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52화
852화. 최후의 거점 ‘아자토스의 궁전’ (2)
완벽히 한 방 먹었다.
그 뼈아픈 현실에, 태고의 신격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콰아아앙!
수십 조각으로 박살나는 성채의 외벽.
하늘에서는 수많은 신격들이 만들어낸 마력의 폭풍이 몰려왔다.
“이런 멍청한 실책을 범하다니!”
“놈의 계략에 전부 다 놀아났다는 말인가!”
“놈이 대체 어떻게 초승달 사제들만 쓸 수 있는 차원의 틈새를 이용한 건지 모르겠군. 애초에 아자토스께 허락받은 자가 아니라면 금제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야 정상이다.”
혼란과 경악 그리고 공포.
가장 은밀하고 보호받아야 할 심장부가 뚫렸다는 건 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적들이 저 틈새로 갔는지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었으니까.
“저주받은 금서.”
요그소토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크로노미콘.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을 해석한 게 틀림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놈이 책을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는지 그 범위는 저희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자신들의 최대 약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파이인 ‘오딘’과 북유럽 신격들을 통해 네크로노미콘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치를 면밀하게 파악해두었다. 꽤나 위협적인 것들도 있었지만, 결코 ‘차원의 틈새’를 통해 아자토스의 궁전까지 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배신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정보를 감췄거나 혹은 갑자기 해석 능력이 대폭 향상된 거겠지.”
단기간에 태고의 언어와 잃어버린 언어를 읽어낼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고 봐야 하리라.
뭐,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이제 와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제 대응을 어떻게 하는지가 관건이었으니까.
“지금 되돌아가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거다.”
양들의 요람과 아자토스의 궁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수많은 신격과 신격의 영역들이 겹치면서 나름의 금제를 해제해가며 가야 한다는 뜻이다. 차원의 틈새를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자유롭게 이동가능한 건 ‘니알라토텝’ 뿐.
하지만, 니알라토텝은 한참 전부터 자리를 비운 채 보이지 않았다.
“……”
노스이디크가 침묵했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여기서는 입 한 번 뻥끗할 수 없었다.
크툰이 조심스럽게 노스이디크에게 귓속말을 했다.
“괜찮을까요, 니알라토텝 쪽은?”
“그래. 놈을 죽이는 건 실패했지만 치명상을 입혀뒀다. 적어도 몇백 년 간은 제대로 된 육체를 갖추지 못할 것이다.”
동족상잔이 알려지는 건 먼 이후의 일.
그때까지 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최악의 일이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결국. 방법은 하나뿐인가.”
“예. 놈들이 지키고 있는 차원의 틈새를 확보해 모두가 궁전으로 가야 합니다. 차원 이동 중에 소멸하는 자가 많이 나올 테지만, 그분께서 깨어나시게 된다면 어차피 모두 죽을 운명일 테니까요.”
“이곳을 지킬 이유는 없다. 전 병력을 동원해라.”
그래.
한방 얻어맞은 건 사실이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이 정도 강력한 군대가 있으면 연합 측의 방어야 순식간에 박살내 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경비가 허술해졌다곤 하나, 아자토스의 궁전은 아자토스의 궁전.
아자토스 자체가 곧 전지전능한 성벽이었다.
쿠웅! 쿠웅! 쿠웅!
곧이어 상상을 초월하는 태고의 병사들이 연합 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박.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이동한다.
입구를 지나 궁전 안쪽으로 들어가자 무수히 많은 기둥과 특이한 석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때와는 또 구조가 달라졌네.’
하기야 한 번 침입을 허용했으니 다른 장치들을 고안해 뒀겠지.
몇몇은 알고 있는 거긴 했지만, 상당수는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오랜 시간을 활동한 고인물이라고 해도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볼 수 없을 만큼. 최후의 거점은 말 그대로 규격 외의 환경을 자랑했다.
“마력의 밀도가 달라졌어요.”
“따갑다 못해 숨이 막히는구나.”
이미 최상위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 테레사와 엘리스 역시 단순히 이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기분 나빠 여기.”
“다, 다리가 후들후들거려 나도.
