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36화
836화. 운명을 건 선택 (1)
한 점 의심 없이 믿고 따르던 절대자의 부재.
그 사실은 집단으로 하여금 엄청난 충격으로 이어졌다.
“저, 정말이다. 저 지팡이는….”
“목자의 지팡이!”
“어머니께서 패하신 게 사실이었나?”
검은 산양들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기도 했다.
50층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하나가 무너졌다는 건 그 정도로 천지를 개벽하게 할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우오오오!”
“우리의 승리다!”
“우리 영웅께서 적장을 치셨다. 남은 잔당들을 전부 쓸어버려라!”
대조적으로 연합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까지 닿았다.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팡이를 연신 들었다 내렸다.
으쌰으쌰.
‘역시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니까.’
조잘대면서 말을 많이 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 그냥 가만히 지팡이를 흔드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어필하기엔 충분하다.
“겁먹지 마라! 어차피 저 지팡이는 어머니의 고유무장! 놈은 제대로 다룰 수도 없을 것이다!”
혈족 중 하나가 거대한 핼버드를 든 채 고함을 질렀다.
으음.
저 발언은 좀 아프네.
솔직히 말해서 목자의 지팡이를 완벽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완벽을 논할 때의 이야기고.
몇 가지 능력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가능하고 말고
[‘귀속권’의 효과로 인해 고유무장에서 나오는 저주가 모두 사라집니다!]
[고유무장 ‘목자의 지팡이’의 특수 사상기 ‘권위(權威)’가 발동됩니다!]
우우웅!
지팡이를 중심으로 원형의 파장이 퍼져나갔다.
혈광이 번뜩이며 태고의 마력이 개화하자, 검은 산양들의 움직임이 180도 달라졌다.
쿠웅!
쿠쿠쿠쿵!
피부를 짓누르는 압박감.
절대 거역해서는 안 되는 절대자의 언령이 뇌리에 파고든 것이다.
“크으윽.”
“이・・・ 새끼가 감히….”
물론, 슈브니구라스에 비해 격이나 이해도가 한참이나 떨어졌기에 짓누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놈들은 반항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해한 이를 노려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거면 충분해.’
애초에 이제 갓 얻은 고유무장으로 모든 검은 산양들을 찍어누를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또 다른 아이템을 꺼냈다.
음산한 빛을 머금은 등불.
바로 전대 절망의 왕관의 주인이었던 ‘페르무트’로부터 얻은 성유물이었다.
[성유물 ‘죽음을 불러 모으는 등불’이 발동됩니다!]
쏴아아아….
쇠약해진 이들의 심계에 이질적인 운무가 흘러들었다.
“……!?”
“……!!”
곧바로 상당수 검은 산양들의 동공이 세로로 가늘게 찢어졌다.
절반 가까운 병력이 죽음을 불러 모으는 등불에 현혹되어 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덜덜덜덜!
“죽・・・여버리겠다.”
“반드시..”
인간형을 한 놈들은 여전히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야. 이것도 견디네. 역시 혈족급 되는 놈들은 정신세계도 양산형들과는 차원이 다른가 봐.”
검은 산양들은 갑옷 꿀벌들보다 훨씬 높은 25성급에 해당하는 상위종들.
그중에서도 직계혈족들은 ‘태고의 반신(半神)’에 이르는 괴물들이었다.
어지간히 성유물을 다루기 전까진 복종은 어림도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제안할게. 어차피 너희들이 따르는 자는 더 이상 너희에게 돌아오지 않아. 대신 나와 함께한다면….”
“개소리 하지 마라!”
“고작 네깟 놈에게 당하실 어머니가 아니시다. 보나 마나 더러운 술수를 부렸을 터! 우리가 얼마가 걸리든 간에 반드시 그분을 되찾고야 말겠다!”
어쩔 수 없나.
적당히 부리기 좋은 놈들은 데리고 간다.
그리고.
부릴 수 없이 강한 심상을 가지고 있는 놈들은….
글쎄, 굳이 그런 강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겠지.
불씨가 될 수 있는 놈들은 최대한 배제하는 게 전쟁의 철칙이었다.
