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35화
835화, 무모한 내기 (2)
[・・・・・・ 선택을 완료했습니다!]
“됐습니다.”
진혁이 신중하게 선택을 마쳤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슈브니구라스도 회심에 찬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후후.”
짜악!
하스팅과 샤일록이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자.
우우웅!
[신성한 관리자와 상단의 제약이 완성되었습니다!]
[당사자의 동의가 모두 이루어졌기에 거래의 강제력이 미치는 범위가 최상위 등급으로 조정됩니다.]
[각자가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은 1개씩. 대신, 플레이어 강진혁에겐 이 내기에서 스킬 한 가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평범한 계약이었다면 제아무리 상급 관리자나 상단의 주인이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강제력을 가지지 못했을 거다.
시스템의 제약으로도 억제하기 힘든 것이 최상위 태고의 신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슈브니구라스 본인이 이 계약의 강제력에 수긍하며 힘을 실어준 상태였으니까.
‘자기 목을 자기가 조른 셈이지.’
“후우.”
물론, 이 모든 건 도박에서 승리했을 때의 이야기.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저 괴물에게 완전한 자유를 선사해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은 진혁이 슈브니구라스에게 다가갔다.
“크르르…”
“쉬잇.”
뒤에 있는 뱀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진혁에게 다가오려 했다.
하여간. 사안봉인검에 저리 깊숙이 찔렸는데도 저렇게 팔팔하다니.
마력의 손실도 거의 없어 보이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손끝이 흔들리는구나,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는 것이냐?”
“미안하지만, 이 정도로 겁먹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어.”
푸푹!
사안봉인검을 조금씩 뽑는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극한의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는 게 핵심이다.
‘신중하게 천천히…..’
진혁이 최고조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검이 0.1mm 뽑힐 때마다 슈브니구라스의 격이 차원이 다르게 상승했기 때문. 살갗을 얇고 예리한 칼로 저미는 것처럼 차가운 살기가 계속해서 몰려왔다.
또옥,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슈브니구라스가 해방되어 온몸을 난도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쿠쿠쿠쿠쿠쿠!
유형화된 압박감이 공간 전체를 짓눌렀다.
쩌저적. 쩌억!
허공에 생긴 균열들이 조금씩 커지며, 검붉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크읍.”
“으으…”
지켜보던 하스팅과 샤일록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분명, 저 살기가 향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단순히 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그저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 하스팅 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샤일록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 찼다.
얼핏 봐도 검은 2cm도 뽑히지 않았다.
고작 2cm.
그게 이 정도다.
없었다. 슈브니구라스가 말은 탑의 상단을 모두 일임하겠노라 약속했지만, 막상 저 끔찍한 살기가 해방될 때에 자신이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기분에 따라서 한 종족을 멸종시키는 것이 저 태고의 존재였으니까.
“우리까지 해치진 않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하스팅이 차분한 목소리로 샤일록을 달랬다.
말은 그리했어도 거기에 확신 따위는 없었다.
바로 그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구나.”
[슈브니구라스가 고유무장 ‘고통의 오르간’을 사용합니다!]
먼저 움직인 건 슈브니구라스였다.
충분히 적기라고 판단을 내린 건지. 그녀의 등 뒤로 보랏빛을 띤 거대한 오르간이 나타났다.
기괴한 눈알들과 날카로운 이빨들이 달린, 처음 보는 형태의 악기.
“키이이이…!”
곧바로 음산한 선율이 울려퍼졌다.
수많은 입들이 노래를 부르자, 모두에게 익숙한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악보’다.
해골과 피로 만들어진 음표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공포’의 감각이 극대화됩니다!]
[‘정신 계열’ 능력치들이 50%만큼 약화됩니다!]
[집중력이 80%만큼 감소되며, 3초마다 ‘부분 마비’ 증상이 발생합니다!]
띠링! 띠링! 띠링! 연이어 나타나는 경고음.
“어떠냐?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무장이!”
슈브니구라스가 회심에 찬 탄성을 내뱉었다.
섬세한 컨트롤이 요구되는 작업 중에 태고의 공포가 깃든 노래가 울려 퍼진다면 치명적일 터. 집중을 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벅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으아아악!”
실제로 하스팅과 샤일록은 머리를 움켜쥐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허공을 가득 메우는 불길하고 사악한 음표들로 인해 눈과 코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아마, 네 녀석도 정신계열 성유물이나 스킬을 선택했겠지. 하지만, 이 몸은 그것까지 읽고 이 무장을 골랐느니라. 일천한 네놈이 무얼 준비했든 전부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뽑아라.
피폐해지고 닳아버린 정신을 놓고.
감각마저 잃어버린 그 연약한 손으로,
위대한 존재를 구속하고 있는 검을 뽑으란 말이다!
악보가 더욱 화려하게 그려지며, 악장의 종막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진혁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 너라면 이 상황에서 그걸 사용할 줄 알았다.’
고유무장 ‘고통의 오르간.
이런 식으로 집중을 요하는 승부가 날 경우 저것만 한 성유물은 없겠지.
정신계열의 방벽을 갉아먹는 금단의 악기.
그 위용 앞에서는 어떤 방패를 갖다 놔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단단하게 버티기만 하는 ‘방패’가 아니라 같은 흐름을 보이는 ‘동류’라면 어떨까?
진혁이 사용할 수 있는 한 개의 스킬을 꺼냈다.
[스킬 Lv48 ‘천상의 선율’이 발동됩니다!]