당연히 격이 떨어지는 아델이나 케이시 그리고 주드로는 더욱더 상태가 안 좋을 수밖에.
그나마 감각을 마비시키고 오롯이 전투에 빠져들게 만드는 ‘쾌락 살인’ 스탯이 있어서 망정이지.
다른 이들이었다면 이미 실신하거나 정신이 나가버렸을 것이다.
진혁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촤라락.
한 손에 들린 네크로노미콘의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며 새로운 정보를 판별하고 해석해나갔다.
‘과연, 2개의 저주와 3개의 결계가 혼합되어있는 구조였나.’
기감에는 걸리지 않지만 지금 이 거대한 통로에는 5개의 얇은 실로 된 마력들이 어지럽게 얽히고설켜 있는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가면 점점 더 그 실타래가 몸에 들러붙어 자멸하는 식이다.
물론.
파훼법 없이 그냥 진입하기만 한다면 말이지.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몽환의 거미’를 소환합니다!]
툭!
털이 복슬복슬하고 아기자기한 거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48층에서 자라는 ‘짙푸른 염화초’와 49층에서 서식하는 ‘내성 풍뎅이’를 하루에 3번씩 먹여서 키운 놈이었다.
“부탁해.”
“콧!”
작은 앞다리로 경례를 한 몽환의 거미가 진혁의 손에서 내려왔다.
뽈뽈뽈!
그리고 열심히 보이지 않는 실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3의 눈과 감으로 실들을 회수하는 것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마구잡이로 끌어모으는 것 같지만. 결코 아니다.
이건 몽환의 거미가 아니라면 절대 하지 못할 기예다.
“와아….”
“신기하구나.”
테레사와 엘리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기는.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진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통로에 펼쳐둔 해로운 실들이 모두 회수되었습니다!]
아자토스의 궁전을 공략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해뒀다.
50층에 오기 전에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쓰면서・・・ 과거보다 더 완벽하고 안전한 길을 찾기 위해서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가죠.”
진혁이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갔다.
-아아아아……
음악을 즐기는 아자토스의 취향에 걸맞게, 가는 길들에는 온갖 종류의 음산한 음악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감미로워질 무렵.
[‘은하가 머무는 호수정원’에 진입하셨습니다!]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장소가 나타났다.
형광색을 띤 동물과 식물들.
평화롭게 정원을 노니는 모습은 아자토스의 궁전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마치, SF 우주 영화 속에서 볼 법한 광경이다.
“여기서부터는 다들 이걸 끼세요.”
진혁이 강낭콩 모양의 무언가를 한 무더기 꺼냈다.
저 음악과 노래에 장시간 노출된다면 ‘아자토스의 종속’이 되어 이 궁전을 영원히 떠도는 심령체로 전락하게 된다.
“귀마개군요. 이러면 소리가 차단되는 건가요?”
테레사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리가.
저 소리는 아무리 완벽한 귀마개로도 100% 차단하는 게 불가능하다.
무려 아자토스의 전용 악사인 ‘트루넴브라’가 부르고 있는 노래였으니까. 광기에 찬 노래가 조금씩 커져감에 따라 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꿈틀거렸다.
“이건 저 노랫소리에 담긴 마력을 재배열해서 위험하지 않은 노래로 바꿔주는 특성이 있는 보조 아이템입니다.”
“그냥 끼는 것만으로도 그런 게 된다는 말씀이에요?”
물론, 그냥 되는 건 아니고.
정확한 음색과 아름다운 선율이 가미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크흠! 크흐흠!”
진혁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모처럼 노래를 부르려니 목구멍이 살짝 칼칼하긴 하네.
성대 역시 몸살이라도 걸린 것마냥 팔딱팔딱 뛰었다.
참고로 아자토스가 굉장한 고음 취향이기 때문에 이에 개입하려면 그에 걸맞은 고음을 난사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그렇다면 역시 선곡은….
“설마.”
“멈추거라!”
모두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진혁은 이미 결정을 내린 뒤였다.
[소찬휘의 ‘tears’를 선택했습니다.]
[‘여성 key’를 선택했습니다.]
[스킬 ‘천상의 선율’이 노래와의 동조율을 재조정합니다.]
