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51화
851화. 최후의 거점 ‘아자토스의 궁전’ (1)
차원의 틈새가 열리기 정확히 하루 전.
다른 곳에서도 커다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결’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저벅.
슈브니구라스가 봉인되어 있는 곳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도착해 있었다.
“이야, 진짜 제대로 한 방 먹었네. 그 대단한 태고의 모태께서 이런 굴욕을 다 겪으시고, 세상 참 많이 변하긴 했어. 라떼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지.”
과거의 천유성이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까지 일전에 벌어졌던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심은 폐허 그 자체였다.
“네놈… 이 대체 어떻게 여기에…”
슈브니구라스가 상당히 놀란 표정을 자아냈다.
태고의 신격들마저 찾지 못하는 이 단절된 차원에 들어왔다는 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
“비밀 초대장을 받았다는 거짓말이고, 뒷문을 알고 있다 정도로 해두지.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여기에 온 이유 아니겠어? 나가고 싶지? 여기서.”
“그런 도움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자, 어서 뽑아라. 그리하여 나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빠져나가게 해다오.”
꾸구구국.
자연적으로 조금씩 뽑혀 나오고 있는 ‘사안봉인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곤 하나 아직까지 6일은 더 있어야 이 검이 완전히 뽑힐 것이다.
하지만, 도움이 있다면 그 속도는 훨씬 더 빨라질 수 있었다.
“나도 전부 다 뽑지는 못해. 이 검에 걸린 제약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거든.”
“며칠이나 줄일 수 있지?”
“최대 5일 정도. 만약 그렇게 단축시킨다고 해도 앞으로 35시간 정도는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할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다면야.”
덥석.
과거의 천유성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수많은 룬어와 잃어버린 언어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국!
뽑힌다.
조금씩 조금씩.
그런데.
검을 2cm 정도 뽑은 시점에서 갑자기 과거의 천유성이 손을 놔버렸다.
“왜 그만두는 거지?”
당연히 튀어나온 의문.
그리고 그 질문에, 과거의 천유성이 천연덕스럽게 조건을 덧붙였다.
“네가 가진 고유무장 중 하나가 필요해.”
“그 인간이나 네놈이나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 것을 요구하는구나.”
“평소였다면 감히 그런 요구를 하진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까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과거의 천유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아직 잘 모르고 있나 본데, 놈들은 지금 양들의 요람을 공략하고 있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마지막에 봤을 땐 꽤나 위태로워 보이더라고.”
“내 거점을 말이냐? 설마, 내성까지 함락된 건 아니겠지?”
슈브니구라스의 평정심이 흔들렸다.
진혁이란 인간이 얼마나 집요하고 악랄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자리를 비운 자신의 보금자리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철벽을 자랑하는 거점마저… 더 이상 안전하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글쎄. 어제까진 괜찮았지만,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니 오늘은 또 어떻게 됐을진 모르지.”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혼돈은 커져만 갈 것이다.
과거의 천유성은 바로 그 시간을 두고 슈브니구라스를 압박했다.
정보의 공백이 생겨버린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심리전이 강제될 수밖에.
“원하는… 고유무장을 말해라.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목자의 지팡이는 강진혁 그 인간에게 이미 빼앗겼다.”
“이미 가장 맛있는 건 가져가 버렸다라… 그렇다면 나는 ‘이면으로 가는 길’을 받도록 할까?”
“이면으로 가는 길? 하필이면 그걸 원하다니 특이하구나.”
슈브니구라스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면으로 가는 길’은 지정한 대상의 심층부에 개입할 수 있는 성유물.
대상을 파괴하거나 각종 저주를 내리는 게 아닌 ‘진정’과 ‘세뇌’에 특화되어 있다.
그런데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진혁을 쓰러뜨리고 싶어하는 이 남자가 그 성유물을 원한다?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거니까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진 마.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검을 뽑는 것 외에 한 가지 선물을 더 주도록 하지.”
판을 키운다.
태고의 신격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제안함으로써.
“‘금서’에 관한 단서, 고유무장을 넘기는 즉시 이것 또한 함께 알려주도록 할게.’
“……!”
슈브니구라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의심과 흥미 호기심과 갈증 등 수많은 감각이 혼재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설마, 금서에 관해서 릭 헤네시만 알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 역시 나름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고.”
“재밌는 제안이로구나.”
슈브니구라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받아들이지.”
알 수 없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차원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최후의 거점 ‘아자토스의 궁전’의 외곽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우우우웅!
밝은 빛줄기와 함께 다수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콜록! 콜록! 먼지가 잔뜩 나지 않느냐.”
“으웩. 웩! 어, 어지럽네요. 차원 이동이라는 건.”
진혁과 엘리스 그리고 테레사.
최후의 전장에 온 것은 단 3명뿐이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온 건가.’
진혁이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으로 장대한 궁전을 바라봤다.
인지를 초월한 심연의 거점. 그 기괴함과 이질감은 50층 전체의 그 어떤 곳과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오싹오싹.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이 느낌은 진짜 적응이 안 되긴 하네.’
일전에 한 번 와봤던 장소.
그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경계가 허술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거점에서 나오는 마력은 오금을 저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단하네요. 진혁 씨는 진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는 언제 봐도 놀라워요.”