“엘리스”
진혁이 옆에 서 있는 엘리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결정이다. 저들은 절대 계약자에게 굽히지 않을 테니까.”
[‘블러드 스피어즈’가 발동됩니다!]
하늘을 빼곡히 덮는 붉은 꼬챙이들.
이어진 것은 전장을 휩쓰는 붉은 폭우였다.
퍼퍼퍼퍼퍽! 투콰아아앙!
주변의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간신히 이성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한계인 혈족들로서는 ‘순혈의 왕관’을 전력으로 개방한 엘리스의 광역기에 당해낼 수 없었다. 광오하면서 압도적인 학살.
엘리스의 공격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전장에 더 이상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혈우(血雨)가 멈췄다.
덜덜덜덜!
가장 공포에 잠겨 있는 건 다름 아닌 상단의 주인 ‘샤일록’이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건 영원한 게 아닌 일시적인 파리 목숨일 뿐,
당장 1초 뒤에 저 분노가 이쪽으로 향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죽음을 불러 모으는 등불에 잠식된 검은 산양들은 따로 모아둬. 당장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래. 내 아이들을 시켜서 특수 군단으로 편성시켜 두겠느니라.”
엘리스가 즉시 움직였다.
“자, 그럼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려나?”
진혁의 시선이 샤일록에게 닿았다.
딸꾹!
샤일록의 입에서 우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나, 절대 잊지 않았다.
샤일록이 본능적으로 같이 있던 하스팅의 뒤로 숨었다.
덩치는 훨씬 커다래 가지고 반도 안 되는 고블린의 꽁무니에 달라붙는 게 꽤나 우습다.
“사, 상급 관리자와 나를 해치면 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쯧쯧. 그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협박이면 너무 실망인데, 차라리 가진 걸 전부 내놓을 테니 살려달라고 하는 편이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스릉, 진혁이 발뭉을 꺼냈다.
“히이익!”
샤일록이 더더욱 하스팅의 발아래로 몸을 숙였다.
상급 관리자를 방패 삼아 1초라도 더 살려고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스팅 님! 제발 뭐라도 해보십쇼. 이러다가 정말 저희 둘 다 죽겠습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저 괴물을 좀 막아보란 말입니다!”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는 샤일록을 대신해 하스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무지막지한 검은 좀 내려두시죠. 그러다가 저까지 베시겠습니다.”
“그래. 감히 상급 관리자께 상처를 입힌다면…”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면 조준이라도 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쓸모가 있는 놈이니 죽이진 말고 조용해지도록 혀만 잘라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만.”
“…응?”
조금 기가 살아나려던 샤일록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나타났다.
설마.
“지, 지금 그 말씀은 하스팅 님께서 저놈과 한패라는 겁니까?”
“슈브니구라스가 찾던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참모가 바로 저였습니다. 솔직히 내기 당시에 스킬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 걸 생각하면 눈치를 좀 채셨어야죠. 그 조막만 한 뇌로 어떻게 상단을 운영해왔는지 해부라도 해보고 싶을 따름이군요.”
“그, 그럴 수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짓밟아버리는 발언.
이제는 정말로 이 적진에 혼자 남게 되어버렸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이 자가 박쥐 같은 놈이긴 합니다만, 그가 보유한 상단과 재력은 상당합니다.”
전쟁에 있어 든든한 물자는 핵심 중에 핵심.
괜히 누가 더 자원이 많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인턴 자리가 이미 포화상태라 웬만하면 추가 모집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스팅의 강력한 추천으로 인해 특별 공채 시즌이라도 열어야 하나 고민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사, 상단을 전부 넘기라고? 그, 그건 안 돼. 상단은 내 전부이자 삶이다! 10% 아니, 그래 딱 20%만 넘기는 걸로 하지.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을 거야.”
정작 지원자는 상향 지원을 하면서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이래도 봐줘야 한다고?”
“죄송합니다. 제 생각보다 더 멍청한 놈이었군요.”
하스팅이 마지막 기회를 걷어찬 샤일록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상단에 관한 정보는 전부 뽑아낸 뒤에 처리하는 걸 추천드리죠.”
그럴 생각이다.
금고의 위치나 각종 저장고들을 비롯해 놈이 가진 걸 모두 다 빼앗을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일일이 심문을 한다면 ・・・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걸릴 테지.
