리고 평화!”
페시스와 낱말에 미친 페시스가 능력을 발동했다.
안전한 길과 불안전한 길이 뒤엉켰고, 활로와 사로가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겹겹이 겹쳤다.
거의 호각.
아니, 완전히 본능을 해방한 투영체들이 전체적으로 앞선다.
거기에 삼두사들이 미친 듯이 날뛰어대는 탓에, 플레이어들을 지키기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진혁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쳤다.
가만.
분명 퀘스트에서는………
-현재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살려 제단이 있는 방까지 데리고 가십시오. 당신이 보스 방 안에 입장했을 때를 기준으로 삼습니다.(메인)
그래, 분명 그렇게 설명되어 있었다.
반드시 전원이 저 제단이 있는 보스 방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콰앙!
진혁이 자리를 박찼다.
삼두사들이 즉각 반응했다.
“웨에에엑!”
“촤라라랏!”
찐득찐득한 독액과 불이 뒤섞여 쏟아졌다.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의 광범위 공격.
“지금!”
진혁의 고함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이들이 개입했다.
“저 인간을 보호해라.”
“예!”
아트리사와 친위대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특수 스킬 ‘황제를 위한 진형’이 발동됩니다!]
[지정된 1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량이 50%만큼 감소됩니다!]
밀랍으로 만든 방패가 진혁의 머리 위를 덮었다.
중무장한 중갑병들의 철통같은 호위!
무려 절반의 피해량을 신경 쓰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탓.
진혁의 발이 제단이 있는 곳에 닿았다.
동시에.
[첫 번째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달콤한 과실이 몸속에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두근!
유독 크게 들리는 심장 소리.
눈에 맺힌 마력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졌다.
보인다.
‘잃어버린 언어 파편’이 습득됨에 따라 매버릭이 펼쳐둔 온갖 능력과 함정들의 구조와 흐름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성과다.
분명, 완전한 언어가 아닌, 일부만을 습득했음에도 이 정도라면. 완전히 모든 언어를 습득했을 때 보일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좋아’
진혁이 곧바로 네크로노미콘을 꺼내들었다.
일부밖에 해석할 수 없던 금서.
촤르르륵!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며 원하는 페이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
“하?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
콧방귀를 뀌며 비웃던 매버릭의 말은….
[고유성창 ‘욕망의 투영화’가 훼손됩니다.]
[시전자의 절대 결속이 끊어졌습니다.]
[투영화로 만들어진 인격들은 더 이상 ‘칼 매버릭’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다음을 기점으로 완전히 끝을 맺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
그런.
말도 안 되는.
연결되어 있는 마력의 실들이 전부 절단 나다니. 고유성창에 이런 식으로 개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이다!
허나, 아무리 부정해봐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마저 아니라고 외칠 순 없었다.
“뭐야, 더 이상 저 바보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거야?”
“흐응.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찾게 된 건가.”
“자유! 평화! 피스! 좋아!”
세 명의 눈빛이 변했다.
충성이 아닌 강제적인 계약에 얽매여 있는 관계. 당연히 매버릭에게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 따윈 없었다.
“안…돼! 막아라! 절대 제단에 닿게 해서는 안 된다!”
가장 거대한 방패가 없어지자, 제단으로 가는 길이 훤히 뚫렸다.
아직까지 명령을 듣는 삼두사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발이 풀린 엘리스와 테레사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개벽의 계시록’, ‘세라핌’.
한 생명체가 최강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고유성창이 연이어 발동되었다.
파스스스..
재가 되어 흩어지는 삼두사들.
뼛가루조차 남지 않는 압도적인 화력은 또 다른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엔 방해하지 않는 것이냐?”
“그럴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너희들 쪽을 돕는 편이 내 욕망을 실현하는 데 더 유리하겠지.”
엘리스의 질문에 투영된 엘리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재롱을 부려보거라. 짐의 능력을 따라올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
“흐응. 적어도 너보다 2배 정도는 더 날려줄 테니. 자괴감에 빠지지나 말라고.”
[개벽의 계시록 & 개벽의 계시록 ‘천혈의 비’가 발동됩니다!]
미묘하게 다른 빛깔을 띤 ‘블러드 스피어즈’들이 한쪽 방향을 향해 쏟아졌다.
제물의 제단 곳곳에 숨어 있던 쇼거스들이 그 꼬챙이에 온몸이 꿰뚫렸다.
“크아아악!”
“케엑! 컥!”
보스 룸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무력화시키는 붉은 비.
거기에 테레사와 페시스의 투영체 역시 매버릭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쯧쯧.
진혁이 혀를 차며 아공간을 열었다.
왼손에는 긍휼의 검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비슷한 크기의 발뭉이 쥐어졌다.
“능력 자체는 꽤나 쓸만했어. 투영을 통해서 내 동료들의 복제품을 불러오는 건 상상도 못 했거든.”
하지만, 본신의 전투력 자체가 그 모양이어서야 이런 순간이 도래하면 완전히 외통수이지 않는가?
만약 매버릭이 아니라 다른 태고의 존재가 펼친 고유성창이었다면 이리 쉽게 파훼점을 찾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갓 태고의 반신이 된 매버릭은 간신히 자기 몸에 적응한 게 고작인 상태.
심오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태고의 영역을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때마침.
-지원 완료했어. 진짜 이번 거는 크게 기억해줘야 돼. 나로서도 엄청 무리한 거라니까?
장보경으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엘더갓들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걸로 다른 층계에 대한 고민도 사라졌다.
“우와아아악!”
모든 정황이 패배를 가리키자, 매버릭이 절규를 내질렀다.
지금까지 단 하나.
슈브니구라스의 사도가 되어서 더 높은 삶을 영위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텨왔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룬 시점에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기에 제단에 저장된 모든 마력을 빨아들이며 이마 쪽에 거대한 마력덩어리를 끌어모았다.
일종의 최후의 발악.
그리고 그에 맞춰.
쏴아아아…
진혁의 주위로 새하얀 눈발이 휘날렸다.
[고유성창 ‘백야(白夜)’가 발동됩니다!]
‘고인물류’
“이만.”
교차한 두 개의 대검에서 각기 다른 마력이 맺혔다.
신성력과 마기. 거기에 제우스의 ‘뇌신’과 바람의 권능인 ‘풍신’까지 깃들었다.
“꺼져라.”
‘양검일합’.
교차한 검격이 매버릭의 몸을 십자로 가로질렀다.
콰콰콰콰콰콰콰!
끌어모았던 마력덩어리와 함께.
“끄으…으…”
매버릭이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마력 제어석이 파괴됩니다!]
[‘제물의 제단’이 무너집니다!]
[각 층계에 현현해 있는 태고의 존재들에게 심각한 제약이 걸립니다.]
[최초로 태고의 거점을 점령했습니다!]
성공을 알리는 상태창들. 그렇게.
태고의 존재들이 가한 첫 번째 비수가 부러졌다.
“휴우.”
진혁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꽤나 정신없이 움직였던 터라,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기분이다.
아니. 정확히는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
시스템 말로는 매버릭에게 붙은 변절자가 몇 놈 있다고 했거든.
진혁의 시선이 플레이어들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