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38화
838화, 결계사, 그리고 잃어버린 언어
“아닙니다. 저도 방금 막 왔어요.”
진혁이 싱긋 웃으며 벨토르를 반겨주었다.
50층에 와서 정신없이 보내느라 제대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드디어 그간의 성과를 공유할 기회가 생겼다.
“듣자 하니 출발 예정 시간을 훨씬 더 앞당긴다던데, 여유롭게 홍차랑 다과를 즐길 시간은 없는 거겠지?”
“예. 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하게 되었거든요. 놈들보다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우리 정도 되는 결계사들에게 구구절절 말로 늘어놓는 것보다는 직접 부딪치는 게 나을 테니까.”
우우웅!
벨토르의 손에 화려한 수인이 맺혔다.
“…..!?”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미 벨토르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건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
그동안 골방에 틀어박혀서 태고의 정보들과 잃어버린 언어에 대해 연구한 게 결코 헛짓거리가 아니었다. 진혁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건데.
어째 분위기가 단순한 교류의 영역을 넘어설 것만 같았다.
[벨토르가 잃어버린 결계 ‘흑요의 끝자락을 발동합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맺힌 룬어들 사이로 낯선 언어가 떠올랐다.
꾸물거리며 피어오르는 흑운(黑雲).
결계가 완성되기 전에 파훼하지 못하면 그대로 집어삼켜진다.
[‘룬의 지배자’의 권능이 발현됩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진혁이 엄청난 속도로 다수의 결계를 만들어냈다.
8성급 ‘붕괴’ 9성급 ‘역무’ 마찬가지로 9성급 ‘쐐기 송곳’,
등급 자체가 잃어버린 결계에 비하면 한참이나 떨어졌지만, 전부 ‘파훼’에 특화된 특수 결계들이다.
파아아앙!
파공성과 함께 모여들던 구름이 흩어졌다.
곧바로 벨토르가 손을 뒤틀자, 하늘과 지면을 따라 새로운 결계들이 나타났다.
쿠쿠쿠쿠쿠쿠!
흩어지던 흑운이 다시 한 번 형(形)을 갖췄다.
‘연산 가속・・・ 거기에 ‘심계 무효화’까지 합쳐진 건가.’
보인다.
특히나 ‘히든 연계 퀘스트’를 성공시키면서 배우게 된 ‘잃어버린 언어 파편’들과 ‘네크로노미콘’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함에 따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영역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결계술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각각 +3포인트씩 상승합니다!]
파각! ・・・쩌저적!
흑운을 구성하는 근간이 사라졌다.
“하하하! 멋지군! 대단해! 나야 지난 시간을 모두 이것에 쏟아부었다지만, 자네는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 이토록 높은 결계술까지 익혔단 말인가?”
벨토르가 경탄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놀랍고 즐거웠는지 손에는 전용 성유물인 ‘기묘의 붓까지 들려져 있었다.
그리는 결계의 능력을 최대 2배까지 올려주는 사기적인 특성.
당연히 저걸 꺼냈다는 건 그저 그런 결계를 선보이지 않을 거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홍연의 물감이 세계(世界)에 칠해집니다!]
붉은 색으로 떠오르는 식(式)
각각의 식을 연결하는 이음새가 심상치 않다.
몇몇은 아예 처음 보는 구조인 것 같은데?
구성하는 언어들 역시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기이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영감탱이가.
진짜로 어디 아공간에 영원히 가둬버리기라도 할 셈인가?
한 영역에 너무 깊이 빠지면 또라이가 된다더니.
어째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진혁이 재빨리 마력을 재배열했다.
촤촤촤촤촤!
파훼식이 겹쳐졌다.
하나로는 턱도 없고.
7개 ・・・ 아니, 최소한 11개는 필요하다.
새로 익힌 ‘잃어버린 언어의 파편들이 연결부위 문자에 끼어들었다.
“파동식을 주축으로 한 파훼식인가. 재밌군. 저게 저런 식으로 이어지는 건 아주 신선해! 흐음. 어디 보자. 나도 그럼 그에 걸맞은 걸 몇개 더 추가하도록 하고. 좋아. 그럼 가겠네.”
“오지 마…가 아니라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러기엔 우리에게 남은 여유가 너무 없지 않은가?”
“여유가 없다고 훈련에서 저딴 걸 꺼낸답니까?”