그래. 무대를 장악하려면 이것만 한 게 없지.
전투가 불가능한 대신 궁전 전체를 범위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트루넴브라. 그 태고의 악사를 압도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잔인하아안!”
진혁의 열창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음표들이 기존의 음표들을 대체하며, 호수정원의 동물과 식물들이 모조리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렇게 열창을 얼마나 이어 나갔을까?
마침내 주위에 흘러넘치던 마력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트루넴브라가 부르는 노랫소리에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훗. 이런 게 가능한 건 탑 전체를 통틀어서 봐도 나 하나 정도지.’
찢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현장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끄으읍.”
“더 괴로운 것 같구나. 차라리 아까 전에 그 노래에 홀리는 게 훨씬 더 나았어.”
“나가서 노래방 가자는 약속은 취소하는 걸로 할게요.”
“이 오빠는 노래로 공격도 할 수 있네.”
제대로 된 비판이기보다는 감정만 잔뜩 실린 비난에 가깝다.
소중한 목숨을 구해주는 건지도 모르고 불평불만만 늘어놓기는
그래도 나름 틈을 내서 보컬 트레이닝까지 받은 건데, 평가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은하가 머무는 호수정원을 돌파한 진혁과 멤버들은 그 이후에도 수많은 통로를 넘나들며 여러 시련들과 마주했다.
그때마다 진혁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아이템과 대응책을 내놨다.
[특수 아이템 ‘척출의 갈퀴’를 사용합니다!]
[대결계 ‘우매함의 경계’를 발동합니다!]
[성유물 ‘둔화의 샘물’의 효과가 스며듭니다!]
물론, 전부 다 공략이 가능한 건 아니었기에 까다로워 보이는 곳이나 위험한 곳은 우회하는 식으로 피했다.
털썩.
아슬아슬하게 가디언 셋을 박살 낸 진혁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쿠웅! 후두둑….
가디언들의 가슴에는 각각 ‘긍휼의 검’과 테레사의 ‘마검 데르카시아’ 그리고 붉은 꼬챙이에 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중간중간 아델의 버들나무류 초식과 케이시와 주드로의 헬버드와 낫에 의한 상처도 새겨져 있었다.
“여긴 가디언도 장난 아니네요.’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태고의 신격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다들 고생했어요. 잠깐 숨 좀 돌릴 거니까 이거 먹으면서 쉬고 있어요.”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잘 차려둔 도시락.
노래 부르는 건 실패했지만, 음식까지 실패할 수는 없지.
맛있는 영양 만점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공대장의 의무였으니까.
바삭바삭하게 튀긴 일본식 돈가스에 마제소바와 수타 우동을 준비해뒀다. 후식으로는 달콤한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상큼한 레몬 셔벗도 있으니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오물오물.
다들 지쳤기에 모처럼의 달콤한 휴식을 마음껏 즐겼다.
그렇게 얼마간에 쉼표를 찍고 나서야 이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가디언들이 쓰러지면서 나타난 3개의 갈림길.
각 길의 입구에는 서로 다른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아델이 그 중에서 한 곳을 힐끗 바라봤다.
‘엘더 갓’들에게서 받은 나침반은 가장 왼쪽을 가리켰던 것.
“천유성이 있는 곳이 그쪽이야?”
“맞아. 저기 안쪽 어딘가에 있을 거야. 당연히 아자토스의 방 쪽으로 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특이하긴 하네.”
아델이 나침반을 이리저리 흔들며 다시 방향을 잡아봤다.
하지만, 화살표의 끝이 가리키는 건 계속해서 왼쪽이었다.
“골칫거리가 저쪽으로 갔다면 우리 목적 달성이 더 쉬워질 수 있어. 다 같이 오른쪽으로 가서 최초의 혼돈을 획득하는 거지. 어떻게 생각해?”
“하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거?”
아델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부드럽게 흐드러지는 검.
핏빛으로 빛나는 검신을 따라 은은한 혈향이 피어올랐다.
그래. 이 미친 전투광의 목적은 천유성이란 최강의 검을 부러뜨리는 것이었지.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50층이 어떻게 되든 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여정을 함께 하는 건 여기까지다.