탑을 오르는 초창기에 얻어 지금까지 보관해둔 스킬. 엘프들의 축제에서부터 수많은 연회의 뒤풀이까지. 전장의 끝을 고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빛을 내주었다. 우우우웅!
음표들의 움직임에 이변이 일어났다.
‘음악’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다.
그 물결의 오의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기존의 악보를 재해석해서 완전히 다른 곡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저 악기는 마스터 피스인 만큼 극도로 정교하지.’
그렇기에 조금만 망쳐놔도 그 무결점함에 커다란 틈을 만들 수 있었다.
먼저.
2악장과 5악장에서 ‘솔’과 ‘레’에 해당하는 부분의 음을 한 단계씩 낮춘다.
[‘음표’가 교체됩니다!]
다음은.
오르간의 11번째 입과 17번째 눈에서 나오는 소리를 정확히 2/5와 1/4씩 차단시킨다.
[‘악기’의 특성이 바뀝니다!]
진혁이 현란하게 스킬을 사용해서 슈브니구라스의 음악을 망쳤다.
촤르르르…
요동치는 음표들의 배치가 뒤바뀌며 끔찍한 격통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동시에.
푸슉!
사안봉인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10cm.
정확히 원하던 지점까지 검을 뽑는 데 성공한 것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봉인의 최대치에 이르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역전시킬 수 있는 건 ‘정보의 격차.
상대의 히든 카드를 예측할 수 있는 이점은 절대자와의 간격을 좁혀주는 최강의 무기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진정한 고인물이 아니지.’
내기에서 이긴 건 이긴 거고.
이 주변에 넘쳐흐르는 마력을 낭비하는 건 도저히 그냥 지켜만 볼 수 없다.
[성유물 ‘암흑의 쐐기’를 소환합니다!]
엘리스의 거점인 블랙캐슬, 그 안에서 가장 은밀한 창고인 ‘혈옥’에서 얻은 아이템을 꺼냈다. 우우웅!
태고의 마력이 그대로 쐐기 안쪽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태고의 마력이 충전됩니다!]
[‘암흑의 쐐기’의 잠재력이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콰콰콰콰콰콰!
평범한 마력이 아닌, 무려 슈브니구라스의 마력이다.
그걸 양껏 포식했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몰아치는 폭풍이 검은색 쐐기의 형태를 바꿨다.
[‘암흑의 쐐기’가 ‘궁(宮) – 해금의 쐐기’로 바뀝니다!]
검은 산양들의 각인이 새겨진 모습.
마력 역시 슈브니구라스 특유의 것이 그대로 스며들어있었다.
“말도 안 되는…”
비릿한 미소를 짓던 슈브니구라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심오하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자신의 노래가 이토록 허무하게 파훼되다니.
아무리 인간의 잠재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슈브니구라스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네 계획은 거의 완벽했어. 다만, 상대가 나빴다고 생각해.’
상대가 한 걸음을 앞서 예상하면 두 걸음을 앞서고,
열 걸음을 앞서면 백 걸음 앞의 미래를 예측한다.
그것이 고인물이 승리하는 방식이고.
필멸자가 불멸자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걸로 원하는 모든 걸 챙겼다.
진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스팅과 샤일록을 들쳐맸다.
“이렇게 깨끗하게 진 건 처음이로구나. 인정하마. 너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대적했던 그 어떤 존재보다 높은 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슈브니구라스가 균열을 향해 움직이려는 진혁을 보며, 마지막으로 말을 걸었다.
담긴 말에서는 분노 대신 짙은 아쉬움과 흥미가 뒤섞여 있었다.
“기다리고 있거라. 다음에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에는 이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겠지. 이런 변칙은 두 번 다시 통하지 않을 테니까.”
10번이면 10번, 100번이면 100번.
다시 이길 확률은 없다고 봐야 할 거다.
‘만약 다시 싸울 일이 있다면 말이야.’
미안하지만, 다음은 없다.
네가 이곳에서 빠져나왔을 때쯤엔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진혁이 슈브니구라스를 뒤로 한 채 그대로 하늘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아앙!
균열이 완전히 박살 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완전히 바뀌었다.
***
[‘허상결계’에서 탈출했습니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엄청난 폭음과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계약자!”
“진혁 씨!”
“크하하하 와줬구나! 당연히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와아아아!”
진혁의 모습을 본 연합 측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무려, 각 군대를 이끄는 대장끼리의 1:1 승부였다.
거기서 당당하게 홀로 돌아왔다는 건, 싸움의 승패가 결정되었다는 뜻.
당연히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반대로 검은 산양들 측에서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 지셨다고?”
“웃기지 마라! 그분께서 패배하셨을 리가 없다. 고작 인간 한 명에게 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단 말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사기? 속임수? 반칙?
어떤 비열한 수단을 쓴 게 틀림없다.
그리고 하지만, 아무리 그런 걸로 폄하하고 부정해봤자 균열에서 돌아온 게 한 명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야 말았다.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짧은 문구와 함께.
[고유무장…]
파츠츠!
진혁의 손바닥 사이로 2m에 이르는 화려한 지팡이가 나타났다.
[‘목자의 지팡이’가 새로운 주인을 바라봅니다!]
3개의 날카로운 눈알이 달린 지팡이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이 뿜어졌다.
덜덜덜!
검은 산양들이 그 힘에 전율하며 모든 투기가 꺾여나갔다.
“지금부터 잔당소탕을 시작한다.”
진혁이 최전선에서 병력을 일괄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