헛구역질을 멈춘 테레사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부유성’을 이용해 거점의 외성을 무너뜨렸을 때는 희망을 엿봤었다.
그리고 노스이디크와 더 네임리스 미스트로 인해 최대 거점이란 목표가 좌절됐을 땐 절망을 맛봤었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지금 이 한 수를 위한 포석이었을 줄이야.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판을 짜는 건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훗. 짐은 계약자가 다 계획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고하게 달을 보면서 적의 심장부로 올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라고 하기엔 어제밤에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게 생생한데.
베개를 끌어안고 최후에는 함께 지내자며 칭얼대는 게 잊혀지지 않는다.
진정시키고 떼놓느라 참 애를 많이 먹었었지.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껴두던 푸딩까지 전부 희생해야만 했다.
“사실 저도 믿고 있긴 했어요. 차분하게 검과 방패를 손질하면서 모두를 위해 기도했거든요.”
엘리스가 떠난 후 1시간 뒤에 파자마 차림으로 홍차 세트를 들고 온 건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버렸나 보다.
추억을 나누고 싶다고 어렸을 때 찍은 사진첩을 꺼냈던 것 역시도.
특히, 8살 때 엑소시스트를 보고 이불에 지도 그렸던 사진은 굳이 공유할 필요가 있었었나 싶다.
하기야 정말로 마지막이라 생각했다면 흑역사고 뭐고 없긴 했겠다만.
‘그러고 보니 거의 잠도 못 자긴 했네.’
엘리스나 테레사 외에도 고구마나 정령수들을 시작으로 프레이 월영 심지어 스승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텐트로 찾아왔었다.
잘못했다간 제 시간에 출발 준비를 하지 못했을 뻔했으니 얼마나 많은 밤손님들이 있었을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리라.
‘일단 여기 일에만 집중해야겠지.’
핵심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아자토스의 궁전 깊숙한 곳에 있는 ‘최초의 혼돈’을 손에 넣어야 한다.
두 번째는 그걸 성공할 때까지 절대 적들을 이곳으로 오게 만들 수 있는 차원의 틈새가 함락되어서는 안 된다.
“남아 있는 자들은 괜찮겠느냐?”
“아마 지금쯤이면 적들도 저희 계획에 대해서 눈치챘을 거예요.”
그 말대로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적의 핵심 전력을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묶어두긴 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양들의 요람은 그만큼 상위 신격들이 드글드글 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장렬하게 산화하라는 자살 명령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겠지.
그럼에도 해야 한다.
지휘관은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승리라는 결과를 쟁취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까.
-크하하하!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가라. 고작 버티기도 못할 정도로 사막의 전사들은 나약하지 않으니.
-에덴과 마계가 공동전선을 펼친다는 게 아직도 생소하지만, 저희도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니 부디 저희 성녀를 잘 부탁드려요.
-흐음. 마신화까지 본 마당에 허무하게 죽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다 끝나면 나와 함께 위대한 마계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절대로 잊지 말거라.
-무림은 이미 각오를 끝마쳤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신교를 아우르는 모든 이들이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를 것이다.
-주군. 부디 무사히 다시 만나 뵙길. 속하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국의 검과 마법 또한 탑의 내일을 위해서 쓰일 것이오.
-그대와 함께 해서 영광이었다.
-십이지 역시 위대한 영웅과 50층의 세계에서 함께 했던 걸 잊지 않으마.
-모기이이!
-미요오오!
-헤헤. 한 방 먹여주고 오라고 주인!
-달그락. 거점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마스터.
최후의 밤에, 각 세력을 이끄는 주신들. 그리고 동료들과 나눴던 대화. 마지막 작전을 공유하면서 수많은 이야기와 꿈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들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50층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해야 한다.
나중에 이 일을 슬퍼하고 애도하며 고통에 몸부림칠지언정.
지금 당장은 이 선택에 자책하거나 후회해선 안 된다.
꾸욱.
단단히 움켜쥔 주먹.
그래.
옳은 결정을 했고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잡은 진혁이 마지막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 짐이 이 궁전에 근사한 꼬챙이들을 장식해 주도록 하마.”
“아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이들이 있었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벅.
반대 쪽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곧바로 반갑다는 인사말이 이어졌다.
“흐음. 생각보다 빨리 왔네.”
“오오! 형!”
“오빠다 오빠!”
귀환자 아델, 그리고 쾌락 살인광인 케이시와 주드로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천유성을 상대하는 데 특화된 이들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천유성은?”
“드림랜드에서 헤어진 이후로 계속 추격했는데, 쉽게 꼬리를 잡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도 2일 전에 흔적을 찾았는데, 이미 궁전 안쪽으로 들어간 것 같아.”
그래.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그쪽도 아자토스의 궁전을 최종전의 무대로 결정한 모양이다.
‘나와 같은 걸 보고 있나 보네.’
보통이라면 ‘양들의 요람’을 최후의 무대로 상정할 테지만, 거기에서 코빼기도 안 비쳤다는 건 이쪽이 ‘차원의 틈새’를 이용할 것이라는 것까지 예측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글쎄.
서로가 보는 시야는 곧 있으면 완전히 뒤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