예전에는 그런 걸 즐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슬슬 다음 세대를 위해 물려줄 때도 됐다. “얘들아.”
진혁이 정령특전대를 소환했다.
“응응 주인 불렀어?”
“헤헤. 이번엔 또 어떤 걸 시키려고 그러는 걸까?”
겁에 질린 정령수들이 손을 부비적거리며 나타났다.
“왜 그렇게들 잔뜩 쫄아 있어.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주인인 줄 알겠잖아.”
“아냐. 우린 행복해 그치?”
“그러엄. 해피 정령이지. 다들 한잔해!”
쌓인게 많긴 많았나 보네.
“다름이 아니고, 여기 새로운 친구에게 너희들이 지금까지 당했던 걸 전부 되새겨줬으면 해서 불렀어. 겸사겸사 스트레스도 실컷 풀고.”
마치 주마등처럼, 정령수들의 머릿속에 진혁과 처음 만나 지금까지의 과정이 스쳐지나갔다.
“히히히!”
“이야, 그런 거라면 또 우리가 전문이지.”
“어디 보자. 선왕의 계곡에서부터 하면 되겠지? 거기가 처음이잖아?”
“그건 너무 불쌍하니까 놀이동산에서부터 시작하자. 그 식인 물고기들 나오는 데 있잖아.”
“다들 조금 더 해봐. 머리 안 아프니까.”
정령수들이 키득거리며 구체적인 고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뭐, 뭐냐. 대체 무얼 하려고 그러는・・・ 으아아아악! 머, 멈춰. 제발 멈추라고!”
질질 끌려가는 샤일록의 비명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
슈브니구라스의 실종.
지금까지 태고의 존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번 것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로스나 카알루트처럼 대체 가능한 존재와 달리 50층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니알라토텝 역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뒤 소식이 끊겼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구나.”
“검은 산양들 역시 대거 소실되었다. 상당수는 놈들의 휘하로 들어갔다고 하더군.”
“최대 전력 중 하나를 잃게 된 건가.”
“엘더갓들의 움직임 역시 심상치 않아. 대규모 병력이 집결 중이고 이미 남쪽과 동쪽의 유적 여러 군데를 빼앗겼다.”
좀처럼 한 자리에 모이지 않는 수많은 신격들이 ‘아자토스의 궁전’에 집결했다.
만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회동.
엘더갓들과의 전면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그소토스께서는?”
이알다골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자토스를 제외한다면 가장 강력한 외신.
모든 아우터갓들을 이끄는 절대자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순간이다.
“찾을 수 없었다. 그분이야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분이니까. 그 외에도 최상위 신격들 역시 아자토스께서 잠에서 깨실 일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을 거라 답하셨다.”
쥬른이 답했다.
사실, 아우터 갓들의 전력을 전부 한 곳에 모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적들이라 하더라도 몇 분 이내에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득실대는 게 이 50층이란 세력인 것이다.
문제는 워낙에 다양한 개성과 성향을 지닌 절대자들답게 그 의중을 하나로 모으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소한 이 궁전까지 침입자들이 밀고 와서야.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릴 거란 뜻이다.
“그나마 슈브니구라스 님이나 니알라토텝 님만이 이 전쟁에 관심이 있으셨거늘.”
이미 사라진 걸 아쉬워만 하고 있을 여유는 없겠지.
지금 당장 급한 건 적들의 다음 움직임에 대비하는 것.
노릴 곳은 단 하나다.
바로 슈브니구라스의 거점.
‘양들의 요람’.
50층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더라도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였다.
특히나 검은 산양들을 이끌게 된 적들이 거길 손에 넣는다면 전력이 2배는 더 상승할 터.
그랬다가는 꽤나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확실한 정보겠지?”
“그래. 놈들의 편에 붙어있는 자가 직접 말해줬다. 틀림없어.”
“그렇다면 그 녀석에게 전해라. 더 이상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으니, 글라가가 ‘성유물’을 사용하게 되면 즉시 적들의 뒤를 찌르라고.”
전력을 다 쏟아부어야만 하는 전쟁.
그 급박한 상황에서 날아오는 아군의 비수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