“하하하. 자네 세계에 가보니 그런 문구가 붙어 있던데 아주 감명 깊더군.”
또 TV에서 이상한 거라도 본 모양인데.
제발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걸 현실에 접목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라던가? 아무튼 연습도 실전처럼 하라는 훌륭한 선전문구였네. 포스터에 해골이랑 붉은 피까지 그려둔 게 아주 오싹했어.”
씨X.
북한군이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군생활 PTSD를 여기서 떠올리게 될 줄이야.
[잃어버린 결계 ‘묵언의 방주’가 발동됩니다!]
우우우웅!
완성된 결계를 따라 거대한 방주가 나타났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허무의 공간으로 보내버리는 침식형 대결계다.
[황도십이궁(黃道二宮) ‘물병자리’가 부름에 응답합니다!]
1초,
결계의 격을 훼손하는 별자리를 불러내고,
[황도십이궁(黃道二宮) ‘사수자리’가 부름에 응답합니다!]
2초,
결계의 심장을 꿰뚫는 별자리를 소환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두 개의 별자리를 보좌하는 ‘성단급 별들을 불러내는 것도 필수적이었다.
콰콰콰콰콰콰
밤하늘을 가득 물들인 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방주를 요격했다.
단순히 배를 침몰시키는 물리적인 개념이 아닌, 방주의 중추가 되는 ‘언어’와 ‘룬어’를 부숴야지만 비로소 저 거대한 흉기를 멈출 수 있다.
[놀라운 경험으로 인해 이해도와 숙련도가 각각 +10포인트씩 상승합니다!]
고도의 집중력과 결계의 극의를 요하는 일.
하지만.
콰콰콰콰쾅!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방주의 항해를 멈추는 동안, ‘뱀 자리의 주인’이 아래에서 갑판을 박살내버렸다.
“크오오오오!”
부서진 언어의 파편들이 밤하늘을 따라 흩어졌다.
[묵언의 방주가 침몰합니다!]
진혁은 그걸 해냈다.
“허억. 허억.”
짧은 시간 내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밀도의 훈련을 한 셈.
결계술의 대가와 벌인 일전은 진혁을 또 다른 단계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이럴 수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진짜로 이래서 선조들이 훈련은 실전처럼 하라고 했던 거였나?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제가 원하는 대결계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응?”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던 진혁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연, 대단하군. 역시 혼자선 안 되겠는데.”
손뼉을 마주치는 벨토르의 뒤로…
새로운 목소리들이 끼어들었으니까.
“훈련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어요.”
“극한의 상황을 연출할수록 결계의 극에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겠다.”
“난이도는 높을수록 좋겠지 암!”
서리혼령과 사멸자 그리고 귀환자인 메드레이였다.
탑을 주름잡던 쟁쟁한 실력자들이 죄다 등판한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다른 능력은 사용해선 안 되네. 어디까지나 결계로만 대응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
“아니, 그걸 말이라고….”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네!”
“제발 사람이 말하면….”
“가즈아!”
현대에서 쓸데없는 유행어는 좀 배워오지 말라고!
콰콰콰콰콰쾅!
온갖 종류의 능력이 폭발했다.
1시간.
2시간.
그리고 3시간.
쉴 틈이라곤 없는 극한의 훈련이 이어졌다.
실전을 방불케하는 고대의 전투는 주위의 경치를 완전히 뒤바꿀 수준이었다.
그렇게 새롭게 익힌 온갖 종류의 결계들을 시험하고 교류하며 발전시키는 사이. 띠링! 띠링! 띠링!
[‘새벽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양들의 요람으로 갈 때가 되었다.
***
새벽이 깊을 무렵. 연합 측의 대병력이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방향은 하나가 아니다.
슈브니구라스의 거점 자체가 워낙에 거대한 데다, 중계지를 만들며 가지 않으면 중간에 허리가 끊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위성 거점 3개와 요람을 포함해 총 5군데.
각각의 군단급 병력들이 각자의 임무를 짊어진 채 흩어졌다.
‘보급로도 신경 쓰고, 적의 기습도 대비해야해.’
전쟁이라는 게 그냥 가서 다 쓸어버리는 걸로 생각하기 쉽지만, 적진에 도달하기까지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정찰대를 맡은 건 6층의 엘프들이었다.
태고의 숲이라고 해도 숲은 숲.
대자연에서 평생을 보내온 엘프들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산세를 읽는 힘이 뛰어났다.
페시스라는 위대한 길잡이가 있긴 했으나, 혼자서 모든 영역을 커버할 순 없었으니까.
“명심해라. 임무는 어디까지나 숲의 기운을 파악하는 것. 전투에 관한 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테슬론이 레인저들을 이끌었다.
“예!”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가녀린 엘프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힘내볼게요. 진혁 님.”
실비아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며 움직였다.
그녀의 입에는 예전 진혁이 알려준 방법대로 만든 콩고기가 우물거리고 있었다.
[기계군주 ‘드론 항모’들이 ‘정찰모드’에 들어갑니다!]
“저는 모멸의 사원, 방어를 위해 남아야 해서 항공 정찰 정도만 서포팅하겠습니다.”
이태민 역시 수많은 드론들을 통해 연합군이 가는 길을 파악했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하고 대비해도 모든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
“키에에에!”
“케에에에!”
당연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발대는 매 순간 목숨을 건 상황에 직면해야만 했다.
“막아라!”
“젠장, 옆에서도 튀어나온다!”
“으아아악!”
늪지를 가로지르는 도중 만난 뱀장어들.
눈 깜짝할 사이에 제국의 기사 다섯을 집어삼킨 놈들이 빠르게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푹!
푸푸푹!
한 발 늦게 오러를 머금은 검이 수면을 갈랐지만, 이미 재빠른 놈들은 사라진 뒤였다.
“큭! 너무 넓게 퍼지지 마라! 이 녀석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자들을 노린다!”
“마법사들은 위치추적 스크롤을 사용하시오!”
에브라함과 펜하이머가 선두에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약간의 방심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땅.
그렇기에 행군을 하는 것에도 모든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귀문대혈진을 펼친다!”
“주술사들은 염(念)을 읊어라!”
공동전선을 펴는 무림 측에서도 즉시 대응에 나섰다.
초절정급 무인들이 수면 위를 달리며, 뱀장어와 각종 수중계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서걱! 콰아아앙!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폭발음.
시작부터 험난한 여정이 예고되었다.
한편.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이집트 그리고 마계 연합이 향하는 방향은 늪지보다 훨씬 더 치열한 접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야생 쇼거스 군락지’에 접어들었습니다!]
50층의 간판 몬스터라 할 수 있는 쇼거스들이 득실대는 계곡을 통과해야 했던 것.
하나하나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데다, 이 계곡 전체가 놈들의 영역이었기에 숫자 역시 감히 숫자로 세기 힘들 정도였다.
“이걸 언제 다 뚫고 간다는 말이냐!”
“다른 쪽으로 가면 안 되는 거였어요?”
엘리스와 테레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백, 수천 따위가 아니다.
수만. 아니 십만이 넘는 개체들이 계곡 전체를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게 중에는 다른 쇼거스들의 10배가 넘는 덩치를 가진 변종들도 보였다. “크오오오오!”
고막이 터져라 울부짖는 사념체들.
저건 못해도 16성급은 되어 보인다.
“어쩔 수 없어. 이곳을 확보해야지만, ‘양들의 요람’으로 가는 수원지를 찾을 수 있거든.”
슈브니구라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거점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몇 가지 기연을 통해서만이 그곳에 갈 수 있는 정확한 지도를 얻을 수 있다는 뜻.
그리고 이곳이 그나마 그중에서 가장 만만한(?) 루트였다.
“저 길을 따라 쭉 가면 물이 모여있는 곳이 있어.’
그 물이 흘러가는 걸 따라만 가면 요람의 외곽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다.
“흐음. 어쨌든 계곡의 중심부까지는 가야 된다는 건데.”
“쉽지 않겠네요.”
너무 걱정들 하지 마라.
소수 정예로 뚫자는 것도 아니고.
대규모 전쟁을 위해서 그에 걸맞은 위용을 갖춰뒀으니까.
“메에에!”
검은 산양들이 가장 앞쪽에 섰다.
양옆에는 베리엘과 상위 혈족들이 이끄는 마계의 군단이 배치되었다.
쇼거스들의 숫자가 많긴 하지만, 이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단시간 안에 돌파할 수 있을 터.
그래.
그리 생각했는데.
[・・・・・・개입합니다!]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했다.
그것도 아주 최악의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